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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광일목사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4~21

어느 곳에 두 집이 있었습니다. 한 집에는 아이가 없는 중년 부부가 살고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싸움이 그치는 일이 없었습니다. 옆집에는 대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젊은 부부와 두 아이 그리고 시부모까지 함께 사는 대식구였지만, 언제나 온 집안이 싱글벙글 웃는 낯이며 보기에도 아주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부부 싸움을 일과처럼 하고 있는 옆집 부부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깨끼였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옆집에 찾아가 대체 어떻게 해서 많은 가족들이 매일매일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살아가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옆집의 젊은 주인이 웃음을 띠면서 , 그것 말입니까? 당신네 집에서 부부싸움을 그치지 않는 것은 두 분이 다 착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에 싸움이 없는 것은 모두 악한 사람들만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옆집 주인이 깜짝 놀라며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착한 사람만 사는 집에 싸움이 있고 악한 사람만 모인 집에 싸움이 없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러자 젊은 주인이 대답하기를 만약 내가 방 한가운데 놓여 있던 물그릇을 모르고 발길로 엎었다고 칩시다. 나는 , 이것은 내가 부주의해서 그랬으니 내가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아내는 빨리 치우지 않은 내가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 어머니께서는 아니다, 얘들아. 나잇살이나 먹은 내가 옆에 있으면서도 그걸 보고만 있었으니 내 잘못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두가 자진해서 나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싸움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로마서는 두 부분으로 분류하는데 1-11장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이론인 교리적인 부분입니다. 그리고 12-16장까지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한 부분으로 구체적으로 삶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2장은 믿음으로 의를 얻은 자의 생활을 언급하는데 본문은 미워하고 핍박하는 원수에 대한 사랑에 대하여 강조합니다. 9-13절이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이라면 본문은 이웃 사랑의 범주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의 이웃은 우호적인 이웃뿐만 아니라 자신을 핍박하는 대적까지 적용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웃사랑은 교회안의 형제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관계까지 적용되어야 합니다.

본문 18절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여기의 화목은 원어로 에이레뉴오인데 신약에 4회 나오며 평화를 유지하다, 사람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좋아하는 자 뿐 아니라 좋아하지 않은 자와도 화목해야 합니다. 잘 해주는 자 뿐 아니라 상처를 준 원수까지도 이웃에 포함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화목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를 보내주신 것처럼 우리도 화목을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반드시 화목의 직책을 감당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더불어 화목하려면,

 

첫째로 축복하여야

앤서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의 글입니다. 어느 사람이 마켓을 운영하는데, 맞은편에 새로운 마켓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불안해진 그는 스승을 찾아가 망하게 되었노라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10년 동안 마켓을 했는데, 맞은편에 들어온 마켓 때문에 문을 닫게 되었다고 큰 걱정을 합니다. 그러자 스승이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자네가 새로 생긴 마켓 주인을 두려워한다면 그를 증오하게 될 것이고, 그 증오는 결국 자네를 파멸케 하는 원인이 되고 말 것이야.” 그는 깜짝 놀라며 묻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매일 아침마다 자네 마켓을 위하여 축복하고, 돌아서서 길 건너에 있는 마켓도 축복하게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다시 묻습니다. “아니 스승님, 그는 경쟁자이면서 내 마켓의 파괴자인데 어떻게 축복합니까?” 그러자 스승이 말합니다. “자네가 그에게 축복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네에게 좋게 되돌아 올 거야. 그러나 자네가 바라는 저주는 무엇이든 자네를 멸망시키고 말 것이야.” 6개월이 지난 후 마켓 주인이 스승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걱정과 근심만 했다면 마켓을 닫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승님 말씀대로 하여 지금은 그 마켓까지 인수하게 되었고 어느 때보다도 경기가 좋아졌습니다.”

본문 14절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여기의 축복이란 뜻은 좋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박해하는 자를 사랑합니까? 어찌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할 수 있습니까? 저주를 해도 시원치 않은데 축복하라는 것이 가능한 말입니까? 여기에 엄청난 은혜가 숨어 있습니다. 저주하는 자의 인생은 계속 저주를 받는 인생이 되지만 축복하는 자는 계속하여 축복을 받는 인생이 된다는 은혜입니다. 남을 축복하는 사람은 자신이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축복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을 스스로해결하려 들면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해결해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핍박하며 괴롭히는 사람을 축복하여야 합니다. 원수까지도 축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이 어렵고 불가능하다고 저주하면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복하여야 합니다. 축복하면 그 축복이 되돌아옵니다. 반대로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은 자신도 해를 당하게 됩니다. 반드시 축복하여 불화가 아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함께 하여야

외솔 최현배(崔鉉培) 선생은 일제 때 조 어 학회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해방 후에도 한글 사랑에 일생을 바친 위대한 학자였습니다. 그분이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의 일입니다. 선생의 집 앞마당이 항상 깨끗했습니다. 매일 새벽에 와서 마당을 쓸고 가는 낯선 청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이웃 사람이 청년에게 까닭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함흥 감옥에서 최현배 선생님과 한 방에 있었습니다. 배탈이 나서 크게 고생한 적이 있었는데, 최 선생께서 저를 보시고 굶으면 낫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시고는 혼자 어려울 터이니 같이 굶자고 하시면서 하루 종일 저와 함께 굶으셨습니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저의 아픈 배를 어루만지면서 정성껏 돌봐 주셨습니다. 아무도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는 감옥 속에서 받은 그 은혜를 어떻게 해서라도 갚고 싶었지만, 가진 것이 없는 처지라 선생님 집 마당이라도 쓸어 드리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외솔선생은 갇힌 자와 함께 아픔을 함께 했습니다. 그 결과 함께 일하는 자가 생겼고, 도우는 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함께 갇히면 함께 일하는 자가 됩니다.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운다면 함께 일하는 자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화목의 직책을 감당하려면 모든 일에 함께 하여야 할 것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화목은 함께하는 데 있습니다. 슬픔을 함께 하며 함께 우는 것은 영적이고 윤리적인 소양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특히 잘 되는 일에 대하여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초대교부 크리소스톰의 말입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은 웃는 자와 함께 웃는 것보다 쉽다. 왜냐하면 웃는 자와 함께 웃기 위해서는 훨씬 더 고매한 인격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웃이 잘 되는 것에 대하여 시기하며 함께 하지 못함이 죄악입니다. 이기주의라는 죄입니다. 울어줄 일이 있는데 함께 울지 않는 것, 웃어 줄 일에 함께 웃지 않는 것이 바로 이기주의입니다. 우리는 이기주의를 극복하여야 화목을 이루게 됩니다. 공감대를 가지고 즐거운 일에 함께 즐거워하고 슬픈 일에 함께 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더불어 화목의 역사가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겸손하여야

데이브 에그너(Dave Egner) 교수가 학회의 발표자로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학회에는 다른 교수들도 참석하여 발표가 동시에 이루어지는데 발제자가운데 유명한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학회가 시작되자, 진행자는 발표자들을 소개하면서 수 있으면 그 유명한 학자의 발표에 많이 참석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그를 학회에 모시게 되어 대단히 영광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에그너 교수는 불쾌한 마음이 되어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도 어느 정도 알려진 사람이고, 발표를 준비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사용하지 않았는가? 학회를 위해 가족들과 시간도 포기하였는데 책임자는 왜 그의 발표에만 많이 참석하라고 하는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무시당한다고 느끼니 마음이 불편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학회를 위해 발표장으로 가는 도중에, 자신이 불쾌하고 평안이 없는 이유는 교만과 시기심 때문이라고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발표에도 사람들을 많이 보내어 주실 것이라고 확신을 주셨습니다. 에그너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나 아닌 다른 사람이나 혹은 경쟁자를 나보다 낫다고 말하며, 자신의 노력과 수고를 인정해주지 않을 때 평안을 잃고 흔들리지는 않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교만 때문입니다. 시기와 교만으로 다른 사람과 불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목하기 위해 낮아져야 합니다. 겸손으로 더 낮은 자리에 처하기를 즐겨야 합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야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높은데 마음을 두지 않고 낮은데 처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남보다 더 가졌다든지, 더 배웠다든지, 더 누린다든지, 더 나은 지위나 힘이나 권력이 주어져 있다고 교만하게 행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낮아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겸손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높이는 삶입니다. 자신의 공로를 생각하고 자신을 높이는 모습은 교만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언제나 부족을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서로 높아지려고 할 때 그 안에 불화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서로 낮아지려 한다면 화목하게 되는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남아공의 만델라(Nelson Mandela)는 인권운동가로서 27년 동안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방되자마자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먼저 화목을 주선했기에 흑백의 갈등을 해결하는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백인교회는 여전히 흑인인 그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만델라는 그 교회까지 찾아가 예배에 참여하여 화목을 주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우리에게 책임을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목하십니까? 아니면 불화 가운데 있습니까?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화목의 대사가 되어야 합니다. 부디 박해자를 위하여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우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는 자가 되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을 이루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6-04-09 20:4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