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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롬8:18-27 2015.9.6(일)영적 부흥을 사모하라

8:18-27 2015.9.6()

영적 부흥을 사모하라

오늘은 9월 첫주일입니다. 보통 가을이 9월에 시작된다고 하면 가을이 막 시작된 날입니다. 그러나 이 날은 저에게도 중요한 날입니다. 제가 한신교회 목회를 시작한 지 정확하게 10년 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200594, 저는 이 강단에서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처음 설교를 했습니다. 12:2을 본문으로 주만 바라 볼찌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그때의 영상입니다(영상). 어떻습니까? 그때도 인물이 괜찮았지 않습니까? 그 뒤 10, 강산이 한번 변한 뒤 많은 변화와 함께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이중표 목사님이 돌아가신 지 두 달밖에 안되어 교인들의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저는 무거운 마음으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해야 했습니다. 새롭게 시작은 했지만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교회는 아름다웠지만(사진), 판교의 빈 들에 외롭게 덩그렁이 놓여 있었고(사진), 여기 저기 비닐하우스와 야산, 잡풀만 무성했습니다(사진).

 

그 텅빈 빈들에서 저와 교인들은 그저 하나님만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때의 심정은 아무 것도 없는 캄캄한 빈들에 아버지는 떠나고 어린 아들만 혼자 남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다가 2009년부터 판교가 개발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저기서 집짓는 소리가 들리고 우리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사진). 봇들 1단지, 풍성아파트에서부터 한 동 한동 건물이 지어질 때마다 우리는 신기했고 감동했습니다(사진). 그리고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사진). 겨울엔 차거운 손을 불어가며, 여름에는 구슬같은 땀을 흘려가며 전도했습니다(사진). 전도가 쉽지는 않았고 금방 열매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땀흘린 교우들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난 10, 저와 함께 하나님을 섬겨온 모든 교우들에게 감사와 고마운 마음을 드립니다. 지난 1개월의 안식월은 저에게 새로운 전환점으로서 우리 교회 과거를 성찰하고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미국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벌써 10년이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이 1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 날 아침 제가 로마서를 읽고 있었는 데 18절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8:18,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저에게 이 말씀은 위로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지난 10년간 제대로 못했다고 자책하고 있는 데 뜻밖에 하나님은 앞으로가 더 큰 영광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받았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잘 했니? 앞으로는 더 잘 될거야”. “혹시 지금까지 잘 못했니? 괜찮아. 앞으로 잘 될거야”.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건어야 할 고난도 있었습니다. 21절입니다.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로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저에게 현재와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약속하셨지만 현재의 모습도 있는대로 보여주셨습니다. “피조물의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책으로 보았습니다. 8장에서 바울이 하는 말은 하나님의 지으신 세계가 여러모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은 멀지 않아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를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우리 주변 어디를 봐도 창조세계는 마치 해산을 앞둔 임신부와 같습니다”. “해산을 앞둔 임신부”, 세상이 겪고 있는 고통은 한마디로 해산의 고통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내면을 일깨우셔서 우리 역시 산고를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산고를 겪고 있고 우리 민족도 산고를 겪고 있습니다. 산도는 아프지만 아이를 낳는 희망때문에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성경을 읽은 날 저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날이 월요일이었는 데 제가 애틀란타 공항으로 사람을 마중나가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마침 애틀란타 한인교회 다니는 사진 작가 집사님이 저를 안내하기로 해서 그 차를 타고 공항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공항에서 사람을 기다리는 데 제 몸이 갑자기 아프기 시작한 것입니다. 도무지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었습니다. 너무 너무 아파 몸을 비틀다가 사람이 도착해서 시내로 달려 한방병원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침을 맞아도 안 낫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한국의시가 하는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 사이에도 금방 숨이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간신히 참고 병원 침대에 누었는 데 이런 저런 검사를 하다가 결국 신장결석으로 판명되었습니다. , 저는 신장결석이 그렇게 아픈지 처음 알았습니다. 도무지 앉아 있지도 서 있지도 못하겠습니다. 그 사이에 제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겠습니까? 처음엔 주여, 고쳐주세요. 살려 주소서하다가 나중에는 그 말도 다 필요없습니다. “주여, 주여”. 그런데 의사가 주사를 놓고 약을 먹었더니 감쪽같아 사라졌습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그때 한인교회 집사님, 너무 수고했습니다. 집사님 아니었다면 저는 여러분을 못 만났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한국에 와서 병원에 갔는 데 돌이 없어졌습니다. 이 짧은 경험을 통해서 제가 정말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 살고 죽는 것이 한 순간이구나. 죽음이 저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내 옆에 있구나”. 그리고 하나님이 살려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죽을 수 밖에 없구나

 

그리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다시 롬8장을 보는 데 롬8:11에 눈에 크게 들어왔습니다. “너희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살리시리라”. “살리시리라”. 죽음의 경험에서 벗어나 살린다는 말이 크게 들어왔습니다. 죽을 몸을 살리시는 성령. 그날 저녁, 저는 그 날 있었던 일들이 인생의 매 순간의 일이면서 동시에 제 목회의 미래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나를 고통에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이것입니다. 22,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탄식과 고통”. 탄식은 죽어 가는 사람이 지르는 비명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요 한신교회, 한국교회,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 속에서 살리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다.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살립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은 살리는 분이라고 믿습니까? 그 성령님을 여러분은 의지합니까?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가장 대표적인 이름은 살리는 영입니다. 6:63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여기에 살리는 영이 나옵니다. 성령님은 살리는 영입니다. 성령의 구약 성경적 이름은 루아흐 하야입니다. “루아흐바람이요, “하야는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문자적으로 풀면 살아 있는 바람, 살아 있는 숨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 그 코에 살아 있는 숨을 불어 넣었습니다. 흙덩이에 불과했던 우리 몸에 하나님의 숨이 들어가자 사람이 살아 있는 영이되었습니다. 사람에게만 부으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창조물과 자연에 부으셨습니다. 이 바람이 입니다. 숨은 생명입니다. 숨이 끊어지면 죽습니다. 다산 유영모 선생은 사람에게 세 가지 숨이 있다고 했습니다. “목숨”, 목에 붙어 있는 생명입니다. 말숨, 말로 나타난 생명입니다. 우숨, 위에서 주신 생명입니다. 목숨, 말숨, 우숨,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성령안에 삽니다. 성령님의 살리는 역사가 없으면 우리는 모두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이 살리는 영을 크게 두 가지로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창조의 영이신 성령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그의 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성령은 창조의 영입니다. 신약은 구원의 영이신 성령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경은 살리는 성령에 대해 많은 은유로 설명합니다. 성령은 어머니와 같습니다. 어머니가 우리를 낳고 기르고 살립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은 우리를 낳고 기르고 살립니다. 66:11, “너희가 젖을 빠는 것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 하리라”. 성령님은 어머니의 영입니다. 성령님은 또한 생수와 같습니다. 우리가 물을 마셔야 사는 것처럼 성령은 우리의 영혼을 적시는 생수입니다. 21:6,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36:8, “주께서 생명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라”. 누구근지 그 물을 마시는 자는 삽니다. 또한 성령님은 생명의 나무와 같습니다. 나무에 열매가 맺혀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것처럼 성령님도 그렇습니다. 14:8, “나는 푸른 잣나무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같으니”. 어머니는 자식을 살리고 생수는 목마른 자를 살리고, 나무의 열매는 굶주린 자를 살립니다. 살리는 성령님, 성령님은 우리를 창조하셔서 살리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살립니다.

 

12세기 독일 라인강변 빙엔이라는 곳에 생명의 영성가가 한 사람 살았습니다. 여자였습니다. 이름은 빙엔의 힐데가르트입니다. 그는 일생 생명의 영이신 성령님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그가 남긴 살리신 성령시입니다.

 

살리는 생명이신 성령님,

당신은 모든 것을 움직이시며 모든 피조물 안에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당신은 우리의 모든 더러움을 씻으시며 모든 죄를 씻으시며 모든 상처를 치료하십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생동하게 하고 다시 살리십니다. 당신은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성령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은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우리안에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끊임없이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8:26,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여기에 연약함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힘이 없다는 뜻입니다. “강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강한 것 같아도 약합니다. 육체의 힘, 영적인 힘, 지식, 감성, 현재를 보는 통찰력, 미래를 보는 예견력, 다 없습니다. 그래서 연약합니다. 그러면 어떻개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그런데 기도할 줄 모릅니다.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어떻게 기도할지 모릅니다”. 그때 도우시는 분이 있습니다. 성령님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가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해야 하는 데 기도는 안하고 있으니 정말 답답합니까? 그때 성령님이 탄식하면서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좋은 일은 기도에서 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개인이나 국가나 모든 좋은 일은 기도를 통해 옵니다.

 

한국교회 부흥의 역사를 아십니까? 1907년 한국교회는 전무무후한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그 한해동안 30만명의 동포가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 뒤에 일어난 3.1운동, 독립운동, 평양 숭실학교, 세브란스, 이 모든 것은 1907년 대부흥운동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부흥은 몇 사람의 이름도 빛도 없는 사람들의 기도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1907, 4년전, 원산에서 한국민족을 위해 남몰래 기도하고 있던 두 사람의 여자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미국의 여자 선교사 화이트와 메컬리였습니다. 이들은 가난한 이 민족을 위해 보고 오랫동안 말없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강원도에서 선교하고 있던 하디 목사를 강사로 초청했습니다. 하디는 토론토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파송된 의료선교사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가는 곳마다 선교에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하디에게 여선교사들이 기도에 대해 강의해 달라고 부탁하자 강의를 준비하기 시작했는 데 강의를 준비하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를 변화시킨 말씀은 눅11:13절이었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처음 이 귀절을 읽었을 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가 잘 아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계속 읽는 가운데 중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말씀은 믿는 자에게 성령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보았습니다.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여기 천부하늘 아버지입니다. 이 말씀은 안 믿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성령님인데 그 분은 아무에게나 오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자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때 하디 선교사가 깨달았습니다. “, 내가 선교에 실패한 것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성령의 능력이 없는 것은 내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구나“. 지금까지 하디는 한국선교가 실패한 것은 한국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는 공부도 많이 있고 설교도 잘하는 데 한국사람들이 무식하고 못 알아들어서 그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눅11:13은 그 이유를 그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교만과 학력 우월주의와 백인 우월주의를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성령을 의지하지 못했던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사람들앞에 나타날 때마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자기의 무지와 무능을 용서해 달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했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면 눈물이 나기 시작하다가 설교가 끝날 때까지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자기의 실수와 부족을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회개하고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한 달동안 저는 한신교회 목회 10년을 돌아보며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10년 동안 저도 열심히 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않고 월요일도 없이 일했습니다. 교회의 문제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고 어느 한날 발뻗고 자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기도하면 할수록 제 목회에서 잘못한 것 두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첫째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목회를 못했습니다. 책도 많이 읽었고 설교도 잘 하려고 애썻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은 많이 의지하지 못했습니다. 제 설교는 성령의 음성이라기 보다는 인간적 지식에 가까웠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제가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역시 기도한다고 했고 특히 새벽기도는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중형 이상의 한국교회 담임목사들이 새벽기도를 주로 부교역자들에게 맡기고 있는 것에 비해 저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 기도는 간절하지 못했고 피상적이었습니다.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저는 하늘 아버지를 간절히 의지하지 못했고 따라서 성령의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저는 기도가 부족한 종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잘못한 것은 교인들을 사랑하는 목회를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하고 가르치고 프로그램 만들어 내는 데는 많은 시간을 쓰고 정작 교인들을 돌보는목회는 잘하지 못했습니다. 판교개발이후 새가족에게 집중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관심이 모든 성도에게까지 미치지 못했습니다. 새가족은 그래도 꾸준히 돌보았지만 기존신자는 충실히 돌보지 못했습니다. 새가족을 위해 기존신자들이 양보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기존신자들은 마치 고향의 느티나무처럼 늘 그 자리에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존신자도 교인이고 그들에게도 돌봄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이 아플 때 가지 못했고 그들이 힘들어 할 때 함께 있어 주지 못했고 그들에게 할 말이 있을 때 들어주지 못했습니다.

 

저는 교인들과 가깝게 지내지 못하는 것이 제 기질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교인들도 목회자를 지나치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 목회철학에서 나온 것보다 게으름과 불충성에서 나온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저는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놓은 종입니다. 이 종이 그렇게 했지만 여전히 기다려 주시고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저는 진즉 망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런 저를 믿고 기다려준 성도들의 인내와 사랑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잘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보다는 더 잘하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디처럼 교만했습니다. 가끔 나는 문제는 없는 데 교인들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제게 있었고 문제의 본질은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한없이 우리 앞에 있는 데 저는 그 능력을 의지하지 못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성령의 능력을 덜 의지하고 한편으로는 교인들을 더 사랑하지 못하고, 이것이 지난 10, 제 목회의 부족한 성적표입니다.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주시지 않겠느냐?”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교회도 개인도, 민족도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best of best, 가장 좋은 것중의 좋은 것, 성령님, 그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생수같은 성령님, 우리에게 부어지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영적 부흥을 사모합시다

그래서 나온 것이 부흥입니다. 저는 사실 부흥이란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부흥하면 박수치고 노래부르는 부흥회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부흥회를 통해 은혜도 받지만 문제도 생긴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흥은 부흥회가 아닙니다. 부흥이란 말은 살아나는 것입니다. 부흥은 revival,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 죽었던 것을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 메마른 산천초목에 단비가 내려 모든 식물이 고개를 들고 살아나는 것처럼, 죽었던 환자가 수술을 받고 벌떡 일어난 것처럼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살아나는 것이 부흥이라면 우리는 늘 부흥을 사모해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처럼 부흥은 살려내는 것입니다.

 

부흥의 또 다른 오해는 전도입니다. 사람들은 전도가 부흥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도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그것이 부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흥의 목적은 많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살려내는 것입니다. 전도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부흥은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전도는 남이 우선입니다. 부흥은 내가 우선입니다. 전도는 나 밖에 이루어집니다. 부흥은 내 안에서 일어납니다. 전도하면 사람들이 모이지만 부흥하면 성령이 일합니다. 그래서 전도한다고 항상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내 속에서 부흥을 일으키지 않으면 전도는 다만 행사에 불과합니다.

 

성경에서나 교회 역사에서 부흥이 일어나는 순서가 있습니다. 부흥은 대개 한 사람으로 시작합니다. 그가 간절히 무릎꿇고 기도하다 성령을 받습니다. 그러면 말씀이 임하고 말씀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부흥이 임합니다. 그 부흥은 반드시 사랑을 동반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사랑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사는 사회가 전체적으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부흥의 순서입니다. 구약 아합시대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엘리야 한 사람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엘리야에게 붙은 불이 엘리사에게 갑절이 붙어 전 이스라엘로 퍼져갔습니다. 마침내 바알을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신약 사도행전 시대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 한 사람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그 불이 사도들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붙어 사마리아,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15세기, 중세기에 이태리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피렌체에 살던 사보나롤라라는 수도사를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이 사람속에 어느날 성령의 불이 임하자 평범하던 사람이 햇가닥 하고 변했습니다. 하루는 그가 강단에 올라가 설교하는 데 갑자기 자신에게 능력이 없슴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즉시 설교를 중단하고 골방으로 내려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성령을 구했습니다. 그렇게 5시간 간절히 기도했더니 성령이 임했습니다. 돌아가 보니 5시간동안 한 사람도 자리를 뜨지 않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중세의 부흥의 시작이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대에는 마틴 루터 에게 불이 붙었습니다. 수도원 탑 골방에서 성경읽다 주님이 그를 위해 죽은 믿음의 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평범한 수도사 마틴 루터이 다시 살았고, 그 불이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100년 후 독일에 또 한번의 부흥이 임했습니다. 프랑크푸르트라는 도시에 살던 야곱 스페너라는 사람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경건주의 부흥운동입니다. 100년후 또 요한 웨슬리를 통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감리교부흥운동입니다.

 

1904년 영국 웨일즈지역에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주역은 20대 초반의 신학생 에반 로버츠였습니다. 그가 항상 울면서 기도했던 제목은 주여, 나를 굴복시켜 주옵소서였습 니다. 18세기, 요한 웨슬리, 19세기, 무디, 그리고 1907년 평양에서 길선주장로, 하나님은 한 사람의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부흥을 일으키십니다. 부흥이 일어나면 사회가 통째로 변합니다. 영국 웨일즈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변화를 받았습니다. 술집과 사창가가 문을 닫았습니다. 나중에는 경찰들이 할 일이 없어서 하품을 했다고 합니다. 감옥에서는 사형시킬 사람이 없어 단두대의 밧줄이 썩어서 떨어졌습니다.

 

이제 그 부흥이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부흥, 교회의 역사에 나타난 부흥, 하나님은 지금도 기도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고, 성령을 통해 우리 자신을 살리시고, 우리를 통해서 세상을 살리시기 바라고 있습니다. 한신교회의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누가 말없이 무릎꿇고 기도해 성령님이 임하게 하겠습니까? 기도합시다. , 수요일, 중보기도학교에 나오십시오. 금요일 저녁 영적 부흥을 위해 기도합니다. 부흥을 사모합시다. 이제부터 하나님이 일하실 것입니다. 영적 부흥으로 충만하기 바랍니다.

 

 

 

 

 

 

 

 

 

 

 

 

 

 

 

 

 

 

 

 

 

 

 

 

8:18-27 2015.9.6()

영적 부흥을 사모하라

설교(영상). 아름다운 교회(사진), 빈 들에 있는 교회(사진), 잡풀(사진).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기도(사진). 건축(사진), 전도(사진).

8:18,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로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우리 주변 어디를 봐도 창조세계는 마치 해산을 앞둔 임신부와 같습니다”(메시지 성경)

 

8:11, “너희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성령님은 우리를 살립니다.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성령은 어머니와 같다.

66:11, “너희가 젖을 빠는 것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 하리라”.

 

성령은 생수와 같다.

21:6,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36:8, “주께서 생명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라”.

14:8, “나는 푸른 잣나무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같으니”.

 

성령은 생명의 나무와 같다.

 

빙엔의 힐데가르트, “살리시는 영, 성령님”.

 

살리는 생명이신 성령님,

당신은 모든 것을 움직이시며 모든 피조물 안에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당신은 우리의 모든 더러움을 씻으시며 모든 죄를 씻으시며 모든 상처를 치료하십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생동하게 하고 다시 살리십니다. 당신은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영원한 생명입니다“.

 

성령님은 기도하게 하십니다.

8:26,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내가 잘못한 것

- 성령의 능력을 덜 의지하고 기도가 약했다.

- 교인들에게 사랑의 목회를 못했다.

 

영적 부흥을 사모합시다

전도와 부흥

 

 

성경이나 교회 역사에서 일어나는 부흥의 특징

(1) 한 사람으로 시작한다

(2) 그가 간절히 무릎꿇고 기도하다 성령을 받는다.

(3) 말씀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부흥이 임한다.

(4) 사랑은 부흥과 함께 동행한다.

(5) 전 도시적, 사회적 변화가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