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국선교의 비전을 갖고 중국대륙의 문을 두드린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의 이야기입니다. 19세기 중국선교의 비전을 갖고 중국대륙의 문을 두드린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헌신하기 위해 중국에 왔고 자신을 바쳐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많아지면서 협력자와 선교비가 필요했으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신적 부담은 밤잠을 설치게 했고 마침내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심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테일러 선교사가 요한복음 15장을 읽어 내려가다가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는 말씀이 마음에 닿았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빛이 비취는 것처럼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이시고 나는 그 가지인데 내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주님께서 수분과 양분을 공급해주는 나무이신데 가지인 내가 수분과 양분을 스스로 공급하려고 애쓰고 있었다니 참으로 어리석었구나. 주님! 이 시간부터는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겠사오니 책임져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설교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면 진액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것이 아니고 붙어있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성도들은 예수가 포도나무인 것을 기억하고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지 않고 하나 됨 속에 있을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무한한 자원은 우리의 것이 됩니다. 신앙을 가질 때 이미 그 일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할 일은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 사는 일이며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그 뜻을 성취하는 방법도 깨닫게 되며 그 일을 하는데 필요한 자원을 공급 받을 수 있게 됩니다.” 테일러는 성경을 읽는 생활과 기도 생활을 중요시했습니다. 기도 생활은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을 지속해주는 힘이 되었고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더욱 깊게 해주었습니다. 기도로 간구 할 때 부흥이 일어나는 것을 확신했으며 그대로 실행 한 것이 선교사역 성공의 비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환경이나 형편을 염려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가지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단단히 붙어있는 가지인 한에 있어서 모든 환경과 여건을 이길 수 있으며 과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포도는 수박이나 오이처럼 넝쿨성 식물입니다. 포도나무 넝쿨에는 많은 가지들이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포도나무로 비유된 이스라엘의 번성을 가리켜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다’고 노래하였습니다. 무성한 포도나무 넝쿨에는 두 종류의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이며 다른 하나는 ‘과실을 맺는 가지’입니다. 원예용어로는 열매 맺는 가지를 ‘결과지’, 맺지 못하는 가지를 ‘도장지’라고 부릅니다. 본문을 통해 예수께서 열매 맺지 못하는 도장지의 처리부터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포도나무는 열매 맺는 것 외에는 쓸모가 없기에 영양만 빼앗는 과실이 달리지 않는 가지를 단호하게 제해 버리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불행합니다. 또한 결실하지 못하는 가지는 더욱 쓸모가 없습니다. 잘리든지 찍히든지 버림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열매 맺는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무릇 성도들은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처럼 천한 것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는 의미는 과연 무엇을 뜻합니까? 가지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내게 붙어 있으라 장기려(張趙呂)박사는 1947년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할 때 주일에는 일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부임했고, 반드시 주일을 지키면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환자를 수술할 때는 항상 기도를 하고 시작했습니다. 의사로서의 성실함과 신실함이 인정되어 1948년 북한 과학원으로부터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했습니다. 1948년 8월, 주기철 목사가 시무 하던 평양 산정현 교회의 장로가 되어 주님과 교회를 섬겼습니다. 월남 후 부산에 산정현 교회를 설립하고 충성되이 섬겼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몹시 싫어했습니다. 자신이 칭송을 받거나 섬김 받기를 원하지 않았고 오직 주님을 높이고 주님만 섬기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무덤에도 "오직 주를 섬기고 간 사람" 이란 비문을 써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장 박사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평생을 제물로 바치는 삶을 살다가 1995년 성탄절 새벽 1시 45분에 85세를 일기로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언론은 그를 가리켜 "한국의 슈바이처" 또는 "살아있는 작은 예수" 라고 불렀습니다.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 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쟁 부상자들을 무료로 돕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으며 현재 고신의료원이 되었습니다. 장기려, 그는 평생 예수께 붙어 일하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가지가 못된 가지가 아닌 깨끗한 가지라도 나무를 떠나면 끝장입니다. 가지가 도장지가 아닌 결과지라도 그것이 열매를 내놓을 수 있는 절대의 조건은 끝까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보통 포도열매는 송이를 이룬 다음에도 100일은 견디며 붙어 있어야 열매로 성숙됩니다. 잘 익은 열매가 되려면 수확의 때까지 잠시도 나무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께 붙어 있기만 하면, 가지는 뿌리에서 올라오는 양분을 공급받아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우리는 하나됨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모습은 예수와 하나 되는 삶을 시작해 놓고도 홀로 헤매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분별조차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가지는 나무가 모든 것을 공급해주기 때문에 그저 받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 있기만 하면 됩니다. 믿음으로 붙어 있기만 하면 나무이신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어디에도 소망이 없다해도 주님께 붙어있는 믿음으로 열매 맺는 가지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나의 안에 거하라 이용규 선교사는 저서 ‘같이 걷기’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아파트의 어두운 계단을 아들 동연이의 손을 잡고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 날씨였던지라 동연이의 손을 잡아서 내 주머니에 넣고 함께 걸었습니다. 아이의 손에서 온기가 전달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새 집이 있는 8층에 도달했습니다. 문을 열기 전 왠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아이와 같이 좀 더 걸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전에 혼자 짐을 들고 올라 다닐 때는 8층이 멀게 느껴졌는데, 아이와 걷는 동안 8층은 너무 가까웠습니다. 갑자기 하나님과 같이 걷는 우리의 인생길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몽골에서의 사역 기간 동안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과 같이 걷는 동안 7년의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혼자 걸었으면 길고 지루했을지 모를 그 길이지만 고비마다 하나님과 함께 나눈 추억들이 있기에 감사의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그분이 같이 가시는 한 비록 사막 가운데 걸어가고 있을지라도 결코 혼자 걷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가장 친밀한 동반자, 주님이 내 곁에서 같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얻어서도 아니고 무엇을 해서도 아니고 무엇을 성취해서도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기만 하면 기뻐하십니다. 삶의 목적을 주님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 4절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같은 내용을 명령형과 서술형으로 번갈아 말씀하신 데는 주목해야 할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가지 노릇을 제대로 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여기의 거한다(abide)는 단어는 지속적으로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번 믿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믿고 행한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나무 안에 있을 때 질병도 이깁니다. 벌레도 이깁니다. 가뭄도 궁핍도 물리칩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열매 맺는 가지가 되어 주 안에서 많은 열매를 내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열매 없는 마른 가지가 된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열매 맺는 나무이신 예수의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가지된 이들은 방심하지 말고 믿는 중에 더 잘 믿어야 합니다. 힘써 더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친밀함이 신앙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내게 영광 돌리라 18세기경 구두 만드는 실습생이었던 죤 워(John Warr)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증인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밑으로 다른 한 실습생이 고용되었고 죤은 그에게 반복하여 영적인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새로 온 견습생은 귀찮아했습니다. 어느 날 실습생이 위조 화폐 일 쉴링을 진짜와 바꾸려다 붙잡혔습니다. 수치스런 죄책감에 사로잡힌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죤 워는 그를 찾아가 기도 해주고 마음을 다해 도와주었습니다. 죤 워를 통해 견습생은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헌신적인 제자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젊은 견습생은 후에 인도의 선교사로 놀랄만한 결실을 맺은 윌리엄 캐리가 되었습니다. 캐리의 생애와 선교 사업은 세계복음화 전도사업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동료 직원에 대한 존 워의 영향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축복을 가져왔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왜 주님은 열매 맺기를 요구합니까? 잎도 아름답습니다. 꽃을 보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꽃은 예쁘고 향기롭습니다. 꽃은 보는 사람에게 감동과 환희를 선사합니다. 그런데도 아름다운 꽃이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꽃은 아름답지만 그 속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꽃은 재생산하지 않습니다. 꽃을 심어 꽃이 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꽃은 열매를 위한 과정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씨가 들어 있는 열매 맺음에 있습니다. 제자의 생명은 열매 맺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지에는 반드시 열매가 맺혀져야 합니다. 가지가 존재하는 목적은 단 한 가지, 나무가 바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 자신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지로서 포도나무이신 주님이 열매 맺도록 헌신을 다함이 그 본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기대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이요 제자가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구스타프 도레(Gustave Dore)라는 유명한 프랑스 화가가 있었습니다. 화가에게 제자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제가 예수의 얼굴을 그렸는데 한 번 봐 주세요” 구스타프가 그림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자네가 그분을 더 사랑한다면 더 좋은 그림이 나왔을 걸세!” 주님을 더 사랑했다면 더 멋진 그림이 나왔을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 사랑한다면 우리의 삶은 더 아름다워 질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 사랑한다면 우리의 봉사는 더 향기 나는 봉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한다면 우리는 더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부디 주님을 깊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깊이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열매 없는 실패 말미암아 괴로워합니까? 약함과 부족함으로 고민하십니까? ‘주님이 포도나무이시오 우리는 가지’라는 말씀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가지이지만 포도나무이신 예수와 하나가 될 때 우리를 통해 열매를 맺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연약한 가지인 것 같지만 우리와 하나이신 포도나무이신 예수 때문에 강한 자가 될 수 있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가지의 본분을 다하리라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붙어 있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 언제나 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