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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마태복음(송수천)

(제8강)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 (마 4:12-17)

(제8강)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 (마 4:12-17)

 

  불교계의 거성 성철스님이 몇 년 전에 죽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철 스님은 불교계의 대표로 일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한 사람이라고 그쪽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는 10년 간을 좌정하고 불심을 닦았고 10년 간은 말하지 않고 지냈다고 합니다. 또 16년 간은 생식만 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1989년 불교 종단 종정에 취임하면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그 유명한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이 왜 유명한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이 유명한 것인지 유명한 사람이 말해서 유명한 말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으면서 한 말은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불교계에서는 우리 기독교와 같이 세 개의 하늘이 있다고 합니다. 허공에 풍륜이 있고, 그 위에 수륜이 있고, 맨 위에 금륜이 있는데 그 복판에 수미산이 있다고 합니다. 그 산 높이가 112만 Km나 되는 높은 산입니다.
  그런데 성철 스님이 말하기를 내가 그렇게 고행을 했어도 아직도 자신의 죄가 수미산 보다 높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아비규환의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을 갈기갈기 찢어지기를 소원했습니다.
  이렇게 인류 역사상 가장 고행을 하고도 죄 사함에 대한 확신 없이 불교계의 대표는 죽어갔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불교입니다. 불교는 구세주가 없습니다. 죄 씻음도 없습니다. 씻어준 이가 없는데 누가 씻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구세주가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는 성철스님과 같은 고행은 할 수 없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고행을 했어도 죄를 못 씻었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에 믿기 만하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믿/아멘!/
  오늘 본문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창기 사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목소개!▶

 

  우리는 마4:1-11절에서 예수님께서 40일간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그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치신 것을 배웠습니다. 이제 그 이후에 예수님의 복음 전파 사명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유대지방에서 세례요한에게 소개를 받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예수님 자신이 '내가 세상을 구원하러 온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다' 그렇게 하지 않고 먼저 세례요한을 통하여 온 백성에게 소개하는 기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백성들에게 요1:29절에서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했고, 또 36절에서도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이렇게 두 번씩이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 역할이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 가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상경하셔서 얼마동안 활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복음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실 때는 세례요한이 헤롯왕에게 붙잡혀 감옥에 간 후부터 본격적으로 전도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12-14절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예수께서 선구자 세례요한이 헤롯에게 체포되었다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세례요한이 말한 것과 같이 '곧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20)'고 말한 그대로 선구자는 사라지고 만 왕의 왕이 나타나시는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잡히게 된 이유를 마14:1-12절에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황제의 임명을 받아 유다를 통치한 분봉왕은 헤롯 안티파스였습니다. 그는 사생활이 복잡한 왕이었습니다. 자기의 조카딸이자 자기의 동생의 부인인 헤로디아를 강제로 빼앗아 살았습니다. 세례요한이 이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한 마디로 세례요한은 정의의 사람으로서 바른말하다가 잡히게 된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바른 말을 하는 정의의 사람들이 권력자나 불의한 자들에 의해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로 인해 세례요한은 체포가 되어 마카에 루스 성 동굴에 감금되었다가 헤롯의 생일날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이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때 살로메가 자기 어머니 헤로디아의 사인을 받아 눈의 가시로 여겼던 세례요한의 목을 달라고 했습니다. 사실 헤롯왕은 세례요한의 말이 의인의 말인 것을 알았습니다.
  요세푸스 역사가에 의하면 헤롯은 세례요한의 말은 굉장히 신뢰하고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그의 말은 들은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헤로디아의 간교한 술책에 의하여 세례요한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아직 세례요한이 목 베임을 당한 것은 아닙니다. 헤롯에 의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은 갈릴리로 내려오셔서 복음 전파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나사렛 동네를 떠나서 스불론과 납달리지방 해변가에 있는 가버나움이라는 곳으로 옮겼다고 했습니다.
  나사렛은 예수님이 자라난 고향입니다. 정이 들대로 든 동네입니다. 사람이 고향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이사한다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없이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향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왜 그곳으로 가셨는가? 복음을 전하시려고 가신 것입니다. 나사렛 동네는 산으로 둘러싸인 산꼭대기에 동네입니다. 그러니까 복음 사역 지역도 잘 골라야 합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은 갈릴리 바다를 중심하여 도로의 중심지였습니다. 갈릴리 바다 주변 지역은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비옥한 땅입니다. 그래서 올리브, 오렌지, 바나나 목화밭이 많아 인구가 집중되었습니다.
  그 당시 '갈릴리에서 큰 올리브 밭을 제배하는 것이 유대에서 한 아이를 기르는 것보다 쉽다'는 속담까지 있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땅이 그만큼 기름진 옥토요, 살기 좋은 고장임을 나타낸 말입니다.
  한 때 그 지방의 집정관을 했던 역사가 요세푸스의 말에 의하면 그 지방에는 204개의 마을이 있었고, 한 마을의 인구가 5,000명 이하가 되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복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그곳에는 아주 많았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에도 인구가 많습니다. 복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한마디로 당시 갈릴리 지방이 복음의 황금어장인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에도 황금어장입니다. 다만 그물을 치지 않기 때문에, 전도하지 않기 때문에 알곡을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당시 갈릴리 사람들의 성품은 개방적이고 성급한 면이 있지만 기사도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언제나 혁신을 좋아하고 천성적으로 변화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복음을 잘 받아 드립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으로 이사를 하신 것은 한 마리도 복음 전파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가신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예수님이 오시기 600년 전에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것을 이룬 것입니다.
 
  ▶15-16절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사9:1-2절의 인용구절입니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스불론과 납달리와 요단강 저편 해변길과 갈릴리는 스불론과 납달리 족속이 제비 뽑아서 얻은 지방인데 그들이 원주민인 가나안 족속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또 이 지방은 유대북방에 있어서 열 방의 침략을 많이 받아 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혀갔고, 이방인들이 많이 그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고, 민족이 혼합을 이루어 이 지역을 이방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빛을 모르고 흑암에 사는 백성이었으나 예수님이 이곳에 이사하여 사시므로 큰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주제가 빛에 대하여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본성과 성품을 보여주는 가장 적절한 표현 하나가 빛이라는 단어입니다.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요, 생명을 주는 빛이요, 진리로 인도하는 빛입니다.
  예수님은 요8:12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당신 스스로 자신이 빛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빛이라고 말씀했는데 그것은 단순히 자연과학에서 배우는 그런 빛이 아닙니다. 한 차원 더 높은 생명의 빛이요, 죽음에서 살리는 빛이요 우리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빛입니다. /믿/
  요1:4-5절을 보면 사도요한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어두움은 하나님과 단절한 상태, 신령한 일에 감각을 잃은 사람의 상태를 말합니다. 요1:9절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이 어두운 인간 세계에 빛이 비취었다는 말은 원어에는 현재진행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계속 쉬지 않고 인간 세계에 비취는 계속성을 의미합니다. 구약시대는 선지자를 통해서 비취었고, 신약에서는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비취었으며 승천 후에는 성령이 계속 비취었습니다. 그런데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탄식했습니다. 여기 어두움은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불 신앙을 어두움으로 보았습니다.
  성경 곳곳에는 빛을 예수 그리스도로 묘사합니다. 고후4:6절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벧전2:9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약에 보면 이 빛을 체험한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모세입니다. 그는 80세 때 떨기나무 불빛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목격했습니다. 또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에서 헤맬 때 어느 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시내 산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40일간 금식한 후 하나님의 돌 판을 들고 사람들 앞에 내려옵니다. 그의 얼굴에는 광채가 났다고 했습니다. 강력한 하나님의 빛을 본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빛을 두려워하므로 그는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인간들의 눈과 얼굴에는 빛이 안 났습니다. 죄로 물든 눈, 분노하는 눈, 시기하는 눈, 살인하는 눈, 사람들의 얼굴을 아무리 찾아도 빛이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얼굴에는 빛이 나서 눈이 부셔서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마17:2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예수님이 변화 산에서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고 했습니다. 신약에 또 한 사람이 이 빛을 보았습니다. 유명한 사도바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강력한 하나님의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 빛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눈이 멀어 3일이나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빛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썩은 얼굴, 분노하는 마음, 상처받은 마음을 이 빛이 비추어져서 치료가 되고 기쁨이 되고 자유가 되어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할/아멘!/


  ▶빛은 몇 가지의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⑴빛은 밝게 하는 사명입니다. 빛은 어두움을 밝힙니다. 빛과 어두움을 공존할 수 없습니다. 빛 앞에는 감추어진 모든 것이 다 드러납니다. 빛 앞에는 죄악과 흑암이 사라지고 광명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참으로 세상의 빛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빛을 받아 이 세상을 밝혀야 합니다.
  ⑵빛은 따뜻하게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따뜻한 사랑과 위로와 화평은 주는 것입니다.
  ⑶빛은 변화시키는 사명이 있습니다. 고체를 액체로 액체를 기체로 변화시키고 딱딱한 것은 부드럽게 사나운 것은 온순하게 변화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으면 악한 자가 선하여지고 죄인이 의인되며 약한 자가 강하여지고 병든 자가 강건해지며 비겁한 자가 용감해집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빛은 아름답게 변화시킵니다.
  ⑷빛은 바른 길로 인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단12:3절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전도는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빛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16절의 '흑암에 앉은 백성'에 대하여 알아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아담과 하와 이후에 곧 타락한 후에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흑암에 앉은 백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죽음 안에 있는 존재요, 어둠 속에 속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죽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옥에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빛 안에 거한 자 즉 생명 안에 있는 자입니다. /할/

 

  ▶17절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이때부터' 특별한 시점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로써 예수님의 생애에 중요한 전환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예수님의 복음의 첫 외침이요, 예수님의 선교의 첫 주제입니다. 이 말씀은 마3:2절에서 세례요한도 했습니다. 그러나 말의 형식은 같다 할지라도 그 개념과 사상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오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면서 외쳤으나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막1:15절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여기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전파하여 가라사대'

  여기 전파한다는 말은 '선포하다, 설교하다, 나타내다'는 말로 예수님의 사역은 세 가지입니다.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신 사역'입니다. 우리 교회 표어도 '가르치며 전파하며 고치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사역 중 가장 중요한 사역이 바로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사역입니다. 오늘날은 예배의 60%가 바로 설교의 사역입니다. 설교란 분명한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설교와 같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에는 어떤 권위가 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설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전파한다는 말은 '선언한다.'는 의미로 어떠한 지식에 대한 설득, 토론이나 또한 어떤 유의 논쟁이나 공격을 허용하는 이론전개가 아닙니다.
  이 선포는 도래되는 천국에 대한 일방적인 선언이며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명하신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지체 없이 전하는 것입니다.
  전파의 주요 원액은 복음,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뜻 있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오늘날 교회의 설교가 타락해 가고 있다고 합니다. 신문기사거리나 민주화의 이야기, 신문의 사회면을 설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사회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설교가 아니라 강연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것입니다. 정견 발표가 아니고 도덕 강연도 아닙니다. 설교는 성경 안에 있는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교가 죽으면 교회는 죽습니다.
  강단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회복되면 교회는 부흥되어지고 성도들의 영혼이 삽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들을 때 찔림을 받아야 하고 그 설교를 들을 때 꼭 나만 두고 나를 향해서 설교하는 것 같다고 느껴져야 합니다.
  설교는 무섭도록 자기를 분해하고 찌르고 파괴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회개의 탄식이 터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아멘!/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사명을 깨닫는 자가 '전파'하는 것은 전도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최초의 관심도, 최후에 관심도 영혼구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도 '영혼구원을 최우선 순위로' 두어야 합니다. /믿/
  ⑴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영혼구원입니다. 요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할/
  ⑵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신 목적도 영혼구원입니다. 그렇습니다. 죄 값으로 지옥에 갈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대속의 피를 흘려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막10: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할/
  ⑶영혼구원은 지상의 명령입니다. 마28:18-2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⑷성령을 부어 주시는 목적도 영혼구원입니다. 행1: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⑸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도 영혼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지옥 갈 영혼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딤전2: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눅15:7절에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⑹전도자에게는 사단을 지배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70인의 제자들이 전도하고 돌아와서 기뻐하며 보고하기를 눅10:17절에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님께서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하시면서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할/
  ⑺전도자는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됩니다. 이 땅에서 인기 있는 연예인들이나 정치인들은 잠시 잠깐 후에 인기가 떨어지거나 죽으면 끝나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영혼을 구원하는 사람은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된다고 했습니다. 단12:3절에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아멘!/
  ⑻전도자에게는 기쁨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시126:5-6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전도하고 영혼구원 하다 보면 욕도 먹고 억울한 일도 당하고 슬퍼 눈물 흘릴 때가 있지만 참고 거두면 큰 기쁨의 단을 거두는 때도 온다는 것입니다. 그 기쁨은 영적인 기쁨이지만 육신적으로도 기쁨을 누리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내세의 기쁨이 우선이겠지만 현세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황해도의 아낙 골의 유명한 깡패였던 김익두가 하루는 거리를 지나가는데 코쟁이 미국 선교사가 전도지를 주면서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라고 합니다. 김익두는 그 전도지를 받아 가지고 코를 획 풀어 선교사 앞에 던졌습니다.
  그때 한국사람 같으면 김익두가 어떤 사람인줄 아니까 아무 소리 못할 텐데 그 선교사는 '매우 섭섭합니다. 한국 사람은 예의가 바르다고 들었는데 너무합니다. 그 전도지에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코를 풉니까? 그러면 코가 썩습니다.' 이 말을 들은 김익두가 아무리 깡패지만 가슴이 뜨끔하더랍니다.
  그 날 밤 집에 와서 잠을 자는데 자꾸 선교사가 눈에 보이고 코가 썩는 다는 말이 자꾸 떠올라 잠을 설칩니다. 그 이튿날 선교사를 찾아갔습니다. 선교사는 그를 보고 '아니 당신은 어제 그 청년이 아닙니까?' 반갑게 맞아 줍니다.
  '예! 접니다.' 절을 꾸벅하고는 '저 같은 것도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그 날 밤 선교사가 인도하는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크게 은혜 받고 철저히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후에 목사가 되어 한국 초대교회를 빛냈던 유명한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②'회개하라!'

  이 말의 헬라어원으로는 '메타노이아'인데 '생각을 고친다. 방향을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생각과 행동을 고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자신의 길을 가던 발걸음을 돌이켜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개란 단순히 죄를 슬퍼하거나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근본적인 마음의 회심을 말하며 결단을 하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⑴자기의 죄를 자각해야 합니다. 눅18: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⑵자기의 죄를 원통히 여겨야 합니다. 죄에 대한 심각한 수치심과 혐오감, 그리고 슬픔의 감정을 느끼는 것, 즉 세리의 기도와 같습니다.
  ⑶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요일1: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⑷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려야 합니다.
  ⑸죄를 떠나야 합니다. 인생의 궤도를 수정해야 합니다. 곧 마음과 사상과 행동과 생활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⑹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눅15:17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탕자의 절규입니다. 우리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믿어야 합니다.
  ⑺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힘써서 새 생활을 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회개란 '성격의 변화요 생각의 변화요 의견의 변화요, 방법의 변화'입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진리는 임하고, 성령도 임하고, 은혜, 은사, 축복'도 임합니다. /할/
  그렇습니다. 회개가 희망입니다. 회개하면, 회복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면 희망의 문이 열립니다. 회개하면,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대하7:14). /할/
  ⑻그렇다면 시대적인 사명을 안고 이 땅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우리는 회개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회개해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회개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죄의 지적보다는 듣기 좋은 말만 들으려고 합니다. 남의 잘못은 잘 지적해도 자신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회개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다윗은 왕이 된 후에 치명적인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밧세바와 간통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아를 죽음으로 몰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다윗의 태도입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올 때까지 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그의 죄를 깨우쳐줄 때 그때서야 다윗은 회개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매일 회개의 자리에 나아가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의 무뎌진 마음은 죄를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의 어두운 눈은 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쉴 새 없이 죄의 담을 높여갑니다. 알고 범죄하고, 모르고도 범죄를 합니다. 생각으로, 눈으로, 입으로, 귀로도 범죄 합니다. 손과 발로도 범죄 합니다. 이렇게 죄의 늪에 빠져들면서도 안전하다고 착각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첫 선포는 회개입니다.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회개 없는 신앙, 회개 없는 기도, 회개 없는 삶은 가짜이고 죽은 신앙입니다. /믿/ 그러므로 우리는 그동안 회개하지 않았던 것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주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아멘!/
  ㈁우리는 용서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용서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어떠한 사람이라도 용납하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할 것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주님은 주기도문으로 가르쳐주십니다(마6:12). 만약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마6:15). 우리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요셉의 삶을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는 총리의 위치를 이용해서 형제들에게 보복할 수 있었지만 요셉은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고, 모든 식구를 돌보아줍니다.
  형제들을 용서할 때 요셉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창50:20).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그러나 훗날 되돌아보면 별 것 아닙니다. 이제 부모, 부부, 친구, 성도와의 관계에서 용서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읍시다. 마음에 쌓인 아픔과 상처를 다 털어놓고 용서하지 못한 것을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십니다. /아멘!/
  시34:18절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할/
  ㈂희생하지 못한 것, 봉사 안 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봉사는 사랑의 표현이고, 행위입니다. 봉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은 봉사하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희생봉사가 행복입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시간을 뺏기는 데도 좋아합니다. 물질을 사용하는 것도 기뻐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해줄까?'를 고민합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아내 삼기 위해서 7년을 하루같이 봉사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일은 봉사하는 일입니다. '과연 나는 봉사가 행복한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봉사를 귀찮아하고 있지는 않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웃 앞에 무관심한 것도 회개해야 합니다. 
  성경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보면 '왜 부자가 지옥에 갔는지' 나오지 않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부자가 하나님께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무관심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말씀해주었다고 합니다. ▶부자는 땅의 것에 관심이 커서 천국에 무관심했습니다. 부자는 부에 관심을 갖느라 이웃에 무관심했습니다. 그때 나사로는 바로 부잣집 앞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살며 먹을 것이 넘쳐났지만 집 앞에 있는 나사로에게는 무관심했습니다.
  혹시 이 부자가 내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도우심이 넘쳐납니다. 그런데 우리 집 앞에 있는 불신자에게 무관심하지는 않습니까? '무관심은 상대방을 아프게 하는 가장 예의 바르고도 잔인한 방법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사회가 병들어 가는 것은 무관심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벧전4:8절에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할/ 사랑이 관심입니다. /아멘!/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한 번 짚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의 사명은 많습니다. 한 나라의 정부가 가진 사명보다 더 다양합니다. 그 사명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교회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입니다. 빛은 어두움을 밝히고 얼어붙은 것을 녹이고 불의한 것과 부정한 것을 태워 새것이 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교회는 빛에 힘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또한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소금은 썩는 것을 막아주며(방부제) 강한 것을 유하게 하며 음식의 맛을 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제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교훈은 소금의 교훈이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직업은 본래 어부였기 때문입니다. 어부들에게 절대 필요한 것이 소금이었습니다.
  둘째로 교회는 '죄를 깨우치는 민족의 양심'입니다. 인류 역사상 양심을 깨우치는 가장 예리하고 날카로운 설교를 세례 요한의 설교라고 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에 가까왔느니라'(마3:2). 오늘날 교회가 이런 양심의 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합니다.
  셋째로 교회는 '부정한 세상을 정결케 하는 찌르는 칼'입니다. 마3:10절에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몇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⑴회개의 의무가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⑵성결의 의무가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⑶봉사의 의무가 있습니다. '너희는 서로 봉사하라'
  ⑷사랑의 의무가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⑸기도의 의무가 있습니다. '항상 깨어 있어 기도하라'
  ⑹전파의 의무가 있습니다. '온 천하에 복음을 전파하라'
  ⑺기뻐할 의무도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할/ ▶단테의 '신곡'에 보면 지옥 맨 밑바닥에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무슨 죄를 짓고 여기 왔느냐?'고 물으니까 안내하는 사람이 '다른 죄가 아니라 이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 믿는다고 하면서 기쁘게 살지 못하고 늘 우울하게 한숨만 쉬며 산 죄 때문에 여기에 왔다'고 했습니다. 이왕이면 기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합시다! /할/


  ③'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여기서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곳입니다.
  지금 그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통치하는 곳에 '심령 천국, 가정천국, 교회천국, 지상천국'이 이루어지고 또 재림천국왕국건설이 이루어지며 저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신천지가 새롭게 열리게 됩니다. /믿/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