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sion(11) (고후4:7-11, 벧전4:10-11) 2014.10.19(일)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우리 인생의 최고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살아야 우리는 행복합니까? 이런 질문을 하다가 우연히 태국 광고 영상을 보았습니다. 태국에 한 약국에서 한 소년이 약을 움치다가 주인에게 걸립니다. “야, 이 도둑놈”하고 있는 데 음식점 주인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약값을 대신 내주고 음식까지 줍니다. 30년 후 한 사람이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합니다. 그 옆에는 병원비가 없어 딸이 울고 있습니다. 이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영상을 보실까요?(영상). 30년전에 약을 훔친 소년이 의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돌보는 환자가 어릴 때 자기에게 약값을 준 사람인줄 알고 병원비를 대신 내 줍니다. 30년전에 받은 작은 약값이 30년 후 생명을 살리는 큰 감사로 돌아 왔습니다. 짧은 이 영상을 통하여 남을 섬기고 베풀면 반드시 그 축복이 되돌아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섬기고 베풀면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세상에서 뿐일까요?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한다면 어떨까요? 저의 할머니는 6.25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어릴 때 삼촌들을 따라 할머니 고향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 고향은 김제 금산입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 가면 아주 오래된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100년은 훨씬 더 된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서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마을에 경상도에서 가난 때문에 무작정 집을 떠난 이자익이란 소년이 조덕삼이란 부잣집에서 마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선교사가 전주에서 말타고 전도하러 다니다가 금산을 들러 조덕삼의 집에 말을 대고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일로 주인과 함께 머슴이 예수믿고 세례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1908년, 이 교회에서 처음으로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의 예상을 깨고 주인은 떨어지고 마부가 장로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때 조덕삼이 나가 말합니다. “여러분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의 마부 이자익을 장로로 선출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기 마부를 “장로님, 장로님”하고 모십니다.
때가 되어 또 장로 투표가 있었는 데 이번에는 조덕삼도 장로가 되었습니다. 장로가 된 조덕삼은 이자익을 평양신학교로 유학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 사이 식구들을 부양하고 학비도 댑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이자익이 목사가 되어 돌아오자 금산교회 2대 담임목사가 됩니다. 조덕삼은 자기 머슴인 이자익을 담임목사로 맞아 충성스럽게 섬깁니다. 훗날 이자익은 한국장로교 총회장을 세 번 역임하며 하나님을 위해 크게 일합니다. 지금도 가면 볼 수 있는 이 교회가 금산교회입니다(사진1). 6.25때 불타지 않아 100년 전 모습 그대로입니다. 교회안으로 들어가면 ㄱ자 형태도 되어 있습니다(사진2). 어릴 때는 잘 몰랐는 데 훗날 이 교회를 알면서 “야, 참으로 훌륭하다. 어쩌면 주인이 그렇게 훌륭할 수 있나? 머슴도 참 훌륭하다.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조덕삼의 가문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그 집안에서 수많은 정치가, 학자, 언론인이 나왔습니다. 단지 돈많은 지주로 끝날뻔한 인생이 하나님의 쓰임을 받아 한국교회 최고 훌륭한 장로의 모범을 보인 조덕삼, 비록 가난해서 머슴이요 마부로 살았지만 누구도 하나님의 쓰임받으면 훌륭한 목회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이자익, 두 사람은 저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의 쓰임받기를 원합니까? 다만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만 목사, 장로, 권사, 교회 직분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쓰임받는 직분자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난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쓰임받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쓰임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습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의 쓰임을 받아야 하고 어떻게 쓰임을 받아야 합니까?
고린도전후서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때입니다. 고린도전후서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실제적으로 중요한 책입니다. 사랑이 무엇인가 말할 때 고전13장, “사랑은 오래 참고”를 빼놓고 말할 수 있습니까? 부활을 말할 때 고전15장을 제외하고 말할 수 있습습니까? 성령의 은사에 대한 가르침, 고전12,14장, 성찬식을 어떻게 집례할 것인가? 고전11장, 만일 고린도서가 없었다면 우리 신앙생활에 너무 많은 어려움이 있을 뻔 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고린도는 그리스의 항구도시로 사람들이 많이 살던 곳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였으니 교회에서도 사람들의 문제가 그대로 노출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교회 분쟁문제, 사분오열된 교회 모습, 5장, 교회내 성문제, 성도덕이 무너졌습니다. 6장, 교인간의 법정소송문제, 교인끼리 치고 박고 법정에서 다툽니다. 7장, 결혼문제, 8장, 제사문제, 16장, 헌금문제, 교회안에 있는 모든 문제가 여기 나타납니다. 로마서가 신앙의 본질을 다룬 책이라면 고린도서는 교회생활의 이모 저모를 다룬 책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서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모든 문제를 다 다룬 후에 고린도후서4: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어떤 맥락입니까? 교회안에 있는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다 이야기하다 보니 우리는 질그릇이라는 것입니다.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그래서 하나님의 쓰임받기는 어려운 존재들, 그런데 딱 한 가지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다면 우리안에 있는 보배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능력은 그릇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배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우리는 모두 질그릇이다.
하나님의 쓰임을 받고자 할 때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질그릇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질그릇이 무엇입니까? 흙으로 만든 그릇입니다. 유리로 만든 그릇도 있고 쇠, 플라스틱, 고급 화학물질로 만든 그릇도 있는 데 진흙으로 만들었다면 얼마나 약하겠습니까? 이스라엘 텔아비브를 가면 “에레츠 이스라엘”이라는 박물관이 있습니다. 이 박물관안에 도자기박물관이 있어서 성서 시대의 풍습을 보여줍니다. 먼저 도공이 진흙을 이깁니다. 그리고 그것을 목판에 올리고 돌립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두 손으로 정성을 다하여 돌립니다. 그 사이에 마음에 안들면 버리고 또 합니다. 그리고 3천도가 넘는 뜨거운 가마에 넣고 굽습니다. 그런 다음 유약을 바릅니다. 그리고 그림이나 무뉘를 드립니다. 그러면 단단한 그릇이 나옵니다. 그러나 아무리 단단하게 해도 깨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도자기 공장에 버린 깨지고 버려진 도자기가 수북히 쌓였습니다. 재료가 진흙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존재가 진흙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창2:7절입니다. “여호아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흙인가 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원문을 보니 “흙”이 아닙니다. “미프하 하 아다마”. “흙에 있는 먼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지로 지으셨습니다. “dust from the soil”. 흙이 아니라 흙에 있는 먼지로 우리를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약하고 잘 부숴집니까? 우리는 돌이나 쇠가 아닙니다. 흙입니다. 성경의 사람들을 보십니까? 모두 질그릇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이나 속이고 하나님이 아들 주시겠다고 수없이 약속한 것을 하갈을 통해 낳아 것이 이스마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갈등의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찬사와 함께 이스라엘, 아랍간의 갈등의 불씨를 제공한 장본인이라는 오명도 함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아브라함도 질그릇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대단한 존재였지만 사실은 자기 성질 못이겨 사람을 둘씩이나 죽인 살인자였습니다. 모세에 대해 정말 억울하고 답답한 것은 하나님이 반석을 향하여 명하여 물을 내라고 했을 때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면서 “패악한 족속아, 내가 너희를 위해 물을 내랴”하고 소리쳤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모세는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왜 모세는 가나안땅에 다 와서 그런 실수를 한 것입니까? 질그릇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누가 부숴지지 않는 그릇입니까? 라합은 기생이었습니다. 다윗은 간음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부인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쓰셨던 사람, 누가 완전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없습니다. 다 질그릇입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2천년 교회사는 교회도 질그릇임을 보여준 역사였습니다. 교회의 아름답고 화려한 역사의 이면에는 교회의 엄청나고 큰 실수가 많았습니다. 독일 루터 생가에 가면 당시 면죄부 통이 전시되어 있습니다(그림3). 베드로 성당짓는 데 혈안이 된 당시 교회는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이 통에 은화를 넣기만 하면 그것이 쨍그랑하고 통에 떨어지는 순간, 지옥에 있는 부모가 천국에 간다고 가르쳤습니다. 십자군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중동사람은 십자가를 구원의 상징으로 보지 않고 공포의 상징으로 봅니다. 가장 큰 죄악은 종교재판이었습니다. 이단을 숙청한다는 미명하에 스페인에서만 1,400만을 죽였습니다. 그 속에 갈릴레오도 들어가고 잔다르크도 들어갑니다. 얼마나 많은 교황이 사생아를 낳았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카톨릭의 박해로 죽었습니까?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쯔빙글리는 카톨릭과 싸우다 전쟁터에서 전사했습니다. 신부가 달려와서 임종미사를 드려 주겠다고 했지만 쯔빙글리는 거절했습니다. 형제를 죽이면서 기도한 교회, 그 기도를 누가 들을까요? 그래서 개신교가 태어났으면 개신교는 실수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영국 국교가 또 사람을 죽입니다. 그것이 청교도입니다. 영국 국교는 카톨릭을 반대하여 태어난 개신교의 하나였습니다. 청교도는 카톨릭이 박해한 것이 아니라 개신교가 박해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수백만이 죽고 결국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오늘날도 교회는 실수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질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교회는 성인들이 사는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사는 곳입니다. 교회가 완전하다면 딱 하나 때문입니다. 제도나 사람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자신을 질그릇이라고 고백합니까? CCM 작사가 박용주씨가 <질그릇에 담긴 보배>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자신에 대한 무력감은 그리스도를 붙잡는 재료이다. 무력감은 싫지만 그래야 우리가 그리스도를 의지한다. 우리는 질그릇 같아서 문제가 아니라 질그릇 같은 존재임을 몰라서 문제이다. 하나님이 모세를쓸 때는 그가 질그릇임을 깨달은 후였다. 모세가 자기 잘난 맛으로 살 때 하나님은 그를 쓰지 않았다. 우리는 질그릇이기 때문에 슬퍼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질그릇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 것에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금강석이 되라 하지 말씀하지 않았다. 예수님을 담은 질그릇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질그릇을 보배로 만들겠다고도 약속하지 않았다. 질그릇 안에 보배로 임하시겠다고 말씀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질그릇인 것이 절망이 아니라 우리안에 보배가 있다는 것이 희망입니다.
우리는 보배를 가졌다
그래서 두 번째가 우리안에 보배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는 질그릇이지만 그 질그릇안에 보배가 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이스라엘 박물관에 가면 세계에서 가장 비싼 항아리가 있습니다(사진4). 1947년 2월, 이스라엘의 한 베드윈 목자가 양을 찾자가 이 항아리를 발견했습니다. 안을 들여다 보니까 그 안에 가죽 두루마리가 있습니다. 학자들에게 가져 보니 주전 150년경 쓰여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경사본, 이사야 66장 전권이었습니다. 지금 이 사본의 가치는 값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억만 금을 준다해도 팔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항아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장독대의 항아리와 똑같습니다. 다 흙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차이가 있습니다. 우라 장독은 장이 들어 있고 이스라엘의 항아리에는 성경의 보화가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 질그릇같이 연약한 우리안에 하나님의 위대한 보배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다시 창2:7을 보겠습니다. “여호아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우리는 모두 흙입니다. 단지 흙도 아니고 흙의 먼지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하나님의 생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기는 무엇입니까? “루아흐 하야”, “하나님의 숨”입니다. 하나님의 호흡입니다. 곧 성령입니다. 그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질그릇안에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신비한 일입니까? 그런데 구약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의 생명으로 바뀝니다. 이 차이를 조심해야 합니다. 단지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닙니다. 본질은 똑같은 하나님, 곧 성령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성령은 창조의 일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일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영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믿든 안 믿든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의 영을 받습니다. 그 영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만 예수님의 영, 예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요일5:13을 보시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영생은 영원한 생명,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예수믿는 성도안에만 있습니다. 요일5:11-12이 분명히 말합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있으면 그 안에 성령님이 생명으로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있으면 생명이 있고 예수님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안에서 “루아후 하야”, 하나님의 신, “생기”가 있습니까? 당연히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의 생명이 유지됩니다. 그러나 예수믿는 여러분에게는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아멘.
그런데 우리가 자주 속는 것이 있습니다. 그 생명이 우리안에 평소에는 없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붙잡을 말씀이 골3:3절입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여기서 바울은 우리안에 있는 생명이 “감춰져 있다”고 말합니다.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잘 안보입니다. 1947년 쿰란에서 발견된 항아리도 이 보화가 감춰져 있었습니다. 무슨 가죽이 둘둘 말아 있어서 베들레헴 고물상에 가서 1달러 받고 팔았습니다. 그 뒤 고고학자가 100만 달러에 샀습니다. 그 뒤 이스라엘 정부가 1,000만 달러에 샀습니다. 지금은 아무에게도 안팝니다.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감추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도 엄청난 보화가 감추어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영이요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어떻게 될까요? 다시 골3:4절,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지금은 없는 것같고 초라해도 주님 오실 때 그 생명은 영광가운데 빛날 것을 믿습니까? 영적인 삶이란 그런 것입니다. 우리안에 있는 생명이 자라고 커져서 점점 그 능력을 나타내는 것, 그래서 오늘 말씀 고후4:7, 그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잇슴을 아는 것, 그 능력에 따라 일하고 그 능력에 따라 사는 것, 그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100여년전에 영국의 한 마을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왔답니다. 이때 한 할머니가 전기를 가설했는 데 몇 달 후에 직원이 가서 보니까 집안에 어두 침침합니다. 그래서 계량기를 보니까 계량기가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할머니, 전기를 통 안쓰셨네요. 전기를 안쓰시나요?” 그때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응, 나는 전기를 쓰는 데 촛불킬 때마만 써. 그리고 꺼” 하더랍니다. 할머니는 전기를는 달았지만 촛불 켤 때만 쓰기 늘 꺼 놓았기 때문에 때문에 집안에 늘 어둡고 침침했던 것입니다. 왜 우리의 삶이 어둡고 침침한지 아십니까? 전기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가끔 어둡고 침침합니다. 우리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있기는 있는 데 쓰지 않으면서 “우리 집에도 전기있어. 그런데 안 쓰고 있을 뿐이야”라고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성경은 믿는 우리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다고, 성령님이 계신다고 수없이 말합니다. 바울은 216번 말했고, 요한은 26번 말했습니다. “너희안에 예수님 계신다. 계신다. 예수님 생명이 있다. 정말 있다. 믿어라. 반드시 믿어라. 믿는대로 된다”.“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 여러분안에 예수님 계신 것 맞습니까? 예수님의 생명이 있는 것 믿습니까? 생명이 능력입니다. 없다면 몰라도 있다면 대단한 일이 일어납니다. 모든 가능성. 잠재력, 비전, 꿈, 판단력, 통찰력, 예견력, 인내, 모험, 담대함, 기적, 이 생명에서 나옵니다. 벧전4:11을 보실까요?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고”. 이 공급하시는 힘이 우리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그래도 우리도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다면, 성령님이 계시다면 우리가 질그릇이라 해도 어떻습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두 주전에 미국의 필립 얀시가 한국에 왔습니다. 그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는 영성작가입니다. 그가 쓴 많은 책들은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고통의 영성> 이런 책을 썻습니다. 지난 주 금요일, 필그림 하우스에서 초청해서 “필립 얀시와 함께 한 6시간”에 갔습니다. 거기서 필립 얀시가 오늘의 본문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는 오늘 한국교회가 여러 가지로 어려운 때 목회자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도 역시 질그릇에 집중했습니다. “질그릇은 진흙으로 만든 그릇으로 깨지기 쉽고 부숴지기 쉬운 그룻입니다. 교회는 질그룻이고 우리 모두도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질그릇만 보다가더 상처받고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이제 보화이야기해야 합니다. 질그룻보다 보배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보배에 있을을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하면서 하나의 이야기로 설교를 마무리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콜로라도 오케스트라 이야기입니다.
필립 얀시는 미국 콜로라도 산골에서 태어났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마을에 사람들이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연습하기 시작했답니다. 오키스트라 구성원은 두말할 것도 없이 마을의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느날 동네 사람들 모여 놓고 연주회를 했는 데 놀랍게도 연주곡은 베트벤 교향곡 9번이었습니다. 그런데 연주가 가관입니다. 여기 저기서 삑삑거리는 소리, 잘 안맞는 소리, 어떤 사람은 바람불어 악보가 날아가고, 어떤 사람은 연주하다 줄이 나가고, 그날 연주는 엉망이었다는 것입니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결코 그들이 연주할 곡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연주에 참여한 동네 사람중 즐거워 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연주가 끝나자 기립박수하며 부라보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와서 베토벤을 말로만 들었는 데 베토벤의 음악을 처음으로 라이브로 듣게 되어 기뻣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의 목회자 여러분, 여러분은 어쩌면 하나님 보실 때 콜로라도 오키스트라와 같을 수 있습니다. 여기 저기서 파열음이 나고 틀리고 베토벤이 살아 있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아니, 내 음악을 망치는 놈들이 누구야?”’ 하고 소리질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십시오. 여러분의 연주가 아니면 누가 베토벤의 음악을 들려주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아니었다면 지나간 100년, 한국민족에게 하나님의 교향곡을 들려줄 사람이 누구였겠습니까? 여러분의 서투른 연주를 듣고 사람들이 기뻐하면서 ‘아, 저것이 하나님의 소리구나. 저것이 하늘의 연주구나’. 하지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이 볼 때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더 나은 목회자, 더 나은 연주자들이 들을 때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도 연주를 중단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음악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설교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오직 여러분의 음악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때 조용히 제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지금까지 목회자를 향하여 수없이 쏟아내는 질타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마다 주목을 불끈 쥐었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는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마치 밖에서 얻어 맞고 집에 와서 엄마를 보는 순간 ”앙“하고 눈물이 쏟아지듯이 한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못하고 있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고 계신다는 감격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잘게 부숴지는 질그릇입니다. 우리 모두는 엉터리 오키스트라입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리 속에 있는 보배 때문입니다. 우리안에 계시는 성령님 때문입니다.
목회자 뿐입니까? 우리 모두가 똑같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안에 정말로 충성되어 하나님의 쓰임받는 많은 성도들이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올해는 유난히도 장례가 많이 났습니다. 현재까지만 40번이 넘습니다. 그런데 그 장례를 한번도 빠지지 않고 다닌 분들이 있습니다. 길이 멀고 가깝고를 따지지 않습니다. 내가 잘 알고 모르고와는 상관없습니다. 그저 우리 교인이고 우리 교인 부모님이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다 주부요 직장인입니다. 바쁩니다. 갈 때마다 부조도 합니다. 엄청난 희생입니다. 아마 이들이 천국가면 고맙다고 달려올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한 해동안 회장으로 뽑힌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내가 한 해동안 회장으로 뽑혔으니 적어도 한 해동안은 최선을 다하라는 뜻으로 알고 일체 공예배를 빠지지 않습니다. 장례식도 빠지지 않습니다. 마침 7순이었는 데 7순잔치도 안하고 아들에게 7순비용을 대신 돈으로 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주일마다 50명 이상의 어른들에게 커피를 대접합니다. 충성스러운 종입니다. 주일마다 멀리 충청도에서 올라와 아침부터 주차안내를 하는 분이 있습니다. 몇 년동안 택시타고 오는 분들에게 택시비를 내주고 택시운전수들에게 빵과 우유를 대접했습니다. 충성스러운 분입니다. 주일 아침 1부부터 1,2,3,4부 모든 예배를 참석하고 신자들의 손을 붙잡아 주며 마지막에 교회 청소까지 하고 가시는 장로님도 있습니다. 눈물겹습니다. 매주 월요일마다 공부하러 온 목회자들을 섬기고 간식을 주는 분도 있습니다. 국내외 선교때마다 자기 병원 문을 닫고 간호사들까지 데리고 선교를 다녀는 분도 있습니다. 충성스러운 분들, 감사합니다. 신자는 목회자의 설교를 듣고 은혜받지만 목회자는 신자의 삶을 보고 은혜받습니다.
우리는 모두 질그릇입니다. 우리 자신을 봐서는 하나님의 쓰임받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안에서 보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 성령의 능력이 우리안에 있습니다.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 리가 사는 한 하나님의 쓰임받는 충성스러운 종들이 되시기 축복합니다.
Re-vision(11) (고후4:7-11, 벧전4:10-11) 2014.10.19(일)
태국 광고(영상).
금산교회(사진1).
예배당안(사진2).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모두 질그릇이다.
창2:7“여호아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면죄부 통(사진3).
박용주씨, <질그릇에 담긴 보배>
“자신에 대한 무력감은 그리스도를 붙잡는 재료이다. 무력감은 싫지만 그래야 우리가 그리스도를 의지한다. 우리는 질그릇 같아서 문제가 아니라 질그릇 같은 존재임을 몰라서 문제이다. 하나님이 모세를쓸 때는 그가 질그릇임을 깨달은 후였다. 모세가 자기 잘난 맛으로 살 때 하나님은 그를 쓰지 않았다. 우리는 질그릇이기 때문에 슬퍼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질그릇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 것에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금강석이 되라 하지 말씀하지 않았다. 예수님을 담은 질그릇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질그릇을 보배로 만들겠다고도 약속하지 않았다. 질그릇 안에 보배로 임하시겠다고 말씀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이다”.
우리는 보배를 가졌다
쿰란 항아리(사진4).
창2:7 “여호아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요일5:13“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일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골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벧전4:11,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고”.
그래도 우리도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필립 얀시(사진5)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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