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이윤재목사

대림절(2) (눅3:1-6) 2015.12.13(일)빈들에서 주님을 기다립니다

대림절(2) (3:1-6) 2015.12.13()

 

빈들에서 주님을 기다립니다

오늘은 성탄에 오시는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세 번째 주일입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무엇인가 간절히 기다려본 적이 있습니까? 그때 어떻셨습니까? 기다릴만 했습니까? 2차 대전때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에서 나찌에게 붙잡혀 수용소에 갇힌 빅터 프랑클이라는 유대인 의사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왔는 데 돌아온 후 이런 보고를 했습니다. “수용소에서 가장 많이 사람이 죽는 때는 성탄절 직후다“. 그래서 왜 그런가 하고 알아 보았더니 사람들이 성탄절에 오면 뭔가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아무 희망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붙잡고 사는 것은 여전히 희망입니다. 그 희망의 시한이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이 지나면 한 해가 끝납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오면 석방되지 않을까? 성탄절이 오면 가족들이 오지 않을까?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성탄절이 지나가면 모든 희망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희망입니다. 그 희망을 행해 나아갈 때 필요한 것이 기다림입니다. 기다림과 희망은 같이 갑니다. 희망하니까 기다리고 기다리니까 희망입니다. “지금은 내가 이렇게 살지만 이번 성탄절에는, 내년 봄에는, 5년 지나면, 괜찮아 질거야”. 이 희망, 그리고 이 희망을 향한 간절한 기다림, 그것이 우리를 살아가게 합니다.

 

언젠가 해외 입양된 사람들이 가족을 찾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이 맺어준 핏줄을 잊지 못해서 나이가 40이 되고 50이 되어도 엄마, 아빠를 찾는 모습은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미국에 입양되어 지금은 뉴욕에 사는 크리스틴 조던도 그 사람입니다. (입양야 엄마 찾기. 영상(1)). 크리스틴은 나이가 43살이고 미국으로 입양된 지도 40년이 지났지만 자기 출생의 근원을 찾는 마음은 나이가 먹을수록 더 했습니다. 자기도 자녀를 낳아보니까 어머니, 아버지가 더 그리워 집니다. 그 끝없는 희망의 기다림, 그 기다림이 그를 미국에서의 온갖 고난과 시련속에서 견디게 했습니다. 여러분도 한 해동안 살아온 것도 이 기다림때문이 아닙니까?

 

지금부터 2천년전에도 우리와 똑같은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1-2절을 볼까요? 3:1-2,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 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구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1절과 2절은 세례요한이 살고 있던 시대상을 보여 줍니다. 구체적인 이름을 거론하여 그가 살았던 시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빈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여기서 빈들은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 임한 것일까요? 빈들이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빈들은 아무도 살지 않는 땅입니다. 보통으로 말하면 황무지요 성경적인 말로 하면 광야입니다. 이스라엘은 전 국토의 2/3가 광야입니다. 남쪽에서부터 신광야, 브엘쉐바 광야, 아라바광야, 바란광야, 유다광야, 십황무지, 엔게디 황무지, 온통 광야로 가득차 있습니다. 광야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그림 (2)). 학교도 없습니다. 쉴만한 까페도 다방도 식당도 없습니다. 광야는 말하는 사람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습니다. 공중을 나는 독수리와 바람에 들려오는 침묵의 소리가 전부입니다. 그런데 왜 세례요한은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까요?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린 세례요한은 빈들에서 두 가지 메시지를 남깁니다.

 

첫째. 버리라

광야는 버리는 곳입니다.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광야도 자세히 보면 이것 저것 많습니다. 우리가 광야를 보면 겉으로 볼 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광야에는 독수리, 뱀 등 짐승들이 삽니다. 뱀이 얼마나 무서운지 광야에 사는 뱀은 완전히 독이 올라 있어서 한 번 물리면 죽습니다(그림(3).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렸다고 했습니다. 불뱀에 물리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에는 웅덩이가 많습니다. 본래 움푹 꺼져서 웅덩이가 된 것도 있지만 물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이 우물을 팟기 때문에 웅덩이가 되기도 합니다. 광야에는 가시가 많습니다(그림(4). 광야는 물이 없기 때문에 가시나무만이 생존할 수 있습니다. 가시나무는 물이 많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생존할 수 있지만 한번 찔리면 피가 나고 크게 다칩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광야에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아무것도 없지만 자세히 보면 위험한 것들이 많아서 광야는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광야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버릴 것입니다. 광야는 우리 마음의 웅덩이들, 서로 찌르고 찔리는 가시들, 남을 위해 파놓은 함정, 뱀같은 음흉한 마음, 서로 할퀴고 미워하는 마음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1~2절에는 세례요한 시대에 살았던 주요 인물들이 나옵니다. 하나같이 버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본디오 빌라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입니다. 주후 26년부터 10년간 이스라엘의 총독으로 있으면서 하도 악명이 높으니까 결국 로마 황제가 소환해서 로마에서 자살로 인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갈릴리 분봉왕 헤롯, 세상적으로 너무 욕심이 많아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를 빼앗은 사람입니다. 안나스와 가야바, 이들은 전 현직 대제사장인데 불법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원래 대제사장은 레위지파, 아론의 혈통으로 태어나야 하는 데 이들은 아론과 아무 상관이 없이 돈주고 대제사장이 되어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했습니다. 1-2절에 나타난 이 사람들은 광야에서 버려야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버려야 할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받았습니다. 헤롯, 우리도 날마다 남의 것을 빼앗습니다. 안나스와 가야바, 믿는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짝퉁 신자입니다. 이것들이 광야의 골짜기요 험한 산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이것은 광야의 모습이며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고 또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저는 지난 한 해동안 한국교회 미래목회포럼 대표회장으로 섬겼습니다. 미래목회포럼은 한국교회 천명 이상 모이는 목회자 300명으로 구성되어 한국교회 미래를 제시하는 영향력있는 한국교회 기관입니다. 이름만 대만 알 수 있는 한국 유명교회, 유명 목회자가 소속되어 있고 교수, 박사, 법조인등 전문위원만 100명이 넘습니다. 대표가 무슨 말을 하면 모두 기독교 신문에 나옵니다. 작년 초 임진각 기도회부터, 3.1, 광복 70주년 행사등 큰 일을 감당했고 기독교 T.V, 신문에 수없이 등장했습니다. 그 일을 하면서 보람도 많이 느꼈지만 제가 얼마나 허영심이 많은 사람인가도 뼈저리게 느꼇습니다. 플라톤이 쓴 <대화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명예를 추구하는지 보라. 유명해지고 싶어 하고 불멸의 영광을 영원히 쌓고 싶어 하고, 자녀보다도 더,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이든 용맹하게 감수하려고 하고, 이를 위해 돈을 쓸 준비가 되어 있고, 모든 종류의 시련들을 겪으려고 하고, 영광을 위해서라면 심지어 죽으려고까지 한다.” 이 말은 정말 저를 두고 한 말 같습니다. 사람이 누구입니까? 성경은 사람의 가장 큰 죄를 교만이라고 봅니다. 2천년 교회사에서 인간이 지은 큰 죄를 대죄라도 불렀는 데 그것이 7가지입니다. 탐식, 욕심, 태만, 시기, 분노, 정욕, 그리고 교만입니다. 이들중에서 가장 뿌리가 되는 죄가 교만입니다. 중세시대에 죄를 나무로 그린 그림이 있는 데 모든 죄가 줄기요 열매라면 그 뿌리는 교만입니다(그림(5)). 모든 죄가 교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교만은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교만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가아와’“높히다의 어원에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교만은 높이는 것입니다. 자신을 실제보다 더 높힙니다. 교만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기를 최정상에 세웁니다. 그래서 그 높이가 하늘까지 올라갑니다. 교만의 최고 극치가 자기가 하나님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그래서 타락했고 천사도 그래서 땅에 떨어졌습니다. 다른 죄는 다스릴 수 있지만 교만은 최후까지 남는 죄입니다. 그런데 이 교만의 큰 가지가 허영입니다.

 

교만과 허영은 이런 것입니다. 교만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것이라면 허영은 그 낫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교만이 자신이 남보다 잘났다라는 것이라면 허영이 내가 남보다 잘났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만은 안에 있고 허영은 밖에 있습니다. 교만이 속에 웅크리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 반면에 허영은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입니다. 교만의 뿌리에서 허영이 나오고 허영의 가지를 통해 교만이 자라납니다. 교만이 자기 존재에 대한 우월감이라면 허영은 그 우월감으로 다른 사람에게 주목받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 허영에서 두 개의 가지가 나옵니다. 자랑과 위선입니다. 자랑은 자기의 우월성을 과장하여 드러내는 것이며 위선은 자신이 갖지 않은 것을 가진 것처럼 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것입니다.

 

그 작은 가지에서 또 네 가지 열매가 나옵니다. 고집, 의견 불일치, 논쟁, 불순종입니다. 속에 있는 교만이 밖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고집이 생깁니다. 고집은 내 생각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남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그것을 꺽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내가 우월한 데 누구 말을 듣습니까? 이것이 고집입니다. 이런 사람은 남과 자주 다투고 논쟁을 일으킬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주장이 옳고 합리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낫고 더 우월하기 때문에 자기보다 못한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논쟁으로 나타나고 불순종으로 나타납니다. , 그림을 한번 보시죠(그림 (6))

 

고집 의견 불일치 논쟁 불순종

 

자랑과 위선

 

허영

 

교만(뿌리)

 

저는 미래목회포럼 대표를 하면서 T.V앞에 많이 섰습니다. 한 아홉 번은 된 것 같습니다. 그 전에도 강의한다고 많이 섰지만 그때와는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그것도 한국교회 총회장, 대표들과 같이 그렇게 했습니다. 어느날 T.V앞에서 인터뷰를 하는 데 , 나에게도 허영심이 너무 많구나. 나를 드러내려는 마음,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너무 많구나를 깨달았습니다. “, 나는 나에 대해 굶주리고 있구나. 영적인 삶이란 하나님께 굶주리는 것인데 나는 나에 대하여 굶주리고 있구나”. 그때부터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가능하면 매스컴앞에, 사람들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조심해야겠구나. 그래야 내가 살겠구나”. 생각했습니다.

 

2세기, 3세기, 이집트 사막에서 기도하던 사막교부들의 이야기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도자중에 모세라는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아주 유명해서 사람들이 많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어느때 사람들이 그를 만나러 이집트 스케테 사막으로 갔습니다. 갔더니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여기 아바 모세가 기도하는 기도실이 어디입니까?” 그러자 그 노인이 말했습니다. “그를 왜 보려고 합니까? 그는 바보에다 이단이예요”. 그러면서 자리를 피합니다. 뒤따라 오던 사람들도 물었습니다. “여기 아바 모세가 기도하는 기도실이 어디입니까?” 그러자 그 노인이 말했습니다. “그를 왜 보려고 합니까? 그는 바보에다 이단이예요”. 그러면서 자리를 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갈 바를 모르고 있는 데 한 젊은 수도자가 지나갑니다. “저희는 아바 모세를 만나러 멀리서 왔는 데 어디 계시죠? 한 노인에게 물었더니 바보이며 이단이라고 하면서 모른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젊은 수도자가 물었습니다. “그 노인이 어떻게 생겼어요?”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키가 크고 피부가 검고 낡은 옷을 입고 있었어요.” 그러자 젊은 수도자가 말했습니다. “그가 바로 아바 모세예요. 아마도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을 피하려고 일부러 그런 것 같습니다”. 결국 모세는 사람들에게서 자기를 감추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허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면 자주 사람들의 주목을 피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데 굶주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인정받는 데 굶주려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자신을 피알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데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할 수 있으면 자신을 나타내는 데서 피해야 합니다. 저는 그래서 웬만하면 T.V, 매스콤에 안 나타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열 번 부탁이 오면 한 두 번만 합니다.

 

예수님이 마귀에게 받은 세 가지 시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 탐욕입니다. 둘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허영입니다. 셋째, “내게 절하라. 천하 모든 영광을 네게 주겠다”. 교만입니다. 예수님이 성전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할 수 없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허영의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안 했습니다.

 

메리 델 발이라는 사람이 겸손의 기도를 썻습니다. 읽을수록 표현한 것 같았습니다. “,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 나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귀중히 여김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사랑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칭찬을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높임을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찬양을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부끄러움을 당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경멸을 당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습니다. 노래와 같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빈들처럼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오십니다.

두 번째 들으라

빈들은 버리는 곳이면서 또한 듣는 곳입니다. 다시 2절을 보실까요? 3: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여기에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세례 요한에게 들려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광야는 버리는 곳이면서 또한 듣는 곳입니다. 광야는 버리는 곳이지만 버리기만 해서는 살 수 없습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회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입니다. 뉘우치는 와 고치는 가 있습니다. 뉘우치기만 해서는 회개가 아닙니다. 고치기도 해야 합니다. 버려서 뉘우치고 들어야 고칩니다. 무엇으로 고칩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야 고칩니다.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신앙생활의 위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는 위기입니다. 사울 왕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버릴 때 다른 것으로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잘못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습니다. 미워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잊혀지는 것입니다. 잘못해서 나무라기만 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예 나무라지도 않으면 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단치고 혼내는 것은 그래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설교들을 때 찔리고 저것은 나한테 하는 소리구나했다면 아직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말하든 못하든 감동이 없습니다. 이것이 위기입니다. 엘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침체 때문입니다. 영적 침체는 다른 것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으니까 오는 것입니다. 엘리야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피곤하고 지쳤기 때문입니다. 너무 피곤하고 지쳐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동굴에서 쉬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그가 살아났습니다.

 

기도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시편을 보십시오. 4: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5:2,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10:1, “여호아여 어찌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란때에 숨으시나이까”, 27:7, “여호아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기도는 내 사정을 아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안들리니까 탄식하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갈 때 등록금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등록금은 주지 않고 렘33:3절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어느날 동생이 등록금 가져 왔습니다. 이스라엘 갈 때 도움의 손길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직 아무런 도움도 없을 때 하나님은 시32:8절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이스라엘 도착했더니 후배가 쓰던 방이 예비되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아침에 성경을 읽는 데 시102편을 읽었습니다. 제목이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고난당하는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의 근심을 여호아앞에 토로하는 기도”. 여러분도 마음이 상하고 근심이 있을 때 이 시를 읽으시기 바랍니다. 거기 13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02:13,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 여기에 정한 기한이란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때가 정해졌다는 뜻입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이 정한 때에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때가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긍휼과 은혜를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그 날 하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은혜입니다. 대림절에 우리가 기다리는 은혜가 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지성소를 드비르라 합니다. 광야를 미드바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바르라고 합니다. 세 말의 어원이 같습니다. 광야와 지성소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입니다. 광야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입니다. 광야에 있어도 말씀이 임했다면 그곳이 지성소입니다.

 

이청준이 쓴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방배동에 있는 맹인 안요한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공부도 잘한 안요한, 37살 때 갑자기 눈이 안 보였습니다. 절망에 빠져 자살을 시도했는 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요한아, 너는 혼자가 아니다. 구역성경 320페이지는 너의 것이니라“. 깜짝 놀라 지나가던 학생에게 성경을 읽어달라고 했더니 구약성경 320면은 여호수아 1장이었습니다. 1:5-9,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그 후 안요한은 맹인 목사로 하나님의 큰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대림절에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음성듣는 것입니다.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재미있게도 대림절에 예수님을 기다렸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마리아가 천사의 방문을 받고 아기 예수의 탄생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가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기 예수를 만납니다. 엘리사벳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 마리아의 복중에 뛰노는 아기 예수를 찬양합니다. 중요한 것은 요셉입니다. 제가 마1-2장에서 요셉에 관한 기록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무려 7, 8번이나 요셉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처녀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고민할 때 하나님의 감동으로 마리아의 임신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을 알게 됩니다. 마리아를 데려올까 말까 주저할 때 천사의 말씀을 듣고 마리아를 데려옵니다. 이사야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탄생이 임마누엘의 탄생임을 압니다. 헤롯이 두 살 미만의 아이를 죽이려 할 때 애굽으로 피난가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애굽에서 또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헤롯이 죽고 그 아들 아켈라오가 유다 지방 분봉왕이 되자 갈릴리 지역인 나사렛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1-장에서 가장 많이 쓰인 말이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주의 천사가 지시하기를, 주의 사자가 말하기를”. 여러분 요셉은 어쩌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평소에 기도 많이 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던 사람을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로 택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림절에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버리고 들어야 합니다. 우리 죄는 버리고, 하나님의 음성은 듣고, 교만, 허영, 광야의 가시, 들짐승은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음성은 듣고. 중세의 성자 성 리차드가 짧은 시를 썻습니다. “, 주여. 세 가지를 기도드립니다. 당신을 보다 분명히 보게 하시고 당신을 더 사랑하게 하시고 당신을 보다 가까이 따르게 하소서. 그것이 매일의 나의 삶이 되게 하소서”.

대림절(2) (3:1-6) 2015.12.13()

 

빈들에서 주님을 기다립니다

크리스틴 조던(입양야 엄마 찾기. 영상(1)).

 

3:1-2,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 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구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광야(그림 (2)).

 

버리라

(그림(3).

 

가시(그림(4).

 

플라톤, “인간이 얼마나 명예를 추구하는지 보라. 유명해지고 싶어 하고 불멸의 영광을 영원히 쌓고 싶어 하고, 자녀보다도 더,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이든 용맹하게 감수하려고 하고, 이를 위해 돈을 쓸 준비가 되어 있고, 모든 종류의 시련들을 겪으려고 하고, 영광을 위해서라면 심지어 죽으려고까지 한다.”(대화록)

 

교만과 허영

교만: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것

허영: 그 사실을 남에게 드러내는 것

 

고집 의견 불일치 논쟁 불순종

 

자랑과 위선

허영

 

교만(뿌리)

 

자신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할 수 있으면 자신을 나타내는 일을 피해야 한다.

 

 

메리 델 발, “겸손의 기도

,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 나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귀중히 여김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사랑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칭찬을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높임을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찬양을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부끄러움을 당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경멸을 당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들으라

3: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신앙생활의 위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위기다.

 

4: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5:2,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10:1, “여호아여 어찌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란때에 숨으시나이까”,

27:7, “여호아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33:3 “나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32:8.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102:13,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

1:5-9,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성 리차드 , 주여. 세 가지를 기도드립니다. 당신을 보다 분명히 보게 하시고 당신을 더 사랑하게 하시고 당신을 보다 가까이 따르게 하소서. 그것이 매일의 나의 삶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