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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행8:9-24 2015.9.20.(일)우상을 버리고 성령님께

8:9-24 2015.9.20.()

우상을 버리고 성령님께

가을의 한 복판으로 접어 들었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는 것일까요? 무엇을 얻으면 잠시 기뻐하다가 곧 더 큰 것을 원합니다. 어느 정신병동에서 그랬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쳤습니다. “내가 왕이다. 다 내게 와서 절하라”. 그랬더니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외쳤답니다. “? 누가 너를 왕으로 임명했느냐? 내가 너를 왕으로 임명한 적이 없노라”. 했답니다. 사람은 누구나 왕이 되고 싶고 큰 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 욕망속에 우리가 숨겨둔 우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한국사람이 그렇듯이 저도 불교문화의 뿌리가 깊은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웬만큼 좋은 산에는 반드시 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풍을 가면 항상 절로 갔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다닌 저는 그것이 불만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해인가 그때도 절로 소풍을 갔는 데 점심 먹고 시간이 있어 절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부처님 뒤로 살짝 들어 갔습니다. 도대체 부처님은 살아 있는 것일까? 부처상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항상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 놀라웠습니다. 거기는 아무 것도 없을 뿐 아니라 부처상 뒤에는 낡고 너덜 너덜한 쇠붙이만 붙어 있었습니다. 메끼질한 금 메끼가 벗겨지고 그나마 주변에는 빗자루, 걸레, 심지어 쓰레기같은 것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웅장한 부처님 뒤가 그렇게 허술할 줄은 미쳐 몰랐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불상을 무서워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저는 또 다른 우상이 항상 저에게 있슴을 알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불상을 섬기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그것이 저에게 항상 자랑이었지만 저는 저도 모르게 많은 종류의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우상은 다만 사람이 만든 조각상이 아니잖습니까? 우상이란 무엇일까요? 깍아만든 어떤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 하나님을 대신하는 무엇,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하나님처럼 앉아 있는 어떤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근에 우리 사회에 자살이 많아 지고 있습니다. 한 해에 약 만 5천명이 자살합니다. 지난 번 미국에 가서 들었는 데 미국에 있는 한 교포 사업가도 얼마전에 자살했답니다. 이유는 그가 미국의 어떤 사업에 크게 투자했는 데 주가가 폭락해서 재산을 크게 잃었답니다. 그래서 유서를 쓰고 죽었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그는 왜 죽었을까? 그의 사업과 그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사업이 안돼서 목숨을 끊었다면 사업은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그때 생각한 것은 사업은 그에게 우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자리잡은 우상은 그래서 심각한 것입니다. 오늘 저는 마술사 시몬을 통해 우리안에 깊히 자리잡은 우상의 실체를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우상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하나님이신 성령님의 지배와 통치를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말씀을 통해 우상을 버리고 성령님께 돌아오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빌립이 사마리아 지역을 전도하는 가운데 나타난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사로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해진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7장까지 예루살렘과 유다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자 하나님은 빌립을 택하여 사마리아 지역에도 복음을 전하도록 명했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사마리아 지역으로 갔고 거기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6-7절입니다. 8:6-7,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 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빌립의 전도로 사마리아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생기가 없던 도시가 생기가 생기며 재미가 없던 도시가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등장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술사 시몬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평소에 마술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그것으로 많은 돈을 벌고 있었는 데 가만히 보니까 빌립이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는 빌립을 따라 다닐 뿐 아니라 세례까지 받았다는 것입니다. 12-13절을 보시겠습니다. 8:12-13,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권능을 보고 놀라니”. 마술사 시몬은 왜 빌립을 따라 다녔을까요? 믿음때문입니까? 오랫동안 마술로 사람들을 속이고 그것으로 부와 명예를 추구하던 잘못된 삶을 회개하기 위해서 그랬을까요?

 

오늘 말씀에서 많이 나온 단어가 크다라는 단어와 놀랐다라는 단어입니다. 각각 두 번씩 나타납니다. 13절 다시 보실까요?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과 큰 권능을 보고 놀라니라”. 마술사 시몬이 빌립을 따른 이유는 믿음때문이 아니라 자기도 빌립처럼 큰 능력을 가져서 사람들을 위에 우뚝 서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능력이 어디서 오나 하고 보았더니 성령의 능력에서 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든 성령을 소유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나왔습니다. 18-19절입니다. 8:18-19,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마술사 시몬이 얼마나 급했으면 성령을 사려고 돈을 내놓았을까요? 그에게 있는 것은 돈과 욕심뿐이니 돈이라도 드려서 성령을 사려고 했던 것은 당연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이 어디 돈주고 사는 것입니까? 돈주고 산 성령이 얼마나 그에게 능력이 되겠습니까? 결국 시몬은 베드로에게 책망을 받고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것은 마술사 시몬에게 있었던 것은 돈이 아니라 우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마술은 속임수가 아닙니까? 있지 않은 현실을 눈속임으로 속여서 사람들로부터 호기심과 돈을 얻어 내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레20:6절과 27절은 어떤 마술도 하나님앞에 금지되어 있고 마술을 행하는 자는 반드시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마술을 금한 것은 그것이 속임수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진짜 하나님이 사라지고 가짜 하나님, 대용 하나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마술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것입니다. 그 심리속에는 나도 하나님처럼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이 놀라면 봐라. 내가 누군지 아니? 내가 이 정도야하면서 자신이 마치 하나님이 된 것처럼 우쭐댑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얻는 인기나 돈이나 명예도 또 다른 우상입니다. 이 우상의 매력 때문에 사람들이 마술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도 매일 우상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상을 섬기고 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자신을 성찰할 때 나도 매일 너무 많은 우상을 섬기고 있구나 하고 생각합니까? 십계명중 가장 큰 계명은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부처는 안 섬기지만 사실 너무 많은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너무 많아 셀 수 없지만 대표적인 몇 가지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1) 자식의 우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식은 거의 우상입니다. 저는 창22장을 읽을 때마다 이런 질문을 합니다.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을 바치라고 했을까? 그렇게 어렵게 얻은 아들을 왜 하나님은 바치라고 했을까? 그냥 바치라는 것이 아니고 번제로 바치라고 했으니 칼로 아들을 죽이고 오장육부 다 드러내고 각을 떠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인데 하나님은 너무 하지 않은가? 줄때는 언제고 달라고 할 때는 언제인가? 그래서 이삭이 태어난 창21장과 이삭을 바친 창22장을 유심히 읽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미묘한 변화를 발견했습니다. 아들이 태어나자 부부가 크게 웃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먼저 태어난 아들 이스마엘을 쫓아냅니다. 사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원해서 나은 아들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부부가 원해서 낳았습니다. 그래 놓고 내쫓습니다. 진짜 아들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창222절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면서 아들 이삭을 이렇게 말합니다. 22:2,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그 전에는 아들이라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입니다. 이삭이 나이가 20살쯤 되었다면 21장과 22장 사의에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세월이 흐르면서 아들의 칭호가 바뀌었습니다. 그냥 아들이 아니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입니다. 아들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고 사정해서 25년이나 기다려 아들을 주었는 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아들은 아브라함에게 점점 하나님이 됩니다. “그냥 하나만 주세요해서 주었는 데 이제는 내 아들 내 사랑하는 독자입니다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리아사건은 무엇일까요? 누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냐 시험보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이 시험한 것이 그것입니다. “내가 네 하나님이냐? 네 아들이 네 하나님이냐?” 다행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창22:12절이 중요합니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 내가 이제아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다같이 이제야”. 아브라함이 시험에 통과하자 하나님이 그에게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하나님으로 여긴 자에게 자신의 하나님됨을 나타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여러분의 자녀를 지나치게 사랑하지 않습니까? 사랑한 것이 무슨 죄겠습니까? 자식이 하나님 되는 것이 문제 아닙니까? 왜 애굽에서 하나님이 장자들을 바치라고 했겠습니까? 장자는 첫 아들입니다. 자식중에서 첫 번째로 태어난 아들입니다. 온갖 사랑과 기대가 그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 자식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사랑하되 자녀가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을 믿습니까? 오직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2) 소유의 우상

자식에 대한 우상과 함께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우상이 소유의 우상입니다. 12:15절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주님이 간통을 물리치라”, “거짓말을 물리치라고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가장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물질욕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야곱을 아십니까? 저는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싸워 이겼다는 말을 읽을 때마다 사람이 어떻게 천사를 이길 수 있을까? 야곱이 천사를 이겼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야곱은 일생 소유를 따라 살았습니다. 아버지밑에 살 때도 형과 장자권가지고 싸우다가 하란으로 도망했습니다. 그리고 20년간 하란에 살면서 오로지 뭔가 소유하고 성공하는 데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는 20년동안 낮에도 더위, 밤에는 추위를 무릎쓰고 일했습니다.

 

그가 소유하고자 했던 것은 물질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내도 소유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네 명의 여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예쁜 여자만 아내로 삼고자 한 것도 여자를 인격으로 본 것이 아니라 소유의 개념으로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제가 성경읽다가 깜짝 놀란 것이 있습니다. 28장에서 32장까지, 야곱이 하란에서 20년 사는 동안 한번도 하나님이란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이유가 있었습니다. 야곱이 다른 하나님을 좇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20년동안 진짜 하나님을 잊고 짝퉁 하나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의 짝퉁 하나님은 첫째 물질, 둘째 여자, 셋째 성공이었습니다. 그가 드디어 20년 하란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성경은 야곱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그의 소유를 소개합니다. 다 소개하지 않고 형 에서에게 준 것만 소개합니다. 32:14-15입니다. “암염소가 200이요, 수염소가 20이요, 암양이 200이요, 숫양이 20이요, 젖나는 낙타 30과 그 새끼요 암소가 40이요 황소가 10이요 암나귀가 20이요 그 새끼가 10이라“. 형에게 준 것만 이렇게 많다면 그는 얼마나 부자입니까? 신앙인이 20년을 객지에서 살았다면 물질말고도 얻은 것이 많이 있기 않겠습니까? 그런데 야곱은 사람도 잃고 하나님도 잃고 오로지 물질만 얻었습니다.

 

그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던 날, 뜻밖에 얍복강에서 기다리고 있던 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었습니다. 야곱은 거기서 그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하나님과 만났습니다. 20년동안 짝퉁 하나님을 따라다니느라 잊고 있었던 하나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밤새도록 싸웠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그는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야곱이란 말은 야포크“, ”비운다는 뜻입니다. 그가 20년동안 다른 신을 섬겼던 야곱, 이제 그 모든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만 찾았던 그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환도뼈를 쳤다는 것은 그 우상을 버리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를 쳐복종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우상을 버릴 수 없습니다. 결국 야곱은 하나님과 싸운 것이 아니라 자기와 싸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싸운 것이 아니라 야곱이 자기 우상과 싸우도록 주선하고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때 낳은 아들이 누구입니까? 요셉입입니다. 왜 요셉이 믿음의 사람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 아버지 야곱이 20년동안 믿었던 물질의 신, 소유의 신, 짝퉁 하나님을 버리고 얍복강에서 진짜 하나님을 만난 후에 낳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소유가 필요하지만 소유가 하나님이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하나님을 믿어도 물질욕에 사로잡힌 한 우리는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없습니다. 두 하나님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온 말은 믿으라”, “사랑하라가 아닙니다. “믿으라가 성경에 272, “사랑하라714번 나오는 데 드리라2162번이 나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질을 주인 삼으면 하나님이 그만큼 멀어집니다. 일생 소유욕으로만 살다 예수님만난 삭개오는 수입의 50%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부정하게 얻은 것을 사회에 기부함으로써 물질의 신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을 당연히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이지만 동시에 물질속에 사는 우리가 물질의 우상에 빠지지 않게 해주는 탐욕의 해독제입니다. 물질은 가장 대표적이며 가장 강한 짝퉁 하나님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질을 신으로 섬겨서는 안됩니다.

 

3) 성공주의의 우상

소유의 우상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색깔로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우상이 있습니다. 성공의 우상입니다. 오늘의 주인공 마술사 시몬을 붙잡았던 가장 강력한 우상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성공주의일 것입니다. 성공하면 언제나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마술사 시몬이 만약에 그날 돈주고 성령을 샀다면 그 능력으로 더 많은 기적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마음에 더 많은 행복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행복감과 함께 성취감과 의욕이 생겨나 더 많은 일을 추진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더 많이 인정받고 더 많은 부와 명예를 차지했을 것입니다. “, 내가 괜찮은 존재구나. 누가 나를 이기나? 내가 최고야이렇게 되는 것은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성공주의는 우리에게 가장 매력있는 짝퉁 하나님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상당히 오랫동안 제가 성실하고 괜찮은 목회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 내면에는 흉악하고 무서운 죄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공주의의 우상이었습니다. 곁으로는 제가 영성을 말하고 하나님 닮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제 마음의 목표는 큰 교회 목사가 되어 목회에 성공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당연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성령님이 제 마음에 빛을 비추자 그 모든 것이 짝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지난 번에 제가 성령님을 덜 의지했다고 했는 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보았더니 제 속에 있는 성공주의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성공주의를 목회자의 열심과 사명과 혼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묵상하다가 성공과 승리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공은 세속적 개념이고 승리는 영적 개념입니다. 성공은 물량적이며 외형적 개념입니다. 그러나 승리는 내적이며 영적인 개념입니다. 우리는 성공해야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해야 성공합니다. 하나님없이도 성공할 수 있으나 하나님없이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마술사 시몬의 이야기는 바로 제 이야기입니다. 그는 성공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도 누구나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성령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입니까?

 

우리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오늘 말씀이 성령에 대하여 우리에게 가르치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를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마술사 시몬은 그가 성령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20, 8:20,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함께 망할지어다”. 엄청난 말입니다. “망할지어다“. 이 말을 다른 번역으로 보면 하나님을 모독했으니 돈과 함께 저주를 받을지어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신 성령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습니까? 성령님이 물질입니까? 성령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전형적인 짝퉁 신앙의 특징입니다. 셩령님은 소유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님이 우리를 소유합니다.

 

성령은 누구입니까? 20, “하나님의 선물“. 선물입니다. 상품이 아닙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무엇이 선물이 아니라 성령님 자신이 선물입니다. 7:11,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가장 좋은 분은 성령입니다. 가끔 우리가 기도하고도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응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응답이 더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이것을 믿으면 절대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응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기도한다. 기도할 때 우리가 붙들 것은 기도의 응답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 자신을 붙드는 데 왜 낙심하겠습니까?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고 성경이 말하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님이 가장 좋은 분입니다. 기도할 때 가장 좋으신 성령님이 같이 계시는 데 왜 낙심합니까?

 

또 하나 낙심하는 이유는 기도해도 내 뜻대로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되어야 잘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 인생을 다스릴 힘이 거의 없습니다. 인간은 유전, 환경, 개인의 선택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된 존재입니다. 유전과 환경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96%입니다. 나머지 4%만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시대와 장소, 부모와 가족, 어린 시절의 환경, 신체적 특징, 유전, 인간이 처하게 되는 대외적인 환경중 아무 것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그래서 슬픔과 절망은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슬픔은 위로할 수 있는 고통입니다. 절망은 극복할 수 없는 영혼의 고통입니다. 슬픔이 감정의 문제라면 절망은 영혼의 문제입니다. 영혼의 문제란 그것이 우상에서 나온 것이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으로 여겼던 무엇이 사라지자 더 이상 삶의 목적도 의미도 사라져 희망이 없다고 느끼는 영혼의 질병이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에 빠졌다는 것은 자기 속에 우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 자녀가 마음대로 안되는 것은 슬픈 일입니까? 절망적인 일입니까? 자녀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왜 절망합니까? 사업이 잘 안됩니다. 슬픈 일입니까? 절망스러운 일입니까? 사업이 하나님이 아닌데 왜 절망합니까? 계획하는 일이 잘 안됩니다. 슬픈 일입니까? 절망적인 일입니까? 누구 마음대로 되어애 잘된 일입니까? 내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 뜻은 필요하나 그것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우리가 절망에서 벗어나는 길은 마음을 추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안에 있는 우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상에서 벗어나려면 우리 속에 있는 우상을 버리는 것과 함꼐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96%를 성령님께 맡기고 내가 할 수 있는 4%에 성령의 도움을 받아 결정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열쇠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 뜻이 다 옳지도 않고 우리 행동이 항상 선하지 않습니다. 정말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 소원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6:8,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님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을 이용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의 도움과 인도 그리고 지배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2장에 보면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2:2-3,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성령이 초자연적으로 임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먼저 소리가 나타났습니다. “하늘로부터 급하고 바람같은 소리였습니다. 다음 눈에 무엇인가 보였습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상한 말이 들렸습니다. 4,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 모든 것을 종합한 말이 2, “하늘로부터입니다. 이 말은 성령의 초자연적 속성을 보여줍니다. 다같이 하늘로부터”. 그래서 우리는 마술사 시몬과 같이 성령을 소유해서는 안됩니다. 그 분이 우리를 소유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이 우리를 부립니다. 절에 있는 부처처럼 우리가 성령을 모시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앞에 무릎꿇고 경배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모든 우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식은 사랑할 뿐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랑도 물질도 성공도 심지어 교회 일도 목회도 교회부흥도 우리가 최선을 다해 섬길 뿐이지 그자체가 하나님은 아닙니다. “두 손 들고 찬양합니다. 다시 오실 왕 여호아께. 나 주님만을 섬기리. 헛된 마음 버리고 성령이여 내 영혼 충만하게 하소서”.

 

 

 

 

 

 

 

 

 

 

 

 

 

 

 

 

 

 

 

 

 

 

 

8:9-24 2015.9.20.()

우상을 버리고 성령님께

우상은 깍아만든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는 그 무엇이다.

 

8:6-7,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 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12-13,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권능을 보고 놀라니”.

 

8:18-19,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우리도 우상을 섬기고 있다.

 

1) 자식의 우상

22:2,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22:12,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 내가 이제아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2) 소유의 우상

12:15,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32:14-15, “암염소가 200이요, 수염소가 20이요, 암양이 200이요, 숫양이 20이요, 젖나는 낙타 30과 그 새끼요 암소가 40이요 황소가 10이요 암나귀가 20이요 그 새끼가 10이라“.

 

3) 성공주의의 우상

 

성공과 승리는 다르다. 성공은 물량적이며 외형적이다. 승리는 내적이며 영적이다. 성공해야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해야 성공한다. 하나님없이도 성공할 수 있으나 하나님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

 

우리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8:20,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함께 망할지어다”.

 

7:11,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는 응답받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기도한다. 기도할 때 우리가 붙들 것은 기도의 응답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슬픔과 절망은 다르다. 슬픔은 위로할 수 있는 고통이지만 절망은 극복할 수 없는 영혼의 고통이다. 슬픔이 감정의 문제라면 절망은 영혼의 문제다. 영혼의 문제란 절망이 우상에서 나왔다는 뜻이다”.

 

6:8,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2-3,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두 손 들고 찬양합니다. 다시 오실 왕 여호아께. 나 주님만을 섬기리. 헛된 마음 버리고 성령이여 내 영혼 충만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