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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sion(13) (고후5:14-21) 교회는 이 땅의 평화입니다 2014.11.2.(일)

Re-vision(13) (고후5:14-21) 2014.11.2.()

교회는 이 땅의 평화입니다

오늘은 11월 첫 주일, 그동안 13주 계속되어 왔던 비전 설교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크고 아름다운 비전은 무엇일까? 그것은 교회의 사명에 대한 비전입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교회는 이 땅의 평화입니다”. 저는 이번에 목회자들과 함께 독일을 다녀왔습니다. 독일 통일의 현장에서 통일에 대한 교훈과 비전을 배우며 우리도 어떻게 통일과 평화를 이룰까를 생각했습니다. 그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베를린 장벽이었습니다. 1961812일 밤, 서독으로 탈출하는 수많은 난민들을 막기 위해 설치한 장벽, 높이가 5m의 콘크리트에, 고압선을 설치했고, 그 길이가 동서독 베들린을 나누며 무려 120의 장벽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육중한 철옹성같은 장벽이 1989119, 동독에 의해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90.10.3, 독일은 역사적 통일을 맞이했습니다. 장벽은 이미 무너졌지만 후대의 역사를 위해 조금 남겨놓은 장벽에 손을 대고 기도했습니다(사진1). 얼마나 높은지 손을 쭉 펴보았습니다(사진2,3). 그 육중한 장벽을 보면서 이 장벽이 어떻게 무너졌을까? 45년간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살던 두 나라가 어떻게 극적인 통일을 이루고 지금은 세계 4위의의 경제력과 힘을 가진 나라가 되었을까? 155마일 휴전선 철책선 뿐아니라 남과 북사이에 쌓여온 수많은 장벽들, 그 장벽들은 언제 무너져 우리도 독일처럼 하나된 민족으로 살 수 있을까? 그리고 교회는 무슨 일을 해야 하고 우리는 또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해답입니다. 같은 말씀도 어디서 읽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집니다. 독일 분단과 통일의 현장에서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18절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고후5:18,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여기에 화목이란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여기서 바울은 두 종류의 화목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화목,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십자가에서 우리와 화목하셨습니다. 다음 우리가 이룰 화목, 그러므로 우리도 이제 세상에서 화목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둘을 합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이미 하나님과 화목했다. 그러므로 이제 세상과 화목해라”. 어떻습니까? 오늘 찟기고 부숴진 세상에 화목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그 화목이 자라 민족의 통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까? 우리는 그 역사적인 사명을 띠고 여기 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사명을 이루기 위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첫 번째는 이것입니다.

 

평화가 통일보다 먼저입니다.

우리가 통일에 대해 생각할 때 오해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통일이 최선의 선이다. 통일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소위 통일 지상주의입니다. 물론 이 생각은 통일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통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슴을 알아야 통일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평화입니다. 통일에는 보통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국토의 통일입니다. 남과 북이 휴전선의 철조망을 걷어내고 하나의 땅, 하나의 국가, 하나의 정부를 이루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상적 통일입니다. 남쪽의 자본주의와 북쪽의 공산주의가 대화를 통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성경적 통일입니다. 그것은 당장 휴전선 철조망이 걷워내거나 두 나라의 군대를 없애지는 않지만 우선 하나님안에서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화해라고 말합니다. 통일을 정치적으로 접근하면 국토통일이 됩니다. 사상적으로 접근하면 이데올로기의 통일이 됩니다. 그러나 통일을 성경적으로 접근하면 화해가 됩니다. 세계 역사에서 볼 때 화해가 동반되지 않은 통일은 언제나 적과의 동침이었습니다. 베트남처럼 군사적으로 통일할 수도 있습니다. 유고처럼 정치적으로 통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화해가 전제가 되지 않으면 구 소련처럼 결국 갈라서고 맙니다. 성경이 말하는 통일은 화해가 전제가 되고 그 기초위에 통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고후5:14-15을 보겠습니까? “우리가 생각컨데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은 우리가 할 화해의 사명을 말하기 전에 이미 화해를 이루신 분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입니다. 화해의 시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 커서 그의 아들을 화해의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이셨습니다. 14-15절의 핵심은 대신하여입니다. 14, “예수님이 우리 대신하여 죽고”. 15, “예수님이 대신 죽음으로 우리가 대신 살고”, “대신 죽었다는 말은 자기 죄 때문에 죽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대신 살았다는 것은 실제 산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화해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어서 우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17절입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이 무엇입니까? 죽고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첫번째 사람은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거듭난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이 해야 일은 무엇입니까? 세상과 화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절입니다. 고후5:18,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누가 세상과 화해를 이룰 수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과 화해한 자입니다. 자신이 먼저 용서받아야 남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 화목되어야 다른 사람과도 화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통일만 하면 된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될 수 있습니다. 통일은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지지 말고 함께 살자는 것입니다. 가족과 민족은 헤어지지 말고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함께 살아야 합니까? 싸우려고 함께 삽니까? 불행하려고 함께 삽니까? 아닙니다. 행복하게 살려고 함께 삽니다. 사이좋게 살려고 함께 삽니다. 그것이 평화입니다. 통일이 함께 사는 것이라면 평화는 함께 사는 이유입니다. 통일이 평화의 옷이라면 평화는 통일의 몸통입니다. 통일을 위해 통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통일이 있습니다. 아무리 통일을 했어도 평화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무력통일이 안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어떻게든 통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가 함께 사는 나라입니다. 동시에 평화로운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면 평화롭습니다. 통일보다 중요한 가치가 평화입니다. 그래서 만일 지금 통일해서 평화롭지 않겠다 하면 때를 기다려서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통일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통일은 목적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합니다. 통일의 목적도 평화요 통일의 과정도 평화입니다. 이런 점에서 산상수훈이 중요합니다. 5:9에서 예수님이 평화의 원칙을 말씀합니다.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 그리고 9절에서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했습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청결이 평화보다 먼저입니다. 청결은 하나님과 관계이고 평화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선행되어야 평화도 아뤄집니다. 3:17이 이 순서를 보여줍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야고보는 화평보다 성결이 먼저라고 말합니다. 이 순서가 바뀌어서는 안됩니다. 85:10도 그렇습니다. 85:10,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평화의 출발이 인애와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의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통일은 운동이 아닙니다. 평화는 운동권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니까 평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평화는 통일로 나아가게 합니다. 여러분은 이 나라가 통일되기 바랍니까? 먼저 평화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평화를 위하여 통일해야 합니다.

 

통일은 기도로 시작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평화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 마음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통일을 위해 반드시 할 일이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고후5:18-19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하나님과 화목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화목의 사명, 화목의 직책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세상과 화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이번에 독일에서 독일 통일의 힘과 원동력이 무엇인지 보았습니다.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가 일어난 진원지가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교회였습니다(사진4). 니콜라이 교회는 1165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960년 된 교회입니다. 대단합니다. 이 기도회를 인도한 목사님은 크리스쳔 퓌러 목사, 이 교회의 122대 담임목사입니다. 이 교회는 음악가 바하가 27년간 음악 책임자로 있던 교회로 유명한 교회입니다. 1945년에 동독이 공산화되고 1961년에 동서독에 장벽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1981, 분단된지 35년이 된 해에 이 교회 신자 몇 명이 모여서 우리가 통일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지 않으냐?” 해서 기도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매주 월요일 오후 5,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1986년도까지, 5년간은 6명에서 15명 정도 참석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뒤에 청년들이 참여하기 사작했습니다. 18살에서 25살의 젊은 청년들이 참여하면서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5년이 지난 1986년부터 수백명이 참석했습니다. 신자들도 있었고 비신자도 있었지만 그들은 오직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사람이 많아지자 동독 공산당이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비밀 경찰들이 교회에 상주하면서 사람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담임목사였던 크리스챤 휴러에게는 28명의 비밀경찰이 배정되었습니다. 그런데 퓌러 목사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설교를 시작할 때는 이렇게 말하고 시작했습니다. “여기 정부 당국자들이 많이 참석하셨습니다. 제가 일일이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데 여러분이 직접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사람들은 모두 웃었습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을 설교했습니다. 산상수훈은 비폭력 평화운동을 가르치는 말씀이었습니다. 비밀경찰에게 퓌러 목사는 눈의 가시같은 존재였지만 그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목회자의 인사권은 교회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법을 행한 경우에만 목사를 체포할 수 있었으나 퓌러목사는 불법을 행하지도 않았으니 잡아 넣을 수도 없었습니다.

1989년부터는 아예 교회로 들어오는 길을 바리케이트로 막고 한 사람씩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도와 고속도로등에서 라이프치히로 들어오는 차량들을 아예 통제했지만 단속이 심할수록 기도의 열기는 뜨거워졌습니다.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는 최대 인원이 2천명인데 기도가 시작도 되기도 전에 자리는 이미 가득찼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기도를 마치고 밖으로 나갔는 데 깜짝 놀랐습니다. 미쳐 교회 들어오지 못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손에 촛불을 들고 우리는 한 민족, 독일은 하나를 외치며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손에 촛불을 든 수만의 사람들이 평화적인 기도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행진은 철저하게 비폭력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989년에는 그 촛불행진에 참가한 사람들이 7만명이나 되었습니다.

 

수많은 동독사람들은 공산당 때문에 못살겠다고 목숨걸고 탈출하고, 교회에서는 수만명의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기도하니 동독정부로서는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느날, 동독 정부 대변인이 동독시민들이 자유롭게 서독을 여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기자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되냐고 묻자 곧 바로 당장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말은 실제 그렇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너무 동요하니까 덮으려고 한 말인 데 그날따라 대변인이 술을 너무 많이 먹고 실수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방송을 들은 사람들이 그 말을 믿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 날 수만명이 달려가 베를린 장벽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아무 계획에도 없는 일이 동독시민에 의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랬으면 공산당 정부가 무력으로 막았어야 하는 데 당시 러시아 고르바쵸프가 무력진압을 허락하지 않아 진압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동독은 총 한방 쏘아보지 못하고 1990, 45년만에 무너져, 독일은 꿈에도 그리던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무슨 힘입니까?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기도할 때 손을 들면 하나님이 그 손 붙잡아 주시는 것을 아십니까? 이스라엘과 아말렉이 싸울 때 모세가 손을 들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졌습니다. 이기고 진 원리가 기도의 손이었습니다. 그것을 출17:16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의 보좌를 향해 손이 들렸으니”. 하나님께 손을 들면 하나님이 그 손 붙잡아 주십니다. 지금도 니콜라이 교회에 들어가면 그때의 기도의 불이 타고 있습니다(사진5). 올리브 기름으로 불을 밝히고 하나님을 향해 기도했던 기도의 불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나라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시나요? 통일에 대하여 국민들의 생각이 점점 부정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IMF이전인 1996년에 국민들에게 물었더니 습니다. 35%반드시 통일되어야 한다”, 47%,“가급적이면 통일되었으면 좋겠다그래서 83%가 통일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다가 2010년에 물었더니 반드시 통일되어야 한다”. 34.2%, “가급적 통일되는 것이 좋다36.5%, 무려 10%이상이 통일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돌아섰습니다. 심지어 22.1%의 사람들은 "현재 이대로가 좋다고 하여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통일에 대해 더 큰 문제는 우리에게 통일에 대한 기도가 식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독일에서 들은 감동적인 소식이 있습니다. 독일의 교회들이 한국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매주 월요일마다 기도해서 기적적으로 통일을 이루고 보니까 같은 고통을 가진 나라가 세게에서 한국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사진입니다(사진6). 어떻습니까?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다른 나라가 기도하니 우리도 이제 기도를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도하면 하나님이 역사합니다. 독일 크리스쳔들도 무릎꿇고 기도했더니 동독이 스스로 무너져 죽거나 다친 사람 하나 없이 통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동독이 망한 뒤 동독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계획했고 모든 상황을 준비했다. 그러나 촛불과 기도는 미쳐 예상하지 못했다. 어느날 사람들이 모여 촛불을 켜고 기도하기 사작하자 우리의 모든 계획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저는 먼 훗날 북한 공산당 간부도 같은 말을 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계획하고 모든 준비를 다 했다. 미사일도 준비하고 핵도 쥰비했다. 그러나 남한 기독교인들이 기도하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아멘. 기도가 능력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두 손을 모으는 것이야 말로 무질서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일어서는 하나님 자신의 손이다”. 기도가 곧 기적입니다.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통일을 위해 우리는 희생하고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통일을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기도만이 아닙니다. 희생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평화의 모델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2:7-8절을 보십시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평화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희생하고 죽어야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니”. 이것이 예수님의 모델입니다. 10:34에서 예수님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했습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왔다니 반대로 말씀하신 것 아닌가?” 이런 뜻이 아닙니다. 평화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대가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더 좋은 것을 위해서 좋은 것을 버려야 좋은 것입니다.

 

동독을 평화로 끌어내기 위해 서독교회가 한 일을 보면 눈물겹습니다. 우선 자주 방문했습니다. 동독과의 대화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서독교인들은 시간만나면 동독을 방문했습니다. 동독사람이 서독에 가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서독사람이 동독가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었습니다. 자주 방문하고 얼굴을 마주대했습니다. 서독의 모든 교회가 동독의 교회와 일대일 자매결연을 맺었습니다. 서로 기도하고 왕래했습니다. 동독에서 정치범으로 수용된 사람이 있으면 동독 정부에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하게 했습니다. 특히 서독의 목회자중 스스로 동독지역에 들어간 목회자가 많았습니다. 자유로운 서독을 버리고 공산체제하로 들어간 것은 한 마리 양을 구하기 위한 목자의 심정이었습니다. 지금의 메르켈 총리가 그 사람입니다. 아버지 목사님이 동독이 공산화되자 고향인 함부르크를 버리고 아무 연고도 없는 동독지역으로 이주합니다. 거기서 통일될 때까지 목회합니다. 메르켈이 훌륭한 총리가 된 것은 자신이 동독에서 가난해 봤고 공산당의 압제밑에 살아봐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압니다. 그래서 백성을 어루만질 수 있습니다. 특히 동서독 교회 지도자들이 서로 자주 방문해서 형제의 관계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동독과 서독의 관계의 끈이 유지된 것은 우리와 달리 동독지역에서 서독의 라디오, 텔레비전 시청이 가능했고 우편, 소포 교환도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독일교회가 한 또 하나는 물질적 지원입니다. 분단시대 서독교회는 동독교회에 대해 총 51억 마르크를 지원했습니다. 그 돈을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71400억입니다. 서독이라고 해서 전쟁이후에 어렵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서독교인들은 자기들 보다 더 어려운 동독교인들을 형제애로 도왔습니다. 심지어 동독 정부에 원유, 구리, 양모등 현물로 지원해서 그것을 동독정부가 돈으로 환산해서 주민들에게 나눠주도록 했습니다. 물론 동독정부도 이것을 떼어먹거나 다른 데로 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안하면 백성들이 굶어죽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2:14절 말씀을 아십니까?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이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평화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폐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평화가 있습니다. 로마식 평화와 성경적 평화입니다. 로마식 평화는 자기를 위하여 남을 죽이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로마는 천년동안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방식은 남을 위해 자기를 죽이는 방식입니다.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죽이는 자기 희생없이는 예수님처럼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저는 이번도 좋은 독일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이번 세미나에서 강의 하나를 맡은 베르너 크레첼 목사님입니다(사진8). 그는 28년간 동독에 머물면서 목회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지금의 동독지역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다가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었는 데 그때 그는 동생과 함께 스웨덴에 있었습니다. 스웨덴을 여행하다가 자기 조국 동독에 장벽이 생기고 모든 독일인은 서독이든 동독이든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날 동생은 서독으로 가고 싶다고 해서 서독으로 가고, 자신은 동독으로 돌아갔습니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그가 동독으로 가면 죽는다고 만류했지만 그는 동독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2차대전으로 인해 더 큰 피해를 본 곳은 서독이 아니라 동독이었고 동독은 목회자도 없이 고난과 절망속에 빠진 곳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회자로서 그는 자기 동포는 어렵게 사는 데 자기만 편히 살겠다고 동독을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독지역으로 들어가 통일될 때까지 28년을 살았습니다.

 

그 기간동안 그가 당한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자녀가 모두 4명이었는 데 자녀들이 공산당 청소년 연맹가입을 안해서 반에서 성적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인문계진학을 못하고 직업학교에 가야 했습니다. 공부 잘하는 자녀가 목사의 자녀라는 이유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할 때 부모로서 얼마나 마음이 아팟겠습니까? 1980, 친척이 서독에서 죽어서 여행을 신청했는 데 허가가 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불법으로 서독을 다녀왔는 데 돌아오자 마자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또 고생합니다. 그 많은 고생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한 가지 마음이 있었습니다. “독일은 하나다. 나는 내 동포와 함께 이곳에서 죽겠다”. “나는 예수님처럼 살다가 예수님처럼 죽겠다. 저들이 때리면 맞고 저들이 발로 차면 얻어 맞겠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끝까지 사랑하겠다”. “동독 공산당이 나를 죽일 수 있지만 한 가지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다행이 그 많은 고난을 이겨내고 통일을 맞았습니다.

 

그에게 제가 북한은 동독과 다르다. 우리는 북한 동포와 자유롭게 왕래할 수도 없고 편지도 주고 받을 수도 없다. 북한 공산주의는 동독 공산주의와 다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잔학한 집단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당신이 만일 한국 목회자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물었더니 뜻밖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조금 더 젊고 한국인이라면 나는 반드시 북한에 들어가겠다. 거기서 예수님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다 죽겠다. 지금 예수님이 계신다면 예수님도 아마 그렇게 했을 것이다. 희생없이 어떻게 통일이 되겠는가? 최고의 희생은 사랑의 희생이 아닌가?“.

 

짧은 독일 방문을 통해 이 나라 평화와 통일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내린 결론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목회하면서 만난 두 분의 권사님이 주신 메시지 였습니다. 한 분 권사님은 몸이 매우 약한 데 며느리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공부도 많이 하고 흠잡을 데 없는 일등 며느리이고 둘째는 배운 것도 많치 안고 부모도 없는 데다 몸도 안 좋았습니다. 당연히 둘째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많이 보살펴야 했습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항상 골골하던 시어머니가 눈에 띄게 건강해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둘째 며느리 때문입니다. 둘째는 어머니가 늘 도와줘야 합니다. 몸도 움직여 방문해야 하고 먹을 것도 만들어 줘야 합니다. 큰 며느리는 완벽해서 시어머니에게 걱정도 안드렸지만 일도 안 드렸습니다. 그러나 둘째는 걱정과 함께 일을 드렸습니다. 결국 둘째 며느리 때문에 시어머니가 살았습니다. 또 한분의 권사님도 몸이 안 좋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정신이 이상한 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불안합니다. 늘 같이 다녀야 합니다. 결국 몸이 아픈 어머니가 딸보다 더 오래 살았습니다.

 

두 사람의 권사님을 통해 북한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북한은 우리에게 못난 둘째 며느리같고 병든 딸과 같습니다. 우리가 도와줘야 하고 우리가 신경써야 하고 그래서 우리가 힘들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북한이 있어 우리가 힘들지만 북한이 있어 우리가 삽니다. 사랑할 사람이 있어서 건강하고, 도와줄 사람이 있어 우리가 더 오래 삽니다. 북한은 우리가 도와서 살고 우리는 북한을 도와야 하기 때문에 삽니다. 북한만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의 아픔 때문에 삽니다. 그래서 사랑은 아픔이고 아프기 때문에 우리는 삽니다. 미셸 쿠오스트라는 시인이 이런 시를 썻습니다. “아들아,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이 통하는 일이다. 마음이 통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위해 자기를 잊고 그 사람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죽여야 한다. 아들아, 알겠니. 사랑은 아픔이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아픔입니다. 아프기 때문에 사랑이고 아프다 보면 우리가 삽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이 사실을 깨닫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 민족에게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사랑이 아픔이이지만 아픔을 통해 서로가 사는 신비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독일이 아픔을 통해 통일로 간 것처럼 우리에게도 서로의 아픔을 돌보다 통일을 맛보게 하소서. 우리에게 형제 때문에 아파할 은혜의 시간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끝까지 인내하게 하소서. 끝까지 사랑하게 하소서. 끝까지 희생하게 하소서. 평화의 주님이 매일 우리에게 통일을 주시기 바랍니다.

 

 

 

 

 

 

 

 

 

 

 

 

 

 

 

 

 

 

 

 

 

 

 

 

 

 

 

Re-vision(13) (고후5:14-21) 2014.11.2.()

교회는 이 땅의 평화입니다

베들린 장벽(사진1,2,3)

고후5:18,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평화가 통일보다 먼저입니다.

세 가지 통일

(1) 국토의 통일

(2) 사상적

(3) 성경적 통일

 

고후5:14-15, “우리가 생각컨데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5:18,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통일이 함께 사는 것이라면 평화는 함께 사는 이유이다.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85:10,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통일은 기도로 시작됩니다.

고후5:18-19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니콜라이 교회(사진4).

 

17:16 “여호와의 보좌를 향해 손이 들렸으니

 

니콜라이 교회 기도의 불(사진5).

 

한국을 위한 기도(사진6).

 

동독 공산당 간부, “우리는 모든 것을 계획했고 모든 상황을 준비했다. 그러나 촛불과 기도는 미쳐 예상하지 못했다. 어느날 사람들이 모여 촛불을 켜고 기도하기 사작하자 우리의 모든 계획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칼 바르트, “기도하기 위해 두 손을 모으는 것이야 말로 무질서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일어서는 하나님 자신의 손이다”.

 

통일을 위해 우리는 희생하고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2:7-8,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평화를 위해 서독교회가 한 일

(1) 방문, 교류

(2) 물질 지원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이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베르너 크레첼 목사(사진8).

 

미셸 쿠오스트, “아들아,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이 통하는 일이다. 마음이 통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위해 자기를 잊고 그 사람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죽여야 한다. 아들아, 알겠니. 사랑은 아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