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승건 선교사의 저서 ‘나가사키의 십자가’는 일본에서 기독교를 처음 받아들인 나가사키에서 시작된 일본 기독교 선교역사에서부터 일본선교의 전략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1596년 12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프란치스코회 선교사와 크리스찬들을 포박하여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1597년 1월 1일을 기해 체포된 사람은 교토의 프란치스코 선교사 등 6명과 오사카의 예수회 수도사 3명을 포함하여 24명이었습니다. 최연소자 12세 루도비코 이바라키와 세 명의 소년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히데요시는 백성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 그들의 왼쪽 귀를 자르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귀가 잘리고 손을 뒤로 묶인 채 세 사람씩 소가 끄는 마차에 실려 교토, 오사카, 사카이의 거리로 끌려 다녔습니다. 행렬을 구경하던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포박당한 크리스찬들 모두가 아픔을 참아가며 천사와 같은 얼굴로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히데요시는 “24명을 나가사키로 끌고 가서 십자가에 매달고 창으로 찌르는 극형으로 처형하라”고 명하였습니다. 히데요시는 백성들이 이들을 보면서 두려워 크리스찬이 되지 않으려고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참상을 보는 백성들은 ‘죄도 없는데 어째서 처형하는가’라며 동정을 금치 못하였다고 합니다. 24명이 나가사키로 가는 동안 2명의 크리스찬이 늘어 26명이 되었습니다. 나가사키로 가는 동안 관리들은 제일 어린 루도비코 이바라키를 불러 회유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버리면 살려주겠다” 그러자 “잠시뿐인 인생과 영원한 생명과 바꾸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1597년 2월 5일 오전 10시, 26명의 크리스찬이 나가사키의 니시자카 언덕에 도착했을 때 눈앞에 26개의 십자가가 있는 것을 보고 달려가 자기 십자가를 감싸 안았습니다. 이 광경을 4,000명이 지켜보았는데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26명 전원이 십자가에 달리고 세워졌습니다. 예수회 수도사 파우로 미키는 십자가에 매달린 채 마지막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죽음을 앞에 두고 여러분들을 속일 생각은 없습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기독교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단언하여 말씀 드리는 바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을 용서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에 저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용서합니다. 오히려 그와 모든 일본인이 그리스도의 신자가 되기를 절실히 소망합니다.” 그의 설교가 끝나자 창을 든 네 명의 무사들이 두 사람씩 조를 이루어 십자가에 달린 26명의 가슴을 양쪽 끝에서부터 찔렀습니다. 창끝이 번쩍일 때마다 그들은 “예수님! 천국!”을 외쳤습니다. 나가사키의 26개의 십자가를 지고 간 성도들은 예수 십자가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 길을 자랑스럽게 걸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십자가의 고통을 경험하여야 합니다. 이사야 53장은 본격적으로 종의 모습을 언급합니다. ‘종의 고난’이 본문의 주제일 뿐 아니라 구속사의 핵심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리스도가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유가 인간의 구원을 위함이라고 예언합니다. 특히 5절은 ‘그’라는 3인칭 단수와 ‘우리’라는 1인칭 복수가 네 번이나 대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이사야는 종이 받는 징계가 인간이 받아야할 형벌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떠나 방황하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원하여 고난을 감수하셨던 것입니다.
종려주일입니다. 볼품없는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성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습니다. 평화 행진은 가시관에 찔리시고 창에 찔리시는 십자가 고난의 서곡이었습니다. 예수의 고난 이야기는 이사야에 의해 예고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은 무슨 까닭입니까? 과연 ‘그가 받은 징계’ 는 무슨 뜻입니까?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첫째로 평화를 누리나니 영국의 한 노인이 예수를 믿지 않고 살다가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평생 죄만 짓고 살아 온 것이 두렵고 무서웠던지 죽은 후의 운명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손녀를 불러다가 성경을 읽어 달라고 했더니, 성경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어두워지고 죄책감이 깊어갔습니다. 어느 날 손녀가 성경을 읽어 가다가 요한일서 1장 7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성구를 듣자 노인은 깜짝 놀라면서 ‘그런 말씀이 거기 있다니. 다시 읽으라’ 소녀는 다시 읽었습니다. ‘그 아들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랬더니 ‘애야, 내 손가락을 그 성경 구절에 짚어 다오’ 그래서 손녀가 짚어 드렸더니 ‘내가 이 말씀을 믿고 죽었다고 사람들에게 일러 달라’고 부탁하면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여기의 평화를 누리고는 ‘쉘로메누’인데 단순히 전쟁과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어느 것 하나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초점을 맞춘 표현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의 사이가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안해 할 필요도 없고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 공포에 떨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은 본래 죄인이었기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돌이켜야만 했습니다. 그러나징계의 대가가 죽음이기에 누군가 죽지아니하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완전히 막혀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자원하여 징계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을 향해 돌이킬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회복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나음을 받았나니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Juan Carlos Ortiz) 목사는 편두통 때문에 설교를 하다가 기절하여 병원으로 실려 가곤 했습니다. 유명한 의사도 찾아가 보고 좋은 약도 먹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던 가운데 하나님의 엄중한 책망을 들었습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너 때문이 아니고 예수의 피 때문에 네가 자신을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자세히 너를 알고 있는 내가 용서했다. 그런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너는 누구냐? 나보다 더 거룩한 자냐?” 자신의 불완전성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불만족스럽게 생각하였던 그는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자신의 행위와 상관이 없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행위를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보시는 예수의 피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때부터 놀라운 평안과 행복에 젖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편두통은 사라졌습니다. 수년이 흐른 지금까지 후안 카를로스목사는 편두통으로 고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나음을 누리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을 만족시키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분명히 회복시켜 주시고 낫게 하실 것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여기의 ‘나음을 받았도다’의 ‘니르파’는 인간이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구원의 수혜자가 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깨졌던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손길이 아니면 고침 받을 수 없는 상처투성이입니다. 그렇게 쓸모없던 우리, 깨졌던 우리들을 그리스도 사랑의 손길로 붙잡으셔 치유해주시고, 온전케 하시고, 과거보다 더 좋고 더 귀한 존재로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저가 징계를 받음으로 상처투성이의 우리를 치유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사 새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셋째로 사함을 얻었나니 서부를 개척할 당시, 백인들은 마을에 있는 인디언들을 쫓아 낼 방법을 찾아내었습니다. 넓은 평원에 옥수수 밭을 만들어 놓고, 가운데에 장막을 짓고 살았던 인디언들을 쫓아내기 위해 사방에 큰 불을 질렀습니다. 그 불길이 점점 타들어 왔습니다. 몇 시간만 지나면 불길이 마을까지 번지게 됩니다. 불길이 세기에 뚫고 나갈 수가 없자 인디언들은 발만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노련한 인디언 노인이 말합니다. “마을에서 100발자국 떨어진 곳에 불을 질러라! 운동장 크기만 하게 불을 지르라". 인디언들은 불 때문에 죽게 되었는데 또 불을 지르라고 외치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경험이 많은 노인의 말이기에 순종하며 불을 질렀습니다. 불탄 자리는 운동장 크기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마을 사람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불탄 자리에 모두 올라서라!” 한번 불탄 자리는 다시 불에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노인은 알고 있었습니다. 마을의 인디언들은 불탄 자리 위에 올라가서 죽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십자가에 오르면 죄를 사해주실 것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죄의 문제가 사함 얻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의 죄 값을 예수께서 지불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 값을 스스로 지불해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으면 두 번 다시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시고, 예수께서 우리를 사서 풀어주셨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은 우리의 죄악을 사하기 위함입니다. 십자가는 심판의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지만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죄를 담당시키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구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일 때에 거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오로지 나의 죄악 때문입니다. 나의 죄를 사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죄가 십자가에 있음을 외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시나무 새 (The Thorn Birds)는 다 자란 후 생애 단 한 번의 노래를 부르고 죽을 가시를 찾기 위해 둥지를 떠나갑니다. 그리고 가시나무를 찾고 가장 크고 날카로운 가시를 향해 온갖 힘을 모아 쏜살같이 날아가 가시에 박혀버립니다. 가시나무 새는 그렇게 죽어가면서 온 몸으로 단 한번뿐인 노래를 부릅니다. 이 노래는 노래라기보다 온 몸으로 부르는 고통의 절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한지, 어떤 고통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소리를 들으면 고통이 사라지고, 시름이 다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가시나무 새는 누구입니까?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인간들의 죄를, 절망과 고통과 아픔을 한 몸에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교회 다닌 햇수나 직분이 그리스도인임을 결정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고 십자가의 사랑과 만남이 이루어진 순간부터 진실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나를 위한 십자가로 깨닫는 순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한 십자가로 보아야 합니다. 주께서 징계를 받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우리는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주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의 죄가 모두 사하여졌습니다. 부디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얻어지는 은혜를 바라고 묵상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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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9 18:18: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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