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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2:1-11 2015.9.13(일)갑절의 성령을 주옵소서

왕하2:1-11 2015.9.13()

갑절의 성령을 주옵소서

아름다운 9월입니다. 이 아름다운 9월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어떤 여성이 쓴 엣세이를 보았습니다. 제목은 나는 네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 그 네 사람이 누군가 했더니 첫째는 영화배우, 둘째 은행가, 셋째 목사, 그리고 넷째 장의사랍니다. 그래서 왜 넷이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결혼하자마자 가장 필요한 것은 로맨스예요. 잘생긴 영화배우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며 살고 싶어요. 그러다 나이가 더 들면 돈이 필요하겠죠. 그러면 돈많은 은행가와 인생을 즐기며 살고 싶어요. 그러다 나이가 더 들면 조금은 영적으로 살고 싶어요. 그래서 목사와 결혼하고 싶어요. 그러다가 때가 되면 죽겠죠. 그때 나를 잘 묻어주는 사람이 필요해요. 그것이 장의사예요”. 상당히 우스운 이야기인데 웬지 슬픈 느낌도 납니다. 어떻습니까? 실제 이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 여성의 바램이겠죠. 그러나 이 이야기속에 우리 인간이 바라는 소원이 네 가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두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여기 살아 있다는 것과 다음은 우리가 하나님 믿고 산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입니까? 저는 지난 주에 영적 부흥을 사모하라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부흥은 다른 것이 아니라 revival, 살리는 것이다. 죽었던 것을 다시 살리는 것이다. 우리의 몸과 영은 언제나 죽을 수 있다. 이때 우리안에서 우리를 살리는 분이 계신다. 그 분이 성령님이다. 그래서 성령님은 살리는 영이다. 성령님은 우리안에서 매일 우리를 살리신다. 그 방법이 기도다”.

 

저는 지난 주 저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이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번 주에는 성경에서 그렇게 살았던 사람을 한 사람 소개하고 싶습니다. 새벽에 기도하다가 성경의 모델 하나를 찾았습니다. 그 사람이 구약의 엘리사입니다. 여러분은 구약의 엘리사를 아시나요?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입니다. 그는 엘리야에 치어 뒤에 숨어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엘리야보다 훨씬 위대한 인물입니다. 엘리야가 열왕기상 17장에서 열왕기하 2장까지 8장에 걸쳐 나온다면, 엘리사는 열왕기상 19장에서 열왕기하13장까지 17장에 걸쳐 나옵니다. 성경에서 17장 이상이 나온 인물은 모세와 다윗밖에 없습니다. 엘리야가 오므리, 아합, 두 왕을 섬겼다면 엘리사는 아합에서부터 아하스왕까지 모두 여섯 명의 왕을 섬깁니다. 엘리야가 기적을 14번 일으켰다면, 엘리사는 그것의 두 배인 28번의 기적을 일으킵니다. 엘리야가 주로 바알과 싸우는 일생을 살았다면 엘리사는 일생 살리는 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엘리사가 일으킨 기적의 대부분은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의 첫 번째 기적은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첫번째 기적은 물이 나빠져 먹을 수 없게 된 여리고의 샘을 고친 것입니다. 지금도 여리고에 가면 엘리사의 샘이 있고 그 샘에서 맑은 물이 콸콸 나옵니다. 엘리사 시대를 주전 9세기라 하면 거의 2900년 된 샘입니다(사진). 엘리사가 일으킨 기적 28개 중 24개가 살리는 기적입니다. 기름 한 병으로 빚진 과부를 살립니다. 죽은 아이를 위해 기도해서 그를 살려냅니다. 독이 든 국을 먹어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 냅니다. 선지 생도중 하나가 연못에 도끼를 잃어버렸는 데 기도로 떠오르게 합니다. 보리떡 20개로 100명을 먹입니다.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 장군의 나병을 요단강에서 낫게 합니다. 도단성을 에워싼 아람군대의 눈을 어둡게 해서 성안에 있는 수많은 백성들을 살려냅니다. 흉년으로 굶주린 사마리아성의 나병환자들을 살려냅니다. 그의 일생은 살리는 일생이었습니다.

 

엘리사의 또 하나의 업적은 사람을 키우는 사역입니다. 엘리야가 엘리사 한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면 엘리사는 수천명의 선지생도를 제자로 삼았습니다. 열왕기하 2장에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나오고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나옵니다. 또 길갈에도 학교가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간 곳마다 하나님의 학교를 세워 제자를 키워냅니다. 말하자면 그는 당대의 탁월한 영적 지도자요, 능력있는 치유자이며. 위대한 교육가였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서 엘리사가 이렇게 되었느냐 입니다. 엘리사가 본래 특별해서 이렇게 되었느냐? 아닙니다. 그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외모도 대머리로 인물도 시원치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훌륭하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농민의 아들이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영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도 엘리사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마음의 소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소원을 두고 행하십니다. 엘리사처럼 돠고 싶은 열망이 있으면 엘리사처럼 됩니다.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엘리사처럼 되어 한 시대를 빛내고 하나님의 쓰임받는 인물들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엘리사는 잘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사를 크게 사용하신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 부름받을 때 이미 나타났습니다. 왕상19:19입니다.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들었더라”. 이것이 하나님이 엘리사를 처음 불렀을 때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하여 그를 부르자 그가 그동안 함께 일해 왔던 12마리 소와 모든 기구들을 불태우고 백성과 함께 고기를 먹은 후에 엘리야를 따랐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아벨므홀라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벨므홀라라는 말은 춤추는 목초지라는 뜻입니다. 지금의 요단강 지역의 곡창지대에 있습니다. 엘리사의 가족은 거기에서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농가는 대부분 소 한 마리에 쟁기 하나로 영세하게 농사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열두 겨리의 소를 몰고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 말은 그가 상당히 부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그를 부르자 그는 소와 쟁기를 버릴 뿐 아니라 아예 불태워 버리고 엘리야를 따랐습니다.

 

어떻습니까? 이것이 쉬운 일입니까? 어떤 사람은 엘리사는 부자이기 때문에 소 몇 마리 없애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맞습니까? 부자니까 소12마리를 없애는 것은 일도 아닙니까? 돈이 많다고 헌금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은 돈의 개념이 아니라 믿음의 개념입니다. 돈이 적어도 분에 넘치게 헌금하는 사람이 있고 돈이 많아도 일체 헌금 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교인중 한 분이 오랫동안 병원에 계신 분이 있습니다. 하도 오랫동안 병원이 있어 생활이 매우 어렵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제가 누가 좀 도왔으면 좋겠다했더니 그 중의 한 분이 매월 몇 십만원씩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렇게 잘 사는 분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몇 년전에 우리 교인의 자녀중 큰 병이 생겨 급히 도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새벽기도때 이야기했더니 그 다음날 강대상에 헌금이 올라왔습니다. 잘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주님, 아픈 딸을 위해 드립니다라고 썻습니다. 아주 어려운 분이 헌금을 바쳤습니다. 아마 몇 달치 생활비는 되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떠날 수 있다면 그는 행복받은 사람입니다. 쟁기를 불태웠다는 것은 농사를 그만두겠다는 뜻입니다. 소를 잡았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는 농부로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대책이 있었습니까? 엘리야를 따라가면 농사짓고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는 보장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단 하나, “하나님이 나를 불렀다. 그래서 나는 그를 따르겠다”. 그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엘리사에게 쟁기는 베드로에게 배였습니다. 베드로가 배와 그물 버리고 예수님 따랐듯이 엘리사는 소와 쟁기를 버렸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이 그를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아버지 밑에서 농사짓고 살았으면 평생 잘 먹고 살았을 텐데 대책없이 엘리야를 따라 나선 것입니다. 다만 부모에게 작별인사만 요청했을 뿐입니다. 왕상19:20,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사의 기적은 그때부터 나타났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문제는 양다리 걸치는 것입니다. 믿는 것도 아니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과 세상에 발 하나씩 걸치고 어중간하게 서 있습니다. 남들이 내가 예수믿는 것을 알아서 좋을 때는 나는 어릴 때부터 교회 다녔습니다. 어머니는 권사님이고 아버지는 장로님입니다”. 묻지 않는 말까지 합니다. 그러다가 직원들 하고 회식하러 갈 때는 슬그머니 한발 뺍니다. “요즘 교회 한번 안 나가본 사람이 어디 있어? 내가 목산가? 병신도지”. 그러다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무슨 일로 얻어 맞으면 완전히 두 발을 뺍니다. “요즘 교회가 왜 그런지 모르겠어?” 그렇게 말할 때 그가 한 가지 잊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부흥은 하나님을 위하여 철저히 자기를 버리는 사람과 공동체에 임합니다. 19장에 보면 에베소 지방에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곳애서 물었습니다. 19:2,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사람들이 말합니다. “우리는 성령이 있슴도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곳 두란도 서원에서 2년동안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성령님은 항상 말씀과 함께 임합니다. 성령님은 말씀의 통로로 우리에게 임하고 말씀의 통로는 성령님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얼마나 진지하게 말씀을 들었는지 보시겠습니까? 19:10, “두 해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모두가 말씀을 듣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11절입니다. 19: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12절 이하에 보면 바울이 손수건만 얹어도 악귀가 떠나갔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9절입니다. 19: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앞에서 불 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저는 5만 드라크마가 얼마나 큰 돈인지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1드라크마는 당시 노동자 한 사람이 하루 번 임금입니다. 5만 드라크마면 한 사람이 138년 동안 일해서 받은 임금입니다. 만일 노동자 한 사람이 하루에 10만원 받았다면 10만 곱하기 5만 하면 50억이 됩니다. 마술하는 사람들도 성령받기 전에는 그것이 매우 비싼 돈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 아무 것도 더 비싼 것은 없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50억이 종이 휴지조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불태워 버렸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까? 이왕 부름받았으면 내려놓을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시 직분 받으셨습니까? 이왕 직분 받았으면 그 직분에 충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가진 무엇이 하나님의 부름보다 더 소중합니까? 내가 가진 무엇이 성령의 은혜보다 소중합니까? 이왕 예수믿기로 하고 길을 떠났으면 퇴로를 차단해야 합니다. 지나간 과거와 과감히 결별하고 나를 괴롭히는 세상적 쾌락과 잘못된 습관으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1519219, 스페인의 탐험가 에르난코르테스가 그랬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가 멕시코를 정복하려고 배 11척과 13필의 말과 110명의 선원과 553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스페인일 떠나 멕시코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한 말이 이것입니다. “배를 모두 불태워라”. 왜 그랬겠습니까? 더 이상 돌아갈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퇴로를 차단하고 과감하게 정복에 임해서 그는 결국 멕시코를 정복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그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지금 필요한 것이 그것입니다. 과감하게 옛것을 결별하는 것, 스스로 돌아갈 퇴로를 차단하는 것, 오직 주님 따라가기로 올인하는 것, 그것이 첫 번째 길입니다.

 

다음 엘리사는 잘 좇아갔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사를 크게 사용하신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꾸준히 하나님을 좇아갔다는 것입니다. 왕하2장에서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하려고 합니다. 그때 엘리사가 보였던 태도는 두고 두고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거기서 엘리야는 엘리야에게 다섯 번이나 그만 따라 오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벧엘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여리고로 갑니다. 마지막에 요단강으로 갑니다. 지금 하늘로 승천하려는 엘리야는 마음이 급합니다. 세상 걱정, 염려 다 놓았습니다. 엘리사고 누구도 다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끝까지 엘리야를 따라 갑니다. 11절을 보시겠습니까? 왕하2:11,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만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엘리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위해 벧엘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여리고를 거쳐 요단강까지 옵니다. 이 거리를 간단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벧엘은 유다 광야 윗 자락에 있고 여리고는 그보다 1000미터 낮은 골짜기에 있습니다. 지금도 이 골짜기를 내려가려면 아찔합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그 멀고 험한 길을 끝까지 엘리야를 따라 갑니다. 그냥 따라만 가는 것이 아니라 11,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대화하며 따라갑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스승과 제자가 임종직전까지 같이 있습니다.

 

왕하2장에 두 사람이라는 단어가 여러번 나옵니다. 6, “이에 두 사람이 가니라”, 7, “두 사람이 요단가에 서 있더니”, 8, “두 사람이 마른 땅위로 건너더라”. 그리고 마지막 11, 11,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얼마나 아름다운 동행입니까? 이렇게 끝까지 동행해 준 사람이 있다면 그는 결코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주고 싶을 것입니다. 마침내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 마지막 순간에 엘리사가 무엇이라고 소리칩니까? 12절입니다. 왕하2:12,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엘리야가 승천할 때 울부짖는 엘리사의 모습을 보면 가슴 뭉클하니 감동이 됩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른 것은 이 때만이 아닙니다. 처음 엘리야의 부름을 받을 때마다 지성으로 섬겼습니다. 엘리야를 따르는 엘리사의 이야기중에 감동적인 귀절이 하나 있습니다. 왕하3:11절 중간입니다. “이스라엘 왕의 신복중의 한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여기서 엘리사는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븟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로 소개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은 더운 나라입니다. 밖에 나갔다 집에 오면 손과 발에 온통 먼지가 묻습니다. 그러면 종들이 달려와 대야에 물을 담아 주인의 손을 씻기고 발을 씻깁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밖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언제나 엘리사가 달려와서 엘리야의 손과 발을 씻겼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얼마나 열심히 따르고 있습니까? 처음 믿을 때 얼마동안 반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도 변하지 않고 끝까지 따릅니까? 엘리아갸 승천하는 그 순간까지 끝까지 따릅니까? 신앙의 길을 가다가 피곤해서 잠시 쉴 수 있습니다. 때로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넘어져 있어서는 안됩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길에 언제 한번 걱정안해도 되는 완벽한 때는 없습니다.

 

요즘 나온 좋은 책이 있습니다. 프랑크 루박이 쓴 “1분 게임이라는 책입니다(사진. ) . 1884년에 미국에서 태어난 루박은 필리핀선교사였습니다. 그가 선교사로서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계속 듣는 훈련을 했습니다. 그는 “1분게임이란 이 책에서 매 1분마다 1초씩 예수님을 생각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사는 모든 경우에 이것을 실습했습니다. . 주일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옆에 계신 예수님을 깨웁니다. “예수님, 저와 함께 교회가요”. 교회에서 끝나고 집으로 갑니다. “주님, 제 손 잡으세요. 이제 저와 함께 집으로 가요”. 그래서 집에 왔습니다. 적어도 1분에 한번은 예수님 생각하는 것입니다. 눈에 띄는 곳에 예수님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보고 예수님 생각합니다. 옆에 의자가 비어 있습니다. 상상속에서 예수님을 그 의자에 앉힙니다. “주님, 이 의자에 앉으세요. 그리고 저와 함께 이야기해요”. 신문이나 책을 읽습니다. 그러면 신문이나 책을 예수님께 읽어드립니다.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그러면 바로 옆에 예수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혼자 산책합니다. “주님, 제 손잡고 가요”. 그래서 돌아가신 성결교의 이성봉 목사님은 항상 주먹을 쥐고 다녔다고 합니다. 누가 왜 그렇게 주먹을 쥐고 다녀요?” 했더니 , 주님 손잡고 다녀요했답니다. 예수님과 같이 다니는 것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곳이 집입니다. 집에 있을 때 예수님과 함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뜨개질을 하든 설거지를 하든 늘 찬양을 부르거나 흥얼거립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도록 예수님 그림을 집안 곳곳에 붙여 놓습니다. 창문밖에 아름다운 장면이 보입니다. “주님, 저 모습 보이시니요? 주님이 지으셨죠?” 하고 말합니다. 가끔 T.V를 볼 때가 있습니다. T.V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고 주님, 저 사람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 도와 주세요기도합니다. 이렇게 훈련해 나가다 보면 예수님이 무관한 공간과 시간은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모든 곳에서, 모든 시간에 주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루 24시간 주님과 동행하게 되고 마음이 평안하니까 모든 일이 잘된다는 것입니다. 걱정과 근심은 사라지고 주님으로 충만해져서 행복해 지고 성령이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통계를 보면 한국교회 성도의 90%가 주일에만 나옵니다. 그래서 한 시간 예배드립니다. 일주일이 168시간인데 나머지 167시간은 세상에서 살고 한 시간만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닙니까? 엘리사가 끝까지 엘리야를 따랐듯이 우리도 매일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엘리사는 갑절의 성령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엘리사를 크게 사용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갑절이나 구했기 때문입니다. 긴 여정을 엘리야와 함께 동행하여 요단강에 이르렀을 때 엘리사가 구한 것이 있었습니다. 왕하2:9,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10절입니다. 왕하2:10,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엘리사가 그때 엘리야에게 다른 것을 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신이 가졌던 리더의 자리를 내게 주소서. 당신이 가졌던 영적 권위를 주소서. 당신이 가졌던 부와 명예를 주소서”. 그런데 엘리사는 다른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가졌던 영감의 갑절을 주옵소서”. 영감은 성령의 감동입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을 구했습니다.

 

엘리사가 왜 성령을 구했을까요?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 읽었던 성경 눅11:13,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7:11,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저는 오랫동안 기도할 때 능력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같이 대화하는 것이지 능력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도에는 보통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필요를 구하는 기도. 주님도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습니다. 필요한 것을 구하는 기도가 저급한 기도가 아니며 오히려 필요한 것은 구하지 않는 것이 교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살기 때문입니다. 내게 필요한 것을 구하지 않겠다는 것은 하나님 도움이 필요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교만입니다. 필요한 것을 구하면 우리에게 만족이 옵니다. 두 번째 기도는 교제를 위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무엇을 얻기 보다 주닙과 대화하는 데 목적을 둔 기도입니다. 내가 주님안에 있고 주님도 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아이가 엄마를 바라보듯이 하인이 주인을 바라보듯이 늘 주님을 바라보며 도란 도란 대화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대화의 기도를 하다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 갑니다. 그러나 또 하나가 있습니다. 능력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먹을 양식도 필요하고 주님안에서 누리는 교제도 중요하지만 실제 우리에게 능력이 없다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교제한다면서 늘 아프고 주님과 도란 도란 이야기는 하면서 세상의 정과 욕심을 못 이기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래서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바꿧습니다. “주여. 능력을 주옵소서. 죄를 이길 능력, 선을 행할 능력, 목회할 능력, 설교할 능력, 인내할 능력, 용서할 능력, 기도할 능력, 기도를 지속할 능력을 주옵소서”.

 

엘리사는 왜 성령을 구했을까요? 그것이 가장 크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필립스가 쓴 네 하나님은 너무 작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3달러어치의 하나님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주님, 나는 주님의 작은 일부만을 사고 싶습니다. 내 영혼을 깨뜨리지 않을 정도만, 수면을 방해받지 않을 만큼만, 내 인생이 사로잡히지 않을 만큼만. 따듯한 우유 한 잔만큼이면 됩니다. 나는 3달러어치만 하나님을 사고 싶습니다. 호주머니에 넣은 만큼의 사랑이면 충분합니다. 내 마음을 바꾸지 않아도 될 정도만, 시간이 날 때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만, 나는 영원의 500그램만 사서 종이 봉지에 담아들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차릴 정도로 내 안에 심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어떤 책임도 느끼지 않을 만큼만, 사람들이 나를 보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길 정도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너무 작지 않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너무 작지 않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 않습니까? 28: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우리의 기도도 조금 커져야 하지 않습니까? 작은 기도를 드린다고 겸손한 것이 아니요 큰 기도를 드린다고 교만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구하는 가장 큰 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손에 가지신 것보다 하니님 자신이 더 크지 않습니까? 하나님 자신이 곧 성령입니다. 엘리사는 그 성령의 갑절을 구했습니다. “성령의 갑절을 주옵소서”. 옛날 이스라엘에서 장자는 다른 자녀보다 두배의 상속을 받았습니다. 영적 장자가 되려면 두 배의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힘이 있고 그래야 이깁니다. 9, “너는 구하라”. 10, 입니다. “갑절의 성령응 주옵소서”. 기도는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는 통로입니다.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이 말했습니다. “기도는 죄를 쉬게 하는 것이며, 기도를 쉬 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다”. 기도와 죄는 물과 기름입니다. 또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기도한 후에도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 기도가 전부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약속을 믿습니까? 44:3-4,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내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다윗의 기도를 아십니까? 138:3,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스가랴의 말씀도 있습니다. 10:1,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

 

 

 

 

 

 

 

 

 

 

 

 

 

 

 

 

 

 

 

 

왕하2:1-11 2015.9.13()

갑절의 성령을 주옵소서

엘리사의 샘(사진).

 

먼저 엘리사는 잘 버렸습니다.

왕상19:19,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들었더라”.

왕상19:20,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우리 신앙생활의 문제는 양다리 걸치는 것입니다.

 

19:10, “두 해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9: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19: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앞에서 불 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다음 엘리사는 잘 좇아갔습니다.

왕하2:11,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만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왕하2:12,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왕하3:11, “이스라엘 왕의 신복중의 한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프랑크 루박, “1분 게임”(사진. ) .

 

엘리사는 갑절의 성령을 구했습니다.

왕하2:9,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왕하2:10,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11:13,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7:11,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세 가지 기도

(1) 필요를 구하는 기도.

(2) 교제를 위한 기도

(3) 능력을 구하는 기도

 

“3달러어치의 하나님

주님, 나는 주님의 작은 일부만을 사고 싶습니다. 내 영혼을 깨뜨리지 않을 정도만, 수면을 방해받지 않을 만큼만, 내 인생이 사로잡히지 않을 만큼만. 따듯한 우유 한 잔만큼이면 됩니다. 나는 3달러어치만 하나님을 사고 싶습니다. 호주머니에 넣은 만큼의 사랑이면 충분합니다. 내 마음을 바꾸지 않아도 될 정도만, 시간이 날 때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만, 나는 영원의 500그램만 사서 종이 봉지에 담아들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차릴 정도로 내 안에 심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어떤 책임도 느끼지 않을 만큼만, 사람들이 나를 보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길 정도만”.

 

28: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작은 기도를 드린다고 겸손한 것이 아니요 큰 기도를 드린다고 교만한 것이 아닙니다.

 

존 번연, “기도는 죄를 쉬게 하는 것이며, 기도를 쉬 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다”.

 

44:3-4,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내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10:1,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