눅14:15-24 2014.11.9(일)
행복으로 초대합니다
11월 둘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다음 주 추수감사절을 맞이합니다. 한 해동안 주신 풍성한 열매를 감사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축복의 예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축제를 한 마디로 말하면 “행복의 축제”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행복하다고 느끼십니까?“ “나는 과연 행복한가? 나는 인생을 행복하기 위해 사는가? 나는 다만 성공을 위해 사는가?”. 우리는 가끔 물어봐야 합니다.
영화 <초원의 빛>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버드와 윌마는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며 서로에 대해 호감을 갖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가정교육 때문에 둘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몇 년 후, 둘은 우연히 마주칩니다. 그때 윌마가 버드에게 묻습니다. “그동안 행복했니?”. 이때 평범한 농부가 된 버드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한 번도 나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해본 적이 없어”. 우리는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자주 우리가 행복한지 아닌지를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행복이 갑자기 찾아올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행복하기로 결심해야 하고 행복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어느 회사의 임원으로 일하는 어떤 남자가 스트레스와 일에 시달리다가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에게 갔습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습니까?” 남자의 이야기를 들은 의사는 그에게 세 개의 봉투를 주며 말했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조용한 해변가로 가십시오. 그리고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에 봉투 하나씩을 열어보세요”. 의사의 처방대로 한적한 해변으로 간 이 남자는 9시가 되자 봉투 하나를 열었습니다. 그 안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휴대전화를 끄시오. 그리고 조용히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휴대전화를 끄고 내면의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했더니 조금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12시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봉투를 열었습니다.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가장 행복했던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남자가 잠시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보았더니 자기에게 나쁜 과거와 함께 좋은 과거도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후 3시에 마지막 봉투를 열었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문제를 바다와 비교해 보십시오. 어떤 것이 더 큽니까?” 남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떠올리며 바다를 보았습니다. 바다는 끝없이 펼쳐져 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자기 문제가 아무리 커도 바다보다 크지는 않았습니다. 바다는 모든 것을 품은 채 수만년, 아마도 수억년을 출렁거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연은 쉬지 않고 움직이는 데 자기는 작은 문제로 사네 죽네 했던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일어났습니다. “행복도 불행도 내가 선택한 것이다. 나는 앞으로 행복하겠다”. 그가 행복을 선택하고 일어났을 때 바다는 더 아름다웠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도 문제가 있습니까? 그 문제가 너무 커서 여러분의 행복이 도저히 회복되지 못할 것 같습니까? 오늘 말씀은 그 행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모두 행복해지시기 바랍니다. 이야기는 이스라엘로 돌아갑니다. 이스라엘의 한 가정에 잔치가 열렸습니다. 16절을 보실까요? 눅14: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여기서 잔치가 어떤 잔치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 나라도 잔치를 좋아하지만 이스라엘도 잔치를 좋아합니다. 유월절, 오순절, 장작절 같은 민족적 잔치도 있고 성인식, 약혼식, 결혼식같은 개인적인 잔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잔치에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음식입니다. 포도주입니다. 사람입니다. 웃음입니다. 그리고 기쁨입니다. 잔치에 있는 것들을 한마디로 말하면 행복입니다.
하나님은 잔치로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잔치를 위하여 주인이 가장 먼저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초청입니다. 17절 보실까요? 눅14: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주인은 사람들을 한 번만 초청한 것이 아니라 두 번이나 초청했다는 것입니다. 16절에 한번 초청하고 17절에 또 초청했습니다. 16절에서는 그냥 초청했고 17절에서는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오소서”라고 하면서 초청합니다. 처음에저는 이 부분이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스라엘에서 보니까 이스라엘의 잔치는 반드시 두 번 초청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한번은 잔치를 계획할 때 초청합니다. 음식을 만들기 전에, ”언제 언제 잔치가 있으니 다른 약속을 잡지 마십시오“라고 초청합니다. 다음은 잔치가 시작될 때 초청합니다. 음식을 만든 후에, 사람을 보내어 초청합니다. ”잔치가 시작되었으니 지금 바로 오세요“.
여러분, 이 두 번의 초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횟수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번만 부르지 않았습니다. 한번 불러서 안오면 어떻게 합니까? 한번 부를 때 안 왔다고 다시 안부르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어릴 때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저는 하나님의 부름에 잘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그후 25살 때 인생고를 맛본 후 하나님이 또 다시 저를 불렀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저를 두 번 부르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까지 세상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돌아온 뒤로 하나님의 부름이 그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저를 불렀습니다. 공부할 때 목회자로 불렀습니다. 교통사고때 생명으로 불렀습니다. 목회하면서 은혜로 불렀습니다. 제 인생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일생입니다. 그래서 이 찬양은 저에 대한 찬양입니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앞에서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다같이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하나님의 부름은 우리가 구원받을 때까지입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가 잔치에 참여할 때까지입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신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몇 번이나 여러분을 불렀을까요? 아마 수없이 불렀을 것입니다. 50대에 교회나와 저에게 세례받은 분이 온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은 큰 병으로 손들고 하나님께 돌아왔는 데 병이 깊어 죽음을 앞두고 가족들이 요청해서 제가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가 세례받고 보니 하나님이 자기를 수없이 불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릴 때 동네 교회 주일학교 친구들이 교회 나가자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그를 불렀습니다. 몇 번 나가다 말았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가 교회 수양회가자고 해서 갔으나 예수님을 영접하지는 않았습니다. 두 번째 부름이었습니다. 결혼하고 아들을 낳았는 데 갑자기 열이 나고 아픕니다. 그때 살려주면 교회 나가겠다고 했는 데 살았지만 교회 안 나갔습니다. 세 번째 부름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사업이 안돼 힘들 때 직장 동료가 전도했습니다. 또 안 나갔습니다. 네 번째 부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50대 후반, 이번에는 암에 걸렸습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세례받는 날, 눈물을 흘리며 내가 왜 일찍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는지. 왜 죽어가면서 늦게 돌아왔는지 모르겠다고 울멱였습니다. “그래도 가장 빨리 돌아왔다”고 제가 말해 주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부르신 것입니다.
행복하게 믿어야 잘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불렀습니까? 잔치에 참여하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초청했는 데 사람들이 핑계를 댑니다. 자, 첫 번째 사람, “밭을 샀으니 밭계약하러 갑니다. 그래서 못 갑니다. 두번째 소를 산 사람, “소를 시험해봐야 하기 때문에 못갑니다”. 세 번째 결혼한 사람, “결혼했기 때문에 못 갑니다”. 핑계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모두 뭔가 하는 사람들입니다. 밭사고, 소사고, 결혼하고, 내용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밭, 물질문제입니다. 소, 사업, 일의 문제입니다. 결혼, 가정문제입니다. 그래서 통계가 있습니다. 초청했는 데 교회오지 않은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오지 않습니까?” 제일 많은 이유가 “바빠서” 39%였습니다. 두 번째는 “교회가는 것이 별 의미가 없어서”, 14%, 세 번째, “교회나 교인들이 마음에 안들어서” 11%, 네 번째, “게을러서” 6%. 나머지 30%는 다양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든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밭사고, 소사고, 결혼하고,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하나는 행복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왜 밭을 삽니까? 부자돼서 뭣하려고? 행복하려고, 왜 소삽니까? 소사서 무엇하려고? 행복하려고, 왜 결혼합니까? 결혼해서 무엇 하려고? 알콩 달콩 행복하게 살려고. 어떤 경우든 행복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공통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행복을 다른 데서 찾고 있습니다. 행복이 무엇입니까? 제가 좋아하는 행복의 정의가 몇 가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마음에 와 닿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 보십시오. 먼저 칼릴 지브란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반드시 두 개의 마음을 갖고 있다. 하나는 사랑하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쟝 샤오형이란 하바드대 교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말입니다.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지만 두 가지로 압축한다면 하나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가 말합니다. “행복한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요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희망을 갖는 것, 둘째는 할 일이 있는 것, 셋째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프랑수아 를로르란 사람이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이란 책에서 행복을 말했습니다. “행복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다. 행복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행복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쓸모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행복이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는 것이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행복의 정의를 좋아합니까?
오늘 말씀에 나오는 세 사람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이 말하려는 초점이 아닌 것이 있고 긴 것이 있습니다. “밭을 사는 것이 불행이다” 이것이 아닙니다. “소사서 열심히 일한다고 행복하지 않다”. 이것도 아닙니다. “결혼한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이것도 아닙니다. 여기 나오는 세 사람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이 추구하는 세 가지 행복의 길입니다. 밭, 물질, 행복하려면 밭이 필요합니다. 소유가 필요합니다. 소, 일, 비즈니스, 행복하려면 내가 신명을 바쳐 할 수 있는 일이 필요합니다. 결혼, 행복의 최고의 조건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행복의 수단일 수 있지만 그 자체가 행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밭, 물질, 행복의 수단입니다. 소, 일, 행복으로 가는 통로입니다. 결혼, 행복의 관문입니다. 이 세 가지는 행복으로 가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 자체가 행복이거나 그것만 가지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 사람의 이야기는 우리가 행복을 추구할 때 행복의 수단을 행복의 목적으로 오해할 가능성을 말해줍니다. “나는 밭을 샀습니다”. 밭을 사면 행복합니까? “나는 소몰고 일하러 가야 합니다”. 일만 하면 행복합니까? “나 장가갔어요”. 축하합니다. 그러나 장가가면 자동적으로 행복해 집니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많은 아내들이 행복하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난 정말 불행해요. 남편이 자주 출장을 가서 집을 비우거든요”. 웬만한 엄마들이 불행의 원인을 이렇게 말합니다. “제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아요. 정말 화가 나요”. 많은 직장인 남자들이 말합니다. “직장 상사가 나를 인정해주지 않아서 기분이 우울해요.” 시어머니들은 대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며느리는 정말 틀렸어요. 내 그렇게 살라고 내 아들 키운 게 아니예요”. 한 사람이 가게를 들어갔다 나오면서 말합니다. “다시는 이 가게를 안 갈거야. 도대체 주인이 너무 불친절하지 않아”.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행의 원인도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아내는 출장간 남편 때문에 불행하고, 엄마는 말안듣는 아이 때문에 불행하고, 직장인은 직장상사 때문에, 시어머니는 며느리 때문에, 손님은 가게주인 때문에 불행합니다. 행복의 열쇠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있습니다. 도대체 나는 언제 행복할 것입니까?
한 유명 작가가 친구와 함께 가판대에서 신문을 샀습니다. 친구는 가판대 주인에게 매우 예의 바르게 고맙다고 말했지만 주인은 들은 체하기는커녕 고개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잔뜩 화가 난 그 작가는 돌아오는 길에 그 주인을 향해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도대체 장사하는 태도가 뭔가? 저러고도 물건팔아?” 씩씩거렸습니다. 그런데 같이 간 친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콧노래를 부릅니다. “자네는 화가 안 나는가?” 작가가 소리쳤습니다. 그때 친구가 말했습니다. “화나지, 하지만 내가 왜 저 사람의 태도에 따라 내 기분을 좌지우지해야 하는데? 나는 나야. 저 사람은 저 사람이고. 내가 저 사람 때문에 불행해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90%가 다른 사람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다른 사람 때문에 불행해저야 합니까? 우리의 행복의 대부분도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하는 언행에 의존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좋게 대하는 사람이 없다면 영원히 불행하겠습니까? 행복을 위해 밭이 필요합니다. 소도 필요합니다. 결혼하면 더 좋습니다. 그러나 밭이 없다고 불행이 아닙니다. 소가 없으면 없는 대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결혼안한다고 해서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행복과 불행이 밖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말씀이 가르치려는 초점이 여기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주인에게 있습니다. 잔치를 벌여 놓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주인, 그가 우리를 위해 잔치를 준비했습니다. 우리 행복은 그가 준비한 잔치에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주인에게 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잔치를 준비한 그 분에게 가는 것입니다. 찬송가 339장 1절, “큰 죄에 빠진 나를 위하여 주 보혈 흘려 주시고 또 나를 오라 하시니 주께로 거저 갑니다.” 믿음이란 거저 가는 것입니다. 내 모습 이대로 그 분께 가는 것입니다. 의심이 있으면 의심이 있는 대로, 안믿어지면 안믿어진 채로 가는 것입니다. 그 분에게 가지 않은 데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이 찬송가를 연구했습니다. 그래서 누가 어떤 찬송을 좋아하는지 분석했습니다.“참아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변비로 고생하는 분들이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너 시험을 당해 범죄치 말고”. 컨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찬송이 있습니다. 소방서에서 싫어하는 찬송이 있습니다. “산마다 불이 탄다. 고운 단풍에”. 감옥에 있는 죄수들이 불평하면서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강원도 카지노에서 대박을 꿈꾸며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주여 지난밤 내 꿈에 뵈었으니 그 꿈 이루어 주옵소서”. 대머리들이 싫어하는 찬송이 있습니다. “반짝반짝 빛나게 비치리로다”. 믿음은 행복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베푼 구원의 잔치에 와야 행복이고 축제입니다. 헬렌 켈러가 말했습니다. “태양을 바라보고 달려라. 그러면 그림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C.S 루이스가 말했습니다. “하늘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기쁨이다”. 하늘뿐만이 아닙니다. 땅에서도 제일 큰 일이 기뻐하는 일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단순한 의지입니다. 믿음이란 마치 몸이 아픈 아이가 그 몸을 어머니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는 어머니에게 가면 어머니는 언제나 자기를 받아 줄 것을 압니다. 그는 엄마에게 가서 “엄마, 나 아파” 하고 몸을 맡깁니다. 몸을 맡기면 그때부터 엄마가 일하기 시작합니다. 아이의 행복은 엄마에게 가야 옵니다. 엄마에게 가지 않고 이것 저것 가졌다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어야 행복합니다. 믿음이 곧 행복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순간, 하나님이 주신 힘과 위로가 행복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제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걱정 근심없고 정말 즐거워.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나와같은 아이 부르셨어요”. 우리의 최고의 행복은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푼 잔치자리로 돌아가면 행복합니다. 믿음이 행복입니다.
함께 먹어야 더 행복합니다
주인이 사람들을 초청해도 사람들이 오지 않자 주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명령합니다. 21절입니다. 눅14:21,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자,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처음 초청한 사람들과 다릅니다. 처음 초청한 사람들은 밭가는 자, 소시험하는 자, 결혼한 자였습니다. 무엇인가 있는 자들입니다. 밭가는 자는 밭이 있습니다. 소시험하는 자는 소가 있습니다. 결혼한 자는 남편과 아내가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부류의 사람들은 아무 것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가난한 자, 물질이 없는 자들입니다. 몸 불편한 자, 건강이 없는 자들입니다. 맹인들, 눈이 없는 자들입니다. 저는 자, 다리가 아픈 자들입니다. 왜 이들을 불렀을까요? 이 경우에도 극단으로 가서는 안됩니다. “아, 가난해야만 행복한 것이구나”. “몸이 아파야 행복한가?” “눈도 안 보이고 다리도 절어야 행복한가보다”. 아닙니다. 첫 번째 종류의 사람, 밭이 있고 소가 있고 결혼한 사람이 있어서 행복한 것이 아닌 것처럼 가난하고 아프고 저는 자들도 없어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앞의 것이 “쾌락주의”라면 뒤의 것은 “금욕주의”입니다. 있고 없고가 행복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없으면 더 의지합니다. 내가 곤고하면 더 필요를 간청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 필요없고 없는 자에게만 하나님 필요하다”, 이렇게 말해서도 안됩니다. 있거나 없거나 하나님 필요합니다. 누구나 다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미국의 리 스트로벨이라는 사람이 비신자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말했습니다. 리 스트로벨 자신도 오랫동안 비신자였기 때문에 비신자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비신자의 특징의 첫째는 “교회나오는 것은 싫어하지만 하나님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둘째, “도덕적으로 흔들리는 삶을 살더라도 누군가 붙잡아 주기를 바란다.” 셋째, “자신은 교회 나가지 않으면서 자녀들은 도덕적으로 좋은 교육을 받기를 원한다“. 넷째 ”겉으로는 강하게 보여도 속으로는 누가 자기를 교회 데리고 나가지 않는가 기다린다“. 누구나 하나님 필요합니다. 가진 자든 못 가진 자든 하나님없이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소유가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소유하게 하신 분이 행복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함께 먹어야 더 행복합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우리 모두가 함께 먹기를 바랐으면 23절에서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말했을까요? 우리가 영혼들을 초청하는 것은 교회 빈 자리를 채우려 함입니까? 얼마나 먹이고 싶었으면 주인이 그렇게 말했을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닐까요? 이번에 뉴욕 자유의 여신상에 갔더니 하나의 시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피곤한 자, 가난한 자
모두 내게로 오시오
그렇게 갈망하던 자유를 호흡하시오
누더기를 걸친 난민
집 없는 외로운 사람
폭풍에 시달린 힘없는 삶
이 생동의 해변으로 오시오
황금의 문에서
희망의 횃불을 높이 들리니...
이 시는 소련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엠마 나자루스라는 유대인이 쓴 시입니다. 이 시의 주인공은 19세기 말, 소련에서 기병대가 유대인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방화와 살인을 일삼을 때 간신히 탈출해서 뉴욕 항구에 들어오면서 느낀 감격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시를 읽으며 저는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너는 내게 오라. 돈도 있고 열심히 일도 하고 가정에서 나름대로 행복하지만 가끔 외롭지? 내게로 오라. IMF보다 더 큰 경제란에 사업하고 자식들 가르치느라 힘들지? 내게로 오라. 그래도 하나님의 일이라고 몸 안 돌보고 애쓰느라 힘들지? 내게로 오라. 행복은 나에게 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이 너를 불행하게 하지 말라. 다른 사람 행복 믿고 행복한 체 하지 말라. 행복은 나에게 있다. 내게 와야 행복이다. 한 가지 더 부탁한다면 너만 행복하지 말고 너로 인해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할 수 없겠니? 내 상에서 먹는 너를 보면 기쁘다. 그러나 함께 먹으면 더 좋지 않니?”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뿐 아니라 우리로 인해 다른 사람이 행복해지기 원합니다.
우리가 만일 다음 주에 어떤 영혼을 초청한다면 그가 살아 있는 그는 꿈에도 우리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한 전쟁터에서 한 남자가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물, 물, 물" 해서 옆에 있는 전우가 물을 마시게 했더니 잠깐 정신을 차린 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죽거든 꼭 이 사람에게 가서 전해주게. 그 분은 내가 초등학교 4학교 때 나를 교회로 인도한 교회 선생님이라네. 그에게 가서 부디 감사했다고 전해주게. 비록 전쟁터에서 죽지만 선생님이 전해준 예수님 믿고 오늘까지 살았고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가게 되었다고 감사의 말을 전해주게“. 전우가 친구의 유언을 들고 친구의 고향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친구의 옛날 교회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분은 지금은 교회를 나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예수 믿어도 세상이 달라지지 않고 사람이 변한다는 것에 회의를 느껴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에게 전장터에서 죽어간 친구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잠시 선생님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그 동안 예수 믿으면서 달라지지 않은 세상을 보고 실망했고 예수믿어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 보고 너무 실망해서 스스로 교회를 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어릴 때 전도한 제자가 그렇게 장하게 죽었더면 분명 예수님은 살아계신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믿으면 달라집니다.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선생님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초청한 사람이 누구든 하나님이 살아계신 한 그는 반드시 변화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감사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함께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눅14:15-24 2014.11.9(일)
행복으로 초대합니다
눅14: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하나님은 잔치로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눅14: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앞에서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행복하게 믿어야 잘 믿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행복을 다른 데서 찾고 있습니다.
행복의 정의
- 칼릴 지브란, “행복한 사람은 반드시 두 개의 마음을 갖고 있다. 하나는 사랑하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 쟝 샤오형,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지만 두 가지로 압축한다면 하나는 자신 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이다”.
- 윌리엄 바클레이, “행복한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요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희망
을 갖는 것, 둘째는 할 일이 있는 것, 셋째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 프랑수아 를로르, “행복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다. 행복은 자신이 좋아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행복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쓸모가 있다고 느끼는 것
이다. 행복이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는 것이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339장 1절, “큰 죄에 빠진 나를 위하여 주 보혈 흘려 주시고 또 나를 오라 하시니 주께로 거저 갑니다.”
헬렌 켈러, “태양을 바라보고 달려라. 그러면 그림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C.S 루이스 “하늘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기쁨이다”.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걱정 근심없고 정말 즐거워.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나와같은 아이 부르셨어요”.
함께 먹어야 더 행복합니다
눅14:21,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리 스트로벨, 비신자의 특징
- 교회나오는 것은 싫어하지만 하나님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 도덕적으로 흔들리는 삶을 살더라도 누군가 붙잡아 주기를 바란다.
- 자신은 교회 나가지 않으면서 자녀들은 도덕적으로 좋은 교육을 받기를 원한다.
- 겉으로는 강하게 보여도 속으로는 누가 자기를 교회 데리고 나가지 않는가 기다린 다.
피곤한 자, 가난한 자
모두 내게로 오시오
그렇게 갈망하던 자유를 호흡하시오
누더기를 걸친 난민
집 없는 외로운 사람
폭풍에 시달린 힘없는 삶
이 생동의 해변으로 오시오
황금의 문에서
희망의 횃불을 높이 들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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