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6:48-55 2014.12.21(일)
생명의 양식을 주옵소서
오늘은 12월 셋째 주일, 한 해도 한 주를 남기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나간 한 해동안 어떻게 사셨습니까? 어느 병원에 기억력이 점점 사라져가는 환자가 의사와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시력과 기억력에 모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둘 중의 하나는 살릴 수 있습니다. 시력을 살리면 기억력을 잃고 기억력을 살리면 시력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이제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시력을 택하시겠습니까? 기억력을 택하시겠습니까?” 남자가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둘 중 하나를 갖는다면 저는 시력을 택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기 보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환자는 과거를 기억하기 보다는 미래를 바라보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과거는 우리에게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척 스윈돌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는 네 가지가 있다. 내뱉은 말, 쏜 화살, 지나간 시간, 무시해 버린 기회다”.
그렇습니다. 과거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수는 있습니다. 기억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기억은 은혜의 기억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베푼 은혜, 그것이 없었으면 내가 지금 살 수 없는 은혜, 그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과거의 기억만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능력입니다. 미래를 향한 희망입니다. 어떤 분이 “은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과거의 은혜는 적금과 같고 현재의 은혜는 현찰과 같고 미래의 은혜는 보험과 같다“. 어떻습니까? 한 해동안 여러분을 살린 은혜가 있었습니까? 지금도 은혜가 필요합니까? 앞으로도 은혜로 살겠습니까? 오늘 성탄절을 앞둔 뜻깊은 성찬예배에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기억할 첫 번째 은혜는 하나님이 공급하신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양식을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은 오병이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뱃세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며칠 지나자 사람들은 시장기를 느꼈습니다. 그때 안드레가 소년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고 그것으로 예수님을 5천명을 먹였습니다. 이것이 요6장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1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대로 주시니라”입니다. 하나님은 떡과 물고기를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고 말합니다. 다른 성경으로 보면 “필요한 대로” 주셨습니다.
어떻습니까? 지난 한 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만큼 주시지 않았습니까? 물론 우리 욕심대로는 주지 않았습니다. 욕심대로 주셨다면 큰 일납니다. 사람의 불행은 두 가지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아무 것도 받지 못하는 것과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받는 것입니다. 다 불행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원하는 아무 것도 안 주시지도 않았지만 원하는대로 모든 것을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공급의 원칙은 언제나 필요한 만큼만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을 때도 그랬습니다. 출16:4,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여기서 중요한 말은 두 마디입니다. “비같이”. 비는 하늘에서 내립니다. 하나님이 주시고 싶을 때 주시고 싶을 만큼 주십니다. 또 하나는 “날마다”입니다. 일년 먹을 것을 절대 하루 아침에 주지 않았습니다. 그날 그날 먹을만큼만 주셨습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런데 일용할 양식을 어떻게 주셨습니까? 요6:11절 앞 부분입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여기에 “축사하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축복하고 감사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이 일상 생활에서 입버릇처럼 쓰는 말이 있습니다. “바룩 하쉠 아도나이”. “주여, 당신의 이름이 축복되십니다”. 예수님이 떡 한 덩어리를 손에 잡고 기도하신 기도도 이 기도입니다. ”바룩 하쉠 아도나이“. ”주여, 당신의 이름이 복되십니다“. 떡 한 덩어리를 손에 잡고 감사기도 드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니까?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아닙니까? 만유보다 크시고 영원보다 크신 분 아닙니까? 그런데 그 분이 작은 떡 한 덩이를 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작은 것을 그렇게 소중하게 들고 계십니다. 우리가 한 해동안 받은 은혜가 이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것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은 주님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며칠 전 고향에서 부모님이 쌀을 보내주셨습니다. 20킬로 자루에 담긴 쌀 세 자루, 고구마, 무, 한 자루씩, 저에게 뿐 아니라 손자에게 까지 보내셨습니다. 제가 쌀자루를 두 손에 들었는 데 묵직했습니다. “어, 무겁네” 했는 데 정말 무거운 것은 쌀이 아니라 부모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부모님이 그것을 키우시느라 한 해동안 얼마나 수고했겠습니까? 자식들에게 보내려고 힘든 줄도 모르고 농사했습니다. 단순한 쌀이 아닙니다. 하도 고마워 가슴으로 안았습니다. 복음 가수 홍순관이 “쌀 한 톨의 무게”라는 제목으로 노래한 것이 떠올랐습니다.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빛도 그 안에 스몄네. 농부의 새벽도 그 안에 숨었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었네. 버려진 쌀 한 톨 우주의 무게를 쌀 한 톨의 무게를 재어본다”. 그렇습니다. 정말 그냥 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중에 가벼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속에 우주가 들어 있습니다. 쌀 한 톨의 무게가 곧 우주의 무게입니다. 우리가 받은 월급, 보수, 건강, 가정, 자녀, 믿음, 모든 것이 다 무겁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한 해동안 여러분이 기도한대로 다 받지는 못했지만 여러분에게 필요한 만큼은 받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공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몸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뱃새다에서 준 것은 육신의 양식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것도 주셨습니다. 요6:48-51,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생명의 양식입니다. 육신의 양식만이 아니라 영혼의 양식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참 재미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 장 마다 사건이 먼저 나옵니다. 그 뒤에 해석이 따라 옵니다. 예를 들면 3장에서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께 나옵니다. 그리고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이 사건입니다. 이 주제로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밤새 이야기 하시다가 요3:16절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누구든지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 거듭나는 것은 예수님 믿고 영생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3장입니다. 요4장에는 수가성 여인이 나옵니다. 남편 5명을 바꾸며 목마른 인생을 삽니다. 그날도 사마리아 우물곁에 물 마시러 왔습니다. 이것이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14절에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은 자신의 생수를 여인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이 해석입니다. 목마른 인생에 대한 예수님의 해답입니다. 9장에는 장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실로암에 가서 씻었더니 눈을 떳습니다. 그 다음 해석이 나옵니다. “내가 세상에 있을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10장에는 목자와 양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해석은 11절입니다. “내가 곧 선한 목자다”. 11장에는 나사로가 죽습니다. 죽음의 문제가 사건으로 등장합니다. 25절에서 예수님의 해석이 나옵니다.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 요한복음은 전체적으로 이런 구조입니다. 각 장마다 사건이 나오고 그 사건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 나옵니다.
그런데 6장의 사건은 오병이어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백성들에게 필요한대로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뒷 부분으로 가면 예수님의 해석이 나옵니다. 51절입니다. 요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먹이려고 했던 것은 다만 육신의 양식이 아니었습니다. 더 중요한 양식이 있었습니다. 생명의 양식입니다.
놀랍게도 이 생명의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몸이었습니다. 56-57절입니다. 요6:56-57,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사람들은 배고파서 먹는 양식만 먹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 영혼의 양식, 생명의 양식입니다. 49절에서 57절까지 “먹어라, 먹으며, 먹을지니”, “먹으라”는 말이 무려 열 번 이상이나 나옵니다. 생명의 양식은 먹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은 먹고 예수님의 피는 마셔야 삽니다. 광야같은 세상에 정말 필요한 것은 육신의 생명만이 아닙니다. 58절, 요6: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육신의 양식만 먹다가 죽었습니다. 그때는 그것밖에는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주실 생명의 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먹어야 삽니다. 그것이 요6장입니다.
이 예수님의 생명이 예배로 나타나면 성찬이 됩니다. 성찬은 2천년 교회를 하나로 묶었던 거의 유일한 연합의 끈이었습니다. 지역에 따라, 교리, 신학, 교단에 따라 교회는 다양하지만 어떤 교회에서도 빼놓지 않고 하는 한 가지가 성찬입니다. 물론 성찬에 대한 해석은 다양합니다. 카톨릭은 화체설을 주장합니다. “우리가 떡을 먹고 잔을 마실 때 그 떡은 실제 예수님의 몸이 되고 그 잔은 실제 예수님의 피가 된다”고 말합니다. 장로교는 기념설을 주장합니다. “이것을 기념하라”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억하며 시간을 뛰어넘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루터교는 공재설을 주장합니다. 우리가 주의 떡과 잔을 먹고 마실 때 성령이 거기에 임재하여 예수님과 영적으로 하나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찬에 대한 해석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이 틀리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각각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지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 몇 가지 공통된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가 공동체가 되는 은혜를 받습니다. 성찬식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준비하는 사람, 떡 나누는 사람, 잔 나누는 사람, 참여하는 사람, 모두가 함께 해야 이루어집니다. 기도는 혼자 할 수 있습니다. 금식도 혼자 할 수 있습니다. 순례도 혼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찬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성찬은 참여자에 제한도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 남자, 여자, 아이와 노인, 지적 장애인과 우울증을 앓는 사람, 행복한 사람과 슬픈 사람, 30년을 기도원에서 기도한 사람, 감옥에서 금방 나온 사람, 누구나 다 참여할 수 있습니다. 누가 참여했든지 초청하신 분은 한 분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장로교인, 성공회, 루터교인, 순복음, 동방정교회, 아르메니안교회, 누구나 예수믿으면 참여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 제일 어려웠던 것은 거기 개신교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른 교회들을 다녔습니다. 그리스 정교회, 콥틱교회, 아르메미안교회, 러시아 정교회, 예배양식도 다르고 순서도 다릅니다. 그런데 한가지만 같습니다. 성찬입니다. 성찬은 말도 필요없습니다. 줄에 서 있기만 하면 누구나 성찬을 받습니다. 어디서 왔느냐 무슨 교파에 속했느냐 묻지를 않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았습니다. “아, 우리는 하나다. 서로의 전통이 달라도 우리는 예수님안에서 하나다. 예수님안에서 우리의 피부, 교리, 신학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 우리는 하나다”. 성찬은 전 세계 그리스도인을 하나로 묶습니다.
성찬은 우리를 은혜에 참여하게 합니다. 성찬에 참여할 때 우리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우선 성찬에 참여할 때 우리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다른 분들이 이미 성찬을 준비했고 목회자가 집례합니다. 우리는 나와서 손만 펴면 됩니다. 한번은 제가 미국 교회에서 성찬식에 참여했습니다. 앞으로 나가 떡을 받는 데 제가 손을 펴자 떡이 제 손에 놓여졌습니다. 그 떡을 보자 눈물이 확 났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데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구나. 내가 받은 모든 것이 은혜구나. 나는 손만 벌리고 살았구나”. 그래서 앤 라모트라는 사람이 은혜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은혜의 신비를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안다. 은혜는 우리가 있는 자리로 찾아와 절대로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찬의 은혜에 더 들어가면 거기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만납니다. 성찬에 참여하면 2천전에 죽은 예수님이 갑자기 가까워 집니다. 그 사건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사건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몸으로 느껴집니다. 영적으로 기갈한 우리를 초청하여 잔치를 배설하고 생명의 양식을 먹이시는 주님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잠9:5-6절대로입니다.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성찬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합니다.
성찬은 우리를 감사하게 합니다. 성찬은 우리가 이 땅에서 몸을 지닌 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성찬은 몸으로 참여합니다. 요즘 T.V로 예배드리는 사람이 있지만 성찬은 T.V로는 안됩니다. 몸으로 먹고 몸으로 마셔야 합니다. 발로 걸어 손으로 받고 몸으로 먹고 마십니다. 성찬은 현재에 받는 것입니다. 성찬의 시간은 현재입니다. 내가 몸으로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에 성찬을 받는 것입니다. 성찬은 내가 사는 것이 다만 육신의 양식만이 아니라 하늘의 양식으로 살아야 할 것을 깨닫습니다. 성찬은 내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것이 아닌 다른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성찬은 우리가 사는 나그네 삶에서 흘끗 영원의 관문에 들어서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이렇게 성찬을 먹고 마시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영원히 먹고 마실 것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성찬은 과거에 대한 은혜요, 현재에 대한 감사요, 미래에 대한 희망입니다.
우리도 우리 몸을 세상에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찬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찬을 통해 예수님의 떡을 먹는다면 이제는 우리가 떡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갈2:20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의 밥이 되었다면 이제 우리가 세상의 밥이 되고 예수님이 우리의 생수가 되었다면 이제 우리가 세상의 생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인 김지하가 “밥”을 썻습니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그렇습니다. 밥은 함께 먹어야 맛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성찬때 예수님의 떡을 먹는 데만 만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자신이 또 하나의 밥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 최고의 진리는 이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고전13:8절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사랑이 떨어지지 않다니, 무슨 말일까?” 영어성경에 이 말을 이렇게 풀었습니다. “Love never fails”“사랑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성공합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을 찾아 해매는 것이 아니라, 창조해 내신다.”
이런 눈으로 세상을 보면 어떻습니까? 소수의 부자와 다수의 가난한 자로 되어 있습니다. 어떤 통계를 보니까 그래요. 세계는 매일 밤 8억 명 정도가 굶주린 채 잠자리에 듭니다. 그 중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이입니다. 다섯 살 이하 어린이 2억명은 식량 부족으로 체중 미달입니다. 매일 2만 4천 명 정도의 사람이 굶주리거 질병으로 죽어갑니다. 그것을 시간적으로 계산하며 매 7초마다 어린이 한 명이 굶어죽거나 병으로 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인류가 먹기에 충분한 식량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식량이 몇 몇 부자 나라에 편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할 일은 나누는 일입니다. 교회가 나누는 것은 구제때문이 아니라 내가 밥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밥으로 먹었다면 이제 우리도 밥이 되어야 합니다.
의사 안수현은 예수님과 같은 서른세 살의 나이로 하나님께 갔습니다. 그의 일화를 모은 책 《그 청년 바보 의사》 (사진) 를 보면 그가 얼마나 자기를 희생하며 살았는지 보여 줍니다. 그는 환자가 아파서 피가 없다고 하면 자기 피를 주었습니다. 서점에 가서 책을 사면 환자들을 생각하며 환자들의 이름을 써서 책을 샀습니다. 환자가 아프면 밤새도록 간호하고 환자가 죽어서 영안실로 가면 환자를 붙들고 울었습니다. 그는 크리스쳔 의사가 어떻게 환자의 밥이 되는 의사가 될 수 있는가를 될 가르칩니다. 유한양행의 유일한 회장(사진)은 일생 신문에 과장광고 한번 안했답니다. 어떤 간부가 마약성 약품을 팔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말하자 그 자리에서 간부를 해고했습니다. 박대통령이 줄기차게 정치자금을 요구했지만 끝내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세무조사를 당했는 데 몇 달을 뒤져도 먼지 하나 안 나왔습니다. 그는 당시 자장면 한 그릇에 60원일 때 407억원을 사회에 기부했습니다. 죽으면서 유언을 남겼는 데 딸에게는 땅 5천평을 물려주면서 유한동산으로 꾸미라고 하고 아들은 대학에 보냈으니 네가 자립하라고 하고 다만 손자 학비로 만 달만 남겼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아들은 아버지에게 받은 만달러중 절반만 쓰고 나머지는 사회에 환원하였고 딸도 죽으면서 자기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자식들이었습니다. 유일한 회장은 크리스쳔 기업가가 어떻게 세상의 밥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의사가 그렇게 살고 기업가가 그렇게 산다면 우리는 왜 못 살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 살았다면 우리도 누군가에게 살이 되고 피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사는 학생에게, 상관은 부하에게, 부모는 자녀에게, 목회자는 신자에게, 장로님은 교인에게 밥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마지막에 날에 내가 그를 살리리니”. 예수님을 먹고 살았으니 우리도 예수님처럼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를 위해 성탄절에 예수님이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배고픈 세상에 밥을 주고 스스로 밥이 되신 주님, 이제 우리가 밥이 되겠습니다. 이제 제가 세상의 밥입니다“. 이것이 성탄절을 맞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이것이 성찬앞에 선 우리의 결단입니다.
요6:48-55 2014.12.21(일)
생명의 양식을 주옵소서
“과거의 은혜는 적금과 같고 현재의 은혜는 현찰과 같고 미래의 은혜는 보험과 같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양식을 주셨습니다.
요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사람의 불행은 두 가지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아무 것도 받지 못하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받는 것이다”.
출16:4,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요6:11,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홍순관,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빛도 그 안에 스몄네. 농부의 새벽도 그 안에 숨었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었네. 버려진 쌀 한 톨 우주의 무게를 쌀 한 톨의 무게를 재어본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몸을 주셨습니다
요6:48-51,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요6:56-57,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6: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성찬을 통해 받는 은혜
(1) 공동체
(2) 은혜
(3) 감사
“성찬은 과거에 받은 은혜요, 현재에 누리는 감사요, 미래에 거는 희망이다”.
우리도 우리 몸을 세상에 주어야 합니다
갈2:20,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김지하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고전13: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Love never fails).
칼 바르트,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을 찾아 해매는 것이 아니라, 창조해 내신다.”
의사 안수현(사진)
유일한 회장(사진)
요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마지막에 날에 내가 그를 살리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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