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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성숙(6) (약4:6-10) 2015.11.8(일)순종, 지금 시작하면 나중에 이긴다

성숙(6) (4:6-10) 2015.11.8()

순종, 지금 시작하면 나중에 이긴다

가을의 한 복판입니다. 어느 도시에서 공처가 대회가 열렸답니다. 1등상을 제주도 여행으로 걸고 대회를 열었는 데 심사위원이 노란깃발과 빨간 깃발을 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자기가 공처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노란깃발로 모이세요”. 남자들이 우루루 몰려 노란깃발로 갔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 빨간 깃발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사위원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혼자 빨간 깃발에 있습니까?” 그랬더니 그가 말했습니다. “우리 마누라가 사람들 많은 데는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날 1등상은 그 사람이 받았습니다. 여자가 행복하려면 젊을 때 남자들에게 순종해야 하고 남자들이 늙어서 행복하려면 평생 마누라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아멘).

 

그러나 세상에 정말 힘든 것이 순종입니다. 순종이 왜 힘든가 하면 내 생각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뜻, 내 계획, 내 자존심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순종이란 말은 긍정적인 이미지보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순종하라하면 항복하라. 굴복하라. 양보하라. 희생하라라는 뜻으로 들려 옵니다. 그래서 순종하면 연상되는 것이 이조시대에 툭하면 쫓겨나는 여인들의 한, 힘없이 구타당하는 노예들의 고통, 부당하게 권리를 빼앗긴 노동자의 눈물, 죄없이 끌려가는 아프리카 노예들, 힘없이 지배당하는 피정복민의 아픔, 힘없이 무릎꿇는 약자들의 백기투항,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가 아닙니까? 민주주의란 각자의 생각과 권리가 보호받는 사회 아닙니까? 그런데 누가 누구에게 순종을 요구합니까? 아니 내가 알아서 사는 데 누가 누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합니까? 그래서 순종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순종이 필요없는 것일까요? 순종은 불필요한 것이며 우리의 행복과 자유를 제한하는 전근대인 덕목일까요? 성경은 순종은 조금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순종은 무엇이고 우리는 순종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쓴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야고보가 네 명 나오는 데 이 야고보는 예수님 동생 야고보입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에게는 적어도 네 명의 남동생과 한 명 이상의 자매가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 바로 밑에 동생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동생들에게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활동할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예수님은 비방하고 공격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7:4절입니다.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은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나소서”. 말이 부드러워 그럴싸 하게 보이지만 현대어 성경으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형님, 일을 제대로 하려면 이 촌구석에 있지 말고 대도시로 가시오. 그래야 우리도 한 몫 볼 것 아닙니까?” 이렇게 믿음이 없었던 야고보가 예수님이 죽고 부활한 후 확 달려졌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후 기도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는 그의 별명을 낙타 무릎이라 불렀습니다.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는지 무릎이 낙타처럼 공이가 배였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대제사장 안나스 2세에 의해 순교당합니다. 그때가 주후 62년이었습니다.

 

그러면 야고보서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참회록입니다. 과거에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불신하고 불순종했던 것을 회개하며 믿음이 믿는 자는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인내하며 어떻게 순종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참회하는 심정으로 쓴 책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쓰고 야고보는 순교했습니다. 실패한 믿음을 죽음으로 고백한 책, 만일 내가 다시 산다면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순종하리라는 염원이 가득 담긴 책 , 오늘 우리도 야고보의 마음으로 돌아가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합니까? 우리도 야고보처럼 믿음과 순종으로 성숙하기를 원합니까? 오늘 야고보가 말하는 순종의 첫 번째는 이것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같이 6절과 7절을 읽을까요? 4:6-7,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야고보가 순종을 말하는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순종은 사람들앞에 나타나는 어떤 도덕적 덕목입니다. 고분 고분 하다든지 얼굴이 착하게 보인다든지 , 하면서 허리를 굽힌다든지 하면 우리는 그 사람이 순종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순종은 하나님앞에서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순종은 하나님앞에서 겸손한 태도입니다. 사람앞에서의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앞에서 어떻게 서느냐의 문제입니다. “겸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겸손은 사람들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아이구. 제가 뭘 알겠습니까? 알아서 하세요하면 겸손한 줄 압니다. 그러나 성경의 겸손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사막교부들의 이야기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수도사에게 마귀가 천사의 모습을 가장하고 나타났습니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가브리엘 천사다.” 이 말을 들은 수도자는 그 자리에 엎드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미천한 종이라 천사의 방문을 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자 마귀가 사라졌습니다. 수도자의 겸손앞에 마귀를 물리친 것입니다. 한 젊은 수도자가 마음에 있는 교만 때문에 늘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평생 기도만 하고 사는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에 관심을 갖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겸손은 기본적으로 사람과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들앞에 나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앞에 나를 낮추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고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앞에 겸손히 서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6절에서 겸손을 먼저 말하고 7절이하에서 순종을 말합니다. 이 말은 겸손이 순종의 출발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겸손하면 사람앞에 순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순종이 안되는 이유는 하나님앞에 겸손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순종을 영어로 obedience라고 합니다. 이 말의 어원은 듣는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아우디레(audire)”에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순종은 듣는 것입니다. 잘 들어야 잘 순종합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최고의 순종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처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까요? 하늘에서 입니다. 2:6-8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역사상 최초, 최고의 순종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의 말과 같습니다. “역사상 최초의 순종은 하나님의 내적 결단에서 일어났다. 인간이 하나님앞에 불순종할 때 하나님은 사람에게 순종을 택하셨다. 그래서 보낸 분이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순종을 받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몸소 순종을 실천하셨다”. 하나님의 순종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다는 말입니다.

 

몇 년전 인도 방갈로르에서 단기선교를 마치고 때 잠시 힌두교 사원을 방문했습니다. 우연히 거기 있는 한 인도 젊은이와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목사라고 하니까 그가 대뜸 말했습니다. “결국 모든 종교는 똑같죠”. 그래서 어째서 똑같냐고 물었더니 결국 모든 종교는 세상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 있는 것 아닙니까? 이름만 다르지 내용은 같아요. 산으로 비유하면 어느 골짜기로 올라가도 정상은 같지 않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말했습니다. ”종교를 산으로 비유한 것은 참 잘 했습니다. 그러나 방향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종교는 사람이 산위로 올라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산위에 있던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때 그 젊은이가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모든 종교는 결국 사람이 신이 되려는 것입니다. 거기에 말할 수 없는 고행과 노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거기에 은혜와 순종이 있습니다. 다릅니다.

 

예수님은 순종으로 땅에 오셨을 뿐 아니라 일생 순종의 삶을 사셨습니다. 7:16-18을 보시겠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시면서 한번도 자신의 뜻을 나타낸 적이 없습니다. 기도할 때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하게 하옵시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마귀에게 시험받을 때도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다만 여호아를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도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십자가에서도 아버지,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평생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영성가가 헨리 나우엔이 예수님의 순종을 이렇게 묵상했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자기 혼자 힘으로 살지 않겠다는 것이며 자기 생각에만 의지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평생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순종하셨고 예수님을 통해 순종을 받으십니다. 그런데 순종의 또 하나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와의 관계입니다.

 

불순종의 배후에 마귀가 있습니다

7절 중간입니다. 4:7,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왜 야고보는 순종을 이야기하면서 마귀를 이야기할까? 조금 이해가 잘 안됩니다. 6, 하나님앞에 겸손하라. 7, 하나님께 복종하라. 거기까지는 이해가 됩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논리적으로 잘 연결이 안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순종에 있어서 이 부분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순종의 근원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출발한 야고보는 이제 순종의 영적인 측면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겸손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모델은 예수님이다“. 여기까지가 첫 번째입니다. 그러면 순종을 방해하는 세력은 무엇이냐? 무엇이 우리의 순종을 방해하느냐? 이것이 두 번째입니다. 왜 우리는 순종이 잘 안되는가? 순종이 다만 도덕적 덕목이 아니라 영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건이라는 말은 배후에 그것을 못하도록 조종하는 세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귀입니다.

 

여러분은 아담이 왜 선악과를 따먹고 불순종의 사람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심고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결국 누가 그것을 먹게 했습니까? 뱀입니다. 뱀이 간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켜 아담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게 한 것입니다. 이 뱀을 성경은 마귀라고 합니다. 마귀를 헬라어로 디아불러스라고 합니다. ”디아는 사이입니다. 둘 사이에 불러스분열, 이간질 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분열을 ”division“이라고 합니다. ”di“는 둘입니다. 디비전은 비전이 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로 가야 할 비전이 둘이면 분열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무엇이고 둘은 무엇입니까? 하나는 하나님이고 둘은 거기에 마귀가 끼어드는 것입니다. 과연 마귀가 하나님과 맞설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는 끊임없이 하나인 우리와 하나님을 분리해 냅니다. 그래서 디비전“, 비전을 둘로 하고, 생각을 둘로 하고, 교회를 둘로 하고 이간질, 분열, 다툼, 갈등을 조장합니다. 그 분열속에 불순종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순종과 불순종은 단순한 기질의 문제나 다양성의 문제나 도덕적 덕목이 아닙니다. 불순종은 하나님을 division, 분리해 분열과 다툼을 일으키고 우리와 하나님을 분리해 하나님을 떠나게 ,만듭니다. 그때 쓰는 마귀의 작전이 불순종입니다. 사실은 마귀가 하는 일이면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순종의 문제를 신학화한 사람이 사도 바울이고 그 책이 로마서입니다. 핵심이 롬5:19입니다.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바울은 불순종을 단순한 도덕적 실수가 아닌 죄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불순종은 하나님과 인간의 하나됨을 division 시킨 마귀의 작전입니다. 마귀는 인간의 자유의지, 다양성, 민주적 사고, 인격, 자존감, 자존심, 기질등 모든 좋은 것에 이유를 붙여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듭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독립적이고 책임적인 존재다. 고유의 인격이 있고 생각이 있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이 명령을 내리면 어떻게 하나? 인간의 자율성, 민주성, 개체성, 인격, 책임적 자아를 존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합리적인 이유로 불순종하게 만듭니다. 마귀는 뒤에서 아바타로 있고 행동은 인간이 하게 합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배후에서 이것을 조정하면서 하나님과 우리가 분리되도록 합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오래전에 제가 어느 교회 중고등부 전도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교회 담임목사님은 요즘 말로 하면 셀교회, 즉 소그룹 목회를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앞선 목회를 한 것이죠. 그래서 모든 교인을 소그룹화해서 친교를 강화하고 대화지향적인 구도로 만들었습니다. 저도 중고둥부 전도사였기 때문에 당연히 목사님의 목회방침에 따라 중고등부를 그 방향으로 인도했습니다. 교사들에게는 소그룹이론을 가르치고, 주일날은 학생들을 소그룹형태로 질문과 토론이 있는 분반모임을 만들고, 토요일에는 주일날 부족한 취미그룹을 만들어 부지런히 모였습니다. 그렇게 한참 재미있게 나갈 무렵, 어느날 갑자기 목사님이 모든 소그룹체제를 중단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소그룹 대신에 성령의 은혜를 강조하고 기도에 집중하는 교회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얼마나 열받았겠습니까? 교회 체제는 하루 이틀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큰 배가 방향전환할 때 소용돌이가 있는 것처럼 교회도 방향을 바꾸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과 혼란이 따릅니다. 그렇게 힘들게 소그룹체제로 만들어 지금 잘 되고 있는 데 갑자기 소그룹을 중단시키고 성령의 은혜를 강조하라니. 소그룹체제는 성령의 은혜가 없습니까? 제가 보통 정의감이 있는 사람입니까? 옛날에 저도 한때 운동권 뒷 자리에 있던 사람 아닙니까? 그때 저는 두 주를 교회 안 나갔습니다. 두 주후에 교회 나갔더니 선생님, 학생들이 전도사님, 어떻게 해요?” 합니다. 제가 짤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다행히 짤리지는 않았지만 그 후 한동안 교회사역에 재미를 잃었습니다. 제가 불평이 많으니까 불만 있는 사람들이 서서히 제 주변에 모여들었습니다. 졸지에 제가 비주류 당수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불순종의 전염성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민수기 16장에 고라 일당이 모세와 아론에 대해 반역을 꾀했습니다. 처음에는 고라, 다단, 아비람, 세 사람으로 시작했다가 점점 많아져 250명의 족장들이 합세했습니다. 모세는 이들과 다투지 않고 기도만 했는 데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땅이 갈라져 모두 땅속에서 죽었습니다. 문제는 어떤 불순종에도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고라 일당이 문제삼은 것은 모세의 지도력이었습니다. 모세의 지도력에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모세가 이방여인 구스 아내를 취한 것도 이유중의 하나였습니다. 불순종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혹입니다. 분명히 담임목사님이 목회 체제를 너무 쉽게 바꿨습니다. 요즘 용어로 말하면 목회적 동기부여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시험든 이유도 있었고 제 주변에 사람들이 모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기도하는 데 하나님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 교회가 네 교회냐? 네가 목회하고 담임목사가 너를 돕냐? 담임목사가 목회하고 네가 돕냐? 너는 갑자기 일이 일어났다고 하고 마치 담임목사 혼자 결정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데 내가 그에게 명했다면 어떻게 할래? 그러면 너는 담임목사를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거역한 것 아니냐? 무엇보다 너는 아직 결과를 모르지 않으냐? 만일 성령체제로 교회를 바꿔서 교회가 부흥되면 어떻게 할래?” 하나님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저도 마음이 진정되었고 목사님의 목회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에 교회는 크게 부흥되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인데 그 교회가 소그룹 교회로 가자 사람들이 차마시고 잡담하는 것이 교회생활인지 알고 모이면 이야기하고 흩어지면 잡담하고 기도는 없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교인간의 스캔들도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담임목사만 알고 있었고 목사님은 고민하다가 기도하면서 그런 결단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제가 안 것은 교회는 사람의 눈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 불순종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으나 그 이유보다 중요한 것은 순종이라는 것, 그것이 마귀의 사주를 받아 파당을 이루고 결과적으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 지도자는 늘 약하고 실수할 수 있지만 그가 기도하고 엎드리는 한 하나님은 그의 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순종하는 개인과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합니다.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이 청산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또 딤전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여기서 장로는 교회 지도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경대로 권면합니다. 하나님이 세운 교회 지도자들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들이 연약하고 힘들 때 하나님이 은혜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교회가 정한 작거나 큰 모든 지도력에 순종하십시오. 학생은 교사에게 교사는 팀장에게 팀장은 장로님께 순종하십시오. 성가대는 대장에게, 모든 사역팀은 팀장에게, 모든 성도는 목회자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 순종합시다.(아멘). 이 순종의 원리가 우리의 가정, 직장, 삶의 현장으로 적용되도록 합시다. 마지막으로 순종에 관한 야고보의 가르침의 세 번째입니다.

 

믿으면 순종합니다.

순종을 가르치는 야고보는 세 번째로 순종을 믿음과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8절입니다.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여기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졌다고 우리가 자동적으로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죄인들아 손울 깨끗케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가고 순종으로 성결에 이릅니다.

 

오늘 말씀을 쓴 야고보서의 일관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2:22, “내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요즘 교회가 사람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습니다. 주로 도덕성의 문제요 실천의 문제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행함의 문제입니다. 믿음은 있는데 행함이 없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것을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은혜 승리

 

믿음 행함

 

순종

 

, 믿음은 어디서 오느냐? 은혜에서 옵니다. 그 믿음이 행함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순종이 필요합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고 순종은 우리가 합니다. 은혜는 믿음을 낳고 믿음은 순종을 통해 행함으로 갑니다. 그러면 최후 승리합니다. 그래서 승리의 V자가 됩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히11장입니다. 11장에는 그렇게 살았던 사람 10명이 등장합니다. 아벨로부터 기생 라합까지 입니다. 이들의 삶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과 그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사람이 아벨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믿음으로 살았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물을 바쳤습니다. 순종입니다. 다음 노아가 나옵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홍수로 심판할 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배를 지었습니다. 120년이나 걸려 높은 산꼭대기에서 배를 지었습니다.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었습니다. 너무 믿음이 좋아 믿음의 조상이라고까지 불렀습니다. 어느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아들을 바치라했습니다. 모리아산에서 바쳤습니다. 믿음이 의 순종으로 이어지는가 시험한 것입니다. 모세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바로에게 가라”. 갔습니다. “재앙을 일으키라”, “홍해앞에 서라“. 홍해앞에 지팡이 들고 섰습니다. ”반석을 치라“. 쳤습니다. 믿음은 순종을 낳고 순종은 기적을 낳았습니다.

 

우리는 보통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믿으면 순종하고 순종해야 믿는 것입니다. 독일의 본회퍼 목사님이 <나를 따르라>는 책에서 말했습니다. “믿음은 오직 순종 속에서만 존재한다. 믿음은 결코 순종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믿음과 순종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한다라는 명제에 다른 명제를 보충해야 한다.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 “나는 믿음은 있지만 순종하지는 못한다고 말하지 마라. 불순종에 머물러 있는 한, 그대에게는 믿음이 없다. “나는 정말로 믿음이 있다. 그러나 순종의 첫 발걸음을 내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 마라. 순종의ㅏ 첫 발걸음을 내딛지 않으면서 불신앙 속에 머물러 있는 한, 그대는 믿음이 없다. 부족한 믿음을 부족한 순종의 탓으로 돌리고, 부족한 순종을 부족한 믿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일종의 악한 도피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모든 것은 순종입니다. 기도하라.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기도하지 못할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순종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사랑하라. 사랑하지 못합니다. 왜 사랑하지 못합니까? 사랑할만한 사람만 찾기 때문입니다. 순종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더 순종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일하는 통로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순종해야 하고 순종하면 승리합니다.

 

 

 

 

 

 

 

 

 

 

 

 

 

 

성숙(6) (4:6-10) 2015.11.8()

순종, 지금 시작하면 나중에 이긴다

7: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은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나소서”.

 

순종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4:6-7,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순종=obedience=“아우디레(audire)”= 듣는다.

 

2:6-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칼 바르트, “역사상 최초의 순종은 하나님의 내적 결단에서 일어났다. 인간이 하나님앞에 불순종할 때 하나님은 사람에게 순종을 택하셨다. 그래서 보낸 분이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순종을 받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몸소 순종을 실천하셨다”.

 

7:16-1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헨리 나우엔, “예수님의 순종은 자기 혼자 힘으로 살지 않겠다는 것이며 자기 생각에만 의지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평생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불순종의 배후에 마귀가 있습니다

4:7,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마귀=”디아불러스“(사이를 이간질 시키는 자)=”division“=”비전이 둘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이 청산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딤전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믿으면 순종합니다.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2:22, “내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은혜 승리

 

믿음 행함

 

순종

 

본회퍼, “믿음은 오직 순종 속에서만 존재한다. 믿음은 결코 순종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믿음과 순종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한다라는 명제에 다른 명제를 보충해야 한다.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 “나는 믿음은 있지만 순종하지는 못한다고 말하지 마라. 불순종에 머물러 있는 한, 그대에게는 믿음이 없다. “나는 정말로 믿음이 있다. 그러나 순종의 첫 발걸음을 내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 마라. 순종의 첫 발걸음을 내딛지 않으면서 불신앙 속에 머물러 있는 한, 그대는 믿음이 없다. 부족한 믿음을 부족한 순종의 탓으로 돌리고, 부족한 순종을 부족한 믿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일종의 악한 도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