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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성숙(4) (시119:97-105) 2015.10.25.(일)묵상: 많은 기도에서 깊은 기도

성숙(4) (119:97-105) 2015.10.25.()

 

묵상: 많은 기도에서 깊은 기도

 

일년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이번 주에 권사회 수양회, 시니어대학 소풍을 함께 다녀왔습니다. 얼마나 단풍이 아름다운지. 붉게 물든 단풍을 구경하면서 참 행복했습니다. 지금이 가을의 한 복판입니다. 이 아름다운 가을에도 걱정은 있습니다. 충남 지역을 중심으로 가뭄이 심해서 사람들이 고생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자체마다 물 때문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믈 부족은 비단 우리 나라 문제만은 아닙니다. 세계 인구의 약 40% 정도가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에 의하면 전세계 인구 61억명 중 1억 천만명이 물로 인한 질병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질병으로 매년 5백만 명이 죽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듯이 우리 영혼에도 생수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문제는 생수의 문제입니다. 지난 주 저는 미국의 영성가 헨리 나우엔의 기도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다른 사람을 나쁜 존재가 아니라 목마른 존재로 볼 수 있도록 도우소서.” 그렇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목마릅니다. 나쁜 사람이 있는 따로 것이 아니라 목마른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목마른 사람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몰라서 목마른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을 아십니까? “하나님이여 당신이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당신안에서 우리가 안식하기 전에는 영원히 평안이 없나이다.”. 그렇습니다. 물을 떠난 고기가 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떠난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영원의 근원인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인간은 누구나 목마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돌아온 다음에 생기는 목마름입니다. 교회는 다니는 데 행복하지 않습니다. 세례는 받았는 데 기쁘지 않습니다. 예배는 드리는 데 만족이 없습니다. 첫 번째 목마름이 하나님이 없어서 생기는 목마름이라면 두 번째 목마름은 하나님으로 채우지 않아서 생기는 목마름입니다. 불신자에게 생기는 목마름이 첫 번째 목마름이라면 신자에게 생기는 목마름이 두 번째 목마름입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에 대한 조사를 보면 이 목마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1998, 2004, 2012, 세 번에 걸쳐 한국교회 신자들의 신앙상태를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교회 생활에 매우 만족합니까?”. 그랬더니 1998, 24.3%, 200423.1%, 그리고 20126.8%였습니다. 15년만에 24%에서 6%로 떨어졌습니다.

 

교회생활 만족도

199820042012

24.3% 23.1% 6.8%

 

왜 이렇게 만족도가 줄었을까요? 그동안 교회가 잘못한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교회가 우리에게 영적 만족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결국 신앙의 목마름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뿌리입니다.

 

신앙의 문제는 곧 뿌리의 문제입니다.

1:1-3을 보실까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아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같으니”. 왜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마르지 않습니까? 나무 자체가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닙 니다. 그 나무가 뿌리를 시냇가에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문제가 아니라 뿌리의 문제입니다. 어떤 나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나무가 어디에 심겨졌느냐의 문제입니다. 몇 년 전 우리 교회 마당에 느티나무를 심었습니다. 조금 잎이 나오더니 거울이 되자 죽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심었습니다. 또 죽었습니다. 그래서 땅을 파보았더니 땅속에 돌멩이, 비닐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다 제거하고 다시 심자 잘 자랍니다.

 

우리 영혼의 가뭄은 괜히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뿌리를 하나님께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땅에 나무를 심었다고 자동적으로 자라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교회나온다고 자동적으로 믿음이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왔으면 시1:1절 말씀처럼 우리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2,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3, 형통한 것은 아닙니다. 죄안 짓고 사는 것은 대단하지만 죄안짓고 사는 것이 우리 영적 생활의 목표일 수 없습니다. 2, “여호아의 율법을 즐거워 하며”. 즐거워 해야 합니다. 3,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형통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겠습니까? 뿌리가 시냇가에 심겨져야 합니다. 생수의 근원에 우리가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합니다. 작년에 한 기독교신문사에서 한국교인 32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습니다. “주일성수를 얼마나 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29.1%어떠한 경우에도 한다”. 34.4%가끔 빠진다”. 나머지 69.1%일이 있으면 빠진다”. 10명중 3명만 철저히 주일성수하고 7명은 왔다 갔다 한다는 것입니다. 뿌리를 생수의 근원에 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통계가 있습니다. “일 주일에 평균 얼마나 성경을 읽고 묵상합니까?”. 이 질문은 세 번 물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줄어갑니다. 1998년에는 1시간 6분이었습니다. 2004년에는 1시간 2분이었습니다. 2012년에는 48분이었습니다.

 

주일성수

어떤 경우에도 가끔 빠진다 자주 빠진다

29.1% 34.4% 69.1%

 

성경묵상

199820042012

1시간 61시간 248

 

놀라운 것은 1998년에서 2004년까지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 이후에 갑자기 줍니다. 지금은 또 2015년 아닙니까? 이 보다 더 줄었을 것입니다. 일 주일에 3-40분 정도 기도하고 성경보는 믿음으로 어떻게 험한 세상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뿌리를 기도와 말씀에 내리지 않으니 어떻게 나무가 자랄 수 있겠습니까? 그 대신 취미, 여가, 가족, 여행은 얼마나 늘었습니까?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시냇가에 심어야 형통합니다. 시냇가에 심어야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형통합니다. “샘터에 실린 짧은 글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제목은 성급한 농부의 이야기입니다.

한 농부가 논에 나가 자신의 벼와 이웃의 벼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듯이 이웃의 벼가 더 커 보였습니다. 샘이 나고 배가 아팠지요. 그 농부는 밤에 논으로 나가서 자기의 벼를 조금씩 뽑아 올려 성장을 촉진하고자 했습니다. 다음날, 자신의 벼가 이웃의 벼보다 더 커진 것을 보고 그 농부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주에 뿌리가 뽑아 올려진 그의 벼는 시들어 버렸습니다”. 왜 이 벼는 키는 커졌는 데 시들어 버렸을까요? 뿌리를 땅에 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뿌리가 뽑혀 땅으로부터 물을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키가 크다고 열매맺지 않습니다. 뿌리에서 물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묵상은 뿌리로부터 생수를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잎사귀를 내며 열매를 맺겠습니까? 뿌리를 하나님의 말씀에 내려 생수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읽은 말씀입니다.

 

묵상-반복해서 읽기

함께 볼까요? 97절입니다.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읇조리나이다”. 99, 119:99,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읇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여기 읇조린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읇조리는 것을 묵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읽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반복해서 읽음으로 그 말씀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음성으로 듣는 것입니다. 4장에서 예수님이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은 본래 이사야 61장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읽으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1, 4:21,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묵상을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읽은 후에 그 말씀을 자기 자신의 삶과 연결시켰습니다. 이사야가 말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고, 눌린 자를 해방시키는 일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700년전에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을 자신의 말씀으로 받은 것입니다. 묵상은 이런 것입니다. 그때의 말씀이 지금의 내 말씀이 된 것입니다. 700년전의 이사야의 말이 700년 후의 예수님의 삶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묵상입니다.

 

묵상-되새김질 하기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이것을 되새김질이라고 합니다. 103절 보시겠습니까?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연구하고 공부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먹고 맛보기 위해 있습니다. 15:16절입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말씀은 먹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소나 양이 되새김질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저는 왜 소나 양이 새김질하는지 몰랐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바나라는 성경시대의 동물원(사진)에 가서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거기에 가면 많은 동물들이 있는 데 사슴이나 소, 양은 매우 약한 동물입니다. 이 동물원에는 소나 양뿐만 아니라 사자나 곰같은 무서운 동물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서운 육식동물들속에서 소나 양이 음식을 천천히 먹다가는 사자와 곰에게 잡힙니다. 그래서 재빨리 음식을 위에 넣은 뒤 멀리 떨어진 숲으로 가서 천천히 되새김질합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위가 네 개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들에게 많은 위를 주셨는가 하면 빠른 시간내에 많은 음식을 삼키게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일단 음식을 빨리 삼켜 첫 번째, 두 번째 위에 저장한 후 시간나는 대로 그것을 씹어 세 번째, 네 번째 위로 보냅니다. 네 가지 과정이 반복됩니다. 토출(게워내는 것), 재저작(다시 씹는 것), 재혼합(다시 섞는 것), 재연하(다시 삼키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과정을 반복하면 신기하게도 볏짚은 쇠고기가 되고 풀은 우유가 됩니다. 만일 되새김질하지 않는다면 볏짚은 볏짚대로 있고 풀은 풀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반복해서 되새김하는 과정에서 볏짚은 쇠고기가 되고 풀은 우유가 됩니다. 되새김질의 신비입니다. 어떻게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씹고 또 씹습니까? 주일날 들은 말씀을 주간중에 되씹고 새벽에 읽은 말씀을 직장에서도 되씹습니까? 97,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읇조리나이다”. 종일 반복해서 되씹는 것, 그것이 묵상입니다.

 

묵상-하나님의 성품에 집중하기

그러면 우리가 되씹어야 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말씀 자체가 아니라 말씀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초점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145:5와 같습니다.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을 나는 묵상하리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63:5-7,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주를 찬송하고, 주를 기억하며, 주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본질과 속성 그리고 성품을 묵상하는 것이다. 다른 무엇을 구하기 위해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구하기 위해 묵상합니다. 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묵상은 내가 말씀을 사용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사용하여 무엇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들이 빠지는 함정이 이것입니다. 설교자들은 묵상하기 위해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자주 설교하기 위해 성경을 읽을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억지로 해석하거나 연구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5세기의 교부 어거스틴이 말했습니다. “만일 성경 본문이 기도하면 기도하시요. 만일 성경 본문이 신음하면 신음하시요. 만일 감사하면 기뻐하시요. 희망의 말씀이라면 희망하시요.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거든 같이 두려워하십시오”.

 

묵상은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묵상의 최종적인 단계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는 이유는 말씀을 다만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고자 함입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간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존재를 다하여 하나님께 나간다는 뜻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나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앞에 나가기 위한 묵상기도는 세 단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도표로 보겠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눈으로 생각으로 마음으로

지성 감성 의지

 

묵상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말씀이 통로입니다. 디른 기도는 자기 생각에 따라 합니다. 자기 소원을 말하거나 자기 계획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요청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묵상기도는 자기 뜻을 따라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기도합니다.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천사가 와서 마리아에게 네 몸에서 인류의 구주가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아직 처녀였고 아직 결혼도 안 했습니다. 처녀로 아기를 낳는 것은 절대 마리아의 뜻도 아니었고 좋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1:38,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는 천사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마음에 두었고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말씀으로 기도했습니다. 결국 그를 통해 예수님이 태어났습니다. 따라 합시다. “묵상기도는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묵상기도-말씀읽기

이를 위해 묵상기도는 먼저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함입니다. 이 말씀이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우리의 지성이 필요합니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 있지만 우리의 지성이 필요없는 것이 아닙니다. 지성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통로입니다. 119:125, “나는 주의 종이오니 나를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 말씀을 읽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묵상기도-말씀묵상

말씀읽기를 통해 내용을 알았다면 묵상이 필요합니다. 묵상은 깨닫는 것입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은 감성의 공간입니다. 느끼고 생각하고 질문하고 판단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로 하면 깨닫는 것입니다. 119편에는 깨닫는는 말이 5번 나옵니다. 119:130,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추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읽는 것이 말씀의 표면을 살피는 것이라면 묵상은 말씀의 이면을 살피는 것입니다. 읽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찾는 것이라면 묵상은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찾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깨닫다라고 할 때 레브를 씁니다. 이 말은 심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되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심장으로 아는 것입니다. 17:10, “나 여호아는 심장을 살피나니”. 심장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입니다. 그 깊은 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여기 이 심장입니다. 우리의 깊은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는 것, 그것이 묵상입니다.

 

묵상기도-말씀기도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계속 보세요. 3:16,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의 기도가 시작됩니다. 이것이 말씀으로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말씀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다만 말씀을 가지고 기도한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의 지배를 받으며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기도의 주도권이 나에게서 하나님에게로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시는 기도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구약의 발람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모압땅을 지나갈 때 모압 왕 발락이 선지자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주문했습니다. 22-24장입니다. 그래서 발람이 그렇게 하려고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입을 열자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돈은 받았고 소와 양으로 대접도 받았고 온 백성들이 지켜보고 있는 데 저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축복이 나온 것입니다. 저주는 고사하고 자기도 모르게 이상한 예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24:17,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리라”. 이 예언은 놀라운 예언입니다. 앞으로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별은 왕의 탄생을 말합니다. 규는 왕이 들고 있는 지팡이입니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기도를 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바꾸셨습니다. 기도의 주도권이 바뀐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고 싶은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시는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왜 우리의 신앙생활에 만족이 없을까요? 왜 우리의 영적 생활에 목마름이 계속되는 것일까요? 10, 20년 믿었는 데 영적 만족이 없고 항상 허전하고 답답할까요? 환경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기도의 문제입니다. 기도의 양에도 문제가 있지만 기도의 자세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많이 드리는 기도가 통성기도입니다. 통성기도는 소리를 내서 하는 기도입니다. 손을 들고 주여 삼창하고 하는 기도가 대표적입니다. 제가 아프리가에 갔더니 그 사람들이 주여, 주여, 주여하고 한국말로 세 번 하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누가 가르쳐 주었느냐 했더니 한국선교사가 가르쳤답니다. 왜 당신 말로 안하고 한국말로 하느냐고 했더니 원조가 한국말이라 한국말로 해야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통성기도로 기도의 힘을 얻었습니다. 통성기도의 세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먼저 기도의 분위기를 만들어 줍니다. 여럿이 소리내서 하면 기도의 분위기도 생기고 힘이 생깁니다. 다음 잡념을 없애줍니다. 기도할 때 잡념이 생겨도 소리를 내기 때문에 잡념이 사라집니다. 세 번째로 영적 갈망과 사모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성경에도 통성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통성기도가 유일한 기도가 되면 깊은 기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통성기도의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기도의 내용이 주로 요청하는 기도입니다. 통성기도는 주로 간구의 기도요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주면 또 달라고 합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그 분을 닮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마음에 의지하기 보다 소리에 의지합니다, 소리에 의지하다 보니 밖으로 나오는 말에 신경을 씁니다. 마음을 토로하기 어렵습니다. 남들에게 들리기 때문에 기도의 내용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외식적인 기도가 되기 쉽습니다. 셋째 기도의 주체가 자기가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기도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기도를 습관적으로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묵상기도로 돌아와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이 지시하는 방향을 따라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가 더 힘이 있고 깊이가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가 되고 기도의 결과도 응답과 함께 하나님을 닮아가는 데 더 성공하게 됩니다. 기도가 깊어져야 신앙이 깊어 집니다. 많은 기도와 함께 깊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먼저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점점 더 깊어져야 합니다. 신앙의 연조는 20, 30년 깊은 데 기도는 깊지 않으니 영적 갈증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모르는 사람의 영적 갈증은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온 이후의 영적 갈증은 하나님으로 채워야 합니다.

 

 

 

 

 

 

 

 

 

 

 

 

 

 

 

 

 

 

 

 

 

 

 

성숙(4) (119:97-105) 2015.10.25.()

 

묵상: 많은 기도에서 깊은 기도

 

헨리 나우엔 하나님, 제가 다른 사람을 나쁜 존재가 아니라 목마른 존재로 볼 수 있도록 도우소서.”

 

성 어거스틴, “하나님이여 당신이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당신안에서 우리가 안식하기 전에는 영원히 평안이 없나이다.”.

 

교회생활 만족도

199820042012

24.3% 23.1% 6.8%

 

신앙의 문제는 곧 뿌리의 문제입니다.

1:1-3,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아의 율법을 즐거워 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같으니”.

 

주일성수

어떤 경우에도 가끔 빠진다 자주 빠진다

29.1% 34.4% 69.1%

 

성경묵상

199820042012

1시간 61시간 248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묵상은 뿌리로부터 생수를 공급받는 것입니다.

 

묵상-반복해서 읽기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읇조리나이다”.

119:99,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읇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4:21,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묵상-되새김질 하기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15:16“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이스라엘의 하바나”(사진)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읇조리나이다”.

 

묵상-하나님의 성품에 집중하기

145:5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을 나는 묵상하리이다”.

63:5-7,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묵상은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눈으로 생각으로 마음으로

지성 감성 의지

 

1:38,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묵상기도는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묵상기도-말씀읽기

119:125, “나는 주의 종이오니 나를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

 

묵상기도-말씀묵상

119:130,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추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17:10, “나 여호아는 심장을 살피나니”.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묵상기도-말씀기도

3:16,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24:17“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리라”.

 

통성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