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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혈의 능력! (히 9:11-22)

보혈의 능력! (히 9:11-22)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재미있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을 짜보면 피가 흐른다!” 깨를 틀에 넣고 짜면 기름이 나오고, 포도를 짜면 포도즙이 나오는 것처럼 성경을 짜면 피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성경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피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구약 이야기의 중심은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의 핵심은 피입니다. 제물을 죽여 피 흘리게 함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신약 이야기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은 피입니다. 저 십자가 위에 달리셔서 피 흘리심으로 인간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는 한 마디로 피의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제물의 피가 하나님의 백성의 땅에 흘러 넘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 저 십자가의 보혈이 온 세상에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 인류와 세상 모든 만물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현대인들에게 이런 피 이야기는 신화처럼 들립니다. 무지하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혐오스럽고 엽기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현대인들은 이런 피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손가락질하고 피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많은 현대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피 이야기를 외면합니다. 고상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주목하려고 합니다. 자비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만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때론 그분의 능력 있는 사역에 빠져듭니다. 가장 핵심인 이 피 이야기를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 피인가?

   그러면 성경은 왜 피를 말할까요? 오늘 본문 12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속죄 때문입니다. 죄 값을 치르기 위해 피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롬 3:2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 즉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 땅에 태어나 살다 간 사람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장차 태어나 살게 될 사람들 모두 다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롬 3:10-18을 보면 이런 모든 사람이 범한 죄를 적시해 놓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여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죄란 무엇일까요? 이 세상의 법을 어긴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관점에서 지적될 수 있는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서의 죄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제 멋대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모두가 죄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 점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사탄에게 철저하게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저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뱀에게 속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하나님께서 따먹으면 정령 죽으리라 하신 그 선악과를 따먹은 것처럼, 이 땅의 사람들이 사탄에게 속아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눅 5장을 보면 우리가 주목할 만한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 때 베드로를 만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셨습니다. 밤새도록 한 마리도 고기를 잡지 못하던 베드로가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져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는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삼스럽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베드로가 남다른 큰 죄를 지었던 사람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여전히 그는 세상에서는 선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서니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여전히 나는 의인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법 없이 살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 보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달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 서면 설수록 자기의 죄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됐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뜨거운 죄의 고백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죄를 깨닫는 사람들에게 그 죄를 씻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본문 9:20을 보면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말씀했습니다. 그리고 22절에 보면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깨닫고 속죄 제사를 드리는 자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제물을 대신 죽여 피 흘리게 함으로써 속죄할 수 있게 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 놀라운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 흘리심으로 죄를 지을 때마다 계속 드려야 하는 속죄 제사를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의 피로 속죄에 필요한 모든 피를 대신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드릴 때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사함 받음으로 믿고 고백하면 더 이상 실제적인 피 흘림이 필요치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배로운 피 곧 보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보혈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 보혈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보혈의 능력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곧 보혈은 놀라운 능력이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속죄의 능력

   12절을 보면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보혈이 속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죄도 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시대 어떤 때 저질러 진 죄라도 다 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롬 8:1을 보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모든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죄책감이나 죄의식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출 12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기 전 날 저녁에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집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그 밤 애굽에 장자가 다 죽는 재앙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은 그 재앙이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pass over 곧 유월(踰越)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유월절이라 했습니다. 그 피가 재앙을 넘어가게 한 것입니다. 피의 능력입니다.

 


   우리 주님의 보혈이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로 믿으면 영적으로 그 피가 우리의 심령 정수리에 발라져 심판의 세력을 통과시킵니다. 사망이 권세 있게 찾아들어도 통과시켜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온전히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 짓고는 살 수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한 번은 운전하고 가다가 옆에 사람하고 이야기 하다가 신호등이 노란 불로 바뀐 것을 보지 못하고 사거리 중앙에 진입했는데 빨간 불로 바뀌었습니다. 그 자리에 설 수도 없고 그렇다고 뒤로 갈 수도 없어서 그냥 악세레터를 밟아 앞으로 달렸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교통경찰이 그 자리에 없더라구요. 그런데 그 다음 사거리를 갔는데 교통경찰이 갑자기 다가오는 겁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아이코 걸렸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음주단속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날 하루 교통 경찰만 보면 가슴을 쓰러내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신호위반을 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교통경찰 단속에 걸려 스티커를 띠고 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기분은 나쁘지만 교통경찰을 다시 봐도 가슴 뛰는 일은 없습니다. 지은 죄 값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그 죄에 대해 다시는 고민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렀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는 그 죄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도 그 죄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죄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자유하게 해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의 보혈의 능력으로 무거운 죄의 짐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죄의식, 죄책감 다 털어내 버리시기 바랍니다.

 


2. 성결의 능력

   본문 14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우리 안에 남아있던 죄의 흔적들, 죄가 남긴 것들을 다 깨끗하게 씻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창 3장 이후에서 보듯이 일단 죄가 우리 안에 들어오고 나면 우리 안에는 끝없는 고통이 계속됩니다. 바울 사도는 롬 7장에서 죄가 우리 안에서 왕처럼 지배하고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한다고 탄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신학자 라우센부쉬는 죄가 우리 안에서 다음의 세 가지를 만들어내 우리를 고통가운데로 몰아넣는다고 했습니다.

 


  첫째가 정욕입니다. 끝없는 욕망 속으로 우리를 몰아넣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가 이기심입니다. 자기만을 생각하게 만들어서 공동체 구성원 모두를 함께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가 불경건입니다. 하나님과 철저하게 단절시켜서 하나님 없는 영적 어둠 속에서 깊은 영적 고통을 겪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이런 죄가 남긴 흔적들 죄의 찌꺼기들을 다 씻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정욕이 남아 꿈틀거립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이기심이 남아 출렁거립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떠나 저 세상의 향락에 뛰어들고 싶은 불경건한 모습이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더 큰 죄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1941년 1월 6일 루즈벨트 대통령이 의회 연설에서 국민의 4대 자유를 제창하였습니다. '어디서나 말할 수 있는 자유 :언론의 자유','어디서나 예배할 수 있는 자유 :종교의 자유', '어디서나 결핍으로부터 해방 받을 수 있는 자유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어디서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 :삶의 불안으로부터 보장받을 수 있는 자유' 이렇게 네 가지를 선포했습니다.

   여기에 존 스토트 목사는 그리스도안에 다섯 번째의 자유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 죄로부터의 자유는 보혈의 능력으로만 얻을 수 있는 자유입니다. 보혈의 능력이 우리 안에 남아있는 정욕, 이기심, 그리고 불경건을 깨끗이 씻어서 참된 성결을 이루게 될 때 비로소 누리게 되는 자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참된 성결을 얻어 죄로부터 자유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3. 헌신의 능력

   본문 21절을 보면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쓰임 받는 사람들 또 그릇들을 피를 뿌려서 구별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 그 그릇들은 다른 곳에 사용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주의 전에서 주를 위해서 온전히 헌신케 했습니다. 그 피가 그들을 구별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심령 속에 주님의 보혈의 피가 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주를 위해 헌신해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주인공 안요한 목사님은 본인도 시각장애인이면서 역시 시각 장애인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의사들이 그의 눈을 정밀 검사해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완전하지는 않지만 거액을 들여 수술하면 광명을 찾을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안 목사님은 두 가지 이유에서 거절했답니다.

  첫째는 그런 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있다더라도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써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는 자신이 광명을 찾는다면 시각장애인들과 아픔을 함께 하며 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를 위한 헌신은 세상 봉사와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 봉사가 이웃을 위해 사랑을 베푼다고 해도 자기 사랑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희생하며 이웃을 위해 봉사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위한 헌신은 주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주신 그 큰 사랑에 감격하여 주님처럼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온전히 헌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교회에 많은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 보혈의 피를 뿌려 구별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필요보다 자기의 필요를 따라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희생보다 자기 자랑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봉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에 보혈의 피가 뿌려지기를 바랍니다. 보혈의 능력이 온전한 헌신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비록 내가 원치 않더라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Power를 좋아합니다. 심지어 목회에도 이런 단어가 쓰입니다. Power program, Power preaching... 그러나 진정한 능력은 어디서 나옵니까? 주님의 보혈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보혈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