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7) (막6:41-44) 2015.11.15(일)
감사, 행복으로 가는 길
오늘은 한 해의 추수를 감사하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여러분은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아 왔습니까? 사오정이 식사할 때마다 유치원에서 배웠는지 “감사합니다”하고 기도합니다. 부모는 사오정의 그런 모습이 예뻐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오정의 엄마가 너무 바빠 반찬 두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사오정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간신히 먹겠습니다”. 두 가지 삶이 있겠습니다. 감사하며 사는 삶과 간신히 사는 삶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감사하며 살았습니까? 간신히 살았습니까? 감사하며 살아야 행복합니다.
유명한 닉 부이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사진). 그는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가 없고 작은 왼발에 발가락이 두 개 밖에 없는 장애아의 상태에서 호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우리 나라를 방문해서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저는 팔다리가 없지만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자랑스러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포기하지 마세요.” 닉 부이치도 어릴 때 자기 모습이 너무 삶에 절망스러워 몇 번 자살하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는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을 고치신 예수님 이야기를 읽고 자기도 하나님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감사하는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장애는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인생의 성공입니다. 불행은 따로 없습니다. 감사하면 누구나 행복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감사해야 할까요? 타고날 때부터 기도하는 사람이 없듯이 타고날 때부터 감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감사는 배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감사를 배웁니다. 때는 2천년전, 이스라엘 갈릴리의 뱃새다 광야, 몇 일동안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예수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며칠동안 그들은 정말 먹는 것도 잊어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이 다 마치자 백성들을 드디어 허기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한 어린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손에 붙잡으시고 기도한 후 떼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5천명이 먹고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배우는 감사는 무엇일까?
“하늘을 우러러”
41절 중간,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예수님의 감사는 기도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감사의 첫 번째 대상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배고픈 백성들에게 떡을 주신 것을 감사하며 그는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을까요? 손에 떡을 두시고 얼굴은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감사의 첫 번째는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왜 감사하며 어떻게 감사할까요? 옛날에 별미를 좋아하는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요리사가 만든 맛있는 음식을 먹은 후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이제껏 짐이 먹어 본 요리 중에 가장 맛이 있도다. 내가 요리사에게 상을 주겠노라.”. 요리사는 왕의 말을 듣고는 대답했습니다. “폐하,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 요리는 좋은 야채 덕분입니다. 상을 주시려거든 야채 장수에게 주십시오.” 왕이 야채 장수를 불렀습니다. “짐이 그대에게 상을 내리노라”. 야채 장수가 말했습니다. “폐하, 저는 야채를 팔았을 뿐, 상을 받을 사람은 야채를 재배한 농부입니다.” 왕이 농부가 불렀습니다. “짐이 그대에게 상을 내리노라”. 농부가 말했습니다. “폐하, 저는 그저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었을 뿐 제가 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때를 따라 비를 주시고 햇볕을 주시지 않았다면 이 야채는 자라지 않앗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감사를 따져 올라가면 결국 하나님께 갑니다. 교회안에 참 예쁜 어린이가 많습니다. “야, 너 참 예쁘다” 했더니 그 애가 어른스럽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 말고 엄마께 감사해야죠”. 얼마후 그 엄마를 만나 참 예쁜 딸을 두었다고 했더니 엄마가 말합니다. “다 하나님이 주셨죠”. 그렇습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약1:17절입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찬591장 후렴을 아시나요? “온갖 귀한 선물 주님이 주신 것. 그 풍성하신 은혜를 다 감사드리세”. 우리에게 좋은 부모님 계심을 감사합니다. 그런데 부모님을 누가 주셨어요? 하나님. 공부 많이 하신 분들, 누가 공부하게 했어요? 하나님. 사업과 물질축복 받으신 분, 누가 물질 축복주셨어요? 하나님. 모든 것이 하나님입니다. 마6:25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왜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하나요? 마6장에만 “염려”란 말이 네 번 나옵니다. 그런데 헬라어 문법에서 조금 다르게 쓰였습니다. 25절, 27절은 이미 하고 있는 염려를 말합니다. 이 염려는 중단하라고 말합니다. 31절, 34절의 염려는 아직 시작하지 않은 염려입니다. 이 염려는 아예 시작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둘중의 하나입니다. 이미 염려를 시작했으면 염려를 즉시 중단하고, 아직 시작을 안했으면 아예 시작을 말라.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도 염려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심리학자 어니 젤린스키가 염려에 대하여 연구했습니다. 결과는 이렇습니다. 모든 염려의 40%는 절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염려의 30%는 이미 일어난 것이고, 염려의 22%는 안 해도 될 것이고, 염려의 4%는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염려의 4%는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염려는 크게 두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지나간 과거로 인한 염려, 다가올 미래에 대한 염려, 그런데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안 왔습니다. 지나간 것을 염려하는 것은 쓸데없는 염려요 다가올 미래를 염려는 사서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버드대 심리학 교수 람 다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수수께끼가 둘이 있다. 그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를 그대로 두지 못하는 것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들의 백합화, 하나님이 입히신다. 공중의 새, 하나님이 먹이신다.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 하나님이 먹이시고, 솔로몬의 옷, 하나님이 입히신다.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결국 염려는 불신앙에서 나오고 감사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환경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때문에 감사합니다. 16세기 영국은 청교도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의 중심에 올리버 크롬웰이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크롬웰은 믿음이 좋았지만 청교도 혁명으로 인해 생긴 영국의 혼란 때문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밤잠을 자지 못하고 고민하는 데 그를 따르는 신하 하나가 크롬웰에게 나와 말했습니다. “각하, 제가 질문 하나를 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각하는 세상에 있기 전부터 하나님이 세상을 잘 다스리셨다고 믿습니까?” 크롬웰이 말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각하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하나님이 세상을 잘 다스리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맞아. 그럴거야”. 신하가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각하, 죄송한 말씀이지만 각하가 살아계시는 동안에도 하나님이 세상을 잘 다스리실 것으로 믿지 않습니까?” 그때 크롬웰이 깨닫고 고민을 떨쳐 버렸다고 합니다. 물질 때문에 고민하시는 분,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에도 하나님은 세상에 물질을 공급했고 여러분이 떠난 후에도 하나님은 세상에 물질을 공급할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 여러분에게도 물질을 공급하실 것입니다. 건강 때문에 고민하시는 분,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에도 하나님은 세상의 병을 고치셨고 여러분이 떠난 후에도 하나님은 세상의 병을 고치실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현재 몸도 하나님이 치료하실 것입니다. 미래의 불확실성때문에 염려하시는 분,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에도 하나님은 세상을 인도하셨고, 여러분이 떠난 후에도 하나님은 세상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 여러분의 길도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입니다. “장래에도 인도하시라. 살아계신 하나님”. “하늘을 우러러”. 우리의 감사의 대상은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보리떡과 물고기”
예수님은 어떻게 감사하셨습니까? 다시 41절, 막6: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예수님이 5천명을 먹이려고 손에들고 있는 것은 너무 작은 것이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보리로 만든 빵과 소금에 절인 물고기입니다. 밀로 만든 빵도 있었는 데 예수님 시대 밀로 만든 빵은 괜찮게 사는 사람들이 먹고 보리 빵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었습니다. 부자들은 물고기를 요리해서 먹고 가난한 사람은 소금에 절여 먹었습니다. 소금에 절여야 조금이라고 오래 먹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들고 있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대단하게 여기지 않은 음식들이었고, 그나마 극히 적은 양을 들고 있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 너무 작은 것을 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감사에 대해 오해하는 것은 우리는 잘 나가고 성공적이고 큰 것만 감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수시에서 자녀가 서울대 수석으로 합격했다든지, 사업이 잘돼 외국회사와 수백억 계약이 성사되었다든지, 어쩌다 투자한 주식이 하루 아침에 500배로 뛰었다든지, 자녀가 탄 스쿨버스가 사고가 났는 데 머리털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든지, 그렇게 크고 드라마틱한 일에만 감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감사는 일상의 감사요 작은 감사였습니다. 신약성경에 “감사”란 단어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유카리스테오”입니다. 이 말이 성경에서 주로 “축사하다”로 번역이 되었는 데 예수님이 이 단어로 “감사”를 표현한 것이 네 번 나옵니다.
첫째는 오늘 말씀에 떡과 물고기들고 감사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만찬에서 떡과 잔을 드시며 감사했습니다. 세 번째는 마11:25-27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난 것을 보고 감사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지막으로 죽은 나사로를 살려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요11:41,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감사는 일상속에서의 감사입니다. 그가 매일 먹는 빵을 손에 들고, 매일 만나는 어린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을 보며, 매주 마시는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들고, 그리고 나사로를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감사하셨습니다.
어떤 신학교에서 가르친 교수가 쓴 글을 보았습니다. 그가 “나의 감사”라는 글을 썻습니다. 그는 처음에 몇 몇 친구와 작은 방에서 생활했답니다. 생활은 불편했지만 하루하루가 즐거웠습니다. 그에게 한 이웃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여러 사람이 복작거리며 사는데 즐겁습니까?” 그는 대답했습니다. “언제든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으니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그러다가 친구들이 이사가고 혼자 남았습니다. 여전히 즐겁게 생활합니다. 이웃이 또 물었습니다. “외톨이처럼 지내는 데 뭐가 그리 즐겁습니까?” “혼자 있어 조용하니 독서하기 좋지 않습니까?” 몇 년 후 7층짜리 건물의 1층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1층에서의 생활환경은 열악했습니다. 사람들이 틈만 나면 구정물이며, 쓰레기를 버립니다. 그래도 즐거웠습니다. 이웃이 물었습니다. “이번에는 왜 즐겁습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1층에 살면 출입도 간편하고, 공터에 꽃을 심을 수도 있어서 좋지요”. 그러다가 7층으로 이사갔습니다. 여전히 즐겁게 삽니다. “이번에는 무엇 때문에 즐거운가요?” 그가 말했습니다. “더 이상 위층에서 방해할 사람이 없으니 좋지 않습니까?”. 그가 말하는 감사는 생활속에서 감사입니다. 환경에 따라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다 보니 환경이 달라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큰 감사만 생각하고 작은 감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상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일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일상을 은혜로 여겨야 감사가 나옵니다.
일상을 사소한 것으로 여기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일상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야 감사가 나옵니다.
일상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면 감사가 안 나옵니다.
일상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감사가 나옵니다.
영국의 체스터턴이 말했습니다. “이 세상의 기적은 결코 부족하지 않다. 정말 부족한 것은 우리의 감탄이다”. 우리 마음에 감탄과 경외심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감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빙점>을 쓴 일본의 미우라 아야코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은혜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늘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은혜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도와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처음에는 병약한 나와 결혼해 준 남편이 무척이나 고마웠는데, 결혼생활에 익숙해진 지금은 처음의 그 고마움이 다 사라지고 화를 내거나 제 멋대로 행동하는 버릇없는 여편네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정말 무서운 것은 은혜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감사하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 감사할 이유나 환경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환경에 너무 익숙한 채 감사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나 자신은 감사하고 있나를 살폈습니다. 그리고 글을 썻습니다. 주보에 나오는 글입니다. “추수감사절 아침에”.
저는 너무 자주 감사를 잊고 삽니다.
오래전 제가 신학교 가기로 마음 먹고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동대문의 한 독서실에 거처를 정하고 낮에는 구두팔고 저녁에는 공부했습니다.
독서실 화장실에 곤로를 놓고 라면을 끓여 먹었습니다.
하루 종일 좌판대를 벌여 놓고 구두를 팔아도 구두 한 켤레 팔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녁에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잘 수 있다면
먹고 사는 것 걱정을 안하기만 하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대한민국 최고의 아파트단지 판교에 살면서도 감사가 없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는 날 등록금이 없어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뜻밖에 동생이 찾아와 돈봉투를 내밀었습니다. 방배동 지하철공사 막노동자로 하루 하루 번 돈이었습니다.
그 돈을 받고 울며 돈걱정 안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돈걱정 안하고 사는 데 감사가 없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집 사람은 마켓가서 김밥싸고 저는 저녁 10시 이후, 도서관 청소를 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한 아내와 어린 자녀들은 저를 따라 어두운 버클리대학 샛길을 지나 한밤중에 4시간씩 도서관 청소를 했습니다.
그때 저녁에 일만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저녁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소파에 앉아 T.V만 보는 데 감사가 없습니다.
총각때 오래 자취하며 혼자 살았습니다.
그때 누군가 내 옆에서 나를 도와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때가 되어 결혼하여 종일 옆에서 시중들고 음식 만들어주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도와주는 아내가 있는 데 저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외국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목회를 못했습니다. 항상 다른 교회를 가면 낯설고 이방인같았습니다.
그때 만일 내게 목회하는 교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한신교회 담임목사인데도
저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한신교회가 집도 절도 없이 섬처럼 떠 있을 때
제발 교회 주변에 집들이 많이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사방으로 아파트에 둘러 쌓여 교회가 안 보이는 데도
저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주님
제가 어느 때에 감사를 배우겠습니까?
무엇을 이루고 얼마만큼 더 살아야 제가 감사하겠습니까?
자에게 없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은혜에 대한 감탄입니다.
은혜에 익숙해진 무디어진 심령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추수감사절 아침에 주님앞에 엎드립니다.
은혜가 없어서 감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익숙해져서 감사가 사라졌습니다. 우리의 일상속에서 쉬지 않고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떼어 주시다”.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5천명 먹이신 사건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굶주린 자에게 양식을 주신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반드시 응답하사신다”. 다 맞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단지 먹는 빵이 아닙니다. 성경은 빵 이야기로 시작하여 생명의 이야기로 옮겨갑니다. 요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자를 먹이십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육신의 양식만 먹이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도 먹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할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생명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에만 “먹으라”는 말이 10번이나 나옵니다.
여러분, 이 추수감사절에 우리가 감사할 최고의 감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주신 것입니다. 크게 두 가지 생명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말씀의 생명이고 다음은 성찬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생명주시고 몸으로 우리에게 생명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 가지를 먹습니다. 말씀을 먹고 성찬을 먹고 사랑을 먹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공급되고,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도 공급됩니다. 예수님은 떡을 떼시고 나누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최고의 감사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예수님이 계십니까? 우리가 오늘 감사하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십시오. 작은 것에 감사하십시오. 예수님이 주신 생명 때문에 감사하십시오.
성숙(7) (막6:41-44) 2015.11.15(일)
감사, 행복으로 가는 길
닉 부이치(사진).
“하늘을 우러러”
막6:41,“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약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찬591장 후렴
“온갖 귀한 선물 주님이 주신 것. 그 풍성하신 은혜를 다 감사드리세”.
람 다스, “인간의 수수께끼가 둘이 있다. 그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를 그대로 두지 못하는 것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보리떡과 물고기”
막6: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예수님의 “감사”(유카리스테오)
- 오병이어
- 성만찬
- 어린이
마11:25-27,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
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 지의 뜻이니이다”.
- 나사로의 부활
요11:41,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 나이다”.
일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일상을 은혜로 여겨야 감사가 나옵니다.
일상을 사소한 것으로 여기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일상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야 감사가 나옵니다.
일상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면 감사가 안 나옵니다.
일상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감사가 나옵니다.
체스터턴, “이 세상의 기적은 결코 부족하지 않다. 정말 부족한 것은 우리의 감탄이다”.
미우라 아야코, “가장 무서운 것은 은혜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추수감사절 아침에”(이윤재)
저는 너무 자주 감사를 잊고 삽니다.
오래전 제가 신학교 가기로 마음 먹고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동대문의 한 독서실에 거처를 정하고 낮에는 구두팔고 저녁에는 공부했습니다.
독서실 화장실에 곤로를 놓고 라면을 끓여 먹었습니다.
하루 종일 좌판대를 벌여 놓고 구두를 팔아도 구두 한 켤레 팔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녁에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잘 수 있다면
먹고 사는 것 걱정을 안하기만 하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대한민국 최고의 아파트단지 판교에 살면서도 감사가 없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는 날 등록금이 없어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뜻밖에 동생이 찾아와 돈봉투를 내밀었습니다. 방배동 지하철공사 막노동자로 하루 하루 번 돈이었습니다.
그 돈을 받고 울며 돈걱정 안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돈걱정 안하고 사는 데 감사가 없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집 사람은 마켓가서 김밥싸고 저는 저녁 10시 이후, 도서관 청소를 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한 아내와 어린 자녀들은 저를 따라 어두운 버클리대학 샛길을 지나 한밤중에 4시간씩 도서관 청소를 했습니다.
그때 저녁에 일만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저녁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소파에 앉아 T.V만 보는 데 감사가 없습니다.
총각때 오래 자취하며 혼자 살았습니다.
그때 누군가 내 옆에서 나를 도와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때가 되어 결혼하여 종일 옆에서 시중들고 음식 만들어주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도와주는 아내가 있는 데 저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외국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목회를 못했습니다. 항상 다른 교회를 가면 낯설고 이방인같았습니다.
그때 만일 내게 목회하는 교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한신교회 담임목사인데도
저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한신교회가 집도 절도 없이 섬처럼 떠 있을 때
제발 교회 주변에 집들이 많이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사방으로 아파트에 둘러 쌓여 교회가 안 보이는 데도
저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주님
제가 어느 때에 감사를 배우겠습니까?
무엇을 이루고 얼마만큼 더 살아야 제가 감사하겠습니까?
자에게 없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은혜에 대한 감탄입니다.
은혜에 익숙해진 무디어진 심령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추수감사절 아침에 주님앞에 엎드립니다.
“떼어 주시다”.
요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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