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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마18:21-35 은혜가 임하면 상처는 사라집니다 2014.11.30일)

18:21-35 2014.11.30)

은혜가 임하면 상처는 사라집니다

11월 말입니다. 올 해도 한 달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한 달동안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몇 년 전 제가 추천사를 쓴 책이 있습니다. 김영사에서 나온 <내 생애 마지막 한 달>이라는 책입니다(사진1). 이 책은 미국 우드랜즈 펠로우윕 교회 케리 슉 목사님이 쓴 책인데 이 책이 쓰여진 배경이 있습니다. 그 교회 성도중 한 사람이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입원했으나 병이 악화되어 한 달만에 돌아갔습니다. 켈리 슉 목사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죽을 병이 아닌데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 누구나 마지막이 있구나. 그리고 그 마지막은 아무도 모른다. 만일 내가 한 달밖에 살지 못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올 해도 정확하게 한 달 밖에 남지 않았는 데 만일 내 생애가 정말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지나간 열 한 달을 돌아볼 때 올해는 유난히도 상처가 많았던 한 해였습니다. 개인적 상처, 건강으로 인한 상처, 이루지 못한 꿈 때문에 상처,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생긴 관계적 상처, 그 밖에 가정, 회사, 비즈니스 때문에 당한 상처, 이 상처들외에도 또 하나가 있습니다. 집단적인 상처입니다. 바로 세월호로 인한 상처입니다. 세월호 사건은 그 가족들에게는 물론 온 국민들에게 큰 아픔과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것을 외상후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심각한 불안감이나 우울증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제는 회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한 달 밖에 남지 않은 이때에 우리 개인과 집단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저는 오늘 말씀을 읽으며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비유중 하나로 소위 탕감의 비유라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 왕이 있었습니다. 그가 어떤 종에게 빚을 주었습니다. 하도 가난하고 먹고 살기 어렵다고 해서 빛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빛이 무려 일만 달란트입니다. 그런데 왕이 돌아왔는 데도 이 종은 빚을 갚을 수 없습니다. 할 수 없이 왕에게 나아가 말합니다. “왕이시여,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왕의 빚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심지어 제 몸과 제 아내와 자식들을 다 팔아도 그 빛을 갚을 수 없습니다. 왕이시여, 한번만 봐주십시오. 저와 제 가족이 평생 왕을 종으로 섬기겠나이다”. 왕이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탕감했다는 말은 빚을 없는 것으로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100데나리온 빚을 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 역시 가난해서 빚을 갚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종이 노발대발하며 왜 빚을 안 갚냐?”고 멱살을 잡고 그를 감옥으로 끌고 갔습니다. 왕이 뒤늦게 이 소식을 듣고 대노했습니다. “아니, ? 내가 1만 달란트나 되는 빚을 탕감해 줬는 데 자기는 100 데나리온도 못 탕감해? 여봐라. 당장 그 놈을 잡아 감옥에 가두라. 남도 불쌍히 여기지 않았으니 나도 불쌍히 여기지 않겠노라”. 여기까지가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발견하는 키워드가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은혜의 중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거저 받는 것입니다. 받을 자격이 있어 받으면 은혜가 아닙니다. 받을 자격도 없고, 줄 의무가 없는 데 주고 받는 것입니다. 왕이 가난한 종에게 만 달란트나 줄 의무가 있습니까? 물론 가난하니까 주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다 줍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왕은 주고 종은 받았습니다. 종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까? 만일 종이 은혜를 깊히 깨달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남의 빚도 기쁘게 탕감해 주고 자기도 감옥에 안 갔을 것입니다. 문제는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은혜를 좋아하십니까? 성경에 나오는 가장 좋은 말이 은혜라는 말인 것을 아십니까? 신구약 성경에 대략 500번 이상 은혜라는 단어가 나온다는 것을 아십니까? 바울이 쓴 서신서에만 무려 80번이나 나온다는 것을 아십니까? 성경은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마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우리는 은혜를 받아야 삽니다. 그 많은 은혜중에서 우리는 세 가지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는 많은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종은 왕에게 만 달란트의 빚을 받았다고 합니다. 만 달란트가 얼마나 될까요? 신약성경 시대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화폐도 이스라엘 화폐와 로마 화폐가 같이 쓰일 때입니다. 이스라엘 화폐는 세겔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이 이름으로 쓰입니다. 로마 화폐는 데나리온과 달란트가 있습니다. 1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한 사람이 하루 일해서 받는 품삯이었습니다. 만일 당시 노동자 한 사람이 5만원 받았다면 1데나리온은 5만원 정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데나리온이 6천개 모여서 1달란트가 됩니다. 그래서 6천 곱하기 5만 하면 3억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만 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3억 곱하기 만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3조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종은 왕에게 3조를 받고 다른 사람에게는 500만원을 빚으로 준 것입니다. 3조대 5백만원, 어떻습니까? 비슷합니까? 받은 것과 준 것이 너무 차이가 납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것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우리가 사람들에게 준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받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준 것은 500만원인 데 하나님께 받은 것은 3조라는 사실을 너무 자주 잊어 버립니다. 1만 달란트가 얼마나 많은지. 제가 계산을 해 보았습니다. 노동자 한 사람이 1년동안 300일을 일한다고 합시다. 한푼도 안 쓰고 20년을 모아야 1달란트입니다. 그것은 만번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5만원 버는 노동자가 20 곱하기 만, 20만년을 벌어야 만 달란트입니다. 어떻습니까? 감이 옵니까? 노동자 한 사람이 일년 300일을 20만년 벌어 한푼도 안쓰고 모아야 만 달란트가 된다는 말입니다. 조금 감이 오십니까?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그만큼 많은 은혜를 하나님께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우리가 안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받은 것을 기억을 못하니까 불행한 것입니다. 오죽하면 성경이 받은 복을 세어 보라고 할까요? 쉽게 잘 기억을 못하니까 차분히 앉아서 받은 복이 무엇인지 세어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세어 볼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의 부모, 생각만 해도 눈물나지 않습니까? 자식들, 정말 잘 자라준 것만 해도 고맙습니다. 조국, 외국에 가봐야 애국자가 됩니다. 이스라엘에 있을 때 어쩌다 거리에서 한국사람 만납니다. 그냥 손이 나갑니다. 한번은 예루살렘 거리를 지나는 데 한 한국사람이 지나갑니다. 제가 무조건 저희 집으로 데려다가 대접을 했습니다. 그 후로 한 20년 지났습니다. 3년전 제가 안식월에 예루살렘에 갔는 데 누가 저를 마중나와 자기 집으로 데려갑니다. 20년전에 예루살렘에서 제가 저희 집에 데리고 왔던 분이었습니다. 그 후에 이 분이 공부를 시작했든 데 큰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제가 거기서 2주간 공짜로 있었습니다. 성악이나 노래 잘한 사람 보면 부럽습니다. 은혜입니다. 잘 생긴 얼굴, 은혜입니다. 교회 장로, 권사되신 것, 은혜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예수님이 나같은 죄인을 구해주신 것, 가장 큰 은혜입니다.

 

독일, 뷔르츠부르크에 가면 미술관 하나가 있습니다. 옛날에 대주교가 살던 집 2층집에 있는 작은 미술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유명한 그림 한 점이 있습니다. “에케 호모라는 그림입니다(사진2). 이 그림은 이탈리아 화가 도메니코 페티(15891624)가 그린 그림인 데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재판받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온 믿음의 거장이 있었습니다. 진젤돌프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그 나이 19, 아직 신앙이 확고하아 방황할 때였습니다. 그가 어느날 우연히 이 그림앞에 섰는 데 빌라도 앞에서 재판받으며 침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그림을 한참 보고 있는 데 갑자기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피흘려 죽었건만 너 나위해 무엇을 하느냐.” 이 음성을 듣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라고 훗날 기독교 역사를 새롭게 한 모라비안이라는 신앙공동체를 세워 그 뿌리에서 경건주의, 그 뿌리에서 요한 웨슬리, 감리교, 구세군, 그리고 1832년에 우리 나라에 온 최초의 선교가 구츨라프가 나왔습니다. 진젤돌프를 한 순간에 변화시킨 것은 은혜였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피 흘렸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래서 나온 찬양이 311장입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 너무 많은 것을 받았다는 것을 아십니까? “한없는 용서와 참 사랑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값었이 주었다. 이것이 귀중하건만 너 무엇 주느냐 이것이 귀중하건만 너 무엇 주느냐”.

 

용서할 사람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종에게 빚을 진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이 종에게 100데나리온의 빚을 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100데나리온이면 우리 돈으로 약 500만원입니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지 못하자 어떻게 했습니까? 28절입니다. 18: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너무나 차이가 난 행동이었습니다. 종은 왕에게 빚을 졌고 종은 동료에게 빚을 주었습니다. 종이 종을 용서하기 쉽겠습니까? 왕이 종을 용서하기 쉽겠습니까? 왕입니다. 그런데 왕은 용서했습니다. 3조원을 탕감해 주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500만원을 탕감해 주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3조원입니다. 그런데 왕은 종의 빚 3조원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종은 자기 친구의 딱한 사정을 알고도 멱살까지 잡고 감옥으로 갑니다. 종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은혜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안 받아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망각해서 모릅니다. 자기는 왕에게 엄청난 은혜를 입었음에도 친구의 작은 빚 하나를 못 참습니다. 만일 이때 친구가 내게 빚을 안 갚았지만 나도 왕에게 큰 빚을 탕감받았는 데 내가 받은 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했다면 문제는 쉽게 풀렸을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용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먼저 용서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람을 용서해도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용서했습니다. 둘째는 용서할 수 없는 데도 용서했습니다. 빚이 3조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없는 것으로 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람을 용서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한 것에는 비하지 못합니다. 세 번째는 우리도 실천해야 할 용서입니다. 용서는 왕이 종을 용서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종이 또 다른 종을 용서하는 것으로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돼요? 35절 보시겠습니다.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같이 하시리라”.

 

몇 년전 성경공부 하다가 용서를 주제로 토론한 것이 생각납니다. K집사는 형편상 고모댁에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모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아주 잔소리를 많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같이 사는 데 허구 헌 날 잔소리 안하는 날이 없으니 K집사는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고모의 태도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고모가 잔소리 그만 하도록 변화시켜 주옵소서”. 이렇게 오랫동안 기도했으나 고모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죠?”하고 물었습니다. 제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고모를 위한 기도를 바꾸면 어때요? 고모를 바꿔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모를 축복해 달라고 기도하면 어때요?” 집사님이 말합니다. “아니, 목사님,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잔소리하는 고모를 축복해 달라고 기도해요? 말도 안됩니다. 고칠 것은 고쳐야죠”.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집사님은 고모를 고쳐야 한다고 말하지만 고모가 왜 잔소리 하는지 그 마음을 다 모르시잖아요? 고모가 왜 그렇게 됐는지도 잘 모르고 집사님이 보지 못하는 고모의 다른 부분도 있잖아요? 무엇보다 집사님도 불완전하고 문제가 많잖아요? 어떻게 문제가 있는 사람이 문제있는 다른 사람을 고쳐요?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고치나요? 자기도 못고치는 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고쳐요? 예수님도 가롯 유다 안 고쳤잖아요?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다 안 고쳤는 데 어떻게 집사님이 고모를 고쳐요? 어차피 못 고친다면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하나님께 맡기고 집사님이 고모를 더 사랑하면 혹시 하나님이 은혜로 차차 고치지 않을까요?”. 집사님이 시무룩해서 돌아 갔는데 밑져야 본전이라 그렇게 한번 해 보았답니다. 기도를 바꾸고 고모를 축복해 달라고 기도했답니다. 그리고 고모를 더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답니다. 그랬더니 고모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고모를 위해 기도한만큼 변하고 자기가 고모를 사랑한 만큼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란 내가 사람을 책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껴안고 있던 그를 하나님께 보낸다는 의미입니다. 용서는 내가 그에게 마땅히 할 복수할 권리를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복수할 권리는 오로지 하나님께 있으니 하나님의 심판에 맡긴다는 뜻입니다. 용서는 더 나가서 죄를 지은 그가 더 이상 나에게 지은 죄속에 살지 않도록 그를 마음으로 석방해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가 나로 인해 더 이상 움츠리지 말고 새롭게 인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그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목에 내가 방해요소로 서 있지 않고 내가 스스로 비켜남으로 그가 자유롭게 하나님께 가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은혜의 열매입니다. 은혜가 자라서 용서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은혜란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이 말은 동사로 허리를 구부리다라는 뜻입니다. 용서는 구부려야 가능합니다, 고개를 바짝 쳐들고 노려보던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는 것입니다. 은혜가 허리를 굳히는 것이라면 본질적으로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허리를 굽히는 것입니다.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허리굽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복종입니다. 은혜가 은혜인 것은 키가 큰 사람이 작은 사람에게 허리를 굽히고 어른이 아이에게 허리를 굽히고 부모가 자녀에게 허리굽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최고의 은혜는 날마다 자식을 위해 허리를 굽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자주 부모에게 허리굽힌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자식을 낳아 보니까 부모가 자식을 위해 허리굽힐 때가 더 많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최고의 은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종으로 오셔서 허리굽히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한 해동안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은 분이 있습니까? 그가 여러분에게 찾아와 손이 발이 되기까지 빌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으시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믿는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나에게 모독을 주고 기분 나쁘게 하고 중상모략한 그 사람이 먼저 사과하지 않으면 말도 안하기로 굳게 결심하셨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에게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당신이 상처를 받아 정말 예수님의 은혜를 나타낼 절호의 기회가 왔는 데 왜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칩니까? 당신이 먼저 허리를 굽히세요. 하나님도 당신에게 먼저 허리를 굽혔습니다. 기다리지 마세요. 이 해가 가기 전에 먼저 찾아가 허리를 굽히세요. 그때 당신은 받은 은혜를 실천하고 진정한 예수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해서 뿐 아니라 교회에 대해서도 같이 나타나야 합니다. 교계의 어떤 존경하는 목사님이 제 핸드폰에 글을 보냈습니다. 짧은 글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제목은 보는 눈입니다. “23세에 혼자 되신 어머니의 유복녀로 태어난 딸이 있었다. 어머니의 희생적인 수고로 유학도 하고, 나중에는 유명한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고등학교 이후 교회를 떠났던 딸은 어머니의 권면으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잠시 교회를 둘러 보는데 실망이 컸다. 여자들이 모여서 남자들을 험담을 하고, 장로가 다가와서 처음 본 자기에게 아들 대학 입학을 청탁하고, 회의실에서는 다투는 소리가 문 밖으로 새어 나왔다. 너무 화가 난 딸은 어머니의 손을 끌고 집으로 가자고 재촉했다. 그때 조용하기만 하던 어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평생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만 봤는데, 너는 딱 하루 교회에 와서는 참 많은 것도 보았구나." 이 말에 딸 교수는 무너졌다. 생각없이 교회에 다닌다고만 생각했던 어머니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보는 수준과 자기의 보는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자기는 보이는 것만 보았고 어머니는 보아야 할 것을 보았다. 자기는 자기 수준에서 보았고 어머니는 하나님의 수준에서 보았다. 그렇다. 우리는 많은 것을 보며 산다. 그런데 대부분은 내 눈에 가깝게 보이는 것들이다. 우리는 조금 먼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예 보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이 보는 것은 대개 자기 속에 있는 것이다. 자꾸 거짓이 드러나 보인다면 내속에도 거짓이 많다는 것이다. 자꾸 교만이 보인다면 나도 교만에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섬기는 사람 옆으로 가보라. 섬길 일만 보인다. 기도의 사람 옆에 가보라. 기도의 깊이가 보인다. 내 눈에 너무 추한 것이 보이면 사람을 탓하기 전에 내 속에 추한 것이 있는지 살펴야 한다. 좋은 것에 가까이 가라. 그러면 좋은 것이 보일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을 보라. 그러면 더 멀리 볼 수 있을 것이다”. 은혜의 실천입니다. 은혜로 사람을 보고, 은혜로 교회를 보고, 은혜로 세상을 보는 눈, 주여, 그 눈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은혜로 자신을 치유해야 합니다.

은혜의 세 번째 측면입니다. 우리가 보통은 이것을 놓칩니다만, 이 점을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 왕의 빚을 탕감받은 종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자기는 왕으로부터 엄청난 은혜를 받았는 데 자기에게 쥐꼬리만한 빚을 진 사람에게 은혜를 갚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왕이 이 사람에게 진노해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여기서 마칩니다. 그리고 보통은 그것 봐라.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잘못 산 사람은 그렇게 벌을 받는다. 너도 조심해하고 끝납니다. 그런데 제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잘못해서 감옥에 들어갔지만 그가 벌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은혜일까? 그가 감옥에 가서라도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은혜로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까?

 

그래서 이 종이 감옥에 들어가 어떻게 자신을 돌아보고 은혜를 회복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여기서 부터가 중요합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둘째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혜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아멘입니까? 하나 더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했다고 우리가 치유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서는 용서받은 대상을 치유하는 것이지 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를 용서했더라도 상처받은 나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를 계속 치유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내가 나를 치료할 수 있습니까? 이때 필요한 것도 은혜입니다.

 

먼저 은혜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적극적 사고에 대하여 듣습니다. 소위 긍정의 힘입니다. 긍정의 힘은 내가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처받은 나를 치료할 때 적극적 사고는 오히려 해가 됩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긍정이 우리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우리를 할 수 있게 합니다. 긍정의 힘이 우리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힘이 우리를 할 수 있게 합니다. 긍정의 힘은 우리가 약하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적극적 사고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사고는 나는 약하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상처받았다로부터 시작합니다. 은혜는 무기력한 자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입니다. 은혜의 치료의 첫 번째는 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질그릇같이 연약한 인생, 주의지하여 늘 강건하리”. 얀약한 나, 쉽게 죄를 짓는 나, 쉽게 분노하고 상처받는 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음 은혜의 주님을 기준삼아야 합니다. 은혜의 치유는 은혜의 주님인 예수님을 모시고 그 분을 기준으로 살 때 가능합니다. 세 가지 판단의 기준이 있습니다. 보통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나에게 좋으냐? 나쁘냐?” , 불호, 이기적인 판단입니다. 내가 기준입니다. 조금 나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 도덕적 판단입니다. 정의가 기준입니다., 세 번째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냐? 아니냐?”. 영적인 판단입니다. 예수님이 기준입니다. 좋고 나쁜 기준은 나를 중심한 이기적 판단입니다. 옳고 그른 기준은 정의에 입각한 도덕적 판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아도 주님이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옳아도 예수님에게 옳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준이 누구냐가 중요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모든 생각과 판단이 예수님이 중심입니까? 생각의 기준이 예수님입니까?

 

미국에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한 믿음이 좋은 북부인이 노예 시장에 가서 어린 소녀 하나를 샀습니다. 소녀와 함께 시장에서 나오면서 그가 말했습니다. “넌 자유다. 이제 내가 너에게 자유를 준다”. 소녀가 놀라면서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된다는 것인가요?” “그래.” “제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 되고요?” 그때 소녀가 주인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이제 아저씨랑 같이 갈래요.”. 이것이 신앙인의 판단이요 생각입니다. 우리는 이 소녀처럼 예수님으로 인해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는 예수님을 떠나는 자유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사는 자유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 예수님의 원하는 대로 하는 것, 예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은혜의 삶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상처 안 받습니다. 가장 큰 것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저는 신앙생활하면서 어떻게 사람에게 상처가 오는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발견했습니다. 큰 것을 가진 자는 작은 것 때문에 상처받지 않습니다. 부자에게 가난하다고 하면 상처받지 않습니다. 박사에게 무식하다고 하면 상처받지 않습니다. 우리안에 세상에서 가장 큰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보다 더 큰 분이 누구입니까? 세상의 어떤 것도 그 분보다 크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데 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가장 큰 것이 있는 데 작은 것 때문에 왜 상처받습니까? 우리는 이미 가장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 때문에 받는 상처는 우리가 받은 은혜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여러분안에 이미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가 있음을 믿습니까? 세상의 어떤 상처도 우리가 받은 은혜보다 작다는 것을 아십니까? 언제나 자기 속에 있는 상처를 은혜로 씻으며 살겠습니까? 은혜가 임하면 상처는 사라집니다.

 

 

 

 

 

 

 

 

 

 

 

 

 

 

 

 

 

 

 

18:21-35 2014.11.30)

은혜가 임하면 상처는 사라집니다

<내 생애 마지막 한 달>(사진1).

 

우리는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에케 호모”(사진2).

 

311, “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용서할 사람이 있습니다.

18: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용서의 특징

- 하나님이 먼저 용서했다.

- 용서할 수 없는 데도 용서했다.

- 우리도 용서를 실천해야 한다.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같이 하시리라”.

 

 

용서는 내가 사람을 책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용서는 내가 그에게 마땅히 할 복수의 권리를 포기한다는 뜻이다.

용서는 그가 가는 길목에 내가 방해자로 서지 않도록 길을 비켜서 주는 것이다.

 

은혜=“헤세드”=“허리를 구부리다

 

보는 눈

 

23세에 혼자 되신 어머니의 유복녀로 태어난 딸이 있었다.

어머니의 희생적인 수고로 유학도 하고

나중에는 유명한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고등학교 이후 교회를 떠났던 딸은 어머니의 권면으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예배를 마치고 잠시 교회를 둘러 보는데 실망이 컸다.

여자들이 모여서 남자들을 험담하고

장로가 다가와서 처음 본 자기에게 아들 대학 입학을 청탁하고

회의실에서는 다투는 소리가 문 밖으로 새어 나왔다.

너무 화가 난 딸은 어머니의 손을 끌고 빨리 집으로 가자고 재촉했다.

 

그때 어머니가 딸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평생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만 보았는데, 너는 딱 하루 교회에 와서는 참 많은 것을 보는구나."

 

이 말에 딸 교수는 무너졌다.

생각없이 교회에 다닌다고만 생각했던 어머니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보는 수준과 자기의 보는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자기는 보이는 것만 보았고 어머니는 보아야 할 것을 보았다.

자기는 자기 눈으로 보았고 어머니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다.

 

그렇다.

우리는 많은 것을 보며 산다.

그런데 대부분은 우리 눈에 가깝게 보이는 것들이다.

우리는 조금 먼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예 보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대개 우리 속에 있는 것들이다.

자꾸 사람들에게서 거짓이 드러나 보인다면 우리 속에도 거짓이 많다는 것이다.

자꾸 사람들의 교만이 보인다면 우리도 교만에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섬기는 사람 옆으로 가보라.

섬길 일만 보일 것이다.

기도의 사람 옆에 가보라.

우리 기도가 부족한 것이 보일 것이다.

우리 눈에 너무 추한 것이 보이면 사람을 탓하기 전에 우리 속에 추한 것이 있는지 살펴야 한다.

 

좋은 것에 가까이 가라.

그러면 좋은 것이 보일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먼 곳을 보라.

그러면 평소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될 것이다.

 

은혜로 자신을 치유해야 합니다.

 

은혜로 치유되려면

- 은혜의 힘을 믿어야 한다.

- 은혜의 주님이 생각과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 세 가지 판단 기준

(1) “이것이 나에게 좋으냐? 나쁘냐?”

(2)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

(3) “이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냐?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