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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한 세상 속의 거룩한 백성 잠 7:24-27


음란한 세상 속의 거룩한 백성

잠 7:24-27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음란한 시대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누구라도 언제 어디서나 음란물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절제하기 힘든 청소년들이나 어린이들마저도 손쉽게 음란물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SNS가 네트워크의 대세가 되면서 누구라도 성매매의 유혹에 노출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은밀하게 성매매에 접근할 수가 있고, 매춘부가 아니더라도 손쉽게 성매매의 자리에 뛰어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간통죄가 폐지되면서 간음에 대한 법적 방어막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법적인 부담감 없이 손쉽게 음란의 수렁에 빠져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최근에 이보다 더 큰 문제들이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우선 동성애문제입니다. 동성애자들이 성소수자라는 미명하에 동정을 받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성애를 문제시하거나 금하는 것을 하나의 차별이라 하여 공격하고, 심지어 아예 법으로 제정하여 동성애를 보호하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동성애가 옹호될 뿐 아니라, 동성애에 대한 호기심이 늘어가고 동성애 가담자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폴리아모리’(polyamory)라는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폴리아모리란 두 사람 이상을 동시에 사랑하는 다자간의 사랑을 뜻하는 말입니다. 지난 2008년에 개봉됐던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영화가 단적으로 이 현상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지금 자기와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와 또 결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남자가 이것을 다 인정합니다. 그래서 한 여자가 두 남자와 동시에 결혼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일부다처제와 다른 형태이고 말하자면 이중결혼입니다.



최근 한동대에서 한 학생이 두 여학생과 동시에 연인관계를 유지하며 동거하면서 자기가 폴리아모리라고 커밍아웃했습니다. 그리고 이중의 한 여학생이 한동대 내의 한 동아리 세미나에서 자기들의 폴리아모리 실태를 설명하면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영화가 아니고 실재로 서구사회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한 남자가 배우자의 인정 속에 다른 여자와 또 다른 부부관계를 맺고, 또 한 여자가 배우자의 인정 속에 다른 남자와 또 다른 부부관계를 맺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 시대의 음란은 어디까지가 그 끝인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음란, 무엇인 문제인가?



그러면 음란은 무엇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음란을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봐야할까요?



첫째, 하나님의 반응



음란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음란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창 6:1-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그리고 6: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해 한탄하시고, 사람 때문에 근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배필을 찾기보다는 성적인 것에 끌려서 결혼상대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성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적인 관점에서 관계가 형성되는 것 바로 이것이 음란의 시작입니다. 성적인 눈으로 누군가를 바라보고, 성적 호기심으로 누군가를 만나고, 성적인 욕망으로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것 이것이 음란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 때문에 마음에 근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한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그 위치에 세워놓은 것을 한탄하시고, 그 사람에게 베푸신 여러 가지 은혜와 복에 대해 한탄하신다는 것입니다.



창 19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심히 무거워서 두 천사를 파견하셨습니다. 소돔사람들이 두 천사가 롯의 집에 들어간 것을 보고 몰려 왔습니다. 5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과 상관하리라” 이 광경을 지켜본 천사들이 손을 써서 사태를 수습했고, 결국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소돔사람들은 낯선 사람이 나타나니까 성관계를 맺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남자들은 동성애를 하자고 몰려들었고, 여자들은 낯선 남자와 성관계를 맺고자 덤벼들었던 것입니다. 성적타락이 극에 달한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멸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부부관계의 경계를 넘어선 성관계가 바로 음란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아닌 상대와 쾌락을 위해 성관계를 맺는 것 그것이 음란입니다. 물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쾌락을 위해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말할 나위 없는 음란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음란행위에 대해 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결코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준엄한 심판을 내리십니다.



둘째, 사람의 결과



음란의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음란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창 6: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음란을 저지른 하나님의 아들들이 육신이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육신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창 2:7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생령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령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 곧 하나님과 소통하는 영적인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음란을 저지른 후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외면하시자 영이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육신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룩을 잃어버린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음란에 빠져들게 되면 존재가 달라집니다. 육신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에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닫힙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됩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 뜻대로, 감정대로, 욕망대로 살아가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을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딤후 3:5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을 잃어버리니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삼손 이야기를 잘 압니다. 나실인으로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거룩한 사람들 가운데도 특별히 거룩하게 살기로 결단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을 이끌 영적 지도자인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남다른 능력을 주셨습니다. 바로 적들을 무찌를 수 있는 괴력입니다.



그러나 그가 나실인으로 지켜야 할 약속을 어겼습니다. 특히 음란한 삶을 살았습니다. 성적인 눈으로 배우자를 택합니다. 성적인 욕망에 눈이 멀어서 음란한 여인들과 어울립니다. 결국 거룩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실인이요 사사가 거룩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음란에 빠져들면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영적인 삶을 살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볼 때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는 있어도 하나님 보실 때는 더 이상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경건의 모양만 있지 경건의 능력은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음란은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근심하게 만들고 나아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이 단절된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게 만듭니다. 나아가 경건의 능력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음란을 경계해야 합니다.



음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음란한 세상에서 거룩을 지켜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소극적 노력

우선 소극적인 노력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 25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되지 말라” 한 마디로 말하면 음란에 빠져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음란의 공격에 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소극적인 방어에 대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맹모삼천지교’라는 고사가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교육을 위해서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맹자의 집은 공동묘지 근처에 있었습니다. 늘 장례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맹자가 이것을 보고는 늘 장례 치르는 흉내를 내며 노는 것입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이사를 합니다. 그런데 이사한 곳이 시장 근처입니다. 맹자는 늘 장사하는 흉내를 내며 노는 것입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역시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또 이사를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서당 근처입니다. 맹자는 늘 공부하는 놀이를 하며 놀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어떤 환경가운데 있느냐에 따라서 삶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음란한 환경을 벗어나는 일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고 해도 음란한 환경 속에 오래 머물면 서서히 영향을 받게 됩니다.



우선 우리가 음란한 사람을 멀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입만 열면 음담패설을 늘어놓습니다. 낄낄거리며 음담패설을 나누는 것을 좋아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음란을 저질렀던 일들을 서슴없이 이야기합니다. 심할 경우는 마치 무슨 영웅담을 말하듯이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우리에게 음란을 권합니다. 심할 경우 우리를 미혹합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피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음란한 자리를 멀리해야 합니다. 대체로 음란은 술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게 되면 부끄러움이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음란한 이야기들이 거침없이 오고갑니다. 그리고 서서히 성적욕망이 일어납니다. 이어서 음란한 행동들이 나타납니다. 어떤 경우는 처음부터 음란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음란을 저지릅니다. 우리가 이런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음란한 문화를 멀리해야 합니다. 요사이 IT기술의 발달로 너무도 손쉽게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됐습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집안에서 영화, 게임, 오락, 그리고 책이나 음악까지도 클릭 한번으로 접근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화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부분이 음란에 점령당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음란문화를 언제 어디서 그것도 무료로 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참 많은 사람들이 음란문화에 빠져있습니다. 심한 경우는 중독에 걸려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음란문화를 피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절제의 은사가 필요합니다. 하고 싶어도 참을 수 있는 은사가 필요합니다. 하다가도 아니다 싶으면 중단할 수 있는 은사가 필요합니다. 습관을 끊어내는 은사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절제로 우리의 삶의 환경 속에 음란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적극적 노력



다음으로 적극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본문 24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아들들아 내 말을 듣고 내 입의 말에 주의하라”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는 말씀입니다. 음란에 대한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음란의 공격에 대한 적극적인 방어라 할 수 있습니다.



히 4:1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렘 23:29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이 두 말씀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말씀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이런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챨스 알렌 목사님이 쓴 [심령의 치료자 하나님]이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사업가가 심한 스트레스로 정신과 치료를 받던 중에 담당의사의 추천으로 알렌 목사님을 찾아와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자수성가하여 큰 기업은 이루었지만 성공 뒤 찾아온 공허감을 이기지 못해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알렌 목사님은 약을 처방해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드리는 약은 매일 다섯 번씩 일주일을 먹어야 합니다. 한꺼번에 많이 먹어도 안 되고 건너뛰어도 안 되고 먹다가 쉬어도 안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이 약을 먹고, 아침 식사 후에, 점심 식사 후에, 저녁 식사 후에 그리고 자기 전에 이 약을 먹어야 합니다. 철저하게 처방대로 해야 합니다."

이분이 집에 돌아와 약을 꺼내보니 조그만 종이에 시편 23편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한번 그대로 해 보리라 다짐을 하고는 철저하게 처방대로 실천했습니다. 놀랍게도 자기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분이 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시편 23편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어느새 푸른 초장 위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이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음란을 극복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말씀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때 음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레 11:4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이 말씀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음란의 영이 나를 유혹할 때 이 말씀을 7번 되뇌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 보십시오. 어느새 음란의 영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입니다. 내 안에서 정욕이 솟구쳐오를 때 마찬가지로 이 말씀을 7번 되뇌이시기 바랍니다. 어느새 음란은 저 멀리 도망쳐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