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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마태복음(송수천)

(제9강) 나를 따라 오너라! (마 4:18-25)

(제9강)         나를 따라 오너라! (마 4:18-25)

 

 

  무디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무디가 어느 날 예수님을 전하기 위하여 탄광촌에 갔습니다. 그곳의 책임자를 만나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당신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구원이 너무 싸군요. 믿어지지 않는데요,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니 값이 좀 들어가야 할 것 같군요.'
  무디는 '당신 오늘 갱에 어떻게 들어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네! 그것은 간단합니다. 버튼만 누르면 승강기가 올라오고, 내려오니까요. 그것을 타고 내려갔었지요.' 무디가 '그것 밖에 하신 일이 없었나요?' 묻자 그는 '석탄회사가 이미 많은 돈을 들여 승강기를 설치해 놓았으니까 그저 승강기의 버튼만 누르면 됩니다.' 그러자 무디가 '바로 그겁니다. 당신이 승강기를 타고 버튼만 누르면 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상에서 대신 죽게 하였으니 우리는 그저 그 공로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믿음의 버튼만 누르십시오.'
  그렇습니다. 믿음의 버튼만 누르기만 하면 구원의 승강기는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아멘!/ ◀제목 소개!▶

 

  여러분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이 무엇일까요? 성전 건축입니까? 구제입니까? 아닙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잃어버린 영혼, 버려진 영혼, 타락한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눅15장에는 비유 세 가지가 나옵니다.
  ①양의 비유: 우리 안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대해서 어느 목자가 기막힌 관심을 가지고 들을 넘고 산을 넘어 그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목자가 그 양을 찾고 너무 좋아서 어깨에 메고 돌아와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으로 끝납니다.
  ②드라크마의 비유: 열 드라크마를 가진 자가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리자 그것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부지런히 온 집을 쓸어서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고 기뻐했다는 비유입니다.
  ③탕자의 비유: 아버지를 배신하고 재산을 가지고 떠났던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잘못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 자식을 위해 밤마다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거지가 되어 비참하게 되돌아오는 그 자식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상거가 먼데 측은히 여겨 달려가서 그 아들의 더러운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 모두가 하나님의 심정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들은 우리 하나님은 한 영혼에 대한 관심이 온 우주보다 더 크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이처럼 기막힌 관심을 가지시고 하루 24시간, 1년 12달, 아니 우리 생애가 다하는 그 날까지 한 번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지켜보고 계십니다. /믿/
  한 영혼에 대한 관심에 이렇게 크기 때문에 부활승천 하시기 전에 최후 명령으로 이런 말씀을 주었습니다. 마28:18-20절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또 행1:8절에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막16:15절에서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할/
  예수 그리스도의 오직 한 가지 관심은 죄인을 구원하는데 있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여 당신의 증인된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엄청만 일을 하시기 위해서 가장 먼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본문을 보면 놀랍게도 사람을 선택하신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방법과 제도를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헌신된 사람을 찾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일을 시작하지 않고 사람을 먼저 찾으셨고 그 사람을 훈련시키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첫 번째 하신 일, 즉 제자를 선택하시고 부르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18-19절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 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할 때, 갈릴리 바다를 돌아다니셨습니다. 이유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찾는 일입니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먼저 성령이 충만하고 뜨겁게 기도하고 말씀대로 헌신하고 충성하는 일꾼들이 얼마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결정이 됩니다. 구경꾼이 많은 교회는 결코 일을 못합니다.
  100명의 성도보다 헌신된 10명이 더 큰 일을 합니다. 제자훈련의 원칙입니다. 구경꾼 교인들, 방관하는 교인들, 뒷짐 지는 교인들이 있는 한 하나님도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구경꾼, 방해꾼, 일꾼입니다. 우리 모두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할/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사실 갈릴리 바다는 바다가 아닌 담수호입니다. 이 호수는 네 개의 이름이 있습니다. 본문에 갈릴리 바다, 눅5:1절의 게네사렛 호수, 요6:1절의 디베랴 바다, 민34:11과 수12:3에 긴네렛 바다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남북의 길이가 21Km 약 50리 정도이고, 동서 폭이 13Km 약 30리 정도의 작지 않은 호수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해발보다 207미터(약 800자)나 낮은 호수랍니다.
  갈릴리는 유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곳 주민들은 거의가 미개한 서민층이었으며 말소리가 상스럽고, 매우 거친 게 특징이었다고 역사가들은 말합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분 내지 인격, 또는 지방을 알 수 있습니다. 어째든 우리 주님은 그의 나라의 귀한 일꾼들을 부르기 위해 갈릴리 해변으로 가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왜 그곳으로 가셨을까요? 예루살렘도 아니요, 헤롯의 궁전으로도 가시지 않으시고 왜 갈릴리 해변으로 가셨을까요?
  주님은 제자를 선택할 때 제사장과 같이 교만한 자를 뽑지 않으셨습니다. 학자와 같이 이론가도 아니요, 정치가와 같이 정략, 책략가도 아니며 문학가나 예술가와 같이 감상적인 자도 아닌 소박하고 무식한 어부들을 선택하시려고 갈릴리로 가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사도바울은 고전1:27-29절에서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눈여겨볼 부분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들을 부르셨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같이 일할 동역자를 찾으십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은 노아,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모세와 다윗은 부르시고 택하셔서 일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택하셔서 일을 하셨습니다.
  요15: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할/
  오늘 여러분들이 교회에 오게 된 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올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불러주셔서 오게 된 것입니다. /믿/ 교회는 하나님이 부른 사람들이 나오는 곳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온 것입니다. 스스로 왔다고 생각하면,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면 교만해지고 불순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생각하면 겸손하고 온유해집니다.

 

  ▶부름 받은 제자들의 신분을 보겠습니다.
  ⑴두 쌍의 형제들을 불렀습니다. 먼저 베드로와 안드레입니다. 다음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요1:35절 이하에 보면 안드레는 세례요한의 제자로써 이미 예수님을 알고 있었고, 그의 형인 베드로를 예수님께 소개했습니다. 또한 요한도 처음에는 세례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요1:36절을 보면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도 예수님을 알고 있었으나 주님을 따르도록 부름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두 쌍의 형제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이처럼 형제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참으로 특별한 축복입니다.
  우리나라도 형제들이 똑같이 부름 받아 주의 종이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는 '내게 만일 30명의 아들이 있다면 모두 다 하나님의 종으로 부내고 싶다'고 했답니다. 주의 종의 자리가 귀한 자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할/
  ⑵어부들을 불렀습니다. 그 당시 그들의 신분은 가난한 자들이요, 무식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택하실 때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선택하시지는 않습니다. 미래의 우리들을 보시고 선택하십니다.
  주님은 지금 베드로나 요한의 모습을 보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뒤에 자기를 위해 십자가를 거꾸로 질 베드로를 보았고 밤모섬에서 주님의 계시를 받아 기록할 요한을 보신 것입니다. /아멘!/
  우리 모두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약한 자들을 불러 강하게 하십니다. 미련한 자들을 뽑아 지혜롭게 하십니다. 가난한 자를 뽑아 부하게 하십니다. 실패한 자들을 뽑아 성공자로 만드십니다. /믿/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그들을 뽑으실 때 그들의 인내를 보신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막노동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기에 어떠한 고난도 견디어 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어부라는 직업은 다른 직업보다 더 힘이 들고 위험한 직업입니다. 풍랑과 싸워야 하고 추위에 떨어야 하고 고기와도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내 없이는 못하는 직업입니다.
  ⑶주님은 일하고 있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부지런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부지런히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았고,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고기를 잡고 있었고,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목회도 양을 모아오는 자가 있으면 그 양을 관리하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던지는 사명을 받은 자가 있고 그물을 깁는 그러니까 관리하는 사명을 맡은 자가 있습니다. /믿/
  주님은 부지런히 일하는 자들을 선택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가한 사람이나 예수 믿지! 한가한 사람이나 봉사하지!' 아닙니다. 예수님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19절에 '나를 따라 오너라' 이 명령은 보통 명령이 아닙니다. 시시한 명령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신적 권위에 입각한 절대적이며 강권적인 명령입니다. /아멘!/
  하나님은 오늘도 사람을 부르십니다. 어떤 사람은 선교사를 부르십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로,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부르십니다. 세상에 직장인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선교사로 부르면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로 부르면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또 일꾼으로 부르시면 반듯이 그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영역은 여러 가지지만 부름의 내용은 누구도 막론하고 '나를 따라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주님을 따르라고 합니다. 따르라는 것은 주님을 보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세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믿/
  ▶서두에 말씀드린 미국의 그 유명한 무디 목사님은 집이 가난해서 어릴 때 구두 방 직공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 주인 '킴볼'이라는 사람은 주일학교 선생이어서 그를 전도해서 19세에 교회가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은 말씀을 듣는 중에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완전히 따르며 그 사업을 위해 전체를 바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는 설교를 듣고 '내가 그 전부를 바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로부터 그는 열심히 돈을 벌어 40년의 여생은 오직 복음 전도운동에 전념했습니다.
  유명한 무디 성경학교를 설립하고, 교회를 세우고, 매년 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하고 24년을 계속 했습니다. 미국과 세계 각 국에서 그것은 본받아 하기 수양회가 대대적으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무디 목사는 가는 곳마다 성령의 불을 토했으며 많은 신유의 역사와 회개의 역사를 동반한 종이었습니다. 지금은 무디 성경학교에서 졸업한 사람들이 온 세상에 퍼져 지금도 하나님의 동역 자로서 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따르는 자에게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믿/ 무디는 초등학교를 못나왔지만 그의 설교에 정치인이 깨어지고 대학교수가 가슴을 치고 회개했으며 법조인들이 바른 재판을 하기를 맹세하기도 했습니다.
  왜 우리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상 두 가지의 큰 명령을 하셨습니다. 문화명령과 복음 명령입니다.
  창1: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문화명령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명령이 '온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제자들이 이 복음 명령을 받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 되게 하리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한다는 것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꾼이 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의 목표가 바로 '사람 낚는 어부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직업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직업을 하던지 어떤 종류의 삶을 살든지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주부 엄마로써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에 바쁜 중에서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십니다. 연예인 가운데서도 많습니다. 고은아 권사님도 계시고, 김혜자 권사님도 계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두 형제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는데 '제자의 정신이 어떤 것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⑴우리는 예수로부터 부름 받은 예수의 제자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최고의 고수에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누구의 제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유명한 '허준' 선생은 '성품이 바르고 곧으며, 명예와 돈보다 병들어 아파하는 환자들을 보살피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며 환자들을 돌보는 스승 유의태 선생의 제자'였습니다. 그가 과거에 급제하여 궁의가 되었을 때 다른 궁의들이 그가 유의태의 제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허준은 아무리 자기보다 높은 벼슬을 가진 자라도 자기 스승을 욕하거나 비하하는 사람에게는 그냥 있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자기 스승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와 신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최고의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스승으로 모신 자들입니다. 제자의 정신은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는 자부심을 갖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멘!/
  ⑵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즉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하는 일입니다.  /할/
  ⑶우리는 제자의 사명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제자들은 배도 부모도 다 버리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아멘!/ ▶이제 부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을 보겠습니다.

 

  ▶20-22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버리지 않고는 취할 수 없습니다. 옛 사람을 버려야 새 사람으로 지음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에 핑계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에게 의논해 보겠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업은 처분하거나 인계한 뒤에 따르겠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그물을 버리고 부모를 떠나 버리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할/
  주님은 눅9:57이하에서 여러 가지 핑계와 이유를 대는 자들에게 62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위대한 결단을 보게 됩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결단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는 다는 것은 대단한 결심입니다.
  아브라함도 이런 결단의 주인공이었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갈과 이스마엘을 버리라! 이삭을 바치라!'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떠났고, 버렸고, 바쳤습니다.' /할/ 하나님은 결단하는 자와 함께 일하십니다. /믿/

 

  ▶23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두루 다니사' 갈릴리 지방 곳곳을 두루 다니신 것을 말합니다. 욥2:2절에 하나님이 사단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의 대답은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였습니다. 예수님도 여기저기 두루 다니셨고 사단도 여기저기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차이점은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전하시고 고치시기 위해서였고, 사단은 먹이 사냥을 위해서였습니다. 지금도 사단은 여기저기를 돌아다닙니다.
  벧전5;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요10:10절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선한 목적을 위하여 두루 다니시지만, 사단은 악한 목적을 위하여 지금도 두루 다닌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자기 앞으로 모이도록 선포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세상에 오신 주님은 친히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면서 복음사역을 하셨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갈릴리는 204개의 마을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대부분 각 고을마다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본문 속에서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곳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이 중요한 사역을 위해서 택하신 장소가 있습니다. 어디입니까? 바로 회당입니다. 회당이라는 말은 '함께'라는 말과 '모인다'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이 회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 성전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자, 마을 중심에 회당을 짓고, 율법의 말씀을 가르치고, 자라나는 자녀들을 교육시켰던 장소입니다.
  그 후로 회당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중요한 삶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 한 곳 뿐이지만 회당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회당을 마을 광장 중심이나 성읍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다 세웠는데 그 방향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으로 두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오직 제사만을 드리는 집이었다면, 회당은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재판하며, 공부하며 토론하며 회의도 하는 다목적 기능을 가진 신앙과 삶의 중심센터였고, 심지어 나그네를 위한 여관과 같은 역할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회당은 예배의 처소요, 학교요, 문화의 광장이요, 친교의 터전이었습니다. 사실 초대교회의 전통은 성전보다는 회당적인 기능을 더 많이 이어받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바로 회당교회 역할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주일에 모여서 예배만 드리고 모든 사역이 끝나는 교회가 아니라, 이 지역 속에서 회당적인 기능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회당에는 세 부류가 모였습니다. ⑴기도하는 자들이 있었고, ⑵율법과 예언서를 낭독하는 자들이 있었고, ⑶말씀을 배우고 질문을 하고 토론도 하는 무리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곳 갈릴리에서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약한 것을 고치시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삼대 사역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가르치는 사역은 현대 용어로 교육입니다. 그리고 복음전파는 전도와 설교입니다. 또한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는 사역은 '치유사역, 상담사역'입니다. 그러니까 ⑴교육(디다케)입니다. ⑵전도(케리그마)입니다. ⑶병든 세상을 치유하며 섬기는 봉사(디아코니아)입니다.
  ▶첫 번째 사역은 가르치시는 사역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사역의 중심은 교육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교육적 사명이 있으며, 성도는 배움과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종은 잘 가르쳐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의 사역을 자세히 보면, 가장 많은 시간과 힘을 쏟은 것은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시고, 그들을 교육하며 훈련시키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 명령도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육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교육자로 말하면 가장 뛰어난 교육자였습니다. 가르치는 내용이 뛰어난 진리였으며, 가르치는 방법이 뛰어나셨습니다. 마7:28절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할/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 다 훌륭한 선생이지만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는 내용부터가 세상의 교사들이 가르치는 내용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어찌 회당에서 뿐입니까?
  산에 올라가서도 가르치셨습니다. 그 유명한 산상보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닷가에서도 가르치셨습니다. 눅5장에 이른 새벽부터 가르치셨습니다. 가르치실 때 우리들이 깜짝 놀라곤 했습니다. 이구동성으로 '가르치시는 것이 서기관과 다르다. 그에게는 권세가 있다'고 감탄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치셨을까요?
  ①하늘의 도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또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것과 섬길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②사람의 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와 도덕, 사랑의 윤리, 가정의 윤리, 겸손의 윤리, 화해의 질서에 있습니다.
  ③생명의 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사망의 길로 달리는 인생이 생명을 얻고 소망 속에 사는 비결입니다. 그 길이 곧 예수 믿는 길입니다. 요14:6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④처세의 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육신을 위하여 살지 말고 영을 위해 살며, 높아지려고 하지 말고 낮아지며, 또 남을 주고 살며, 남을 비판하지 말고 자기를 반성하며 진리 아닌 것을 위해 살지 말고 진리 위해 살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⑤물질의 도를 가르치셨습니다. 물질은 하나님의 나라에 쌓아주어라, 그곳이 제일 안전합니다.
  ⑥말세의 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인류의 종말이 있음을 가르치셨으며 그러므로 경성하여 준비하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살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⑦심판의 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사람은 선악간에 향한 대로 보응을 받는다고 합니다.
  ▶두 번째 사역은 복음 전파입니다. 전파한다는 말은 '캐루소'라고 하는데 근원적인 뜻은 '선포하다. 외치다'의 뜻이고 '설교하다'의 뜻도 됩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들에게 선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나라에 진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도 복음전파입니다. 주님의 설교의 재료는 오직 천국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설교 속에 개인의 생각과 방법 개인의 경험과 의도가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반듯이 성경이 강해되어야 합니다. 신문을 가지고 설교해서도 안 됩니다. 민주화를 가지고 설교해도 안 됩니다. 인권을 가지고 설교해도 안 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방법대로 성경말씀은 한 구절 한 구절 깊이 묵상하고 강해하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전파는 1:1의 전도도 해당합니다. 요4장에 보면 예수님은 한 여인을 전도하시기 위해 유대인들이 그렇게 멸시하는 이방 땅 사마리아에 가셔서 우물가에 여인에게 생수의 복음을 주셨습니다. /할/
  ▶세 번째 사역은 고치는 사역입니다.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병든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자요, 불쌍한 자입니다.
  ①예수님은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시는 의사이십니다. 예수님은 복음과 함께 수많은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말씀이 증거 되는 곳마다 치료의 능력이 나타나 세상에서 고칠 수 없는 수많은 병자들이 찾아와 고침 받았으며, 군대귀신이 들려 공동묘지 사이에서 사악하고 무서운 성품으로 변해 버린 자를 고쳐주셨으며(마8:28),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인을 고쳐주셨으며(마9:20-22), 앞 못 보는 소경을 고쳐주셨으며(마9:27) 요5장에 베데스다 연못가의 앉은뱅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②예수님은 정신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이십니다. 현대인들은 산업사회에 살면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삽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감정을 억제하지 못할 때도 많고 사고를 치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갑니다.
  상습적인 마약 중독자가 늘어가고, 술집과 나이트클럽 등 향락산업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현대인들이 정신적인 질병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 증거입니다. 이러한 정신적인 질병에서 치료받으려면 만병의 의사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됩니다. /아멘!/
  ③예수님은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시는 의사이십니다. 육체가 병들어 있는 것도 비참한 일이나 정신적인 질병은 더 불쌍하며 더욱 비참하고 무서운 질병은 영혼의 질병입니다. 육체적인 질병이나 정신적인 질병은 때로는 현대의학으로 치료받을 수 있으나 영혼의 질병은 세상에서 치료받을 수 없고 결국은 멸망당하는 무서운 질병입니다.
  영혼 치료는 예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영혼은 죄로 인해 병들었기 때문에 그 죄의 문제는 주의 보혈로만이 치료될 수 있습니다.
  ▶병이 걸리는 원인도 많습니다. ⑴피곤해서 오는 병이 있습니다. ⑵병균의 침입으로 오는 병이 있습니다. ⑶유전적으로 오는 병도 있습니다. ⑷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기 위해서 오는 병도 있습니다. ⑸연단을 주기 위해 오는 병도 있습니다. ⑹깨닫게 하기 위해 주는 병도 있습니다. ⑺죄의 대가로 오는 병도 있습니다. ⑻자기의 과실로 오는 병도 있습니다. ⑼마귀 사단이 가져다주는 병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어떠한 병도 우리 주님은 고치실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분이 우리를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병만 고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약한 부분을 다 고치십니다. 그 누구라도 예수 앞에 은혜 받고 능력 받으면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격도 변화되고 환경도 변화됩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실패자가 성공자로, 미련한자가 지혜 있는 자로 바꿔집니다. /할/
  막16:17-18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할/아멘!/

 

  ▶24-25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여기 소문은 '들음'이라는 뜻으로서 '평판 또는 명성'으로 표현되는 말인데, 그 당시 예수님의 사역이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얼마나 큰 환대를 받았으며, 영향을 주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 수리아는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의 식민지로 헤롯 안디바스의 관할에 있는 갈릴리를 제외한 유대 북쪽의 팔레스틴 전체를 포함한 큰 지역입니다.
  '모든 앓는 자'는 질병에 대한 보통 표현으로 볼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고질적인 병에 걸린 자'란 뜻으로 의학적 처방으로는 치유 불가능한 질병을 가리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모든' 병든 자를 다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