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김광일목사

이 시기를 아는 자-롬 13:11~14

이 시기를 아는 자-롬 13:11~14
이름 김광일목사
첨부


제목 없음

1941127일 일본군 비행기가 미국 하와이주의 호놀룰루 진주만(Pearl Harbor)을 전격적으로 기습 공격하였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일본이 감히 공격해 오리라고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그 날은 주말인 까닭에 병사들이 댄스파티를 즐기며 놀았습니다. 그리고 아침까지 잠에 취하여 있던 바로 그때 일본 항공모함으로부터 수많은 비행기가 진주만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미국은 감쪽같이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레이더 조종을 연습하던 병사가 레이더를 보니 태평양 쪽에서 수많은 비행기가 날아오는 겁니다. 그래서 재빨리 상부에 연락을 취했더니 응답이 오기를 그것은 아군의 연습기일는지 모르니 관계없다는 메시지와 함께 중대한 사건을 묵살해 버렸습니다. 마침내 이른 새벽 일본 비행기들이 잠들어 있는 진주만을 폭격하였는데 눈뜰 사이도 없이 모두 다 공격을 당하였습니다. 진주만에 정박 중이던 기함 USS 애리조나호는 단 십분 만에 격침되었고, 그 속에 타고 있던 해군 1,177명이 그대로 물속에 수장되는 어마 어마한 피해였습니다. 지금도 진주만에 가면 애리조나호가 침몰한 그 위에 전쟁기념관 애리조나 메모리얼(USS Arizona Memorial)이 세워져 있습니다. 미래의 재난에 대한 시설을 해 놓고도 그 시설을 활용하지 못하여 막대한 피해를 당한 사건을 경계하려함입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모든 인생이 불원간 당하게 될 종말의 심판이 가로놓여 있고, 또한 그 심판의 메시지를 매일매일 전달받고 있으면서도 소홀히 여기며 지내는 경우에 대한 교훈인 것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말세에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줍니다. 말세의 징조를 보면서 종말이 임박했음을 깨달으라고 권면합니다. 종말의식을 가지라는 겁니다. 11절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여기의 시기는 연대기적으로 흐르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어떤 특성을 가진 개념의 시간인 카이로스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해당하는 톤 카이론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오게 될 역사의 종말을 시기의 현상들을 통해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러한 깨달음은 주의 가르침에 근거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시기가 주는 의미를 바로 깨달으라는 바울의 촉구가 담겨있는 표현임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성가 그 날이 도적같이 이를 줄 너희는 모르느냐를 다같이 찬양합니다. “그 날이 도적같이 이를 줄 너희는 모르느냐 늘 깨어 있으라 잠들지 말아라 주님과 동행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향하신 하나님 뜻이니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를 거룩하게 하시고 온 몸과 영혼이 주 오실 그 날에 흠없기 원하노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향하신 하나님 뜻이니라.”

종말에는 우주적 종말과 개인적 종말이 있습니다. 우주적 종말은 재림을 가리키며 개인적 종말은 죽음을 가리킵니다. 시대를 분별하면서 재림이 다가옴을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인적으로 마지막 순간이 다가옴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즉 죽음은 언제라도 닥쳐올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역사적 종말이든 개인적 종말이든 종말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성도들은 항상 종말을 바라보는 긴장과 각성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종말이 가까운 시기를 아는 자의 자세는 과연 어떠해야 합니까?
 

첫째로 자다가 깨어야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가 대통령이 되어 덴버라는 도시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덴버에는 폴 헨리(Paul Henry)라는 6살짜리 소년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대통령을 만나 악수 한번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식이 신문을 통해 보도되었고, 마침 아이젠하워가 덴버에 도착하자 비서관들이 그 소식을 알렸습니다. 대통령은 예고 없이 소년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 날 따라 폴 헨리의 아버지는 늦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왔을 때 잠옷 바람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빨리 그 소식을 듣고 일어나 준비하고 있었더라면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말의 때에 그러한 부끄러움을 당하는 비극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 각성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는 만큼 인생이 바뀝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여기의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는 은총의 때입니다.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눈을 감고 쉬는 의식 없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 아니라 영적인 게으름, 나태 혹은 무지를 이르는 말입니다. 혹시 영적으로 게으른 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벌써 되었다는 것은 종말이 코앞에 닥쳐왔음을 느끼고 속히 깨어나라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 생명을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종말이 가까울수록 깨어 영적으로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면 고난도 축복으로 바뀝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는 가운데 고난이 닥치면 실족하게 됩니다. 우리가 정신을 놓고 걸어가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가면 돌부리에 걸려도 딛고 지나갑니다. 같은 돌이라도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디딤돌이 되기도 합니다. 종말도 언제 어느 때에 임하여도 안심이 되는 까닭은 늘 깨어있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어둠의 일을 벗어야

뉴욕에 살던 처녀가 등대지기 청년 제이콥 워커 (Jacob Walker)와 결혼을 했습니다. 두 젊은이는 등대 하나만 있는 외딴 섬 로빈스 리프라는 곳에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등대를 지키는 워커는 등대지기에 대한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였습니다. 신부는 이런 곳에서 도저히 살지 못하겠다고 1개월 동안 짐을 풀지 않았으나 혼자 떠날 수도 없어 그럭저럭 정착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이해의 폭을 넓혀 갈 즈음 남편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스태튼 아이랜드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입원을 하였지만 결국 제이콥은 병세가 악화되어 폐렴으로 죽고 맙니다. 결혼한 지 3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임종하기 전 제이콥은 아내에게 유언과 같은 부탁을 했습니다. “등대를 지켜주오(Keep the lighthouse). 등대를 생각하오. 등대를 부디 지켜주오.” 남편의 시신을 등대가 보이는 언덕 위에 묻은 워커 부인은 그때부터 등대를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나이가 스물 아홉이었습니다. 수 백번 섬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복받쳐 오르는 고생과 고독의 연속이었지만 그녀는 만 70세가 되는 1923년까지 41년 동안 혼자서 등대를 지켰습니다. 워커 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가 많았어요. 폭풍우 치던 밤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해요. 하지만 두려움이 엄습할 때마다 언덕 위에서 남편의 소리가 들렸어요. ‘등대를 지켜주오. 등대를 생각하오. 등대를 부디 지켜주오그 음성이 내 발을 붙잡았죠.” 등대지기였던 남편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며 평생 한 자리를 지켰던 것입니다. 제이콥 워커의 말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는 의미가 아닙니까? 등대의 불을 밝히는 것은 어둠을 물리치는 행위와 같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여기의 밤은 죄악의 때를 가리킵니다. 또 어둠의 일은 죄악된 삶을 의미하며 방탕, 술취함, 음란, 호색, 다툼, 시기, 정욕을 추구하는 일들입니다. 이 시기를 아는 자만이 이런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둠의 일을 벗어나는 것은 곧 회개를 의미합니다. 회개란 어둠의 죄악에서 벗어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세상이 아무리 어두울지라도 이 시기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빛으로 무장하여 어두운 세력이 틈타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흔히 세상에서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일들이 성도의 생활을 침해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별로 의식 없이 행동하는 통상적인 것들이 성도들에게는 어두운 악의 일이 될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당연히 세상의 것들과 하나님의 것들이 갈등을 일으킬 때 반드시 하나님의 것들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거룩히 성별되기를 항상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를 깨닫는 자는 속히 어둠의 일을 벗어나야 합니다.
 

셋째로 예수로 옷 입어야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는 참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담쟁이가 멋진 유선을 그리며 나무의 몸을 휘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보니 나무의 뿌리가 드러나고 아직 낙엽이 지기엔 이른 계절인데 잎이 제 색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담쟁이가 참나무의 기운을 좀 먹었기 때문입니다. 겉모습을 아름답게 해주던 담쟁이가 정작 참나무의 생명을 위협하는 독초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을 휘감는 담쟁이는 무엇입니까? 겉모양을 화려하게 장식해 주지만 영혼은 황폐케 하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돈 일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참나무가 담쟁이 넝쿨로 인해 화려한 외형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것의 속은 썩고 잎은 제색을 잃어가 생명의 기운을 빼앗기고 만 것처럼 돈이나 권력, 명예의 넝쿨로 자신의 몸을 치장하려 한다면 끝내 영혼을 죽음으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정욕의 넝쿨을 끊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본문 14절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옷은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물건입니다. 입은 옷을 보면 그 사람의 사람됨 즉 인격을 짐작하게 됩니다. 예수가 입으셨던 옷은 청빈한 옷을 입으셨습니다. 세상에서 욕심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진실의 옷을 입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옷 술이 달린 위선의 옷을 입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죄악에서 벗어나 단정히 행해야 합니다. 마치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예수를 항상 의식하고 예수와 일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점점 강하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정욕을 추구하기 위하여 몸을 내어주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함으로 오직 예수만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우리 힘만으로는 어둠의 세력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기고 살아야만 합니다.

신학자 토니 캄폴로(Tony Campolo) 박사의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을 때 자기가 못다 이룬 업적을 후회하며 죽지 않는다.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죽는다.” 인생들은 죽음 앞에서 돈을 조금 더 벌었어야 했는데, 조금 더 출세했어야 했는데라며 후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보통은 세 가지 후회를 한다고 합니다. ‘좀 더 바르게 살 걸.’ ‘좀 더 사랑하며 살 걸’ ‘좀 더 즐기며 살 걸.’ 죽음 앞에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지금이라는 이 시기가 중요합니다. 기회 주셨을 때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해서 마지막 때를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시기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전통 육아교육법에 도리도리’ ‘곤지 곤지’ ‘깍꿍이 나오는데 그 중에 깍꿍은 한자적 의미가 있다고 전해집니다. 본래 각궁(覺躬)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자신을 깨달아라!” 즉  각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적 깍꿍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각성과 깨달음입니다. 언제 주님이 오신다 해도 언제 종말이 온다 해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살아야 합니다.

이 시기를 아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부디 게으른 영적 잠에서 깨어나 기도할 시기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어둠에 빠지지 말고 회개 할 시기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예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기인 것을 바로 아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5-09-05 15:2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