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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1) (요1:14, 빌2:6-8) 2015.12.6.(일)몸으로 오신 예수님

대림절(1) (1:14, 2:6-8) 2015.12.6.()

 

몸으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둘째 주입니다. 대림절은 사순절과 함께 교회력에서 아주 중요한 절기입니다. 대림절은 성탄절을 기다리고 사순절을 부활절을 기다립니다. 각각 40일간 그렇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한 것을 기다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다립니다. 왜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릴까요? 한 젊은이가 어떤 아가씨를 좋아해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사랑합니다하는 그림카드와 함께 이렇게 썻습니다. “You are so beauiful”(당신은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아가씨가 보니까 영어 철자를 잘못 썻습니다. “beautiful”에서 가운데 “t”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서 물었습니다. “아니, beautiful에서 t자를 왜 뺐습니까? 영어 철자도 제대로 모르면서 편지를 씁니까?” 그랬더니 남자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t자가 뺏습니다. 당신은 t없이 아름답습니다”. (다같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도 그렇지 않을까요? “너희는 너무 아름답다. t없이 아름답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 20세기의 유명한 신학자중에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가 유명한 <교회 교의학>이란 책을 썻는 데 모두 13권입니다. 어느날 한 기자가 그의 연구실을 방문해서 물었습니다. “바르트 박사님, 박사님이 쓰신 13권의 책은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고 심오해서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책의 핵심을 간단하게 요약해 주시겠습니까? 이때 바르트박사가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너무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가만히 있다면 사랑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문제는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요1:14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왜 하나님이 육신을 입어야 했을까요?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은 육신이 아닙니다. 영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한 군데만 계시지도 않습니다. 몸을 가지면 한 군데밖에는 있을 수 없고 몸을 가지면 때가 되면 늙고 죽습니다. 왜 영원하신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어 자신을 유한한 존재로 제한하셨나요? 그럴 필요가 있었나요? 모든 신앙은 여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 우리가 믿는 모든 신앙은 이 기초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일이 없었다면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왜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나요? 그렇게 우리가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요?

 

먼저 겸손입니다.

하나님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무엇보다 그의 겸손때문입니다. 2:6-8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으라”. 여기에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가 나타납니다. “자기를 비워,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하나님이 사람이 될 수 있느냐는 논쟁은 교회사에서 가장 치열한 논쟁중의 하나였습니다. 이 논쟁의 주인공은 3-4세기에 살았던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였습니다. 먼저 아리우스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절대적인 초월성과 신성이 있고 또 세상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이 된다면 그가 가진 영원성, 절대성, 신성이 깨지고 맙니다. 그래서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가 하나님이든지 사람이든지. 그가 하나님이라면 사람이 될 수 없고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계속 주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신성모독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다나시우스는 하나님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할 권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기 때문에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에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사람이 되지 못하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에게는 사랑이 있습니다. 죄로 인해 죽어가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얼마든지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데는 자기를 버리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빌2:6절에 자기를 비워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비웠다는 것은 자기를 버렸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형체를 가졌다는 말입니다. 본체는 본질이요 형체는 모양입니다. 본체는 그대로 있으면서 형체를 바꿨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겸손입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보통은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거짓으로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일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마음에 없는 말로 겸손한 척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뭐 아는 것이 있나요?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나요? 당신이 다 하시죠”. 이렇게 말하면서도 , 지가 나보다 나은 것이 뭐야? 내가 더 낫지합니다. 얼마든지 거짓으로 겸손한 척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기라는 존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크리프트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겸손이란 자기를 못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덜 하는 것이다. 안드류 머레이도 겸손이란 고전적인 책에서 말했습니다. “겸손이란 자아가 비켜나고 하나님을 왕위에 모시는 것이다”. 자기를 낮추는 것이 겸손이 아니라 아예 자기가 없는 것이 겸손입니다. “나는 못해요. 나는 틀렸어요하면서도 여전히 를 강조한 것은 여전히 내 속에 가 있다는 것입니다. 의 부족에 집착하는 것이 겸손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자기가 중심이 아닌 것이 겸손입니다. 겉으로는 자신의 부족을 고백해도 속으로는 자아에 대해 집착하고 있다면 겸손이 아닙니다. 성경적 겸손의 초점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앞에 나는 사라지고 내가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약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비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자기를 비웠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살았습니다.

 

마포구 양화진에 가면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어른, 아이 할 것이 없이 모두 425명의 무덤이 있습니다. 이름없는 무덤 80기는 이 숫자에게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한국에 와서 어떻게 살았나 보면 다 자기를 비우는 삶을 살았습니다. 18855월에 내한한 헤론은 미국에서 좋은 대학 교수직을 버리고 이 땅에 왔습니다. 그리고 열악한 환경속에서 일하다 자기도 의사이면서도 이질에 걸려 5년만에 죽었습니다. 오하이오주의 실업가 세브란스는 자기의 사재를 다 털어 서울역 앞에 세브란스라는 병원을 세웠습니다. 후에 연세대학교 병원이 되었습니다. 26살에 한국에 온 언더우드는 신혼여행도 버리고 아내와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아펠셀러는 전도하러 배타고 가다가 서천앞바다에서 한 소녀를 구하고 죽었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1907년 대부흥의 주역인 토마스 하디의 묘를 가면 그 아들 죠셉이 같이 묻혀 있는 데 날자를 보면 하루를 살았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어 아버지곁에 묻힌 것입니다. 190725세 나이로 급성맹장염으로 죽은 루드빅 켄드릭은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하고 말하고 죽었습니다.

 

이 모두가 자기를 버렸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스스로 약해져 세상을 살렸습니다. 다미엔에 하와이 몰로카 섬에 있는 나병환자를 전도하기 위해 자기 몸에 스스로 나병균을 주입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비운 것은 스스로 자기를 낮춰야 세상을 살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스스로 자신을 비우십니까? 스스로자신을 낮추십니까? 그래서 스스로 약한 자가 됩니까?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스스로 자기을 버리고 직장으로, 스스로 자기를 낮춰 가정으로, 스스로 약한 자가 되어 세상으로 들어갑니까? 약할 때 강해집니다. 자기를 비울 때 채워집니다. 겸손할 때 승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몸으로 오신 첫 번째 이유입니다.

 

모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몸을 입으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모험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천사와 함께 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이 땅에 왔다면 모험이 아닐 것입니다. 죄가 없는 의인들만 사는 곳에 왔다면 모험이 아닐 것입니다.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이런 곳에 왔다면 모험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군대와 함께 오지 않고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작은 아기로 왔습니다. 죄가 없는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이 우굴거리는 가인의 도시에 오셨습니다.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래서 모험입니다. 저는 눅1장에서 마리아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하나님은 참 대단하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계획을 나사렛의 한 처녀를 통해 이루시겠다는 것입니까? 그 처녀를 어떻게 믿어요? 그러다가 실패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마리아도 대단합니다. 천사가 와서 네 몸에서 아기가 태어날 것이다 했더니 눅1:38,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응답합니다. 그때 마리아가 나는 못해요. 나는 자신없어요했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아찔한 순간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하나님의 모험입니다.

 

하나님의 모험은 사실 사람을 창조할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직접 손으로 아름답게 창조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몰랐을까요? 몰랐다면 하나님이 아니죠. 알았기 때문에 모험입니다. 자신을 배반하고 죄에 빠질 것을 알았슴에도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험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와 못지 않은 모험이 예수님 보내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반해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하나님도 몰랐을까요?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험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모험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도 모험가요 예수님도 모험가요 마리아도 모험가였습니다.

 

사실 인간의 삶은 모두 모험입니다. 사람은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모험이 시작됩니다. 인생학자 지그 지글러가 말했습니다.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는 모험이 필요하다“. ”자동차를 운전하기 위해서는 사고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는 면접에서 떨어질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연극의 배역 테스트에 응모하기 위해서는 배역을 받지 못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떨어질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미소를 지을 때는 아무도 미소를 받아주지 않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상처받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연설할 때는 아무도 듣지 않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희망을 향해 나아갈 때는 절망이 따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꿈을 말할 때는 바보라는 말을 들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산에 오를 때는 떨어질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저는 이 말을 좋아합니다. “인생은 하나님이 지휘하시는 모험이다”.

 

사실 목회도 거룩한 모험입니다. 험한 세상애서 영혼을 얻기 위해 기도로 싸우고 그 영혼들을 양육해서 세상에 제자로 내보내는 일은 거룩한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 제 목회가 실패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미국의 로버트 슐러 목사의 말을 기억합니다. “해보지도 않고 성공했다고 말하는 것보다 해보고 실패하는 것이 낫다”. 문제는 거룩한 모험심입니다. 실패했다고 느낄 때마다 저는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이 일에 실패한 것일까? 실패자가 된 것일까?”. 어떤 일에 실패한 것은 그 일에만 실패한 것이고 실패자가 되었다는 것은 아예 모든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일에 실패했다고 모든 일을 못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내가 이번에 삼섬 취직시험에 실패했다. 삼성에만 실패한 것입니다. 현대, L.G, 한화는 아직 시험도 보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떤 아가씨와 사귀다가 헤어졌다. 그 아가씨 하고만 안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수많은 아가씨들이 있습니다. 내가 이번 입시에서 연대에 떨어졌다. 연대에만 떨어진 것입니다. 아직도 대학은 많이 있고 올해 안되면 내년도 있습니다. 문제는 나에게 거룩한 모험심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모험을 했는 데 실패했다면 실패가 아닙니다. 모험을 안해서 실패한 것입니다. 최고의 실패는 한번도 모험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했습니다.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무엇인가 얻기를 바란다면 잃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잃을 모험을 하면 얻는 축복을 받습니다.

 

왜 하나님이 마리아를 선택했을까요? 마리아가 믿음으로 거룩한 모험에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주의 비천한 계집종이오나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마리아는 이 믿음으로 그에게 닥쳐온 위기를 이겨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도 처음에는 두려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자 담대해졌습니다. 담대해 지자 모험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0달 후 예수님이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인류 최고의 모험가가 되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곧 모험의 역사입니다. 역사를 이룬 사람들은 한번도 실패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니라 수없이 모험한 사람들입니다. 찰스 린드버그는 25세 때 직접 비행기를 몰고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하여 파리까지 날았습니다. 그 당시로는 모험이었습니다. 무엇인가 업적을 이룬 사람은 모험으로 그 일을 한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만 모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라는 잡지를 보면 세계 역사상 최대 업적을 이룬 사람의 35%60~70세의 노인들이고 23%70~50세의 노인들에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위대한 업적의 64%가 노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코넬리어스 밴더빌트는 85세에 위대한 철도왕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80세에 음악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파스퇴르는 70세 때 광견병 치료법을 발견했고 콜럼버스는 60세를 넘어서 최초의 항해에 성공했습니다. 볼테르, 뉴턴, 스펜서, 제퍼슨같은 인물들은 80세 이후에도 활발히 활동했고 갈릴레오는 73세에 달의 월과 일 변화상을 발견했습니다.

 

문제는 용기요 모험심입니다. 그런 그 용기와 모험을 하나님이 시작하셨습니다. 인류 구원을 나사렛의 한 처녀를 통해 이루는 모험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생도 모험의 일생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에게 최고의 모험이었습니다. 그 모험을 사도 바울이 이어 받아 척박한 땅에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부터 교회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모험이 되었습니다. 그 모험의 전통이 우리에게도 이어졌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담대하십시오. 말구유에 나신 아기가 세상을 승리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모험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몸을 입고 오신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죽기 위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신은 언젠가 죽습니다. 나이 많아 병들어 때가 되면 죽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의 주장의 가장 큰 이유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일 인간이 될 수 있다면 인간처럼 언젠가 병들고 늙고 죽을 수 밖에 없지 않느냐? 그런데 하나님이 죽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그런데 하나님은 죽으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기로 결심한 때가 언제일까? 바리새인에게 미움받을 때일까?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 때일까? 빌라도가 사형을 선고할 때일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기로 마음먹을 때입니다. 십자가는 이미 작정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잡혀 죽은 것이 아니라 아예 죽으려고 오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기록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잡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쓰인 말이 넘겨 주었다는 말입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유대인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유대인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군병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넘겨주었다라는 말은 예수님이 죄가 있어 잡혀 죽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인간적 측면에서 본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손에 잡혀 죽은 겻은 맞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속을 들여다 보면 예수님은 스스로죽으셨습니다. 이때 쓰인 말이 버렸다는 말입니다. 10:11,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0:17-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2:20,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버렸다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의 자발성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겉으로 보았을 때 그는 잡혀 죽었습니다. 그러나 속에서 보았을 때 스스로 죽었습니다. 그 스스로 죽은 죽음의 시작이 언제일까? 하나님이 몸을 입고 아기 예수로 이 땅에 오시기로 작정하신 날입니다. 몸은 언제나 죽습니다. 하나님이 몸을 입지 않았다면 죽을 일도 없고 죽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몸을 입는 순간, 그는 죽기로 각오했습니다. 십자가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제가 지난 8월에 애틀란타를 다녀왔습니다. 거기에 오랫동안 노예시장으로 사용되었다는 곳에 가 보았습니다. 지하였습니다. 지금은 쇼핑가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노예제도는 1860년대 아브라함 링컨의 시대, 그 이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제가 주일날 어느 교회를 갔더니 그 교회 주보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1850-60년대에 애틀란타의 한 영국인이 캘리포니아에 가서 금광으로 많은 돈을 벌었답니다. 거부가 된 그는 다시 애틀란타로 돌아왔는 데 우연히 이 노예시장에서 한 젊고 아름다운 아프리카 여성이 거래되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두 남자가 그녀를 사기 위해 군중속에서 서로 비싼 값을 부르며 흥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프라카 여성을 발로 차고 손으로 만지며 마치 물건처럼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인은 크게 분노하며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누가 이 노예의 값을 제시하든 나는 그 두 배를 내겠소”. 경매인은 경매를 중단하고 말했습니다. “뭐라고요? 값을 두 배로 주겠다고요?” 영국인은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었고 경매는 끝났습니다.

 

영국인이 아프리카 여성을 데리고 노예시장에서 나왔을 때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당신은 자유요. 더 이상 아무도 당신을 노예로 삼지 않을거요”. 그녀는 하도 많은 남자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거짓말하지 말하며 그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그때 영국인이 그를 산 서류를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보시오. 당신을 산 문서요. 내가 서명했지 않았소? 이제 이 문서를 가지고 가시오”. 그녀가 한참 문서를 바라 보다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울고나서 남자를 그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저를 사기 위해 그 어떤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하지 않았나요? 제가 정말 자유해도 되는 건가요?“ 남자가 말했습니다. “그렇소. 당신은 이제부터 자유요”. 그러자 그녀가 또 울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있다가 그녀는 남자를 바라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저를 자유케 했으니 이제 한 평생 선생님의 종이 되어 선생님을 섬기고 살면 안될까요?”.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그녀는 마음좋은 주인밑에서 자유를 누리며 행복한 살았을 것이라고 믿어졌습니다. 그 교회 주보 이야기가 애틀란트의 노예시장을 배경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더욱 신빙성이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죄와 사망의 노예에서 자유케 하시려고 비싼 값을 지불하고 죽으셨습니다. 그가 자신을 버려 우리를 샀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그를 주인으로 섬기며 자유를 얻은 종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 시작이 언제입니까? 사순절이 아닙니다. 대림절입니다. 하나님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와서 저와 여러분을 살려야지 생각하는 순간, 그는 이미 죽을 준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죽으러 왔고 우리는 그의 죽음으로 다시 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대림절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가 몸으로 와서 생긴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몸을 죽으면 끝나지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몸은 소중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몸으로 오셨고, 몸으로 사셨고, 몸을 주셨고, 몸으로 죽으셨고, 몸으로 부활했고, 몸으로 승천했고, 그리고 때가 되면 몸으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몸으로 살다가 예수님이 오시는 날, 몸으로 휴거할 것입니다. 몸을 가지신 여러분, 스스로 자기를 비워 이 세상에서 겸손한 자로 사십시오. 그러나 나사렛 처녀를 통해 인류 구원의 꿈을 이루신 하나님처럼 모험하며 사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 무엇인가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믿음과 보험으로 이루십시오. 때가 되어 죽을 때 우리 몸으로 세상을 살립시다. 몸으로 오신 하나님, 이 거룩한 대림절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대림절(1) (1:14, 2:6-8) 2015.12.6.()

 

몸으로 오신 예수님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먼저 겸손입니다.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으라”.

 

아리우스: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다나시우스: 하나님이 사람이 될 수 있다.

 

크리프트, “겸손이란 자기를 못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덜 하는 것이다”.

안드류 머레이, “겸손이란 자아가 비켜나고 하나님을 왕위에 모시는 것이다”.

 

양화진(사진)

 

모험입니다.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1:38,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지그 지글러,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는 모험이 필요하다. 자동차를 운전하기 위해서는 사고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는 면접에서 떨어질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연극의 배역 테스트에 응모하기 위해서는 배역을 받지 못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떨어질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미소를 지을 때는 아무도 미소를 받아주지 않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상처받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연설할 때는 아무도 듣지 않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희망을 향해 나아갈 때는 절망이 따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꿈을 말할 때는 바보라는 말을 들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산에 오를 때는 떨어질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인생은 하나님이 지휘하시는 모험이다”.

 

최고의 실패는 한번도 모험하지 않은 것이다.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기록

(1) 잡혀 죽었다=“넘겨 주었다

(2) 스스로 죽었다=“버렸다”.

 

10:11,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0:17-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2:20,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선생님, 그런데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저를 자유케 했으니 이제 한 평생 선생님의 종이 되어 선생님을 섬기고 살면 안될까요?”.

 

예수님은 이 땅에 몸으로 오셨고, 몸으로 사셨고, 몸을 주셨고, 몸으로 죽으셨고, 몸으로 부활했고, 몸으로 승천했고, 그리고 때가 되면 몸으로 재림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