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워싱턴포스트지의 기자였던 로라 블루멘펠드(Laura Blumenfeld)는 아버지에게 총격을 가한 테러범과의 화해 과정을 담은 ‘복수, 희망의 스토리-Revenge: A Story of Hope’ 라는 책을 펴내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1986년 아버지와 함께 이스라엘을 관광하던 중에 팔레스타인 테러범이 쏜 총탄을 머리에 맞고 아버지가 쓰러지는 끔직한 일을 당하였습니다. 다행히 아버지는 목숨을 건졌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반드시 복수 하겠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히브리어와 아랍어에 능통했던 그녀는 워싱턴포스트지의 기자로 채용되어 1998년 이스라엘로 건너갔습니다. 곧 바로 이스라엘 법원기록을 뒤져 어렵사리 범인을 찾아내었습니다. 복수의 칼을 간지 12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범인의 이름은 ‘오마르 카티브’, 그는 25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이었습니다. 그녀는 피해자의 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범인과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막상 범인을 만나 얘기를 듣다 보니 범행동기에 관심이 갔습니다. 복수에 대한 충동이 끊이지 않던 그녀는 번민 끝에 복수심에 불타는 아랍인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복수와 관련된 역사적 사례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복수는 동물적인 본능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복수는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복수는 범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테러범을 용서하기로 하고 1999년 범인의 가석방을 위해 법원에 청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판사의 질문에 “우리 가족이 카티브를 용서했으니 이젠 이스라엘이 용서할 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가석방을 불허했습니다. 그녀는 처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테러범의 집을 찾았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범인의 가족들과 포옹을 나누며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녀는 수기를 맺으면서 “중동의 평화를 바란다면 꽉 막힌 정치문제부터 풀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가족들이 서로 만나고 이해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복수는 용서와 화해라는 사실임을 깨달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교회라는 한정된 범위 안에서만 할 것이 아니라 세상의 현장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구원받은 이방인들을 향한 메시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벽을 허물고 모든 죄인들을 은혜의 복음에로 초청하셨듯이 성도들은 서로 솔선하여 사랑의 봉사를 실천함으로 한 몸인 것을 드러내라고 권면합니다. 또한 이를 가능케 하는 방법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 받는 데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본문 5절에 나타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는 원어로 ‘카타 크리스트 예순’인데, 직역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 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특성과 모범을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십니까? 성육하신 하나님으로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표준이시며 모범이십니다. 모름지기 성도된 자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야 합니다. 일찍이 손양원 목사는 자신을 가리켜 ‘예수의 중독자’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로 살고 예수로 죽기까지 철저하게 예수 중심으로 본받고자 힘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손 목사는 진정한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어떻게 행하여야 합니까? 첫째로 약점을 담당해야 만수 김정준(金正俊) 박사는 찬송가 9장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하나님’의 작사자이며 한신대학 학장을 역임하였고 구약학의 학문적 토대를 닦은 신학자 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 폐병으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요양소에 들어갔지만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들을 수용하는 방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방이라고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김목사도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살아 있는 동안 가치 있는 일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병실을 다니면서 위중하여 거동을 잘하지 못하는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물도 떠다 주고, 각혈을 하는 환자의 피도 닦아 주고, 최선을 다해 환자들을 섬겼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는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고 교계에 영향력 있는 신학자와 목사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약해도 우리가 섬길 수 있는 약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언제나 강자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작고 미미한 힘이라도 자신만을 기쁘게 하려하지 말고 이웃을 기쁘게 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본문 1절입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여기의 ‘담당한다’의 ‘바스타제인’은 ‘지탱하다, 운반하다’는 뜻인데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자는 우리의 죄악과 질고를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합니다. 또한 ‘마땅히’는 ‘오페일로멘’ 인데 ‘빚지다, 해야만 한다’ 의 뜻으로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단어입니다. 약한 자가 짐을 지기에 힘든 부분을 강한 자가 거들어 그 짐을 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인데 강한 자는 사랑 안에서 이 일을 행해야 합니다. 사랑만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약점을 담당하러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 약점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약점을 담당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것입니다. 세상 논리는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논리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히려 강한 자가 자기보다 약한 자들을 도우며 더불어 사는 하나님 나라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약점을 들추어내어 비난할 것이 아니라 서로 약점을 담당하며 선을 이루어야 합니다. 선이 하나님과의 윤리적 관계라면 덕은 인간과의 윤리적 관계입니다. 따라서 약점을 담당하는 일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일이 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에 공동체의 덕을 세우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소망을 나누어야 랍비 휴고그린(Hugo G. Gryn)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수용소에 갇혀 온갖 고난을 겪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독일의 잡지에 기고했는데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그날은 1944년의 몹시 추웠던 겨울날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날이 유대인의 명절인 '하누카의 저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 아버지는 저와 친구들을 건물 한 구석으로 모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품안에서 진흙으로 만든 주발과 버터 한 조각을 꺼내었습니다. 버터는 수용소에서 구하기 어려웠던 것인데 아버지는 버터를 녹이시더니 거기에 심지를 적셔 불을 붙이셨습니다. 제가 ”왜 그 귀한 버터를 먹지 않고 낭비하느냐”고 항의했더니 아버지는 불꽃을 가만히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밥을 먹지 않고도 3주간을 살 수 있지 않느냐? 전에 수용소에서 사흘 동안 물을 안주어서 목말라 고통을 당했지만 그래도 물 안마시고 사흘 동안 살 수가 있지 않았느냐? 그렇지만 너도 알다시피 사람은 희망이 없으면 한 시간도 살 수 없지 않느냐? 내가 버터에 불을 붙인 것은 우리가 이 절망적인 수용소에 있더라도 하나님은 질그릇 가운데 희망의 불꽃으로 우리와 같이 계신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놀라운 말입니다. 고난에 빠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가슴속에 희망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역경과 고난에도 헤쳐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소망을 잃어버린 백성은 멸망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온갖 비방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소망으로 극복하였던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야 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여기의 비방은 ‘남을 헐어서 욕함’ 이란 사전적 뜻입니다. 바울은 시편 69편 9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하다 보면 사람들의 비난과 반대에 부딪혀 오해와 중상을 받게 되지만 이때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인내가 없으면 소망도 이룰 수 없으며, 위로가 없으면 소망도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내와 위로로 소망을 이루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해야 합니다.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성경의 위로하심으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 소망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며 절망하는 약한 사람들에게 소망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내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약한 자들과 더불어 소망을 나누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뜻을 같이해야 성 프란체스코(St. Francesco)가 제자 레오날드와 함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레오날드는 본래 귀족의 아들이었으며, 자기의 특수한 배경과 신분으로 말미암아 유달리 자존심이 강했던 자였습니다. 그의 특성 때문에 프란체스코 종단에 속한 형제들은 공동체 생활에서 자주 어려움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그 날도 프란체스코와 함께 길을 가던 레오날드는 프란체스코가 탄 나귀를 끌고 가는데, 갑자기 마음에 불평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영적인 스승이라고 하지만, 귀족의 아들인 내가 보잘 것 없는 배경을 가진 이 사람이 탄 나귀를 끌고 다녀야 하다니....” 마음속으로 불평의 소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귀를 타고 가면서 레오날드를 위해 기도하던 프란체스코는 곧바로 레오날드의 마음속에 불평이 가득하다는 것을 성령으로 감지 할 수 있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형제가 맞소. 형제가 나귀를 타고 가는 것이 합당하오. 내가 걷겠소.” 프란체스코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레오날드는 길에 엎드려 마음속에 있었던 자존심과 시기를 자백했습니다. 그 후로 프란체스코 종단은 레오날드로 인한 분열의 위기를 넘어섰다고 합니다. 성령의 사역에 의한 사랑과 겸손만이 일치를 이룰 수 있음을 교훈하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 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은 자기주장만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뜻을 같이하여 화합과 일치를 이룹니다. 그리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합니다. 그러나 이일이 결코 쉽지 않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마음을 같이 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가장 필요한 부분은 뜻을 같이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강한 자가 약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이 손해 보는 일같이 여겨져 꺼리면서 하나 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더욱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그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한 뜻과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함께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뜻과 마음이 일치되지 못하고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 결코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John Stott)는 2007년 7월 18일 영국에서 열린 케직 사경회에서 은퇴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복음주의 신학자이었기에 회중들은 그가 마지막으로 어떤 설교를 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제 삶이 끝나가려 하는 지금, 제 마음이 안식을 얻는 그 곳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 원한다”라고 서두를 꺼낸 스토트 목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품으신 뜻이 무엇인가?”의 물음을 던지고 차분히 말을 이어갔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을 본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임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바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삶에 있음을 증거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 향기를 드러내어야 합니다. 부디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시기 바랍니다. 위로와 인내로 소망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약한 자와 한 뜻을 이루어 하나님께 함께 영광 돌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