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26-38 2014.12.7.(일)
믿음은 두려움을 이기는 모험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태리의 피렌체를 가면 유명한 미술관이 있습니다. 우피치 미술관이라고 합니다. 이 미술관에 가면 르네상스 시대의 많은 그림들이 진열되어 있는 데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마리아 그림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지오토가 그린 “오니산티의 마리아”입니다(그림1). 이 그림은 마리아가 보좌에서 예수님을 안고 있고 사방에 천사와 성인들이 둘러 쌓여 있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아기 예수는 너무 작고 마리아는 아주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너무 커서 주변의 성인, 천사들을 압도합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작게 그려도 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또 하나의 그림은 같은 보티첼리가 그린 “대공의 성모 마리아”라는 그림입니다(그림2). 이 그림도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고 있는 데 그 옆에 있는 천사들이 마리아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줍니다. 그리고 성경이 펼쳐져 있는 데 자세히 보니 누가복음 1장에 있는 “마리아의 찬가”입니다. 이 그림도 누가 봐도 아기 예수보다 마리아가 눈에 띕니다. 마리아가 중요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존재인가 하고 새삼 놀랍니다.
마리아에 대한 존경심은 마리아를 노래하는 “아베 마리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작곡가가 마리아를 기리는 아베 마리아를 작곡했는 데 대표적인 것이 세 곡 있습니다. 구노의 아베마리아,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 그리고 카치니의 아베마리아, 구노와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가 밝고 경쾌하다면,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는 애절하고 슬픕니다. 아베 마리아가 울려 퍼지면 카톨릭 신자건 아니건 다 숙연하게 듣습니다. 사람들이 아베 마리아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개신교 신자입장에서는 약간 못 마땅하지만 노래까지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 사람들은 마리아에게 끌릴까?
키톨릭과 개신교의 교리중 마리아에 대한 교리만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없습니다. 개신교에서는 마리아를 단순히 예수님의 어머니로 보는 데, 카톨릭에서는 마리아를 “테오토코스”, “하나님의 어머니”로 부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는 당연히 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니냐라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틀린 것도 아닙니다. 카톨릭교리는 이 보다 한 걸음 더 나갑니다. 마리아를 원죄없이 태어난 존재로 믿습니다. 소위 “마리아 무염시태설”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가운데 태어나는 데 마리아는 죄에 물들지 않은 채 순결하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1854년에 교황에 의해 선포된 교리입니다. 더 나가 마리아는 육체로 죽지 않고 부활하여 승천했다고 믿습니다. 1950년 교황 피우스 12세가 선포한 “마리아 부활승천교리”입니다. 마리아에 대한 교리로만 보면 카톨릭과 개신교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교리로만 해결할 수 없습니다. 교리가 다르다고 배울 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는 하나님이 판단할 것이고 우리는 마리아를 통해서 배울 것을 찾으면 됩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통해 무엇을 배울까요? 오늘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기 위해 온 천사와 마리아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성탄에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는 어떤 자세와 믿음을 배울 수 있을까요?
마리아는 두려워 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발견한 마리아의 첫 번째 모습은 그가 매우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때는 2천년전, 장소는 나사렛이었습니다. 요셉과 약혼하고 결혼을 기다리던 마리아에게 어느날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눅1:28,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이때 마리아가 보인 첫 번째 반응이 무엇입니까? 놀라움입니다. 두려움입니다. 29절입니다. 눅1: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찜인고 생각하매”. 이 부분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Mary was greatly astonished, “마리아는 크게 놀랐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사가 예고없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전혀 예상치 못했는 데 그나마 사람도 아니고 천사가 나타났다면 여러분은 안 놀라시겠습니까?
구약에서부터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타나면 그 앞에 엎드려 일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뵈었다는 생각에 두려워서 감히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이사야가 그랬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얼굴을 가렸습니다. 심지어 천사도 두 날개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뵈었을 때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하나님의 뒷 모습만 간신히 보았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뵙는다는 것은 이렇게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마리아를 두렵게 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임신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천사가 말합니다. 눅1: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멀쩡한 처녀가 임신을 했다니. 요셉과 약혼은 했지만 아직 결혼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문화는 결혼하기 전 먼저 약혼을 합니다. 약속을 중요하게 여기는 백성이라 약혼은 곧 결혼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래서 약혼한 후에는 서로 왕래하고 삽니다. 그러나 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다 발각되면 율법을 어긴 자들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 관계가 약혼자가 아닌 다른 남자일 경우에는 더 큰 문제입니다. 그 경우는 남자와 여자를 붙잡아 사람들이 보는 데서 돌로 쳐 죽입니다. 요8장의 현장에서 간음하던 여인이 그렇게 돌에 맞았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약혼자와 잔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다른 남자는 더더구나 생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천사는 “네가 임신했다”는 말합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29절에서 마리아가 듣고 “놀랐다” 할 때 이 단어는 “아주 당황했다”. “크게 요동쳤다”는 뜻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순결하게 살아온 그에게 날벼락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거기다 마태복음의 말을 종합하면 이 소식을 들은 요셉이 조용히 약혼관계를 끊으려고 합니다. 정말 마리아는 사면초가 상태에 빠졌습니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생의 공포와 두려움이 그를 엄습했습니다. 그야말로 “사느냐 죽느냐”의 상황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인간으로 사는 한 피할 수 없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감옥에서 탈출하는 어떤 영화가 생각납니다. 천신만고 끝에 감옥에서 탈출한 탈옥수에게 사람들이 어떻게 그 육중한 벽을 넘어 탈출할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가 말했습니다. “감옥의 벽을 넘을 때 가장 큰 어려움은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가로 막고 있었던 것은 감옥의 벽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두려움의 벽이었습니다. 내가 죽음의 벽을 넘어서자 감옥의 벽은 별 것이 아니었습니다”. 탈옥수의 말은 사람이 진짜 넘어야 할 벽은 감옥의 벽이 아니라 두려움의 벽임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에게 더 큰 벽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고 우리가 넘어야 육중한 벽은 밖에 있는 보이는 장벽이 아니라 안에 있는 보이지 않은 두려움의 벽입니다. 우리 가운데 두려움이 어디서 오느냐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두려움에 관한 몇 가지 법칙만은 분명합니다. 먼저 누구나 두려워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성경에 나오는 인물중 두려워 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오죽하면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두려워 하지 말라”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성경의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이 두려워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는 두려움은 두려움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자, 모든 전쟁은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한다면 두려움이 전쟁을 가져옵니다. 자, 오스트리아가 강해진다. 전쟁을 일으킬지 몰라. 독일이 두려워 하다가 사소한 말다툼이 납니다. 그러다 전쟁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1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두 남녀가 사랑합니다. 그러나 한쪽에서 사랑을 잃어버릴지 몰라 두려워 합니다. 어느날 사소한 오해로 그 두려움이 현실이 됩니다. 결국 사랑이 붕괴됩니다. 시험보는 사람이 실패할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 두려움이 시험보는 순간, 마음의 평정을 빼앗습니다. 결국 시험에 실패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합니다. 잠29:25, “사람이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올무가 사람을 두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올무에 걸리게 합니다. 여호아를 의지한다고 올무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 하지 않기 때문에 올무에 걸리지 않습니다. 두려울 일이 두려움을 낳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두려울 일을 낳습니다.
세 번째 두려움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어 결국 실패하게 만듭니다. 중세시대의 가장 큰 질병은 페스트였습니다. 페스트로 유럽인구의 1/3이 죽었습니다. 한 마을에 성자 한 사람이 아침에 기도하다가 페스트 마귀가 그날 마을로 들어온다는 게시를 받았습니다. 아침 일찍 마을 입구에서 지키고 있는 데 아니다 다를까 페스트 마귀가 완전무장하고 들어옵니다. 성자가 가로 막으며 말합니다. “안됩니다. 우리 마을에는 들어올 수 없소. 나가시오”. 결국 마귀는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마귀를 좇고 마을로 들어와 보니 마을 사람들이 다 죽어 있습니다. “어, 마귀가 안 들어왔는데 왜 죽었지?” 마을 사람들이 죽은 것은 마귀가 해쳐서가 아니라 마귀가 들어온다는 두려움 때문에 미리 겁을 먹고 죽은 것입니다. 두려움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싸워야 할 것은 환경이 아니라 두려움 자체입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고 실패하게 합니다.
한 가지 더 말한다면 두려움은 믿음의 반대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어디서 오든지 두려움은 믿음과 상극입니다. 두려워 하면 믿음없고 믿음있으면 두려움 없습니다. 두려움의 시작은 믿음의 끝이고 믿음의 시작은 두려움의 끝입니다. 시편 46:1-3의 말씀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산이 흔들리고 바다가 솟아나면 누구나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믿음이 오면 두려움 사라집니다. 믿음이 있다고 산이 흔들리지 않거나 바다에 풍랑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환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환란을 이깁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이깁니다. 그래서 믿음이 오면 두려움 사라집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게 두려움을 이겨낸 사람이 마리아였습니다. 물론 마리아가 처음부터 믿음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천사가 “네가 임신했다”고 할 때까지만 해도 마리아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말했습니다. 32절, 눅1: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되었습니다. 여전히 두려워 하고 있는 마리아에게 천사가 계속해서 말합니다. 35절, 눅1: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천사는 두려워 하는 마리아에게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마리아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고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천사의 말은 37절이 되어서야 끝납니다. 눅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그때 드디어 마리아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38절입니다. 눅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통하여 마리아가 믿음을 갖게 된 과정을 보십니까? 우리는 가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리아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은 마리아가 본래 다른 여자와 다르기 때문이야. 그래. 마리아는 달라. 다른 여자들 같으면 어림없어. 마리아니까 그렇게 했어”. 아마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카톨릭신자이거나 마리아를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 어디에 봐도 마리아가 특별한 여자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갑작스런 천사의 방문에 마리아는 놀랐고 그가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 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28절,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은혜란 말이 30절에 또 나옵니다.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믿음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은혜가 임하면 믿음이 옵니다. 그리고 은혜와 믿음 사이에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은 은혜로부터 오고 말씀을 통해 옵니다. 믿음의 출발은 은혜고 그 수단은 말씀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하고 천사가 말씀을 시작합니다. “네게 태어날 자는 하나님의 아들인 데 영원히 왕노릇할 분이다. 그는 남자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가능은 없다”. 그래서 바울의 이 말씀을 아십니까?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래서 이 도표가 나옵니다.
은혜
말씀
고난 믿음 두려움
환경
은혜에서 믿음이 나오고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 믿음이 고난을 이기고 두려움을 이기고 환경을 이기게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으면 고난도 두려움고 나쁜 환경도 그대로 있습니다. 두려움을 이기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떻게 옵니까? 은혜로 시작해서 말씀을 통해 옵니다. 그러면 어떤 말씀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두려워 하지 말라“고 366번이나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할 때마다 반드시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또 하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두려움을 이기는 믿음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 그러므로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나는 두려워 하지 않는다”. 윌리엄 폴 영이 쓴 기독교 베스트셀러가 있습니다. 제목이 “오두막”입니다(사진3). 이 책에 보면 마크란 사람이 예수님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말합니다. “마크, 네가 실패하는 것은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마크가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왜 두려워 합니까?”.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네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가 가진 두려움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 안에 있는 두려움이다. 네가 네 안에 있는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믿어야 한다. 내가 선하다는 것과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마음속 깊히 더 많이 알기를 소원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두려움을 이깁니다. 믿음은 말씀에서 옵니다. 성경 66권의 말씀을 두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 믿음이 우리가 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또 한 측면을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을 하나님쪽에서 보면 은혜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으로 보면 어떨까요? 용기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 용기로 두려움을 이겨냈습니다. 이 점에서 마리아의 탁월성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어떤 상황에 있었습니까? 외간 남자와 간음을 해서 임신을 했다는 오해를 받을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억울할 일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것을 해명하거나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38절 다시 볼까요? 눅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용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용기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용기는 두려움을 이기는 힘이다”. 두려움을 없애는 힘이 아닙니다. 극복하는 힘입니다. 두려움을 피하는 힘이 아닙니다. 직면하는 힘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세 가지 용기가 필요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나를 용납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둘째 하나님이 용납한 나를 내가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셋째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히10:38절 말씀이 정말 좋습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자,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의 현실적인 의미가 무엇입니까?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뒤로 물러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용기라고 부릅니다. 결국 믿음은 용기요 용기가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납하셨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받아들인 나를 내가 받아들이고 내가 받아들인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러가지 않는 것입니다. 뒤로, 과거로, 자책으로, 정죄로, 옛날 실수로, 물러가지 않는 것입니다.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용기입니다. 믿음있는 사람은 결국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마리아는 믿음의 사람이요 용기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는다면 그가 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데 믿음의 사람이요 용기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모험이 필요합니다.
마리아의 이야기를 보면서 떠오르는 또 하나의 단어가 있습니다. 모험입니다. 모험은위험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하는 일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두 종류의 위대한 모험이 만납니다. 먼저 하나님의 모험입니다. 하나님이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보내겠다는 모험입니다. 정말 대단한 모험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그 큰 계획을 나사렛의 한 젊은 아가씨를 통해 이루시겠다? 얼마나 큰 모험인가요? “연약한 인간을 통하여 그 아들을 보내시겠다?“. 결과적으로 잘 됐지만 사실은 대단한 모험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모험에 대하여 마리아는 어떤 모험을 했습니까? 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모험을 했습니다. 눅1:3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그때 마리아가 “나는 자신없어서 못합니다” 했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모든 인류가 숨을 죽이고 바라보던 순간이었습니다. 이때 마리아가 입을 열어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위대한 모험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은 용기입니다. 더 나아가서 모험입니다. 모험에는 언제나 실패에 대한 책임이 따릅니다. 그런데 이런 모험을 처음 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모험은 사람을 창조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는 데 결국 사람이 죄로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몰랐을까요? 알았기 때문에 모험입니다. 자신을 배반하고 죄에 빠질 것을 알았음에도 우리를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험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다음에 큰 모험이 예수님을 보내신 모험입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배반해서 결국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하나님은 몰랐을까요? 알았기 때문에 모험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모험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도 모험가요 예수님도 모험가였습니다. 실패할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어떤 모험도 할 수 없습니다. 모험하지 않고는 어떤 믿음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선택하신 모험을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무엇을 믿고 선택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도 모험하며 살아야 합니다.
목회자로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내가 점점 모험심이 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노만 빈센트 필 목사님의 이 말을 묵상합니다. “문제가 생길 때 문제를 불평하지 말라. 문제속에 해답이 있다. 문제는 문제를 만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해결되기 위해 있다. 사실보다 태도가 중요하다. 문제가 결과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결과를 결정한다. 우리는 문제를 실제보다 부풀려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실제보다 작고 나보다도 작으며 무엇보다 하나님 보다 작다”(노만 핀센트 필, <생각의 힘>).
목회자로서 저는 가끔 실패합니다. 그러나 어느날 다른 각도에서 실패를 묵상하면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 우리가 어떤 실패를 했다고 합시다. 물어 봅시다. “내가 어떤 일에 실패한 것입니까? 내가 실패자가 된 것입니까?”. 실패자는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고 어떤 일에 실패했다는 것은 그 일에만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내가 취직 시험에 실패했다. 나는 다만 취직시험에만 실패한 것입니까? 내가 실패자가 된 것입니까? 취직시험에만 실패한 것입니다. 그나마 삼성에만 실패한 것입니다. 아직도 현대, L.G, 한화는 시험도 보지 않았습니다. 다른 데 시험보면 되고 취직말고 다른 것은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실패자가 아닙니다. 내가 돈을 못 법니다. 다만 돈만 못 번 것입니다. 그나마 아직도 돈벌 기회가 많이 남아 있고 돈버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실패자가 아닙니다. 내가 어떤 아가씨와 사귀가 헤어졌다. 그 아가씨 하고만 안된 것입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수억의 아가씨들이 있고 아가씨 사귀는 것 말고 나는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실패자가 아닙니다. 내가 다른 일을 시도하고 있는 한 나는 실패자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위험을 감수하고, 내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모험정신을 가지기만 하면 나는 실패자가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안하고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보다 실패하더라도 모험해보는 것이 멋집니다.
하나님이 왜 마리아를 예수님을 낳을 인류의 어머니로 택하셨을까? 마리아에게 본래 특별한 것이 있어서?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보통 사람으로 무서워 했고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주자 믿음을 가졌습니다. 믿음은 용기가 되고 모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믿음에 복주셨습니다. 지금도 믿음으로 하나님앞에 서는 자, 용기로 자기를 받아들이는 자, 모험으로 자기 앞에 놓인 두려움을 이기는 자, 하나님은 그를 성탄의 주인공으로 삼으십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눅1:26-38 2014.12.7.(일)
믿음은 두려움을 이기는 모험입니다
오니산티의 마리아(그림1).
대공의 성모 마리아(그림2).
마리아는 두려워 했습니다.
눅1:28,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눅1: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찜인고 생각하매”.
눅1: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두려움의 법칙
(1) 누구나 두려워하며 산다
(2) 두려움은 두려움을 낳는다
잠29:25, “사람이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3) 두려움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4) 두려움은 믿음의 반대다.
시46:1-3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눅1: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눅1: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눅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눅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은혜
말씀
고난 믿음 두려움
환경
“오두막”(사진3).
“네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가 가진 두려움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 안에 있는 두려움이다. 네가 네 안에 있는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믿어야 한다. 내가 선하다는 것과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마음속 깊히 더 많이 알기를 소원해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쪽에서 보면 은혜요 사람의 눈으로 보면 용기입니다.
눅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폴 틸리히, “용기는 두려움을 이기는 힘이다”.
히10:38“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믿음의 모험이 필요합니다.
눅1:3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노만 빈센트 필, “문제가 생길 때 문제를 불평하지 말라. 문제속에 해답이 있다. 문제는 문제를 만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해결되기 위해 있다. 사실보다 태도가 중요하다. 문제가 결과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결과를 결정한다. 우리는 문제를 실제보다 부풀려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실제보다 작고 나보다도 작으며 무엇보다 하나님 보다 작다”(생각의 힘).
“내가 어떤 일에 실패한 것입니까? 내가 실패자가 된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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