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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22-33 주여, 위로를 기다립니다 2014.12.14(일)

2:22-33 2014.12.14()

주여, 위로를 기다립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세번째 주일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립니까? 2차 대전때 독일의 나치 포로 수용소에서 갑자기 많은 포로들이 죽어 갔습니다. 때는 성탄절 직후인 데 사람들이 갑자기 죽자 수용소측에서 당황했습니다. 왜 갑자기 사람들이 죽을까 조사해 보니 포로들이 성탄절에는 석방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 데 성탄절이 지나도 석방되지 않자 극심한 좌절감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사람을 지탱하는 힘이 무엇입니까? 기다림입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앞으로는 잘될거야“. 희망이 기다림을 낳고 기다림은 고통을 이기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위로입니다. 위로는 comfort, fort입니다. com함께입니다. 그래서 위로는 함께 힘을 내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힘을 다른 사람에게 줘서 그도 힘을 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한 해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나 하나가 다 위로받아야 할 일들입니다. 어떤 분은 갑자기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처음엔 좋아지리라 믿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나빠집니다. 병원을 방문했더니 저를 보고 막 웁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손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어떤 분은 갑자기 아들이 죽었습니다. 너무 큰 충격을 받고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무척 괴로워 했습니다. 하도 고민을 많이 해서 얼굴이 반쪽이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몸이 약했지만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예배드리러 갔더니 한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모두가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사람중에 위로가 필요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가 겪는 일중에 위로가 필요없는 일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해서 공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넘어졌을 때 일으켜 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넘어질 수 있습니다. 넘어지면 다치고 상처납니다. 그러나 넘어진 것보다 더 큰 아픔은 넘어졌을 때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남의 위로도 필요하지만 내가 나를 위로하는 위로도 필요합니다. 이해인이 쓴 나를 위로하는 날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내가 나를 위로할 필요가 있네. 큰일 아닌데도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죽음을 맛볼 때/ 남에게 채 드러나지 않은 나의 허물과 약점들이 나를 잠못들게 하고/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에 문 닫고 숨고 싶을 때/ 괜찮아 괜찮아, 힘을 내라구/ 이제부터 잘하면 되잖아/ 조금은 계먼쩍지만 내가 나를 위로하며 조용히 거울 앞에 설때가 있네. 내가 나에게 조금 더 따뜻하고 너그러워지는 동그란 마음/ 활짝 웃어주는 마음/ 남에게 주기 전에 내가 나에게 먼저 주는 위로가 있네“.

 

어떻습니까? 오늘도 하나님은 한 해동안 힘든 길을 걸어오신 여러분을 위로하시리라 믿습니까? 남이 나를 위로하는 것보다, 내가 나를 위로하는 것보다, 더 큰 위로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예수님이 성탄절에 오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태어난 지 약 40일 후에 한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 이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그의 이름은 시므온, 이름으로 볼 때 전형적인 유대인이었습니다. 25절입니다.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시므온에게는 어떤 위로가 필요했을까요? 그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먼저 민족적 위로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이스라엘은 외세의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주전 8세기, 앗수리아, 6세기, 바벨론, 5세기, 페르시야, 4세기, 그리스, 그러다가 주전 63년부터 로마가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민족도 남의 나라 지배를 받았지만 이스라엘은 수천년에 걸쳐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각종 세금과 군사통치와 폭정으로 백성들은 눌리고 억압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에 메시아가 와야 산다고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시므온이었습니다.

 

시므온에게 필요한 위로는 그 뿐이었을까요? 오늘의 말씀에 나오는 시므온은 나이가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메시아의 탄생을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기도했다면 분명 나이가 많았을 것입니다. 나이가 많아지면 왜 위로가 필요합니까? 열심히 일하던 평생의 직장 어느날 그만두고, 건강은 점점 나빠지고, 친구들은 하나씩 죽어갑니다. 그러니 얼마나 외롭고 힘듭니까? “가장 큰 질병은 외로움이다라는 말을 아십니까? 나이 많은 사람에게 위로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시므온에게 위로가 필요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요? 아마도 가정적인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자녀중 하나가 아플 수도 있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모든 인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시므온에게 위로가 필요했듯 우리에게도 위로가 필요하다고 믿습니까?

 

하나님에게서 위로가 옵니다

오늘 말씀에서 위로를 찾는 시므온이 성전에 나와 위로를 구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므온이 성전에 나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도는 왜 합니까? 모든 위로가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25절을 다시 보실까요?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성경은 시므온을 의롭고 경건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린 것보다 더 먼저 나옵니다. 문맥으로 볼 때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렸기 때문에 의롭고 경건한 것이 아니라 의롭고 경건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의롭고 경건하다는 말은 어떤 뜻일까요? 우리가 성경에서 의롭다하면 정의를 행하는 사람, 나쁜 짓 안하는 사람,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런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그러니까 의로운 사람하면 조선시대 사육신 같은 사람, 안중근 같은 사람, 이런 사람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의롭다는 말은 존재의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의를 말합니다. 본래 사람이 의로워서 의인이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의인입니다. 의로운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의인이 아니라 의로운 분과 동행했기 때문에 의인입니다.

 

성경이 의인이라고 말한 사람이 몇 있습니다. 노아, 아브라함, 욥입니다. 이들이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노아, 홍수 후에 포도주 마시고 취하여 자식들에게 추한 꼴을 보였습니다. 아브라함,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이나 속였습니다. , 친구들의 말을 비난하며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습니다. 완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이 다만 의로웠던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존재적 의가 아니라 관계적 의입니다. 시므온은 평소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를 사랑하며 그와 동행했기 때문에 모든 위로가 하나님께로 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나와 기도한 것입니다.

 

, 사람들이 추구하는 위로와 성경이 추구하는 위로가 얼마나 다릅니까? 사람들이 위로를 원할 때 보통 취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이 나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불행한 일은 참 많아. 그러나 그것을 생각하면 더 불행해져. 나쁜 일은 일체 생각하지마”. 그러나 나쁜 생각을 안한다고 행복해 집니까? 나쁜 일은 항상 생각밖에서 옵니다. 두 번째는 이와 비슷한 데 낙관주의 철학을 따르는 것입니다. “지금은 불행하지만 갈수록 좋아질거야. 세상은 점점 좋아지게 되어 있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마”. 낙관주의적 철학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이 필연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진화해간다고 믿습니다. 이 철학이 가장 활발할 때가 19세기 말 진화론이 시작된 때부터 20세기 중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가장 많은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세 번째가 운명론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정해진 운명이 있어. 운명을 따르는 것이 자연의 순리야. 어차피 일어날 일인 데 뭐. 걱정한다고 운명이 달라지지 않아”. 그렇다면 세월호도 운명이라는 것입니까? 그리고 운명은 누가 결정하는 것입니까? 운명앞에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운명론은 인간의 가치와 책임을 무시한 나쁜 생각입니다. 또 하나는 극기의 방법입니다. “잘 참아내. 너는 할 수 있어. 잘 참고 끝까지 이겨내. 그래야 성공해”. 그래서 어느 만큼 참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무한하게 참을 수 없습니다. 인내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가 지나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세상적 방법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린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책임으로 넘긴다고 다 해결됩니까? 개인이 그렇게 능력이 많습니까? 성경의 해답은 이것입니다. “모든 위로도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이 요14:1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여러분, 이 말씀은 예수님이 죽기 전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한 말씀입니다. 성경과 세상의 고통중 가장 큰 차이는 세상은 가능한 한 고통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고 성경은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이 말은 우리에게 근심이 있음을 전제한 것입니다. 이 근심은 제자들뿐 아니라 내일이면 죽을 예수님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근심도 항상 있습니다. 없는 것으로 한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잊는다고 잊혀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의 해법이 있습니다. ”나를 믿으라“. 이것이 해법입니다. ”근심하지 말라. 그런데 나를 믿으라“. 심리학, 낙관주의, 극기의 방법들이 근심을 잠시 잊게 하려고 애쓰지만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근심이 있느냐? 좋다. 나를 믿으라. 그러면 된다“. 이것이 해법입니다.

 

모든 위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고후1:3-4절의 말씀을 아십니까?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바를 기억하십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 모든입니까? 하나님이 위로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아니라 위로의 하나님입니다. 왜 이 차이가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위로하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 많은 데 그중에 하나가 위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위로의 하나님하면 하나님의 본성이 위로라는 것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의 하시는 많은 일중의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안에 위로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환란중에 있는 자를 능히 위로합니다”. 여기 또 모든이 나옵니다. 앞에 나오는 모든은 위로의 내용이고 뒤에 나오는 모든은 위로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도 위로할 수 있고 어떤 사람도 위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위로로 사라의 몸종 하갈을 위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 이스마엘을 큰 민족으로 축복하고 광야에서 물도 마시게 했습니다. 그 위로로 낙심한 엘리야를 위로하여 로뎀에서 쉬게 하고, 그 위로로 고통당한 욥을 위로하여 고난을 이겨내게 했습니다. 그 위로로 에레미아를, 다니엘을, 바울을,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위로하십니다. 모든 위로는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성령님은 위로의 영입니다.

시므온이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며 기도할 때 성경이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성령이 감동했다는 것입니다. 25절부터 27절을 볼까요? 2:25-27,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성령이 무려 세 번이나 나옵니다. “성령이 그 위에 있더라”. “성령의 지시를 받고”,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왜 이렇게 성령이 많이 나올까요? 성령과 위로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성령은 위로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위로를 나타냅니까? 성령님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위로를 나타냅니다. 재미있는 것은 원어입니다. 위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시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령을 보혜사라고 하는 데 그것을 파라크레토스라고 합니다. “파라는 접두어입니다. 둘 다 똑같습니다. “함께라는 뜻입니다. 성령을 의미하는 파라크레토스함께 말하는 자, 속삭이는자입니다. ”크레토스부르다. 말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옆에서 함께 말해주는 자입니다. 카운슬러입니다. 느낌이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위로는 옆에서 함께 붙잡아주는 것입니다. ”클레시스는 붙잡아 주는 것입니다. 지탱해 주는 것입니다. 두 단어가 접두어가 같고 의미가 같습니다. 성령은 위로고 위로는 곧 성령입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를 옆에서 말해주는 일이고 그 일을 통해 우리를 붙잡아 줍니다. 이것이 위로입니다. 15:26을 아십니까?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여기서 보혜사 성령은 파라클레토스”,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이 이 일을 하십니다.

 

육이 죽고 영이 산 후쿠시게 다카시”(사진)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일본 다카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이 사람이 성령의 은혜로 치료받고 위로받은 이야기를 실화를 쓴 책입니다. 일본인 다카시는 일본 최고의 전자공학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장혜림이라는 한국 여성과 결혼해 딸 하나를 두었는 데 본래 무신론자였던 그가 아내를 따라 몇 번 교회를 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10년전, 그에게 놀라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아내와 몇 사람과 함께 스키장을 갔는 데 그 스카장에서 갑자기 쓰러집니다. 평소에 다시는 너무 건강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스키장에서 아무 이유없이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는 데 중태였습니다. 의사의 말은 갑자기 뇌경색이 와 회복불가능하다며 죽든지 살아도 식물인간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절망에 빠진 아내는 하나님께 남편을 살려달라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내가 남편이 누어있는 병실에 십자가를 걸어 놓았는 데 남편이 병원에 입원한 지 21일 만에 벽에 붙어 있던 십자가가 남편위로 뚝 떨어집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다 죽어가던 남편이 갑자기 꿈틀거리더니 일어났습니다. 십자가가 몸에 닿자 마자 뇌파 활동이 시작되어 눈을 뜬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도 알아보고 글을 쓰고 말도 합니다. 그러더니 천천히 입을 열어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 예수님 만났어. 예수님은 나를 53년이나 기다렸어. 모든 것이 다 준비가 되어 있었어. 나만 몰랐어.”

 

깜짝 놀란 아내가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자 다케시가 더듬거리며 말하기 시작합니다. “내 몸이 혼수상태였지만 의식은 분명히 있었어. 얼마나 지났을까. 의사가 당신한테 환자가 위급합니다. 가족들에게 연락하십시오라고 하는 말이 내 귀에 들렸어. 그때 나는 이제 죽는구나하고 생각했지. 내 인생이 이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린다는 안타까움이 있었고 그 무엇보다 5살밖에 안 된 딸 미키에게 작별인사를 못했다는 게 가장 마음이 아팠어. 어느 순간 내가 뜨거운 사막 위에 쓰러져 있다는 것을 알았어. 무덥고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지만 그것보다 내가 죽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두렵고 무서웠지. 그래서 나는 막 이렇게 외치고 싶었어. ”난 아직 죽을 준비가 안 되어 있어요. 나에게는 어린 딸이 있고, 아내에게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는데 나는 죽기 싫어요. 나를 살려 주세요!”라고 말이야.

 

그 때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 저 멀리 모래 위에서 나를 향해 걸어오는 세 사람이 보였어. 그들은 특별하지도 않았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느낌의 사람들이었어“. 이 세 사람이 쓰러져 있는 다카시에게 다가왔을 때 다카시는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누구십니까?”그러자 제일 앞에 있던 사람이 다카시에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나사렛 예수다.”그래서 다케시는 나사렛 예수라고요?’ 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지금 목이 마르니 물 좀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영롱한 빛깔의 물을 입을 하늘에서 받아 세 번이나 부어 주었습니다. 그 물을 마시는 순간 엉치뼈 끝에서부터 등줄기를 타고 마치 불기둥과 같은 강한 힘이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방을 보니 자기는 전혀 다른 곳에 와 있었습니다. 그 앞에 물쌀이 빠르고 거센 강이 흐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 건너편에는 자기 집이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건널 생각을 못하고 있는데 나사렛 예수님이 나타나더니 오라며 손짓하더랍니다. 다카시가 머뭇거리자 어느 사이엔가 예수님이 강 이편으로 와서 다카시의 손을 잡고 빠른 속도로 강을 건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세 번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더랍니다. “어떤 물살도 너를 떠내려가게 하지 못한다. 내 손을 잡고 있으면 안전하다. 너는 아무것도 두려워 마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고,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다.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태우지도 못할 것이다. 나는 왕이요, 나의 하나님이다.”

 

니중에 알고 보니 사43장이었습니다. 어쨓든 다카시는 기적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마지막 그가 예수님과 헤어지면서 들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살려 주는 이유는 이것이다. 네가 가진 모든 재능을 살려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살아 있는 것을 전해라. 지금 전쟁이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 아이들을 죽이는데 아이들을 더 이상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 아이들한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굶어 죽는 아이들이 없어야 한다. 아이들을 위해 학교와 고아원도 세워라”. 그리고 예수님이 다카시를 꼭 안아주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다카시는 기적적으로 살아서 하나님의 일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몸은 불편하지만 놀라운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며 하나님이 그에게 분부한 사명을 감당학도 있습니다. 몇 년전에는 한국에도 왔고 국민일보에 글도 썻습니다. 여러분도 성령이 파라클레시스”, 여러분을 위로하고 옆에서 붙잡아 일으키고, 힘을 주고, 새롭게 하고, 승리하게 하시는 분임을 믿습니까? 위로의 하나님은 오늘도 성령님을 통해 저와 여러분을 붙잡아 주고 계십니다. 위로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위로의 영입니다.

 

예수님께 와야 위로받습니다.

마지막으로 시므온이 받은 위로에 아주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께 나온 것입니다. 28절 볼까요? 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시므온에게 하나님은 성령의 감동을 통해 성전에 나오게 했습니다. 거기서 만난 사람이 아기 예수였습니다. 그때 시므온이 고백했습니다. 2:29-33,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여러분, 성령의 감동을 받은 시므온이 결국 누구에게 올 때 위로를 받았습니까? 예수님입니다. 26절보세요. 2: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예수님께 오기 전에는 어떤 위로도 없습니다. 예수님께 와야 위로와 은혜가 있습니다. 더구나 그 예수님은 갓 태어난 아기입니다. 그런데 그 아기를 안으며 시므온은 주재여라고 말합니다. “주재는 천지와 역사를 주관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이 천지의 주재라고 믿습니까? 26,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 오기 전에는 어떤 위로도 희망도 없습니다. 아기로 오신 예수님이 인류의 유일한 위로입니다.

 

왜 예수님이 우리의 위로입니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위로는 위로할 만한 자가 해야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이 왜 위로자입니까? 그는 우리가 당하신 모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는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는 따돌림당하고 업신여김 받았습니다. 그래서 왕따당한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마음의 상처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상처받은 자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무 죄없이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래서 아무 이유없이 죽어간 세월호 가족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사고로 죽은 세월호 학생중에 단원고 1학년 이강현이란 학생이 있습니다. 이 학생 부모님이 제 후배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의 신자라 위로차 방문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당한 부모에게 무슨 말로 위로할까 처음에는 많이 걱정했습니다. 찾아갔더니 역시 힘들어 했습니다.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한 후에 설교를 해야 하는 데 무슨 말을 할까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손을 꼭 잡고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했더니 금방 울기 시작합니다. 아들의 죽음을 위로할 다른 말이 필요없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죽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위로자이신 이유는 우리가 겪은 고통을 그가 다 겪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와 병빼놓고는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고통받는 우리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아바, 아버지찬양을 부르다가 후렴에서 은혜받았습니다. “주는 내 맘을 고치시고 볼 수 없는 상처 만지시네. 나를 아시고 나를 이해하시네. 내 영혼 새롭게 새우시네”. “나를 아시고 나를 이해하시네”. “내 맘을 고치시고 내 상처 만지시네”.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시므온도 예수님께 위로를 받은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와야 위로를 받습니다. 그는 우는 자를 위로하십니다. 그는 슬픈 자를 위로하십니다. 그는 상처받은 자를 위로하십니다. 대림절은 위로하러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2:22-33 2014.12.14()

주여, 위로를 기다립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넘어졌을 때 일으켜 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해인, “나를 위로하는 날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내가 나를 위로할 필요가 있네.

큰일 아닌데도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죽음을 맛볼 때

남에게 채 드러나지 않은 나의 허물과 약점들이 나를 잠못들게 하고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에 문 닫고 숨고 싶을 때

괜찮아 괜찮아, 힘을 내라구

이제부터 잘하면 되잖아

조금은 계면쩍지만 내가 나를 위로하며 조용히 거울 앞에 설때가 있네

내가 나에게 조금 더 따뜻하고 너그러워지는 동그란 마음

활짝 웃어주는 마음

남에게 주기 전에 내가 나에게 먼저 주는 위로가 있네.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하나님에게서 위로가 옵니다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사람들이 추구하는 위로

(1) 나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

(2) 낙관주의 철학

(3) 운명론

(4) 극기

 

성경의 위로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고후1:3-4,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성령님은 위로의 영입니다.

2:25-27,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위로=파라클레시스=함께 붙잡아 주다

성령=파라크레토스=함께 말해주다

 

15: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육이 죽고 영이 산 후쿠시게 다카시”(사진)

 

예수님께 와야 위로받습니다.

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29-33,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2: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위로는 위로할 만한 자가 해야 위로가 된다.

 

주는 내 맘을 고치시고 볼 수 없는 상처 만지시네. 나를 아시고 나를 이해하시네. 내 영혼 새롭게 세우시네”(악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