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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에게 본받을 점 (욥 1:1-5)

욥에게 본받을 점 (욥 1:1-5)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질문들 앞에 서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등등.

   때론 이런 질문들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좌우할 때가 있습니다. 답을 잘 찾으면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답을 잘못 찾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낭패를 당하기도 합니다. 많은 경우 질문을 외면하거나 답 찾는 것을 미룰 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인생은 여전히 미결 상태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대표적인 예를 보여줍니다. 그의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청년 시절 바울은 답을 잘못 찾았습니다.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척결해야 할 사명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박해하는데 철저하게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 비로소 올바른 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할 사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순교하기까지 복음 전하는 일에 온전히 헌신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느 날 인생의 중요한 질문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답을 잘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만일 답을 잘못 찾으면 평생 고생하다가 끝내 낭패를 달하게 됩니다. 또한 질문을 외면하고 살거나 답 찾는 일을 미루고 살면 인생을 방황하게 됩니다.

   본문의 주인공 욥 역시 인생의 중요한 질문들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우선 욥은 이 질문들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질문들과 맞섰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견디면서 답을 찾았습니다. 올바른 답을 찾았습니다. 결국 그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욥은 과연 어떤 질문 앞에 섰을까요? 그가 어떻게 답을 찾았을까요? 우리는 인생의 중요한 질문과 씨름하며 올바른 답을 찾은 이 욥에게서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 내게 고난이 찾아오는가?

   욥은 그야말로 졸지에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우선 한 순간에 가진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스바 사람들과 갈대아 사람들이 쳐들어 와서 다 빼앗아 갔습니다. 그리고 한 순간에 자식들도 다 잃었습니다. 엄청난 바람이 불어와 집이 무너지면서 자식들이 몰살을 당한 것입니다. 그게 끝이 아닙니다. 제 2탄이라 할 수 있는 고난이 또 엄습해 왔습니다. 한 순간에 건강마저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온 몸에 악창이 돋아서 견딜 수 없는 병고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고난이 한꺼번에 밀려왔다는 것입니다. 재산을 잃는 것 한가지만도 견디기 힘든데 지식들마저 다 죽었습니다. 게다가 건강마저 잃었습니다. 그야말로 설상가상(雪上加霜)이요 엎친 데 덮친 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견디기 힘든 고통 중의 고통이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고난이 닥친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당사자인 욥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 누구도 욥에게 이런 고난이 닥친 이유를 제대로 알려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답답하고 더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욥기는 욥에 대한 소개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지라” 한 마디로 욥은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없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 세상 삶에도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욥에 대한 소개는 자연스럽게 독자들로 하여금 마음에  한 가지 질문을 가지게 합니다. “왜 의인인 욥에게 그토록 처절한 고난이 찾아왔는가?” 물론 당사자인 욥은 고난의 한 복판에서 이와 같은 질문을 심각하게 던졌을 것입니다. “왜 경건한 내게 이런 고난이 계속되는가?”

   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중에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내가 그렇게 신실하게 살려고 몸부림치는데 왜 고난이 찾아오는가?” “하필이면 누구보다도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내게 이런 고난이 찾아오는가?” 이런 질문이 떠오를 때 답을 잘해야 합니다. 답을 잘못하면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마음 아픈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한 청년에 대한 기억입니다.

  20여 년 전입니다. 한 권사님 손자가 방황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다 쉬고 있었습니다. 권사님 부탁도 있고 안타까운 마음도 있어서 마음에 두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찾아가 만나고 권면해서 겨우 돌아서고 있었습니다. 주일이면 교회에 빠지지 않고 나오게 됐습니다.

  이 청년은 할머니하고 단둘이 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뒷바라지로 그런대로 남부럽지 않게 잘 자랐습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에 대한 마음이 남달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권사님께서 새벽기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었지만 거동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고 후유증으로 무척 고생하실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이 늦은 밤 술을 취하도록 먹고 찾아왔습니다. 울부짖으며 소리쳤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 할머니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사고를 당해야 합니까? 우리 할머니는 하나님 밖에 모르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 후로 다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왜 고난이 내게 찾아오는가?” 이 질문에 답을 잘해야 합니다. 답을 잘못하게 되면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면 욥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했을까요? 1:2-21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실지니이다” 가진 모든 것 다 잃은 뒤에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께서 거두셨으니 오히려 찬송하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2:10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지금까지 건강하게 복되게 산 것은 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이고, 이제 하나님께서 화를 주시면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욥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그 질문에 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 계셔서 내 모든 소유를 거두셨으니 찬송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내게 이토록 무서운 질병을 주셨으니 순종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질문에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 중심으로 답을 하려하기 때문입니다. 내 관점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 보다는 고난 중에서 겪는 고통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런 질문을 만나게 될 때 하나님의 관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고난이 쓰고 아프더라도 하나님 중심이 무너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고난을 주셨고, 고난이 임하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일단 철저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 해야 합니다.

 


무엇을 믿는가?

   욥기는 아주 특이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 천상회의(divine council)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모아놓고 세상섭리를 논하는 천상회의를 여셨습니다. 뜻 밖에 사탄도 참석했습니다.

   이 회의 도중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특별히 욥을 칭찬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그러자 사탄이 하나님께 문제제기를 합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하나님께서 욥에게 남달리 물질적으로 축복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치 내기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사탄이 그의 모든 소유를 빼앗는 고난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또 다른 천상회의가 열렸습니다. 사탄이 욥의 모든 소유를 빼앗은 결과를 논의하는 회의입니다. 하나님이 이기시고 사탄이 진 것이 선언되었습니다.

   그러자 사탄이 승복하지 않습니다. 다른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욥이 소유는 잃어도 자기 생명과 직접 관계되는 고난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면 믿음을 내 던져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생명의 위협을 주는 질병의 고난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 사탄의 문제제기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질문을 발견하게 됩니다. 과연 재산을 다 잃고도 믿음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자식을 다 잃고도 믿음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질병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여전히 믿음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사탄이 한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10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하나님께서 욥에게 허락하신 축복을 욥을 지키는 울타리라고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욥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지탱하도록 허락하신 그 축복들을 의지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탄의 눈에는 그 많은 재산이 욥의 삶을 지탱시키는 울타리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10명의 자녀들이 욥의 삶을 지탱시키는 울타리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건강이 그의 삶을 지탱시키는 울타리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신앙의 본질을 뒤 흔드는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무엇을 믿는가?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울타리를 의지하는가?

   

  이번 선교여행 중에 중국 신강 위구르자치구 수도 우르무치 지역을 다녀왔습니다. 이곳은 이슬람 지역이기 때문에 교회가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내 한 복판에 명덕교회(明德敎會)라는 5000명이 모이는 큰 교회가 있었습니다. 도대체 여기에 어떻게 이런 교회가 생기게 되었는가 궁금했습니다.

  60년 전에 한 선교사님이 저 중국남쪽 운남성에서 선교사역을 하시다가 꿈에 이슬람 여인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게 됐답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임을 믿고 3000키로가 넘는 먼 거리를 성경책만 들고 1년 6개월을 걸어서 왔답니다. 비행기도 없고 열차 길도 없던 그 먼 길을 그 옛날 실크로드의 상인들처럼 걸어서 온 것입니다. 빈손으로 그 먼 길을 오는 동안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왔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먹이시고 재우시고 인도하셔서 무사히 왔답니다.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한 그 선교사님을 통해서 이슬람 땅 한 복판에 이토록 놀라운 선교의 열매를 거둘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울타리가 되셔야 합니다. 돈이 울타리가 되고, 사람이 울타리가 되고, 배경이 울타리가 돼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 질문에 답을 잘해야 합니다. “무엇을 믿는가?” 하나님만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욥은 이 질문에 답을 잘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철저히 하나님 중심에서 답을 했습니다. 울타리를 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욥처럼 이 질문에 답을 잘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견뎌야 할 것인가?

   욥기를 보면 별로 주목받지 못한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욥의 아내입니다. 이름도 소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칭찬도 없습니다. 자칫 욥의 아내는 믿음도 없는 여인이요 고난 중에 욥에게 짐이나 됐던 사람으로 잘못 평가될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깊게 욥기를 읽어보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우선 이 여인은 첫 번째 욥의 고난을 곁에서 함께 했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소유를 잃었습니다. 가진 재산 다 잃어버렸습니다. 생존의 울타리가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그래도 이 여인은 묵묵히 욥의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헬라어 사용하는 유대인들을 위한 번역본인 70인 역에 보면 1장 마지막 부분에 이런 내용이 첨가 되어있습니다. “그 동안 나는 그 지긋지긋한 일거리를 찾아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떠돌아 다녔습니다. 애써 일거리를 얻어 놓고도 너무 괴롭고 억울해서 잠시라도 쉬기 위해 빨리 해지기만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동방 최고의 갑부가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어 먹고 살기 위해 하루하루 큰 고생을 한 이야기입니다.

   욥의 아내는 요즘 말로 하면 재벌 사모님이 하루아침에 파출부 신세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말없이 그 고생을 감내했습니다. 욥의 아내는 여기까지 참고 견뎠던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생떼 같은 자식 10을 사고로 한 순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태풍에 집이 무너져 자식 모두 몰살을 당한 것입니다. 자식 하나가 죽어도 그 어미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인데 자기가 배 아파 낳은 자식 열을 몽땅 다 잃어버렸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놀랍게도 욥의 아내는 여기까지 참고 견딥니다. 한 순간에 파출부 신세가 되었고, 한 순간에 무자식 신세가 되었습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살 소망을 다 잃어버리고 삶을 포기 할만 합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이 여인은 욥과 같이 참고 견딥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남편이 온몸에 악창이 돋는 끔찍한 병에 걸렸습니다. 아마도 문둥병과 같은 질병일 것입니다. 온 몸에서 진물이 나고 피부가 망가지고 견디기 힘든 통증이 끝없이 일어납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기대고 함께 하던 남편이 그렇게 되자 이 여인에게 인내의 한계가 찾아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2:9)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 손을 든 것입니다.

   이 여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또 다른 질문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언제까지 견뎌야 할 것인가?” 욥의 아내는 참 대단합니다. 그러나 그 여인에게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고지가 바로 코앞인데 거기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욥은 달랐습니다. 2:1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욥이 그 모든 사탄이 시험을 이겨냈고, 그 모든 고난을 끝까지 참아냈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견딜 것인가?” 이 질문에 욥이 답한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데까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중심으로 답을 한 것입니다.

   시 13편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언제까지 참고 견뎌야 하느냐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이런 다윗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르짖되 잘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마라톤 골인 지점이 있듯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한계가 있습니다. 거기까지 참고 견뎌야 합니다. 잘 참고 견뎌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도중 질문들 앞에 서게 됩니다. 그 질문에 답을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질문을 이해하고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