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4월 5일은 부활 주일이었습니다. 아침에 인천 제물포항에 언더우드 선교사와 (Horace G. Underwood)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선교사가 도착하였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제물포에 첫발을 딛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 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분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옵소서!” 그는 미국 뉴저지의 드류 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최초 선교사로 조선 땅에 왔습니다. 배재학당과 정동교회를 세우고, 출판과 성서 번역에 공헌을 하는 등 많은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 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올라 탄 배가 침몰하게 되자 선실에 갇힌 조선인들을 구하다가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순교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딸 엘리스 아펜젤러와 아들 헨리 아펜젤러가 그의 뒤를 이어 한국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대로 한국 교회는 유례없는 부흥을 이루었고, 미국 다음으로 많은 2만 4천명이 넘는 선교사를 세계 곳곳에 보내는 선교 대국이 되었습니다. 순교하기 얼마 전 아펜젤러는 동료 선교사의 장례식에서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육체가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는 강가에 우리의 막벨라 묘지를 두기 위해 일상의 바쁜 일들을 멈추고 모였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이방인이며 순례자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죽음에는 순서가 없습니다. 몇 주 전 아픔으로 고생하던 한 형제가 주님 품 안으로 갔고 지금 또 한 형제가 우리의 곁을 떠났습니다. 잠자는 것에 관하여 근심하는 형제들이여! 마치 아무런 희망도 없는 다른 사람처럼 근심하지 마십시오. 사망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주 안에서 잠자는 자들을 데리러 오실 것이며, 우리는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부귀, 영화, 물질 어떤 것으로도 인간의 근본적인 죄와 절망,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무덤 앞에 서 있는 여인들처럼 절망 가운데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셨습니다. 본문에 보니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이 새벽에 예수가 묻히신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시신에 바르려고 향품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무덤 속에 예수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여인들은 당황했습니다. 그 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습니다. 그리고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말합니다. 여인들은 누구보다 예수를 무척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열 두 제자보다 더 예수를 사랑했고, 예수를 도왔고, 예수를 잘 믿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은 존재였습니다. 그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도 믿지 않았고, 메시야이심도 믿지 못하였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으며 무덤이 마침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예수의 시신을 보기 위해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아직 무덤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사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렇다면 천사가 전하는 ‘주가 살아나셨느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주가 살아나셨기에,
첫째로 근심치 말아야 루마니아의 작가 게오르규(Constantin V. Gheorghiu)의 ‘25시’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선량한 농부 모리츠를 주인공으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낀 약소민족의 고난과 운명을 그린 작품입니다. 24시간이 지나가면 희망의 날인 새로운 1시가 오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약소국가 루마니아에는 24시가 지나도 새로운 1시가 오지 않고 고통과 절망의 시간이 계속되는 25시로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루마니아 뿐 아니라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절망의 25시로 걸어가는 우리에게 소망의 시간인 새로운 시간 1시를 주십니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하는 삶에는 25시의 삶이 아니라 새로운 1시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25시의 죽음의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1시로 살아 나셨느니라”고 말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살아나셨느니라’고 말하는 천사의 말대로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근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문 4절입니다.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여인들이 근심한 근본적 이유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여인들이 부활의 예수를 믿었다면 오히려 무덤이 빈 것을 보았을 때 기뻐했을 것입니다. 여인들이 기뻐해야 할 상황에서 부활을 예고하신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근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셔서 눈에 눈물을 닦아주시고 고통의 멍에를 져주시고 형통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마음에 기쁨이 회복됩니다. 평강이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시던 새벽에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은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게 되었고 근심이 떠나가며 기쁨이 충만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어둡고 공허한 심령에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심으로 부활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둘째로 말씀을 기억해야 이철환 작가는 소설 ‘연탄길’ ‘곰보빵’으로 유명합니다. ‘연탄길’은 무려 360만 명이 읽었고, 중국 대만 일본으로 수출되었습니다. 그 책이 실린 글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이 정도면 대다한 성공을 거둔 겁니다. 그런데 그가 청년 시절에 3년간 우울증으로 고생했다고 합니다. 지독히 가난해서 리어카를 끌면서 사과 장수도 하고, 산동네를 다니며 양말도 팔고 그랬습니다. 하지만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림을 그렸는데 아무도 사 주지 않아 포기하고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출판사마다 거절했지만 야학교에서 7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며 계속 글을 썼습니다. 다행히 출판 기회가 생겼고, 수입의 절반을 가난한 이웃돕기에 기부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유명작가가 됩니다. 그의 글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기름때 찌든 작업복을 입고 있을 때도 나는 프란츠 카프카를 읽고 있었다. 아무도 사가지 않는 그림 옆에 서서 고개를 들 수 없을 때도 나는 알베르 카뮈를 읽고 있었다. 도스토엡스키와 말라르메, 스타니슬라프스키와 헤르만 헤세가 있어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셨기에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희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요, 그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살아계신 부활의 주님을 기억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여인들과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함께 하시면서 다시 살아나시리라고 하신 말씀을 믿지 못하였고 그 말씀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빈 무덤을 확인하면서도 ‘예수가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전혀 해보지 못한 것입니다. 빈 무덤을 보고도 부활을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이 인격에 스며들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말씀이 깊이 스며듭니다. 지성과 감성과 의지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로 인해 가치관이 달라지고, 인생관이 달라지고, 세계관이 달라집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서 빈 무덤을 본다면 예수의 부활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기억할 때 거기에 부활의 주님이 계시고 또한 만나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소식을 알려야 남북 전쟁 때 참전하였던 군인이 전세가 불리해 후퇴를 하다가 지휘도를 놓고 왔습니다. 지휘도를 놓고 왔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운 일이었지만, 적진 속으로 되돌아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데, 링이라는 소년 병사가 목숨을 걸고 적진으로 들어가 지휘도를 찾아냈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던 소년 병사는 총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죽어가는 병사는 그에게 지휘도를 전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령님,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늘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시 무신론자였던 대령은 소년의 시신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소리쳤습니다. “오! 하나님, 이 어린 병사 앞에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부활을 믿는 소년의 죽음 앞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코넬은 부활의 주를 위해 남은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예일대를 졸업한 그는 신학교에 들어갔고 38세 때 목사 안수를 받고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1925년 82세로 타계할 때까지 5천번이나 강연을 했습니다. 그는 골든 콘웰 신학대학원을 세운 러셀 콘웰(Russell Conwell) 박사입니다. 후에 유명한 미국 템플대학도 세웠습니다. 본문 9절입니다.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무덤을 향한 발걸음이 부활을 증거하는 발걸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빈 무덤만 바라보는 신앙이 아닙니다. 마리아와 여인들처럼 무덤에서 발을 돌이켜 전해야 합니다. 부활 신앙은 단순히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현재적 임재를 믿고 알려야 합니다. 주님은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이들에게 축복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우리가 부활을 알리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믿지만 부활하신 예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절 예배도 형식적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아무 감동 없이 기념식을 지키듯이 드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부활의 주님을 향해 달려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름지기 주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알리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Tuesdays With Morrie)’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운동세포가 파괴되어 가는 불치의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노교수 모리 슈워츠, 죽음의 날을 카운트다운 하고 있는 그에게 제자 미치 앨봄(Mitch Albom)이 화요일마다 찾아가서 인생을 함께 논하는 내용을 담은 내용입니다. 그 글 가운데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네. 만일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사람들은 금방 딴 사람이 될 걸세.”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 수긍하지 않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남의 이야기처럼 듣는 사람들에게 어찌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까?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성도에게 예수가 다시 사셨다는 것이 기쁨이요, 소망을 불어넣는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해마다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마음에 기쁨과 소망이 없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부활절만의 주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를 위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더 이상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으며 근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말씀을 믿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의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신하며 그 부활의 주님을 만방에 알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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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26 11:16: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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