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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말, 같은 마음, 그리고 같은 뜻으로(고전 1:10-17)


같은 말, 같은 마음, 그리고 같은 뜻으로

(고전 1:10-17)





독일의 저명한 설교학자인 루돌프 보렌(R. Bohren)은 [설교학](Predigtlehre)이란 책을 출판해서 설교자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이 책이 우리말로도 번역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이 책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한국의 독자들에게”라는 제목의 서문을 덧붙였습니다. 이 서문에 자기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소감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착륙 직전에 비행기에서 창밖을 내다보았을 때, 처음 내 눈에 띈 건물은 분명 어느 그리스도의 교회였습니다. 서울에 도착해서 차를 타고 시내를 들어오면서 나는 수많은 교회를 보고 정말 놀랐고, 이 땅에 새겨진 신앙의 위력을 보고 기쁨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유럽에서 나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용기와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에 대하여 들은 바 있습니다. 나의 이번 한국방문은 나를 아주 감동케 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이번 방문은 나에게 다른 하나의 생각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그것은 곧 교회의 분열에 대한 것입니다.”



이분은 처음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두 가지 때문에 놀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기독교가 크게 부흥한 것에 놀랐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가 사분오열된 것에 놀랐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서구 기독교인들이 볼 때 한국교회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점들이 있습니다. 우선 기독교의 부흥 때문에 놀랍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50개 중에 우리나라에 1위와 2위를 비롯해서 23개가 있다고 합니다. 선교역사가 겨우 130년 정도 밖에 안 된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교회 분열 때문에 놀랍니다. 예를 들어 장로교교단이 1915년 처음 교단을 창립한 이래로 약 100년 동안 200여 교단으로 분열되었습니다. 통합, 합동, 기장, 고신을 비롯한 크고 작은 교단 200여개로 분열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 하나의 교단이 이렇게 많이 분열될 수 있을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선교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크게 부흥한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역시 선교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심각하게 분열해 온 부끄러운 모습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고린도교회가 그렇습니다. 당시 교회가 이방지역에 세워지는 과정 중에서 눈에 띨 정도로 크게 부흥했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놀라운 영적은사들이 나타났고,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게 되면서 양적으로도 크게 부흥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자랑거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에 주목할 만한 문제가 대두됐습니다. 바로 교회 안에 파벌이 생겨났다는 점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그러니까 고린도교회 안에 네 개의 파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고 그리스도파입니다. 이렇게 고린도교회는 자칫 네 개의 교회로 분열되기 직전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고린도교회의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영적인 역사가 왕성한 교회, 남다르게 부흥하는 교회에 이렇게 분열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네 마리의 황소”라는 이솝의 우화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 사이좋은 네 마리 황소가 있었습니다. 어딜 가든지 함께 다니고 좋은 풀밭을 만나면 절대로 먼저 나서지 않고 함께 사이좋게 풀을 뜯고, 위험한 일이 생기면 힘을 모아 함께 헤쳐 나갔습니다.

그런 황소들을 잡아먹기 위해 노리는 사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백수의 왕 사자라 할지라도 네 마리의 황소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황소를 잡아먹을 궁리를 하던 사자는 풀을 뜯다가 다른 세 마리에게서 조금 뒤처진 황소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습니다. 놀란 한 마리 황소가 친구들에게 뛰어가려는 데 사자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다른 황소들이 그러는데 너 혼자만 풀을 너무 많이 먹는다고 흉을 보더라." 그렇게 사자는 다른 황소들에게도 거짓말로 모함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황소들이 그러는데 네가 덩치가 가장 작고 힘이 약해서 별로 쓸모가 없데." "진짜 맛있는 풀이 나는 언덕을 너한테만 알려주지 않는다더라." "네 뿔이 너무 못생겨서 보기 싫데."

계속되는 사자의 거짓말에 사이가 틀어진 황소들은 서로를 불신하고 미워하게 되어 뿔뿔이 흩어졌고, 결국 차례대로 사자에게 잡아먹혔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 분열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사탄의 역사 때문입니다. 사탄은 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막으려 합니다. 이 때 사탄이 사용하는 전술이 바로 분열전술입니다. 서로 경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시기하게 만듭니다. 그러다 파벌을 만들게 하고, 결국 분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실을 아시고 중보기도 하셨습니다. 요 17:11을 보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성령께서 지금도 우리 안에 계시면서 하나 되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엡 4:1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그렇습니다. 사탄은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을 하나 되지 못하게 역사합니다. 경쟁하게 하고, 시기하게 하고, 갈등에 휘말리게 하고, 파벌을 조성하게 하고 그러다 결국 갈라서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들이 하나 되도록 중보기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오늘도 우리 안에서 하나 되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고린도 교인들에게 10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성령께서 고린도교회를 하나 되도록 힘쓰시는 것에 힘입어 서로 온전히 합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온전히 합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을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같은 말을 하라



같은 말을 하라



우선 같은 말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같은 말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양무새처럼 똑 같은 말을 하라는 말일까요? 다양한 언어가 아니라 한 언어를 사용하라는 말일까요? 물론 그런 뜻은 아닙니다.



본문의 “말을 하고”라는 말은 “레게테”(λεγήτε)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지금은 잘 사용되지 않는 고전적인 표현입니다. 그 원뜻을 살려보면, “같은 말을 한다.”는 표현은 정치적인 공동체가 분열이나 파당이 생기지 않고, 서로 잘 연합되어 있을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국회에서 청문회하는 것을 지켜본 일이 있습니다. 어떤 청문 대상자가 몇 가지 흠결이 있습니다. 여당의원들은 한결 같이 이분을 옹호하려고 발언을 쏟아냅니다. 심지어 자기들이 야당시절 상대방을 공격했던 똑같은 흠결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옹호합니다. 반대로 야당의원들은 역시 한결 같이 이분을 공격합니다. 흠결을 크게 부각시켜서 낙마를 시키려고 합니다. 여야 의원들은 저마다 당이 정한 방침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입을 맞춰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여당의원들은 자기들끼리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당의원들 역시 자기들끼리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여당의원들과 야당의원들은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같은 입장을 표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같은 말을 해야 합니다. 우선 우리가 무엇을 믿는 지에 대해서 같은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함께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무엇을 믿는 지에 대해서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하면서 같은 말을 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신앙적인 면에서는 분열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하려고 해야 합니다. 특히 무신론자들에 대해서 같은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고 단호하게 말해야 합니다. 세속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 뜻대로 역사하신다고 단호하게 말해야 합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해야 합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 얻을 수 있다고 단호하게 말해야 합니다. 교회를 비난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해야 합니다. 비록 교회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교회가 희망이라고 단호하게 말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믿음 가운데 굳건하게 서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열심히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격려하고 말씀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럴 때 사탄이 우리를 분열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같은 마음을 가지라



다음으로 같은 마음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같은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 말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쓴 다른 편지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롬 12:15-1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이 말씀에서 서로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을 말합니다. 즐거워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서 축복해 주고, 슬퍼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위로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자존감이 낮아서 마음이 위축되어있는 사람을 격려하여 세워주고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을 말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공감”(Empathy)라고 합니다. 그리고 공감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대상을 알고 이해하거나, 대상이 느끼는 상황 또는 기분을 비슷하게 경험하는 심적 현상을 말한다.”



그리고 공감을 잘하는 방법을 제시해 주는 이론으로 ‘모사이론’(Simulation Theory)이란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려면 우선 그 사람의 입장이나 상황으로 나 자신을 투사합니다. 그리고 나의 심적 상태가 어떠할지를 상상합니다. 이후 내 심적 상태를 유비추리를 통해 타자에게 투사합니다.



어느 대학병원에 소문난 명의가 한 분 있습니다. 이 분은 한 번 진료를 받으려면 예약하고 3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진료과목은 류마티스 내과입니다. 한 방송에서 도대체 왜 이분이 그렇게 소문이 났을까를 심층 취재를 했습니다.

답은 의외였습니다. 물론 이분은 의사로서 탁월한 진료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분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지 못한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공감의 능력입니다.

사실 류마티스 환자는 대부분 고령의 노인들입니다. 그리고 류마티스가 통증이 심한데 노인들은 이 통증에 대한 설명이 정확하지 않은데다가 말이 많습니다. 이 분은 환자들을 자기 어머니처럼 살갑게 대합니다. 그리고 아프다고 하면 통증부위를 만지면서 얼마나 아프셨느냐고 이곳은 정말 아픈 곳인데 잘 참으셨다고 말한 답니다. 이런 공감의 언어가 환자들을 위로하며 치료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 분은 공감할 줄 아는 의사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같은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공감할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고, 서로 격려하고, 서로 위로할 때 공동체는 더욱 든든하게 하나가 될 것입니다. 사탄이 이런 틈을 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같은 뜻을 세우라



그리고 같은 뜻을 세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한 뜻으로 하나를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같은 목표를 갖는 공동체를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 서로 다른 뜻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는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 누구는 아볼로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 누구는 베드로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 그리고 누구는 직접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공동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암 3:3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뜻이 다른 사람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 뜻을 하나로 모으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일전에 5호선 천호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노인이 발을 헛디뎌서 열차와 승강장 사이에 끼이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본 한 청년이 열차를 미는 것입니다.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이를 지켜보던 친구 두 사람이 같이 뛰어내려서 밀었습니다. 역시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플랫폼에서 이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철로로 내려갔습니다. 금방 10여명이 뭉쳤습니다. 그리고 함께 영차 영차를 외치며 열차를 밀었습니다. 놀랍게도 열차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노인을 구했습니다.



저는 이 뉴스를 들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 시민들 가운데 서로 도우려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참 많다는 생각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더 큰 깨달음을 받았습니다. 서로 뜻을 합하면 큰일도 이룰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같은 뜻을 갖는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깊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공동체가 뜻을 하나로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건강하게 세워 가는데 뜻을 모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되어 가는데 뜻을 모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에 뜻을 모아야 합니다. 이렇게 뜻을 모아 함께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갈 때 사탄이 틈을 탈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역사가 왕성한 곳에 사탄도 호시탐탐 틈을 보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은 시기하게 하고 갈등하게 하고 분열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갈등에 휘말리고 분쟁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교회를 더욱 하나로 든든히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을 갖고, 그리고 같은 뜻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사탄이 틈을 타지 못할 것이고 성령의 하나 되게 하는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