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이권희가 우연한 기회에 아프리카에 관한 선교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얼굴에 수많은 파리들이 앉아 있지만 떨쳐낼 힘조차 없는 어린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마음속에 큰 아픔과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달려가야 할 사명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고백하였습니다. “그 순간 제 몸이 뜨거워지면서 기도를 드리는데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눈부시게 흰 옷을 입은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을 모른 채 죽어가는 이 땅의 수많은 백성들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독생자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간곡히 부탁을 하였습니다.‘험한 산도 괜찮고, 바다 끝도 괜찮으니 나를 보내 달라’고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는 한참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그는 그날의 감격과 느낌을 가사로 적어 그대로 악보에 옮겼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곡이 바로 ‘사명’이라는 복음성가입니다. 복음성가 ‘사명’을 함께 불러봅니다. “주님이 홀로 가신 그 길 나도 따라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길을 나도 가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세상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 사랑하겠소 세상을 구원한 십자가 나도 따라가오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한 당신 이 작은 나를 받아주오 나도 사랑하오” 본문의 웃시야 왕은 남 유다의 10대 왕입니다. 백성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정치를 잘했습니다. 우상을 멸하고 하나님 앞에 성실히 행해 태평세월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교만에 빠졌고 이 일로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웃시야 왕이 유다의 희망이었는데 그가 죽자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이사야는 나라와 자신의 운명을 비관적으로 생각하면서 성전에 들어갑니다. 이사야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갔습니다. 문제를 푸는 열쇠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다른 곳에서 해답을 찾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성전에 나아가야 합니다. 다른 행동을 취하기 전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시급한 일이며 중요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이사야는 기다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는데, 하나님이 쓰시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니 보내심을 받기 전에 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과연 이사야는 무엇을 어떻게 행하였기에‘나를 보내소서’ 라는 고백이 가능했습니까? 첫째로 거룩함을 보았나니 알렉스 파타코스(Alex Pattakos) 교수의 ‘의미 있게 산다는 것’이라는 책에 나오는 실화입니다.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가 27년 동안 로덴의 감옥에서 석방되는 날이었습니다. 세계가 이 일을 주목하였고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아칸소 주지사로 있던 빌 클린턴(Bill Clinton)은 텔레비전을 통해 이 사건을 보고 있었습니다. 황급하게 아내와 딸을 불렀습니다. “빨리 이리 좀 오라. 역사적인 사건이 보도되고 있으니, 놓치지 말고 이 장면을 보아야한다”라며 지켜보았습니다. 클린턴은 감옥에서 걸어 나오는 만델라가 군중 속에 둘러싸이고 군중들이 만세를 부르며 영접하는 순간 만델라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순간적으로 분노의 표정이 지나가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나중에 클린턴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고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이 됩니다. 서로 만날 기회가 생겼을 때 클린턴이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원망과 보복과 분노로부터 멀리하는 화해의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 시간에 분노의 얼굴이 되었는지 알고 싶다” 그러자 만델라는 겸손하게 대답했습니다. “잘 보셨습니다. 저는 감옥에 있을 때 간수의 아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들어와 성경을 가르치는데 은혜를 받고 깨달음을 받았습니다. 27년간의 감옥 생활 중에도 깨끗하고 평화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나오는 순간, 군중들의 함성을 듣는 순간, 27년의 세월을 강탈당했다는 느낌과 더불어 울화가 치밀어 오르더군요. 분노의 순간을 느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후 예수께서 영으로 내 귀에 말씀하셨습니다. ‘넬슨아, 감옥에 있을 동안에는 자유로웠는데, 자유의 몸이 되는 순간 군중 속에서 다시 감옥으로 들어갈 것이냐?’ 감옥에서 자유로 왔던 내가 군중 속에서 부자유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 아닌 내가 나를 지배하고, 나 아닌 어떤 나에게 끌려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후의 삶은 이것을 고치고 버리고 화해와 평화의 사람으로 다시 돌아가는 그런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유로워지기도 하고 평화로워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군중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군중의 환호와 발언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바로 그때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야훼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스랍들이 하나님을 창화하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세 번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세 번 반복의 표현은 최상급을 뜻하는 것으로 ‘최고로, 지극히 거룩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스랍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강조한 이유는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성 자체의 순수성과 죄와 아무 상관도 없으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이사야로 하여금 그의 부정을 깨닫게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의 입을 거룩하게 하시어 말씀을 대언하는 입이 되게 하셨습니다. 세속적 언어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영적 언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체험할 때 거룩하지 못한 인간은 두려움과 함께 죄책감과 수치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겸손히 무릎 꿇을 때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는 체험을 통해 부르심에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죄사함을 받았나니 티코미로프(N.Tikhomiroff)는 소년 시절에 부모와 함께 농업하기에 유망한 곳을 찾기 위해 시베리아로 이주해왔습니다. 오랜 여행 끝에 부모는 콜레라로 죽었고 소년은 쓰라린 고생 끝에 도적 떼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8년간 그들은 농사짓는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어느 날 일당은 두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소유를 가져가버렸는데 그 중에 두 책이 있었습니다. 하나가 신약성경이었습니다. 그날 밤 숙소에 누워 티코미로프는 로마서 3장 15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또 신약성경의 앞면에 씌여진 글을 주시했습니다. “1898년 5월 15일 주님께 회개함으로 중생을 체험하다. 그날 주님은 내 죄를 용서하시고 그의 거룩한 보혈로 나를 씻어주셨다.” 그는 읽고 또 읽었습니다. 누가복음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의 이야기는 그를 강하게 사로잡았고 죄악 된 생활을 청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다른 일곱 명도 함께 자수하는데 동의했습니다. 그 후 도적들은 10년의 중노동형을 받았고 그는 시베리아에 있는 백칼 해 건너편으로 보내졌습니다. 몇 년이 지나 사면을 받았습니다. 그는 걸어서 소련에 돌아갔습니다. 오는 도중에 많은 신자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가 간증한 장소에서 부흥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께 돌아왔습니다. 소스노우카에 돌아와서도 계속하여 복음 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련 성직자들의 반대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다시 구속되었고 1년간 감옥에서 감옥으로 전전했습니다. 그 후 이단을 믿는다는 이유로 2년간 시베리아로 귀양 보내졌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죽였던 사람으로부터 얻은 신약성서의 첫 페이지에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를 용서해주시오. 내가 죄 속에 빠져 있었을 때 당신을 죽게 했소. 주님께서 나를 용서해주시고 나에게 새 생명을 주셨소. 그의 죽으심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영생으로 이르게 하기 위한 것이오. 이 성경은 나의 굳어진 마음을 생수같이 부드럽게 해주었소. 그것은 내 목마름을 달래고 계속하여 흐르면서 다른 영혼에게 생명을 주며 활기를 띠게 하고 있소. 이로 나는 그대와 나의 하나님을 찬양하오. 아멘” 본문 6절입니다.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사야의 죄악이 사해진 구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부정함을 씻어 달라고 먼저 요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부정함을 인식하게 됨으로 ‘화로다 나여’라고 고백하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먼저 손을 내밀어 이사야를 정하게 해 주셨습니다. 사죄의 은총을 무조건적으로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만 인정하고 자복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부정함을 씻어주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대속을 통하여 이미 조건을 충족시켜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죄사함의 은혜를 체험한 자가 어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죽어 마땅한 죄인을 살려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당연히 ‘나를 보내소서’ 라고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부르심을 들었나니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 사무총장 한정국 선교사가 인도네시아에서 사역할 때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을 겨우 마친 8살 어린 아들의 교육을 위해 말레이시아로 보내야 했습니다. 자신은 선교 사역 때문에 인도네시아를 떠날 수 없어서 아들과 떨어져야만 했습니다. 아들을 말레이시아로 보내던 날, 소리쳐 울며 아빠를 애타게 부르는 아들을 뒤로 하면서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하나님! 꼭 이렇게 헤어지면서까지 선교를 해야 합니까?” 그런데 차 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도 너처럼 아들이 하나 있었다. 아들이 죽음의 잔을 옮겨 달라고 애원하였을 때 나는 침묵하였고, 결국 내 아들은 죽음을 받아 드리고 골고다로 걸음을 옮겼다. 아들을 환호하던 백성들이 종려나무를 흔들던 손으로 내 아들을 내려쳤단다. 내 아들에게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조롱하고 침을 뱉었다. 내 아들은 그렇게 모든 사람에게서 버림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았단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충격이었던 것은 바로 내 아들이 십자가에서 부르짖은 말이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는 못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전율하며 한없이 울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자리로 즉시 달려갔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여기의 ‘위하여’란 말은 선교의 사명을 뜻합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중에 선교가 중요한 사명인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보내소서”라고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머뭇거리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져야 합니다. 사람의 음성으로의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음성으로 들려야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거룩한 음성을 듣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그 기쁨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즉시 고백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사용하여 주소서”이사야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선지자가 됨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사람의 소리가 아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려지시기 바랍니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선교사는 인도로 가기로 결심하고 선교를 준비하다가 1883년 커네티컷에서 열린 캠퍼스 부흥집회에서 앨버트 목사를 통해 조선의 소식을 듣고 선교지를 조선으로 바꿉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제물포 항구에 첫발을 내 딛습니다. 그때 기도한 기도문 ‘보이지 않는 조선의 마음’의 내용입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습니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하나님은 지금도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누가 나를 위해 갈꼬‘ 부르실 때 이사야처럼 ‘나를 보내주소서’라고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죄사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
2015-05-30 20:03: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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