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7:15-25 2015.8.30(일)
진정한 자유(3)-본래의 나
이번 주에 우리에게 가장 큰 뉴스는 남북이 대화로 전쟁의 위기를 막은 것입니다. 정말 일촉즉발의 위기속에서 남북 대표들이 지혜롭게 대화해서 결국 최종 합의에 이르렀습니다. 만일 대화하지 않았다면 6.25같은 참혹한 전쟁이 일어날 뻔도 했습니다. 전쟁이 나쁜 것은 우리의 모든 희망과 행복을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전쟁도 가장 나쁜 평화보다 못하다”라는 말이 맞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풍성한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자유는 우리가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우리가 예수믿음으로 얻은 것은 자유와 행복입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자유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할까요? 마치 이런 질문과 같습니다.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1863년에 노예를 해방시켰습니다. 1865년에는 이것을 헌법으로도 공포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론적으로 1865년 이후 미국에는 한 사람의 노예도 남아 있지 않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 이후에도 미국의 많은 지역에서 흑인들이 여전히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는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노예로 살고 있었던 것일까요?
제가 이번에 미국 애틀란타를 다녀왔습니다. 애틀란타는 평생 흑인들의 자유와 인권을 위하여 살다가 죽은 마틴 루터 킹의 고향입니다. 그가 흑인의 자유에 대하여 말한 한 마디에서 왜 우리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사는냐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흑인 스스로 백인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마틴 루터 킹). 마틴 루터 킹은 흑인이 자유를 빼앗기고 사는 것은 백인의 흑인차별때문만이 아니라 흑인 스스로 “우리는 백인보다 못해, 우리는 열등한 족속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백인이 흑인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흑인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빼앗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자유를 빼앗고 속박하는 사람은 대부분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잘 모를 때 우리는 스스로 자유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보통 네 개의 ”나“가 있다고 합니다. 내가 아는 나, 내가 모르는 나, 남이 아는 나, 남이 모르는 나, 또 하나가 있습니다.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나입니다.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나는 누가 압니까? 하나님이 압니다. 아무도 몰라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이 아는 여러분이 진짜 여러분입니까? 하나님이 아는 여러분이 진짜 여러분입니까?
바울이 쓴 롬7장은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나”라는 단어를 자주 쓰고 있습니다. 7장 전체에서 “나”라는 단어가 20번 이상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다 같은 “나”가 아닙니다. 크게 두 가지 “나”가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창조한 “나”와 현실의 “나”가 있습니다. 15절입니다. 롬7:15, “내가 행하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내 안에는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가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본래의 나입니다. 그런데 선을 행치 않으려는 나가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의 나입니다. 또19절입니다.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선을 행하려는 본래의 나와 악하게 살아가는 현실의 나가 있습니다. 이 두 나가 내 속에 같이 있습니다. 어떤 나가 진짜 나입니까?
지금의 내 모습이 나의 본래 모습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메시지는 지금의 내가 본래의 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키가 170센티 조금 못되고, 혈액형은 0형에, 기질은 다혈질 40%, 우울질 40%, 담백질 20%를 가진 대한민국 남자입니다. 두 아이의 아빠고 직업은 목사입니다. 저는 아내가 한명 있고, 물론 대부분의 남자에게 아내가 한명 있습니다. 형제는 다섯입니다. 아마 이 정도가 저 자신의 주민등록상의 “나”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가 가끔 이상한 나가 됩니다. 고등학교 2학년때 교회에 실망한 후 교회를 떠나 많이 방황했습니다. 정말 한 5년은 교회를 안 나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안 믿으시겠지만 정말 모든 사람이 “윤재는 착한 애야” 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때 부흥회에 참석하고 방언을 받은 후로 중학교 3년간 수요예배, 새벽기도를 빠져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랬던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를 떠나 힘들게 방황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제가 그 방황을 멈추지 못한 것은 딱 하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다 위선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바라본 신자들의 삶에서 저는 많이 위선적인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겉으로는 착하게 보이지만 사람들의 진짜 모습은 악하고 위선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솔직히 제 부모님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가끔 내가 우리 자녀들이나 교회학교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쳐질지 늘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 그들과 같이 있지 않으려고 그들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살다 보니 내가 반항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가끔 묻습니다. 하나님떠나 세상에 살던 반항아가 나였는가? 하나님안에 착하게 살던 내가 나였는가? 저는 오랫동안 위선적인 교인들의 모습이 진짜 교인들의 모습이고 거기에 반항하는 내 모습 또한 진짜 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이스라엘 있을 때 도자기 박물관을 방문했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텔아비브에 있는 “에레츠 이스라엘” 박물관입니다. 거기 가면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자기 만든 것을 재현합니다. 도공이 도자기를 만들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진흙을 이기고 그것을 작은 목판위에 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판을 돌리면서 손으로 그릇의 모양을 뜹니다. 겉으로는 보기에는 쉬운 일 같지만 매우 힘든 일입니다. 도공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기가 만들고자 하는 그릇의 형상을 뜹니다. 신기한 것은 도공의 손가락 하나 움직임에 따라 도자기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변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도공이 마음에 안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부수고 다시 만듭니다. 그래서 모양이 나오면 불가마속에 집어 넣습니다. 섭씨 3천도 이상이 되는 불가마속에 그릇을 넣으면 그릇은 단단해 집니다. 한참 구운 후 그릇을 꺼내 유약을 바르고 무늬를 그립니다. 얼마후에 아름다운 그릇이 하나가 나옵니다.
그 광경을 떠올리면서 생각했습니다. 어떤 그릇이 주인이 원하는 그릇일까? 깨진 그릇? 상처난 그릇? 버린 그릇? 주인의 입장에서는 어떤 그릇을 만들기 원했을까? 우리 교회에도 도자기 만드는 도예가가 있습니다. 경기에 광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자, 사진을 보실까요? 도예가는 먼저 만들고자 하는 도자기를 머리에 그리며 흙으로 모양을 만들고 물레 성형을 합니다(사진1). 물레 성형은 도자기의 모양과 형태를 결정하는 과정입니다. 이때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사진2). 도예가의 손놀림 하나 하나가 도자기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그러나 항상 도예가의 생각대로 작품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도자기가 초벌, 재벌 과정을 거치는 과정에서 흙의 비율, 물레성형의 문제, 유약의 문제, 불의 정도, 기후, 습도 온도등으로 잘못 만들어 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도예가는 그것들을 버립니다. 자, 실패작을 한번 보시죠. 깨진 도자기입니다(사진3). 보기에도 상당히 무섭습니다. 주인이 이런 도자기를 보면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그나마 더 이상 고칠 수 없어 버린 도자기들도 있습니다(사진4). 어떻습니까? 안됐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쓰레기라고 부르지만 주인에게는 아마도 마음 아픈 자식들일 것입니다.
자, 이 도자기들을 다시 보면서 이런 질문을 해 봅시다. (사진3). 깨어진 도자기를 보십시오. 묻습니다. 주인이 처음부터 이런 도자기를 만들려고 생각했을까요? 이것이 주인이 만들려고 했던 본래 도자기의 모습입니까? (사진4) 이 버려진 도자기들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쓰레기처럼 버리려고 도자기를 만든 사람이 있을까요? 그것이 주인의 계획이고 뜻이었을까요? 주인은 과연 어떤 도자기를 만들고자 했을까요? 혹시 이런 도자기가 아닐까요? (사진5). 땀과 정성으로 만들어 보기만 해도 좋은 도자기, 반들 반들 윤기가 나지 않습니까? 이것이 주인의 본래 계획이 아닐까요?
모든 사람에게 이 두 모습이 있습니다. 부서지고 버려진 현실의 나와 빛나고 아름다운 본래의 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어떤 것이 본래 나의 모습일까요? 구약의 사울이 있습니다. 성경은 사울의 처음 모습을 아주 아름답게 그리고 있습니다. 삼상9:2,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위만큼 더 컷더라”. 사울에 대하여 묘사한 모습은 그가 매우 좋은 사람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준수하다”는 말이 나오는 데 영어로는 “a handsome young boy”입니다. “잘생기고 젊은 소년”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히브리어로 보면 더 분명합니다. “바훌 바톱”. 바훌은 “생명”입니다. 그냥 젊은 것이 아니라 생명이 넘치는 젊음입니다. 톱은 영어로 good입니다. 그런데 그냥 좋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갖춘 종합적인 “선”입니다. 외면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도 갖췄습니다. 과일로 말하면 최고의 품질입니다. 상품으로 말하면 굉장히 비싼 상품입니다. “바훌 바톱”. “생명력이 넘치는 젊음과 최고로 잘생기고 아름다운 가치를 가진 존재”입니다. 사울은 그렇게 창조되었고 그것이 그의 본래적 자아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윗을 만나자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여덟 번이나 창을 던집니다. 다윗을 잡으려고 엔게디 굴, 하길라 산등 온갖 유다광야를 쫓아다닙니다. 엔게디 굴은 매우 작은 동굴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잡으려고 거기에 3천명의 군대를 보냅니다. “바훌 바톱”. 그렇게 젊고 잘 생기고 뛰어난 존재였던 사울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이 사울의 본래 모습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본래 이렇게 창조했는 데(사진5), 사울은 이렇게 (사진3)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아름답게 창조한 하나님의 original design을 버리고 시기와 질투와 미움으로 가득찬 현실의 사울이 본래 자기인 줄 알고 그렇게 살다가 이렇게(사진4) 버림받고 말았습니다. 그는 결국 길보아산에서 불레셋 사람에게 죽고 말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현실의 여러분이 여러분입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 모습이 여러분입니까? 이것은 신앙인의 삶에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몸이 아파 여러번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있습니다. 하도 오랫동안 아프다 보니까 자기가 본래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조금 건강해지면 “아이구. 얼마나 갈까. 내 몸이 또 아프겠지” 하다가 생각대로 또 아픕니다. 여러번 사업에 실패한 분이 있습니다. 하도 실패해서 자기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성공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재수하고 삼수한 수험생이 있습니다. 자주 떨어지다 보니 떨어지는 것이 내 운명인가 보다 생각합니다. 우리안에 있는 자유를 깨뜨리는 것은 안되는 환경이 아니라 나는 본래 그런 사람이라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상처난 모습이 본래 우리의 모습입니까? 지금 안되는 모습이 우리의 본래 모습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바훌 바톱”. 사울처럼 젊고 잘 생기고 뛰어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미움과 실패와 죽음과 상처는 우리의 본래 모습이 아닙니다.
내가 누군지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잠16:4, “여호아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쉬운 영어 번역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의 목적에 합당하게 만드셨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악한 자도 씌움에 맞게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악한 자로 목적을 가지고 창조했는 데 선한 자는 오죽하겠습니까? 시편 139:13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혹은 세상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우리를 선하게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나의 현재의 모습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본래 지으신 내가 본래 나입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라 죄를 가진 의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에 한 단계 더 나갑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롬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0절도 보십시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로다“. 다같이 ”내 속에 거하는 죄“. 그냥 ”죄“라고 하지 않고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하나님안에 은혜로 의로워졌습니다. 그렇다고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죄가 내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죄인은 아닙니다. 이 말은 잘 새겨 들어야 합니다.
로마서 어디를 봐도 예수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죄인”이라고는 단정한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죄를 가진 사람입니다. 죄인과 죄를 가진 사람은 다릅니다. 제가 2000년도 교통사고로 다리를 수술하고 무릎에 쇠를 박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를 보고 “목사님, 철들었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통사고 나고 철들었습니다. 그러나 제 몸에 철이 있다고 제가 철인은 아닙니다. 제 몸에 철이 있을 뿐이지 제가 철로 만든 마징거 제트는 아닙니다. 때가 되어 쇠를 뺏습니다. 지금은 철이 없습니다. 몸에 쇠를 박고 다닌다고 해서 철인이 아닌 것처럼 우리안에 죄가 있다고 래서 죄인은 아닙니다. 우리는 죄를 가진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가끔 금니를 낀 사람을 봅니다. 사람에 금니를 끼었다고 해서 그를 금사람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는 금니를 가진 사람일 뿐입니다.
20절 다시 보십시오. 롬7: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로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죄를 짓는 것은 맞지만자신이 죄인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쓴 용어를 유심히 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죄인“이라고 부른 사람은 롬1-3장까지 아직 예수님 믿기 이전의 사람입니다. 3장 이후 예수믿고 난 이후의 사람에게는 한번도 ”죄인“이란 말을 쓰지 않습니다. 대신 죄를 가진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죄인은 신분이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죄를 가진 사람은 신분이 죄인이 아니라 신분은 의인인데 아직 약하여 죄가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유명한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재선이라는 학생을 자기 아들로 삼고 자기 집에 살게 했습니다. 재선이는 아무 죄없는 목사님의 두 아들 동인이와 동신이를 죽였습니다. 살인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손양원 목사님 집을 지나면서 “저 집은 살인자의 집이야” 말한다면 그 말은 틀린 말입니다. 그 집은 살인자의 집이 아니라 살인자가 사는 집일 뿐입니다. 그 집에는 살인자도 살지만 살인안한 사람들도 삽니다. 살인자는 안재선 하나 뿐이고 살인안한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1945. 8.15 해방되자마자 중앙청에는 일장기가 내려지고 태극기가 올라갔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소수의 일본인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중에는 아직도 자기들이 이 땅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횡포를 부리며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이 땅이 일본인의 땅은 아닙니다. 일본인이 살고 있는 한국땅일 뿐입니다. 신분과 소유는 한국으로 바뀌고 일본사람 몇 사람이 살고 있을 뿐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합니까? 우리가 예수님 믿으면 행위부터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신분이먼저 달라집니다. 골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저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 예수믿으면 신분은 바뀌고 위치는 옮겨집니다. 신분은 종에서 아들로 바뀌고, 위치는 흑암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집니다. 그라나 신분과 위치는 바뀌었으나 우리의 삶의 행태는 아직도 과거의 지배를 받습니다. 하도 그렇게 오래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의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죄는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야 맞습니다. “나는 하나님안에서 용서받은 의인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내가 원치 않은 죄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고 지금도 죄인입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죄를 짓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믿고 달라진 로마서 3장이후 바울은 예수믿은 사람을 “죄인”대신에 “거룩한 자”, “성도”라고 부르고 그 수가 63번이나 됩니다.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예수믿는 사람을 한번도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죄인이라고 부를 때가 있는 데 그것은 우리의 과거 모습입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성도요 거룩한 자입니다.
고전1:2을 보십시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곧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믿는 자들을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를 계속 보면 1-3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은 서로 분열하고, 5장에서 서로 음행하고, 6장에서 교인끼리 법정에서 다투고, 7장에서 온갖 이혼 문제로 복잡한 교회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세속적인 교회였습니니다. 그래서 이렇게 불러야 마땅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죄인된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만성죄인 신자들에게” 이렇게 불렀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릅니까?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왜 그렇습니까? 행위가 바뀌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분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위치가 바뀐 것입니다. 이름이 바뀐 것입니다. 소속이 바뀌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왜 우리가 자유가 없습니까? 우리 자신을 잘못 알기 때문에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조금 짓는다고 “나는 죄인이야. 나는 쓸데없어. 나는 다 죽었어” 이러니까 자유가 빼앗기는 것입니다. 아무도 내 자유를 뺏지 않았는 데 스스로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창조한 본래의 내가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하와이에서 받은 은혜가 이것입니다. 저는 그동안 목회하면서 자신의 실수와 연약함에 대해 많은 실망과 속상함이 있었습니다. “아, 내가 이것 밖에 안되나? 이것이 정말 내 모습일까?” 누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앞에서 보면 실망, 옆에서 보면 낙망, 뒤에서 보면 절망이랍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관점이 있습니다. 위에서 보는 것입니다. 위에서 보면 희망입니다. 우리를 보는 또 하나의 관점이 있는 데 그것은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셨던 본래의 계획으로 보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그것을 original design 이라고 부릅니다. 도자기의 입장에서 도자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도자기 만든 도공의 입장에서 도자기를 보는 것입니다. 그 눈으로 나를 보았더니 아, 나는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과 계획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선하고 아름답고 목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이 정도밖에 안되나? 나는 왜 그럴까 하고 씨름했던 것은 나의 현실적인 모습이지 하나님의 original design은 아니었습니다. 그 눈으로 성경을 보았더니 성경이 보였습니다.
아브라함 보세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람도 많은 실수를 한 사람입니다. 아내를 누이라 두 번이나 속이고 한때 믿음이 없어 하갈을 아내로 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브라함의 본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창18:19절입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친구라 불렀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original design이었습니다. 다행히 아브라함은 그것을 별견하고 승리하는 삶으로 마쳤습니다. 기드온을 보시겠습니까? 그가 미디안이 쳐들어왔을 때 집안 뒤에 숨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삿6: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이것이 본래의 기드온이었습니다. 무서워 숨은 기드온이 본래 기드온이 아니었습니다. 미디안을 이기고 나라를 구하는 큰 용사가 기드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현실속에 감추인 기드온의 본래 모습을 끄집어 결국 그것으로 승리하게 한 것입니다. 다윗이 중년에 밧세바를 범하고 실수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original design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입니다. 나중에 회개하며 다윗이 기도했습니다. 시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유진 피터슨이 번역한 Message 성경에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잃었습니다. 이제 내 속에 하나님이 창조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게 하소서”. 회개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난 7월 13일, 제가 한달간의 안식월을 위해 하와이로 출국했습니다. 목회자의 삶은 거의 전쟁과 같습니다. 늘 걱정과 염려와 분노와 아픔과 기도의 연속입니다. 그동안 제가 10년 한신교회 목회를 하면서 이런 저런 일로 실수하고 상처받고 연약해진 저 자신을 안고 뭔가 위로와 은혜와 새로운 비전이 필요했습니다. 목회자 세미나의 강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시애틀에서 오신 강사 목사님이 이 original design을 이야기하면서 한분 한분 목회자들을 위해 예언적인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 분이 저희 부부를 앞에 두고 기도하는 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윤재 목사님,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할 때 당신이 높은 산을 오르는 것을 봅니다. 당신은 인생의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기꺼이 어려운 길을 가려고 높은 산에 오르고 있습니다. 또한 나는 당신이 해변가를 지키려고 새워둔 놓은 망대위에 선 것을 봅니다. 당신은 많은 사람과 함께 해변가에 있지 않고 망대위에서 사람들을 살펴 보고 있습니다. 나는 또한 당신이 한 아이를 앉고 있는 데 그 아이는 사람들이 잘 돌보지 않은 아이입니다. 당신은 주님의 나라를 위해 스스로 좁을 길을 택하였고 주님은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길과 진리를 가르쳐 보일 것입니다”.
예언을 겸한 기도였습니다. 제가 그 기도를 들으며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단지 좋은 기도를 했기 때문에 위로가 아니라 주님은 나를 알고 계신다는 것 때문에 위로였습니다. 내가 힘들게 산을 오르고 해변가에 있지 않고 높은 망대에 있고 아무도 돌보지 않은 아이를 안고 있는 것은 주님이 제 목회를 알고 계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힘든 길을 가는 것이 주님이 저를 향한 본래의 목적이라면 저는 기쁘게 그 길을 가리라고 다짐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저를 향한 original design이라면 내가 지금 겪는 고난, 상처, 연약함, 실수는 상관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본래의 디자인, 그것을 이루는 것이 제 삶이요 목회하고 생각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본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병든 오늘의 내 모습, 실패한 오늘의 내 모습, 깨어지고 버러진 도자기의 모습이 하나님이 나를 창조한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믿습니까? 오늘의 훨씬 위대한 내가 내 속에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이 내 밖에 있는 것보다 항상 큽니다. 아름답고 빛난 작품 도자기(사진5). 그것이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이 땅에 보낸 목적입니다. 아멘.
롬7:15-25 2015.8.30(일)
진정한 자유(3)-본래의 나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마틴 루터 킹,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흑인 스스로 백인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롬7:15, “내가 행하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지금의 내 모습이 나의 본래 모습이 아닙니다.
물레 성형(사진1).
물레 성형(사진2).
깨진 도자기(사진3).
버려진 도자기(사진4).
깨진 도자기(사진3),
버려진 도자기(사진4)
본래 주인의 도자기(사진5).
삼상9:2,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위만큼 더 컷더라”.
사울(사진5),
깨어진 사울(사진3)
버려진 사울(사진4)
잠16:4, “여호아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시편 139:13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나는 죄인이 아니라 죄를 가진 의인입니다.
롬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로다“.
우리가 예수님 믿으면 행위부터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신분이 먼저 달라진다.
골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저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
고전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곧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나에게는 하나님이 창조한 본래의 내가 있습니다.
창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삿6: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시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 내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잃었습니다. 이제 내 속에 하나님이 창조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게 하소서)
“이윤재 목사님,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할 때 당신이 높은 산을 오르는 것을 봅니다. 당신은 인생의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기꺼이 어려운 길을 가려고 높은 산에 오르고 있습니다. 또한 나는 당신이 해변가를 지키려고 새워둔 놓은 망대위에 선 것을 봅니다. 당신은 많은 사람과 함께 해변가에 있지 않고 망대위에서 사람들을 살피고 있습니다. 나는 또한 당신이 한 아이를 앉고 있는 데 그 아이는 사람들이 잘 돌보지 않은 아이입니다. 당신은 주님의 나라를 위해 스스로 좁을 길을 택하였고 주님은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길과 진리를 가르쳐 보일 것입니다”.
아름답고 빛난 작품 도자기(사진5).
'추천 설교 > 이윤재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하2:1-11 2015.9.13(일)갑절의 성령을 주옵소서 (0) | 2021.02.18 |
---|---|
롬8:18-27 2015.9.6(일)영적 부흥을 사모하라 (0) | 2020.12.29 |
롬7:6, 5:20 2015.8.23(일)진정한 자유(2)-은혜 (0) | 2020.12.29 |
롬8:15, 갈5:1,13 2015.8.16(일) 진정한 자유(1)-용서 (0) | 2020.12.29 |
출23:14-17 2015.7.12(일) 여름에 열매가 익습니다 (0) | 2020.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