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5) 히4:14-16 2015.2.8(일)
기도하면 희망이 시작됩니다
입춘도 지나 봄이 가까웠습니다. 새 봄은 여러분에게 희망의 봄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느 교회 청소년들이 수양회때 모여 넌센스 퀴즈대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자가 물었습니다. “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벌은?” 왕벌? 개미벌? 답은 재벌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비싼 금은? “황금? 정금? 답은 지금이었습니다. 거리에서 막 청소를 끝낸 여자들을 뭐라고 부르지? 답은 쓸데 없는 여자였습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마지막 질문이 가장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정답이 딱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이탈리아의 유명 시인 타소가 한번은 영국의 왕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둘은 문학과 인생 전반에 걸쳐 유쾌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다 왕이 불쑥 타소에게 물었습니다. “선생은 세상에서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시오?” 믿음이 좋은 타소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마 하나님이 가장 행복하시지요”. 왕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다음으로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왕은 속으로 아마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타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다음으로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을 성경은 거룩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살전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거룩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뜻은 성공이지만 하나님의 뜻은 거룩입니다. 거룩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가까워지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가까워지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어느 시어머니가 아직 아이를 낳지 못한 며느리를 데리고 교회에 갔습니다. “얘야, 목사님이 기도하실 때 무조건 ‘아멘, 아멘’해야 된다. 그러면 네 소원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데리고 교회에 갔는 데 목사님이 세게 기도하는 데도 믿음이 없는 며느리가 도무지 “아멘”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급해진 시어머니가 며느리 대신 “아멘, 아멘”하고 두 번 외쳤습니다. 그 다음 해 시어머니가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우리의 소원을 이루는 최고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새 봄을 앞두고 기도하기 원하십니까? 우리는 왜 기도해야 어떻게 기도해야 하고 기도하면 어떻게 됩니까? 오늘 말씀 히브리서 4장이 그 해답을 줍니다. 히브리서는 아주 독특한 책입니다. 아직까지 정확한 저자를 모릅니다. 많은 사람이 바울이 쓰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학자들은 거의 바울이 아닐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용과 문체에 있어서 바울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의 가장 큰 특징은 예수님을 구약과 비교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핵심은 성전입니다. 성전에서 제사장이 동물을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구약의 성전제도와 비교하여 훨씬 뛰어난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구약의 대제사장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실까요? 히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구약의 대제사장이 누구입니까? 성전에서 백성들을 위해 제사를 집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나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론의 직계 후손만 이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백성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직분상 대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구약시대의 대제사장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선 구약의 대제사장은 인간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죄가 없습니다. 벧전1:19 말씀입니다.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점은 타고날 때부터 가지고 나오고 흠은 자라면서 생긴 상처입니다. 점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이 태어날 때부터 죄가 없다는 것이고 흠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도 죄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태어나기 전이나 후나 예수님은 완전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출생 전후, 예수님의 안과 밖이 동일합니다.
무엇보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매일 동물을 잡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단 한번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대제사장은 동물의 피로 백성의 죄를 씻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백성의 죄를 사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이것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백성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대신 드렸고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를 직접들으시는 분입니다. 죄인인 대제사장이 중개하여 드린 기도도 하나님이 받으셨는 데 흠과 점이 없는 완전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기도를 직접 듣는다면 우리 기도는 얼마나 잘 응답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14절, “큰 대제사장”입니다. 오늘 말씀은 기도에 대하여 세 가지를 가르칩니다. 첫째 우리는 왜 기도하나? 둘째 어떻게 기도하나? 셋째 기도의 결과가 무엇인가?
우리는 왜 기도합니까?
기도에 있어서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왜 기도하는가 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어느 상가집에서 조문하느라 밤을 새고 나온 사람이 아침에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어제 밤에 누가 죽었죠?” 누가 죽은지도 모르고 밤을 새운 조문객처럼 우리는 열심히는 기도하는 데 왜 기도하는지는 모를 때가 많습니디. 그래서 기도할 때 우리가 물어야 할 첫 번째 질문은 “우리는 왜 기도하나?”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왜 기도합니까? 15절을 보겠습니다.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기에 ”연약함“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가 핵심입니다.
“연약하다”는 말은 본래 구약의 제사용어입니다. 옛날 성전에서 제사하러 들어갈 때는 사람들은 양이나 소등 온전한 제물을 가지고 들어 가야 했습니다. 흠이 있거나 점이 있는 동물을 가지고 들어가면 안됩니다. 예를 들면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양이나 귀가 하나 밖에 없는 소, 눈이 먼 비둘기는 제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완전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온전한 제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이라고 해서 아무나 제사를 집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레21:16절 이하에 보면 소경, 코가 불완전한 자, 발부러진 자, 손부러진 자, 곱사, 난장이, 괴혈병 있는 사람은 제사장 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결격 사유를 가진 제물이나 제사장을 성경은 “연약하다, 연약한 것”이라고 불렀습니다.
헬라어로 이 말은 “아스테니아”입니다. “아”는 접두사입니다. “없다”라는 뜻입니다. “스테노스”는 “힘, 강하다”라는 뜻입니다. “스태미나”가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스테니아”는 “힘이 없는 것, 강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말이 왜 중요합니까? 인간의 본성을 잘 표현한 말입니다. 우리는 없는 것이 참 많습니다. 힘이 없습니다. 강하지 못합니다. 여러 가지가 없지만 우선 몸이 약합니다. 며칠 전에도 사고가 났습니다. 도로에서 술취한 사람이 몬 차가 앞에 있는 차를 들이 받았습니다. 이 차가 전봇대를 들이받고 불이 났습니다. 네 사람이 죽었습니다. 정말 청천의 날벼락입니다. 아무 죄도 없이 졸지에 죽었습니다. “아스테니아”,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인중 교회나 집에서 한 순간에 넘어진 분이 있습니다. 잠시 넘어졌는 데 어깨가 다치고 발이 다쳤습니다. 몇 주째 교회를 못 나옵니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도덕적인 연약함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돈에 약합니다. 항상 돈 때문에 시험들고 유혹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성에 약합니다. 이성문제는 그가 안고 있는 도덕적 약점입니다. 어떤 사람은 분노심이 약합니다. 사람만 보면 화가 납니다. 도무지 분노조절이 안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암모나이스라는 수도자는 자기 분노심을 억누르기 위해 수도원에서 14년간이나 울면서 기도했답니다. 어떤 사람은 감정적으로 약하고 어떤 사람은 정신적으로 약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왜 기도합니까? 약하기 때문입니다. “아스테니아”, not strong, not powerful, 강하지도 않고 힘도 없습니다. 인간은 기도 안하고 살만큼 강하거나 기도가 필요없을만큼 힘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약하고 감정적으로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합니다. 노르웨이 신학자 할레스비가 쓴 기도의 명저가 있습니다. 제목이 “기도”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왜 기도하는가를 묻습니다. 왜 기도합니까? 답은 “무기력”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가 비유를 들었습니다. 엄마는 언제 자식에게 가장 큰 모성애를 느끼는가? 자식이 약할 때입니다. 아파서 눈만 껌뻑 껌뻑하고 누어 있는 자식을 볼 때 어머니는 대신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철렁하게 내려앉게 하는 것은 “엄마, 살려줘” 하고 힘없이 부르짖는 자식의 소리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기도의 모델이 막9장의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자 귀신들린 아들을 안은 아버지가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 내 아들을 살려 주옵소서”. 그렇게 말하는 순간, 아들은 경련을 일으키며 금방 죽어갑니다. 도대체 이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는 “아스테니아”, 전적으로 무기력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포기하지 않고 내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주님.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할 수 있으면 내 아들을 살려 주옵소서”. 그때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막9: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 순간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24절, 마9:24,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최고의 기도는 할 수 없는 내가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최고의 믿음은 믿음없는 나를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나는 참 약하다” 생각합니까? 여러분은 기도하기에 딱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더 가지고 나가면 좋습니다. 다시 15절입니다.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기에 ”체휼“이란 말이 나옵니다.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이중부정은 긍정입니다.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라는 말은 체휼한다는 말입니다. 체휼은 긍휼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왜 기도합니까?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왜 기도합니까?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저는 교통사고로 병원에 몇 달 있었습니다. 그때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이 연약한 저를 불쌍히 여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5절을 묵상하면서 세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먼저 주님은 내가 연약함을 아신다. 둘째 주님은 세상에서 나와 같이 연약해지셨다. 셋째 주님은 십자가에서 연약함을 이기셨다. 주님이 내 연약함을 아신다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됩니까? 시139:1을 아십니까?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아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아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아신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살 때 나와 같이 약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됩니까? 내일이면 돌아가시는 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의 모습은 어떻했습니까? 마26:37-38, “예수께서 고민하고 슬퍼하사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얼마나 우리와 똑같은 모습입니까? 주님도 우리와 똑같이 약해보셨습니다. 그래서 약한 우리를 압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약함을 이기고 승리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골2:15,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십자가는 승리입니다. 연약한 인간으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로 승리하신 예수님, 이것이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어떻게 기도합니까?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두 번째는 어떻게 기도하는가입니다. 16절입니다. 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여기 “은혜의 보좌”라는 말이 나옵니다. “은혜의 보좌”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 계신 왕좌입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좌정하신 곳, 그곳이 ”은혜의 보좌“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가끔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는 어떤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제목이 있다는 것이요,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도할 제목이 없다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기도제목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제목이 없다고 하나님께 나가지 못합니까? 꼭 할 말이 있어야 명절에 부모에게 갑니까? 용건이 없으면 부모에게 안 갑니까? 기도는 은혜의 보좌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도제목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를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가진 문제해결보다 큽니다. 이것은 기도뿐 아니라 예배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언젠가 어느 교회 설교하러 갔더니 그날따라 순서가 많습니다. 부목사가 오더니 “목사님, 오늘 바쁘거든요. 그래서 시간을 꼭 맞춰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찬양 시간은 15분입니다. 그 다음에 4분 40초짜리 선교 보고 동영상을 보고, 솔리스트가 4분 10초 동안 찬양을 한 뒤에 2분 30초간 광고가 있습니다. 그 다음 장로님이 헌금 기도인데 1분이내로 하실 것입니다. 헌금은 6분하고 다음에 목사님을 소개하는 데 제가 1분간 목사님을 소개합니다. 그 뒤 목사님이 25분간 설교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제 소개는 빼고 설교시간을 늘릴 수 없습니까?” “죄송하지만 안 됩니다. 무조건 여기 쓰인 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면 설교를 마치고 합심 기도 시간을 좀 가져도 될까요?” “죄송합니다. 설교 후에는 성가대가 찬양하게 되어 있어서요.”
어떻습니까? 그날 예배는 잘 드렸겠습니까? 아주 깔끔하게 잘 드렸습니다. 설교는 정확하게 25분에 마쳤고 예배는 시간내에 마쳤습니다. 그러나 그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날 예배는 콘티대로 진행되어 부목사님은 흡족했겠지만 하나님은 흡족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예배에서 하나님이 할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제 시간에 끝났는가? 찬양대가 안틀리고 잘했는가가 예배의 생명이 아니라 그 시간에 성령이 임재하셨는가? 보좌에 계신 하나님이 기뻐하셨는가가 예배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그날 예배는 성공했으나 실패한 예배였습니다.
목회자의 유혹은 예배시간을 잘 지켜 교인들의 불평을 사지 않는 것입니다. 혹시 너무 길어 교인들이 투덜대며 교회문을 나설까 다음 주에 다른 교회로 가지 않을까 목회자는 염려합니다. 교인들은 짧고 핵심있는 설교와 군더더기없는 진행으로 1시간 이내에 맞쳐주는 예배가 좋은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축구가 연장전에 돌입했다고 관중석을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영화가 두 시간이 넘는다고 직원에게 따지는 관객이 있습니까? 예배시간이 길어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배의 생명은 시간을 잘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배가 조금 길다고 먼저 가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배시간네 설교자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앞에 있습니다. 성가대가 찬양이 끝났다고 아직 예배도 안 마쳤는 데도 먼저 자리를 뜨지 마십시오. 우리가 찬양할 때 사람앞에서 공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앞에서 예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은혜의 보좌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스라엘 회당에 가서 유대인들 기도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거의 2시간 이상 서서 예배합니다. 히브리어로 “아미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오셨는 데 내가 감히 앉아 있을 수 없어서 그 분앞에 선다는 것입니다.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은혜의 보좌에 계신 하나님앞에 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진 문제를 가지고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앞에 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서는 것은 왕앞에 서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좌에 앉으신 왕, 세상을 지으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왕앞에 우리가 서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 분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아간다”는 말의 문법적 형태는 현재형입니다. 헬라어의 현재형은 현재진행형을 포함합니다. 기도는 왕이신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한번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 나아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서는 “은혜의 보좌앞에 나아간다”는 말이 무려 7번이나 나타납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앞에 나가는 일이요 하나님이 하실 일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왕되신 주앞에 나 경배합니다. 주님만 찬양받기 합당하시니 큰 존귀와 영광 홀로 받으소서. 오 주앞에 나아갑니다”.
기도할 할 때마다 항상 점검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앞에 나가는가? 가장 나쁜 것은 기도에는 익숙한 데 그 속에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통성기도가 그렇습니다. “주여, 주여” 세 번 부르고 손을 들고 기도하는 통성기도는 한국교회 기도의 대표적 기도입니다. 그러나 그 형식에 익숙한 나머지 그 속에 하나님이 있는지 늘 살펴야 합니다. 기도의 본질은 왕이신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그 분과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두 가지로 은혜주십니다. 첫째 우리를 찾아오시고 둘째 우리안에 머무십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을 “임재”라고 하고 우리안에 머무시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하고 머무시게 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나에게 임하시옵소서. 주여, 내안에 머무시옵소서”. 아멘.
기도의 결과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물어야 할 것은 기도의 결과입니다. 그렇게 기도했다면 기도는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 줍니까? 다시 16절입니다. 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여기에 “때를 따라 돋는 은혜”라는 말이 나옵니다. 때를 따라 돕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다른 성경을 보았습니다. 공동번역에는 “필요한 때에 돕는다”, 새번역은 “제때에 돕는다”, NIV 영어 성경은 “in our time of need” (우리가 필요한 때에 돕는다)로 되어 있습니다. 기도의 결과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크게 세 가지로 도와주십니다. “반드시 도와 주십니다”. “필요한 때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도와주십니다”.
여러분,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왜 도와주십니까? 우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기도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필요할 때 도와주십신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도와주십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나가 그랬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이가 없었습니다. 남편도 그를 사랑하고 큰 부인인데도 아이가 없습니다. 동서는 아이가 있을 뿐 아니라 한나를 마음으로 괴롭힙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나가 기도하기로 결심합니다. 삼상1:9절입니다. 삼상1:9,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다같이 “일어나니”. 여기서 일어났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그동안 인간적인 고민만 했습니다. 속만 상했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아, 내가 속만 상하고 있으면 안되지 않은가? 기도해야지”하고 일어섭니다. 그리고 10절, 삼상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도움이 시작됩니다. 한나가 기도하기로 결심하고 일어서자 하나님의 도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마치는 순간 응답이 임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잡혀 살던 다니엘이 어느날 마음 먹고 민족을 위해 기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3주 후에 천사가 응답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때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단10:12,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응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느냐 입니다. 다니엘이 3주동안 기도를 다 끝낸 후에 응답이 온 것이 아니라 다니엘에 기도를 시작할 때 응답이 시작되었습니다. “네가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다같이 “첫날부터”. 응답은 기도시작할 때 시작되었고 응답이 도착하는 데 3주 걸렸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도움이 시작됩니다. 기도 끝나면 응답이 도착합니다. 시121:1-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아에게서로다”. 시146: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115:11,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기도해서 얻는 또 하나의 축복이 있습니다. 16절 후반입니다. 히4:16,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다같이 “담대히”. 기도해서 얻는 축복중의 가장 큰 것은 기도를 통해 우리가 담대해진다는 것입니다. 담대함의 반대는 두려움, 지신없슴입니다. 왜 우리가 두렵고 자신이 없습니까? 요일3:21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여기서 책망은 마음의 가책입니다. 죄책감입니다. 양심의 가책입니다. 죄를 지으면 부끄럽습니다. 자신이 없습니다. 우리가 두렵고 자신없는 마음의 가책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죄도 용서받습니다.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벗어납니다. 마음이 평안합니다. 요일3:20이 중요입니다.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이것이 기도의 능력입니다. 기도한다고 해도 우리의 인간적 조건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우리 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크시고, 아시고”. 하나님은 우리 문제보다 크시고 우리 문제를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민보다 크시고 우리 고민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형편보다 크시고 우리 형편을 알고 계십니다. 모든 믿음은 담대함입니다. 믿기 때문에 담대하고 담대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히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미국의 한 신학대학에서 교수가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단 하루밖에 시간이 없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학생들이 심각하게 생각하다가 크게 두 마디로 대답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도와주세요”. 사랑과 기도였습니다. 그 말을 듣던 교수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지금 하세요. 오늘이 여러분의 마지막 날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마지막 날을 삽니다. 사람에게는 “사랑합니다”, 하나님께는 “도와 주세요. 감사합니다” 사랑과 기도, 기도와 사랑을 연기하지 맙시다. 왜 미룹니까? 오늘이 우리 생의 마지막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매일을 마지막처럼 기도하고 산다면 그에게 매일 매일은 인생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기도는 희망을 낳는 모태입니다. 기도는 희망의 에너지요 희망의 원천입니다. 기도하면 희망이 시작되고 희망은 기도로 시작됩니다.
희망(5) 히4:14-16 2015.2.8(일)
기도하면 희망이 시작됩니다
“하나님 다음으로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살전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히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벧전1:19“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우리는 왜 기도합니까?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연약하다=“아스테니아”=힘이 없다. 강하지 않다.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기도한다.
막9: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마9:24,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시139: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마26:37-38, “예수께서 고민하고 슬퍼하사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골2:15,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어떻게 기도합니까?
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배의 생명은 시간을 잘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의 생명은 은혜의 보좌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왕되신 주앞에 나 경배합니다. 주님만 찬양받기 합당하시니 큰 존귀와 영광 홀로 받으소서. 오 주앞에 나아갑니다”.
기도의 결과가 무엇인가?
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때를 따라”= “필요한 때에”(공동번역), “제때에”(새번역), “in our time of need”(NIV).
삼상1:9,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삼상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단10:12,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기도가 시작되면 하나님의 도움이 시작되고 기도가 끝나면 하나님의 응답이 임한다.
시121:1-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아에게서로다”.
시146: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115:11,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히4:16,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요일3:21,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요일3: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히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추천 설교 > 이윤재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룻4:13-17 행복한 가정에 희망이 따릅니다 2015.2.22(일) (0) | 2019.07.24 |
---|---|
희망(6) 눅19:1-10 영혼이 강해져야 삽니다 2015.2.15.(일) (0) | 2019.07.24 |
벧후1:1-11 우리 평생의 희망, 예수님 닮기 2015.2.1(일) (0) | 2019.07.24 |
희망(4) 잠언4:1-10 자녀는 하나님의 희망입니다 2015.1.25(일) (0) | 2019.07.24 |
롬5:1-5 우리에게는 이런 희망이 있습니다 2015.1.18(일) (0) | 2019.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