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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8:1-10 희망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2014.12.28(일)

8:1-10 2014.12.28()

 

희망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12월 셋째 주일, 한 해도 한 주를 남기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나간 한 해동안 어떻게 사셨습니까? 어느 병원에 기억력이 점점 사라져가는 환자가 의사와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시력과 기억력에 모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둘 중의 하나는 살릴 수 있습니다. 시력을 살리면 기억력을 잃고 기억력을 살리면 시력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이제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시력을 택하시겠습니까? 기억력을 택하시겠습니까?” 남자가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둘 중 하나를 갖는다면 저는 시력을 택하고 싶습니다그리고 말했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기 보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환자는 과거를 기억하기 보다는 미래를 바라보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과거는 우리에게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척 스윈돌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는 네 가지가 있다. 내뱉은 말, 쏜 화살, 지나간 시간, 무시해 버린 기회다”.

 

그러나 과거는 지나갔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있습니다. 은혜의 기억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하여 광야로 나오게 했습니다. 거기서 40, 이스라엘은 고난의 광야를 돌아 이제 가나안땅 가까이 왔습니다. 저 멀리 요단강 건너편에 종려의 성읍 여리고가 보입니다. 그 지점에서 모세가 설교를 시작합니다. 주제는 회고와 전망입니다. “돌아보고 바라보고”. 지나간 40년을 돌아보고, 앞으로 올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오늘 우리도 같은 싯점에 서 있습니다. 지나간 1년을 돌아보고,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1년을 바라보고, 이 뜻깊은 시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기억했던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다 이루지 못한 것은 잊으십시오.

지나간 1년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나 혼자서는 절대 여기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많았지만 가장 큰 은혜는 하나님이 인도하신 은혜였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남자만 60만이었으니 남녀노소 합쳐서 약 300만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무슨 수로 혼자 가겠습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하루 한끼씩만 먹었어도 얼마나 많은 음식이 필요했겠습니까? 누가 그 많은 음식을 공급했습니까? 아마 비행기로 음식을 날라야 했다면 매일 수 백대의 비행기가 동원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나마 그 길은 이스라엘 백성이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이었습니다. 누가 인도했겠습니까?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이 앞서 행하셨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이스라엘 백성보다 앞서 건너셨습니다. 13:21, “여호아께서 그들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하나님은 광야도 앞서 걸으셨습니다. 23:20,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여러분은 지난 1년 하나님이 여러분보다 앞서 행하셨다고 믿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인도하셨다고 여러분이 여러분의 뜻을 다 이루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과거에 대해 갖는 생각이 있습니다. 먼저 확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지나치게 획대해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동차 백미러를 보면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당신이 보는 물체는 실제보다 크게 보입니다.” 백미러에 보이는 모습은 실제보다 큽니다. 이것이 우리가 과거를 보는 눈입니다. 또 하나는 미화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지나치게 아름답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 무지개빛 언덕에서 친구들과 뛰어놀았다고 생각합니다. 젊을 때는 장미꽃 만발한 정원에서 데이트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거는 우리에게 현재와 똑같은 현실이었습니다. 지나놓고 보니 아름다운 것이지 그때가 더 아름다웠던 것은 아닙니다. 과거는 언제나 백미러처럼 크게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것이 후회입니다. “, 왜 그때 내가 그랬지?”. 후회해봐야 소용없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후회합니다. 어떤 잡지에서 보니까 어떤 여인이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갔는 데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암으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염려하면서 40년을 살았답니다. 마침내 70세에 죽었는 데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졌다고 합니다. “여기 암에 죽을지도 모른다며 40년을 염려하며 산 여인이 있다”. 그리고 그 밑에 한 마디가 더 쓰여져 있었습니다. “염려는 내일의 슬픔을 막아주지 못하고 다만 오늘의 행복을 빼앗아 갈 뿐이다”.

 

그래서 좋은 것이 망각입니다. 바울의 말입니다. 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사람이 받은 최고의 은혜는 망각의 은혜입니다. 과거를 잊고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축복입니다. 그리고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13:12이 중요합니다.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곧 생명 나무니라”. 우리의 소망은 항상 우리의 희망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희망을 가질 뿐 그 희망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한 해동안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나요? 얼마나 괴로우셨습니까? 가정이 파경에 이르고 물질적으로 정말 어려웠나요?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갑자기 몸이 아파 병원에서 죽음을 생각하셨나요? 얼마나 두려우셨습니까? 오랫동안 기도하던 제목, 아직도 응답이 못 받았나요? 얼마나 답답하십니까?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이유없이 비난받았나요?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인도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것이 여러분이 광야에 살고 있는 증거라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우리는 아직 광야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뜻하는 대로 다 이루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마음 상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뜻이면 언젠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받은 고난에 감사하십시오.

지나간 1년을 돌아보며 그래도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받은 고난 때문입니다. 5절입니다. 8: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을 마음에 생각하고”, 6절입니다. 8:6, “네 하나님 여호아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여기에 징계란 말이 나옵니다. 징계고난, 훈련이란 뜻입니다. 광야를 걷는 사람은 반드시 광야의 훈련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광야에서 우리는 크게 다섯 가지 훈련을 받습니다. 첫째는 먹고 마시는 훈련입니다. 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훈련인지. 애굽에서 배불리 먹던 채소와 고기는 먹지 못하고 오직 만나만 먹고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먹고 사는 문제로 힘들었습니다. 취업문제, 직장문제, 사업문제, 먹고 사는 문제는 우리가 광야같은 세상에서 겪는 가장 첫 번째 문제입니다. 두 번째 훈련은 단조로운 일상의 훈련입니다. 광야의 풍경은 변하지 않습니다. 매일 걸어도 그 모습이 그 모습입니다. 사람이 견디기 힘든 것중의 하나가 일상의 단조로움입니다. 오늘이 어제같고 어제가 오늘같은 삶은 얼마나 견디기 힘듭니까? 우리도 지난 한 해 그렇게 걸어왔습니다. 세 번째가 인간관계의 갈등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40년을 같은 길을 걸었으니 얼마나 부딪치며 살았겠습니까? 상처는 늘 가까운 사람끼리 주고 받습니다. 고슴도치와 비슷합니다. 고슴도치는 가깝게 몸을 지댈수록 서로 찌르지 않습니까?

 

네 번째 광야 훈련은 대적들로부터 오는 훈련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은 가는 곳마다 공격을 받았습니다. 르비딤에서는 아말렉의 공격을 받고 요르단에서는 에돔족속의 공격을 습니다. 모압에서는 발람의 저주까지 받았습니다. 그 대적자들로 인해 여러번 길이 막혔습니다. 21:4입니다.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길로 좇아 에돔땅을 둘러 행하려 하다가 길로 인해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여러분도 한 해동안 길로 인해 마음이 상했습니까? 가려는 목적지는 뻔히 보이는 데 대적자, 방해자 때문에 길이 막히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대학의 길을 막고 사업의 길을 막고 건강의 길을 막지는 않았습니까? 마지막 훈련이 낙심의 훈련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로 힘들고 하루 하루가 단조롭고 가까운 사람끼리 부딪치고 대적자들이 길을 막으면 영혼은 지치고 소망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생기는 것이 낙심입니다. 그래서 다시 잠13:12절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 우리에게 가장 큰 위기는 희망이 사라지는 위기입니다.

 

그때 우리가 생각할 것은 누가 우리에게 이런 훈련을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8:2,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이 사십년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절을 보십시오.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네 하나님 여호아입니다. 무슨 훈련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 라고도 묻지 마십시오. 해답이 없습니다. 누구냐고 물으셔야 합니다. 누가 이 고난과 훈련을 주셨는가?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같은 고난도 누가 주었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마귀가 주었다면 대적해야 합니다. 사람이 주었다면 이겨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셨다면 감사해야 합니다. 지나간 한 해동안 받은 고난의 종류를 기억하지 마십시오. 분명 위에서 말한 다섯 가지중 하나입니다. 무엇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아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고난받을 때 고난을 주시는 분을 바라보지 않고 고난자체를 바라보면 백발백중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고난이 올 때 우리가 바라볼 두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입니다. 에레미아가 그렇게 했습니다. 3:21-24,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여호아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고난 자체를 바라보면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면 힘을 얻습니다. 모든 능력의 비결이 여호아의 자비와 긍휼에 있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가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아침마다 새롭습니다. 고난이 올 때 바라볼 또 하나의 방향은 입니다. 히브리서가 아주 탁월하게 말했습니다. 6:18,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앞에 있는 소망”. 절망은 뒤에 있고 소망은 앞에 있습니다. 뒤 돌아보면 낙심이고 앞을 바라보면 희망입니다.

 

런던의 어떤 남자가 그랬답니다. 사업도 망하고 인생살이가 힘들어 자살해야겠다고 결심하고 호수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호수로 가는 도중에 어느 미술가게앞을 지나게 되었는 데 그 가게앞에는 그림 한 장이 걸려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한 여인이 눈가리개로 눈을 가리고 세상 꼭대기에 앉아 있고 하프가 들고 있는데 줄이 하나밖에 없는 하프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한 줄 밖에 없는 하프를 바라보고 열심히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제목을 보니 희망이었습니다. 그 그림을 물끄럼히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꿈에서 깨어난 듯 말했습니다. “그래, 나에게도 마지막 줄이 있어”. 그가 뛰어가면서 생각한 것은 아들이었습니다. 어린 아들이 그에게 마지막 남은 한 줄 하프줄임을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향해 뛰어갔습니다. 희망은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뒤를 바라보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소망은 앞에 있습니다.

 

언제나 상황과 문제는 다릅니다. 상황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안에서 옵니다. 상황은 문제가 아니고 다만 상황입니다. 상황은 밖에 있고 해답은 안에 있습니다. 많은 부부들이 이렇게 다툽니다. “내 아내가 이래서 문제예요. 내 남편이 이러니까 나도 그래요”. 그러나 아내에게 남편은 문제가 아니라 상황입니다. 남편은 상황이고 내가 문제입니다. 문제는 상황에 대한 나의 태도입니다. 대학입시는 상황이고 그에 대한 나의 태도는 문제입니다. 사업부진은 상황이고 문제는 사업 때문에 낙심하는 나입니다. 상황은 밖에 있고 문제는 내 안에 있습니다. 문제는 나만 힘을 내면 됩니다. 나만 달라지면 됩니다. 문제는 상황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내 태도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바꾸십니다. 하나님이 내 안의 문제를 고치시면 상황은 순식간에 고쳐집니다.

 

어떤 교우가 교회를 안 나옵니다. 이 분은 아주 믿음이 좋았던 분입니다. 제가 위로하면서 전화했습니다. "집사님, 힘드시죠? 그래도 교회는 나오셔야죠“. 했더니 말합니다. ”목사님, 문제가 너무 심각해서 잠시 교회를 쉬겠습니다“. 저는 그를 이해했지만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제가 안타까운 것은 그에게 찾아온 고난을 상황으로 보지 않고 문제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본인이 생각한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 상황이고 문제는 본인에게 있었습니다. 본인에게 있는 문제만 사라지면 상항도 사라질텐데 상황앞에 떨고 있었습니다. 고난의 상황이 올 때 상황을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셔야 합니다. 그래서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어떤 고난의 상황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상황을 다루지 않고 상황을 보는 나를 다룹니다. 그러면 내가 강하고 담대해 집니다. 그러면 내가 그 상황을 이겨냅니다. 하나님은 상황을 직접 치료하지 않고 고쳐진 나를 통해 치료합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고난당했습니까?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으십시오. 뭐 안되는 일이 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교회 안 나올 것이 아니라 그러기 때문에 더 잘 나오십시오. 지나간 한 해 우리가 받은 고난 때문에 감사합시다.

하나님

상황(외부) 문제()

아직도 희망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면서 기억하는 마지막이 있습니다. 희망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7절 이하입니다. 8:7-20,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옥토를 내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제가 정말 좋아하는 구절은 16절입니다. 8: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이 말씀의 키는 마침내입니다. 마침내가 중요합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에서 당한 모든 고난은 마지막에 축복으로 마쳤다는 것입니다. 어떤 고난도 고난 그 자체를 위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희망입니다. 우리에게는 오늘이 있기 때문에 내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일이 있기 때문에 오늘이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야 하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있기 때문에 삽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십시오. 하나님의 관심은 온통 미래에 있습니다.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희망은 우리는 살리고 죽이는 힘입니다. 사람을 끝까지 버티게 하는 힘은 희망입니다. 히브리어로 희망티크바라고 합니다. 이 말은 노끈이란 뜻입니다. 이 말은 끈을 꼬다콰바라는 동사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 말하고도 비슷합니다. 끈은 많이 꼬아야 단단합니다. 여러 개의 실이 꼬아져서 결합된 것이 노끈입니다. 희망은 노끈을 붙잡는 것입니다.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할 때 앙망하다, 바라보다티크바입니다. 여호아를 앙망한다는 말은 여호아를 노끈처럼 붙잡는 것입니다. 희망은 붙잡는 것입니다. 희망이 과거를 잊어버리는 데서 시작되지만 잊어버린다고 희망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희망은 좀 더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티크바”, 붙잡는 것입니다.

 

성경의 사람들에게도 희망은 항상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붙잡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4:8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과 축복권을 약속했지만 그것은 자동적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땅 한 평이 없었고 100세 될 때까지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약속을 주어졌지만 약속은 시간이 지난다고 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신 그는 그것을 붙잡았습니다. 4: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바랄 수 있는 환경중에 바라는 것은 누가 못하겠습니까? “티크바”. 그는 환경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약속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모세를 아십니까?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살았지만 거기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11:24-26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여기에 모세가 발견한 희망의 삼 단계가 있습니다. “거절하고”, 더 좋아하고“, ”바라봄이라“. 그는 먼저 미래를 위해 세계 최강국의 왕자 자리를 버렸습니다. 버릴 뿐 아니라 더 좋아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티크바“, 그는 붙잡았습니다. 안정된 애굽의 왕자 자리를 놓고 불안정한 하나님 미래를 붙잡았습니다.

 

하박국이 그랬습니다. 그가 살던 시대에 그가 붙잡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딱 하나를 붙잡았습니다. 하나님입니다. 3:17-19,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도 없을지라도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아로 말미암아 즐거워 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다같이 나는 여호아로 말미암아”. 욥도 그랬습니다. 끔찍한 고난속에서도 욥은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욥35:10절이 중요합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자가 없구나“. 다같이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 우리는 낮에 노래하기를 좋아하지만 하나님은 밤에 노래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사울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42:8, “낮에는 여호아께서 그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이다”.

어떤 젊은 화가가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이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잘 그린 그림은 무엇입니까?” 그가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음에 그릴 작품이요”. 그는 곧 훌륭한 화가가 되었습니다. 과거의 그림에 붙잡히지 않고 미래의 그림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목회자 세미나때 어떤 강사가 물었습니다. “지금이 여러분의 교회의 전성기라고 믿는 목회자는 손들어 보세요”. 많은 목회자들이 손들었습니다. 그때 강사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교회는 이제 망할 일만 남았습니다”. 사람들이 당황해 하고 있을 때 강사가 말했습니다. “지금이 최고 전성기라면 이제는 쇠퇴할 일만 남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교회가 10년후, 20년 후에 전성기가 온다고 믿어야 더 발전하지 않겠습니까?”. 희망은 붙잡는 것입니다.

 

희망은 티크바”, 붙잡을 때 옵니다. 어떤 사람이 희망을 가져오는 9가지 행동규칙을 말했습니다. 첫째. 일을 해보기도 전에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둘째. 도전해 보기 전에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셋째 기도하기 전에 미리 결정하지 않는다. 넷째. 말을 들어보기 전에 화내지 않는다. 다섯째 같은 일을 당해보기 전에 남을 판단하지 않는다. 여섯째 실패해보기 전에 성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운명은 무엇을 붙잡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안 믿는 사람은 상황을 붙잡고 사람을 붙잡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붙잡고 그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희망은 반드시를 붙잡는 믿음입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이 반드시를 붙잡았습니다. 어느날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했습니다. 내년 이 맘때 반드시 네게로 오리라”. 사라는 이 약속을 믿고 이삭을 낳았습니다. 모세는 반드시를 믿고 광야를 건넜습니다. 11:31,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얻으려 하나니 반드시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할찌라”.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모세를 가나안의 희망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아들을 주시겠다는 반드시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1:45,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그 결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했습니다. 새해를 앞두고 우리가 붙들 반드시가 있습니다. 6:14,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I will surely bless)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아멘. 한 해가 지났지만 희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십니까? 천지는 없어져도 하나님의 약속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십니까? 아직 희망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달력에서 2014년은 사라져도 하나님의 시간에 희망은 계속됩니다.

 

 

 

 

 

 

 

 

 

 

 

 

 

 

 

 

 

 

 

 

 

 

 

 

 

 

 

 

8:1-10 2014.12.28()

 

희망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기 보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 이루지 못한 것은 잊으십시오.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21, “여호아께서 그들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23:20,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과거에 대하여 우리가 갖는 생각

(1) 확대

(2) 미화

(3) 후회

(4) 망각

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5) 기다림

13:12,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곧 생명 나무니라”.

 

받은 고난에 감사하십시오.

8: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을 마음에 생각하고

8:6, “네 하나님 여호아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광야에서 우리가 겪는 훈련

(1) 먹고 마시는 훈련

(2) 단조로운 일상의 훈련

(3) 인간관계의 갈등

(4) 대적들로부터 오는 훈련

(5) 낙심의 훈련

 

8:2,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이 사십년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고난이 올 때 무슨 고난이냐 왜 고난이 오느냐 묻지 마십시오. 누가 고난을 주느냐 물으십시오.

 

3:21-24,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6:18,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상황과 문제는 다릅니다.

 

하나님

상황(외부) 문제()

 

 

아직도 희망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8:7-20,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옥토를 내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8: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4: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3:17-19,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도 없을지라도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아로 말미암아 즐거워 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35:10,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하며 밤에 노래를 주시는 자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는 자가 없구나“.

42:8, “낮에는 여호아께서 그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이다”.

 

희망을 가져오는 몇 가지 행동규칙

(1) 일을 해보기도 전에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2) 도전해 보기 전에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3) 기도하기 전에 미리 결정하지 않는다.

(4) 말을 들어보기 전에 화내지 않는다.

(5) 같은 일을 당해보기 전에 남을 판단하지 않는다.

(6) 실패해보기 전에 성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11:31,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얻으려 하나니 반드시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할찌라”.

1:45,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6:14,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I will surely bless)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