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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요3:16-17) 2015.12.25(금) 성탄, 가장 좋은 소식

성탄절(3:16-17) 2015.12.25()

성탄, 가장 좋은 소식

 

오늘은 즐거운 성탄절입니다. 우리 함께 인사합시다. “메리 크리스마스”. “기쁜 성탄에 축복받으세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나 안 다니는 사람이나 성탄절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왜 성탄절을 좋아하십니까?” 물었더니 세대마다 다릅니다. 어린아이들은 산타 클로스 선물때문에 좋아한답니다. 초등학생은 학교 안가니까 좋아 한답니다. 대학생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여자친구, 남자친구 만나니까 좋아한답니다. 직장인 직장 안가고 쉬니까 좋아한답니다. 50대는 교회에서 떡국 먹으니까 좋아한답니다. 60대는 옛날 크리스마스때 노래하고 율동하던 생각이 나서 좋아한답니다. 70대는 하늘나라 갈 날이 멀지 않아서 좋아한답니다. 여러분은 왜 성탄절을 좋아합니까?

 

그러나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있습니다. 3:16절 때문입니다. 3:16은 누구나 다 압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들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웬만한 신자들은 이말씀을 다 외웁니다. 이 말씀은 모든 성경의 요약이고 성탄절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습니까? 3:16 때문입니다. 왜 성탄절이 좋은 날입니까? 3:16 때문입니다. 성탄절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3:16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성탄을 맞은 여러분에게 축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은 네 가지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낸 이유는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특정한 사람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자를 사랑하사했다면 가난한 사람은 큰 일 날뻔 했습니다. “하나님이 미국 사람을 사랑하사했다면 한국사람은 큰 일 날뻔 했습니다, “하나님이 성공한 사람만 사랑하사...”했다면 실패한 사람은 큰 일 날뻔 했습니다. “하나님이 의인만 사랑하사했다면 죄인들은 큰 일 날뻔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한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의 세상입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를 아십니까?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족보가 나오는 데 그 중 대부분이 죄인입니다. 예수님의 조상 야곱이 누구입니까?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밤에 도망간 사람입니다. 라합이 누구입니까? 여리고의 매춘부였습니다. 룻이 누구입니까? 유대인이 싫어하는 모압족속이었습니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훌륭했지만 밧세바를 범한 사람입니다. 솔로몬이 누구입니까? 지혜로웠지만 이방신을 섬긴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중 완전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예수님이 태어난 시대적 상황을 눅3:1-2절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로마 황제는 디베료, 이스라엘 왕은 헤롯, 대제사장은 가야바와 안나스였습니다. 로마 황제는 자기가 세상의 신이라고 하면서 모든 백성들은 자기를 섬기라고 명령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났지만 그는 자신의 명령을 취소하지 않았습니다. 헤롯은 2살 미만의 아이를 죽이고 엄청난 살인과 세금, 대형 토목공사로 백성들을 강제노역으로 내 몰았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낫지만 그는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고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가야바와 안나스는 예수님 시대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아론의 혈통도 아닌 불법대제사장이었습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있을 때 가야바의 무덤이 예루살렘 탈피옷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우리 나라 왕들처럼 엄청난 금은보화와 함께 화려한 무덤이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그것이 당시의 죄악된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예수님이 성탄절에 만난 사람들도 보십시오. 특별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한밤중에 만난 목자들, 밤늦게 까지 일하는 중노동자들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기다린 시므온, 안나, 시므온은 80이 넘었고 안나는 100살이 넘은 노인들이었습니다. 요셉,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였습니다. 마리아, 아직도 나이 어린 처녀였습니다. 이들은 당시 세상에 살던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미래에 달라질 사람이 아니라 지금 죄짓고 사는 보통사람입니다. 이 말은 계속 죄를 짓고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짓는 것이 잘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달라지라고 세상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있어야 할 존재로 변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있는 모습대로 사랑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중에 변화시킵니다. 5:8에 하나님의 사랑의 진수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말은 아직입니다. “아직이란 말은 여전히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죄가운데 있고 여전히 죄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데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 롬5:10,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행위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요 그 분의 은혜때문에 사랑한 사랑입니다. 유일하게 세상에서 부모만 우리의 행위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네가 나에게 어떻게 했느냐?”를 따지지 않고 네가 나에게 누구냐?” 묻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잘하면 부모는 감사하겠지만 자식이 못했다고 부모가 자식을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잘하고 못하고에 따라 사랑이 커지거나 작아지지 않습니다. 자식이 잘한다고 사랑이 커지는 것도 아니요 못한다고 사랑이 작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는 자식이 잘해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기 때문에 자식을 사랑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했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고 잘하게 합니다. 월터 트로비쉬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신다. 그러나 우리가 있는 대로 받아들여지면 우리는 그대로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있는 그대로 우리를 받아서 우리가 있어야 할 존재로 바꿔주는 능력입니다.

 

나쁜 남편은 갓 결혼한 아내에게 이것 했어? 저것도 했어? 그것도 못해? 밥은 왜 그 모양이야? ”하고 괴롭힙니다. 그러나 좋은 시아버지는 아이구, 아가야. 밥했어? 고맙다. 오후에는 쉬어라”. 오후에 며느리가 추운 데 빨래했습니다. “아이구, 추운데. 또 일했구나. 저녁에는 쉬어라”. 며느리를 바꾸는 것은 무서운 남편이 아니라 부드러운 시아버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죄많은 세상을 벼락으로 망하게 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세상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이 죄많은 우리를 무던히도 참고 봐주셨기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러나 하나님의 진짜 사랑은 다음에 나타납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사랑은 주는 사랑입니다. “주셨으니”.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시지만 말로만 사랑하는 분이 아닙니다. 사랑은 절대 말로만 안됩니다. 서양 속담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사랑없이 줄 수 있지만 주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본래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느 병원에 두 여성이 성형외과를 찾았습니다. 얼굴이 닮은 것 보니까 어머니와 딸인 듯 했습니다. 딸은 30쯤 되어 보이고 어머니는 중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의사 앞에서 딸은 고개를 숙이고 있고, 어머니가 어렵게 입을 열었습니다. “선생님, 제 딸이 곧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어릴 때 사고로 손을 다쳤습니다. 다른 손가락은 모두 수술이 잘되어서 괜찮은 데 약지 손가락만 없습니다. 결혼하면 예물도 맞추고 반지도 끼워야 하는 데 반지낄 손가락이 없어요. 그래서 선생님, 혹시 제 손가락을 딸에게 줄 수 없을까요? 선생님, 꼭 부탁해요. 제 손가락을 수술해주세요”. 의사는 한참동안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딸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눈물만 흘리고 있었고, 어머니는 의사앞에 애원하듯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의사가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병원에 오기까지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을까? 마음은 또 얼마나 아팟을까?” 그래서 의사가 물었습니다. “병원은 몇 군데나 다니셨습니까?” 어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여기가 일곱 번째예요.” 의사 말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제 다른 병원에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수술하겠습니다.” 어머니와 딸은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수술 날짜를 잡은 후 돌아갔습니다. 둘이 손을 꼭 잡고 병원 문을 나서는 모습을 보고 의사도 눈시울이 뜨거웠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주는 것입니다. 사랑없이 줄 수 있지만 주지 않고는 사랑이 아닙니다. 제가 목회했던 전주 교회에 한 여자 집사의 얼굴이 갈수록 검어집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집사님, 요즘 걱정되는 일이 많아요? 병원에 한번 가보세요”. 그런데 병원에 갔다 오더니 목사님, 큰 일 났어요. 간경화래요. 빨리 수술받으래요. 그런데 1억 가까운 돈이 든다는 데 어떻게 하죠?” 남편은 50대 후반의 한전 직원이었습니다. 며칠 후 두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남편이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직장을 조금 일찍 퇴직하기로 했습니다그래서 제가 걱정을 했더니 목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몇 년 먼저 퇴직한 것 뿐이예요. 괜찮아요합니다. 그리고 퇴직금을 받아 아내의 아내 수술을 했습니다. 그러나 수술했다고 완치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간에 고인 담즙을 빼내고 약을 복용하는 데 많은 치료비가 많이 들었습니다. 어려운 살림에 남편은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끝까지 아내를 치료했습니다. 제가 심방갔더니 아내가 울면서 말합니다. “목사님, 우리 장집사에게, 너무 미안해요”. 옆에 있는 남편도 말합니다. “제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이 사람입니다. 이 사람 잃으면 저는 아무 것도 아니예요”. 그리고 남편도 웁니다. 이들이 치료받은 뒤 교회앞에서 간증했는 데 온 교인이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데 무엇을 못 주겠습니까? 우리 교인 가운데 아버지가 간이 안 좋자 자기 간을 아버지에게 준 아들이 있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 줄 수 있는 데 그것이 아들이라면 어떻습니까? 제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윤재씨, 여기 아들입니다”. 보자기에 쌓인 핏덩어리 아들이 막 울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새끈 새끈 자는 모습이 너무 예쁩니다. 그런데 제가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데 두 사람의 남자가 오더니 말합니다. “이윤재씨, 아들 낳은 것 축하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저희들이 가져가기로 오래전에 예약되었습니다”. “당신들이 누구입니까?” “, 의과대학생들이예요. 이 아이를 연구용으로 쓰려고 합니다. 이리 주세요”. “아니, 지금 무슨 이야기입니까? 연구용이라니. 누가 그런 약속을 했어요?” “누구라니요? 당신 아버지예요. 당신 아버지가 손자가 태어나면 의학발전을 위해 손자를 바친다고 약속했다니까요. 여기 보세요. 여기 증서가 있잖아요?” 어떻습니까? 여러분같은 아들을 주겠습니까? 아버지가 약속했으니 그래 잘 가라하고 핏덩이 아이를 주겠습니까? 주라는 사람이나 달라는 사람이나 주는 사람이나 다 미친 사람 아닙니까? 어떻게 핏덩이 아들을 줍니까? 그나마 연구용으로? 그나마 살라자는 것이 아니라 죽이자는 것 아닙니까? 어떤 정신없는 아버지가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아무 아들이나 준 것이 아닙니다. 독생자입니다. 독생자는 헬라어로 모노게네스라고 합니다. “모노”, “하나”, “게네스”, “생명”, 하나밖에 없는 생명, 여러 아들이 있는 데 그중에 하나 준 것이 아닙니다. 그나마 살리려고 준 것이 아니라 죽이려고 준 것입니다. 모노게네스란 말은 성경에 딱 세 번 쓰였습니다. 모리아산에 바쳐진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그리고 눅7장에서 죽은 과부의 독자가 모노게네스입니다. 딱 하나밖에 없고 그나마 죽는 데 내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모노게네스”, 독생자입니다. 그 아들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는 사랑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세 번째가 중요합니다. 첫 번째, 두 번째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세 번째는 우리가 할 일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독생자까지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가 그 아들과 갖는 관계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믿음입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만 요구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 다른 어떤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헌금 많이 하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 했다면 돈없는 사람은 천국에 못 갈뻔 했습니다. “누구든지 금식하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했다면 한 끼도 못굶는 사람은 지옥으로 갈 뻔 했습니다. “누구든지 구제를 많이 행한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했다면 평생 구제 한 푼 못하고 자신만 위해 산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을 뻔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누구든지 믿는 자는”. 믿기만 하면 됩니다. 믿음은 쉬운 것입니다. 믿음은 믿는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옛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뱀에 물릴 때 장대에 구리뱀을 매고 바라보게 했습니다. 21:9, “뱀에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뱀에 물린 자는 뱀과 싸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약을 바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쳐다 보라”, 쳐다보면 살았습니다. 믿음은 예수님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한 착한 청년이 나쁜 친구를 만나 카드를 배웠습니다. 처음에 재미로 몇 번 하다가 나중에는 카드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제쳐 놓고 카드 놀이에 미쳤습니다. 그러다가 술을 마시게 되고 술마시다가 어느날 사람과 싸우다 사람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얼떨결에 사형언도를 받은 이 청년을 불쌍히 여긴 동네 사람들이 진정서를 냈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좋은 청년인데 어쩌다 잘못돼서 사람을 죽였으니 한번 용서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주지사가 진정서를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주지사는 독실한 크리스쳔이어서 어떻게든 이 청년을 용서하고 싶었습니다.

 

어느날 주지사가 허름한 옷을 입고 감옥으로 면회를 갔습니다. 청년을 뜻밖에 아무도 안만나겠다고 우겼습니다. 간신히 달래서 주지사가 말했습니다. "나는 주지사입니다. 당신의 사면을 법원에 제안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내 제안을 받으세요" 했더니 청년이 당신이 무슨 제안이냐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별수 없이 주지사가 돌아갔는 데 며칠후그 사람이 진짜 주지사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청년을 고집피운 것은 후회하고 용서를 빌었지만 주지사는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청년은 사형집행날 무릎을 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죄를 지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죽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주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셨고 나는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비슷한 영어 단어 둘이 있습니다. condemn, “정죄라는 단어와 convict “믿음이란 단어입니다. 같은 c로 시작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Christ에 대한 입장에 따라 둘의 운명이 갈립니다.

 

Christ

 

condemn, convict

(정죄) (믿음)

나 그리스도

 

condemn은 정죄는 그리스도앞에 나를 보는 것입니다. 내가 주로 과거에 했던 행동에 집중합니다. 과거의 나는 아무리 열심히 살았어도 후회가 남습니다. 과거의 나를 보는 기준은 언제나 입니다. 내가 스스로 이루려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할 때 그 간격만큼 실망합니다. 내가 표준이기 때문에 내가 잘하면 내가 잘나서 그런 줄 알고 우쭐하고 못하면 내가 못나서 그런 줄 알고 실망합니다. 실망이 많아지면 절망이 됩니다. 그리고 절망은 정죄를 낳고 정죄는 죽음을 낳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은 없습니다. “나는 틀렸어. 나는 끝났어”. 표준도 자기가 정하고 평가도 자기가 합니다. 가롯 유다가 그래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convict, 믿음은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내가 얼마나 약하고 부족한지 성경이 말한 바를 믿습니다. 103:14, “저가 우리의 체질을 하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39:1, “하나님이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내가 약하고 부족한 것을 다 아시는 데 어떻게 그 분이 나를 정죄하겠습니까? 정죄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정죄하지 말 것은 우리가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대신 정죄하고 우리를 용서했기 했기 때문입니다.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믿으면 누구도 나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나를 용서하셨습니다. condemn은 나를 보고 정죄하는 것이고, convict는 그리스도를 보고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과거를 보느냐? 현재를 보느냐? 나를 보느냐? 예수님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운명을 달라집니다. 심지어 내가 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내가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오히려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내 약함이 하나님께 나아가게 했다면 약함은 나에게 은혜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필립 얀시가 말했습니다. “상처와 흠집은 은혜가 스며드는 틈이다”.

 

중요한 것은 누구든지입니다. 신약성경에는 누구든지10번 나옵니다. 16:16, “누구든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 3:36, “누구든지 아들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고”, 4:14, “누구든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리라”. 22:17,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오라.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값없이 받으리라“. “누구든지“. 누구든지속에 여러분도 들어갑니까? 믿음이 우리가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과 우리가 만나는 방법입니다.

 

영생을 얻으리라

예수님의 마지막 메시지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입니다. 믿음이 우리가 예수님과 맺는 관계의 방식이라면 영생은 그 결과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면 어떤 축복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셔야 합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영생이 먼저가 아니라 멸망치 않고가 먼저 입니다. 영생을 얻기 전에 먼저 망하지 않는 일이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믿으면 천국 가는 줄 압니다. 맞습니다. 믿으면 천국갑니다. 그러나 천국가기 전에 한 가지가 먼저 있습니다. 멸망이 없습니다. 그래야 천국갑니다. 천국에 가서 멸망받나 안받나를 조사하지 않습니다. 영생은 죽은 뒤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기전에 결정됩니다. 예수믿는 즉시 우리에게는 멸망이 사라집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천국 이야기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분석해 보면 13%가 심판과 지옥에 관한 것입니다. “안믿으면 천국에 못가는 것 뿐 아니라 심판을 받는다“. 이것이 예수님 말씀입니다. 예수의 비유중 1/3은 지옥 이야기 이야기입니다. 16:16, ”믿고 세례를 받은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 이것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믿으면 그 순간 정죄가 사라집니다. 죽은 다음에 사하지는 것이 아니라 죽기 전에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온 순간, 우리에게는 정죄도, 심판도, 지옥도, 멸망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믿는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혹 실수할 수 있습니다. 혹 아플 수 있습니다. 혹 사업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순간,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우리는 천국문에 서는 순간, 구원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천국가기전에 이미 구원이 결정되고 구원받은 자로 하나님앞에 서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 많은 손미영권사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신장이 안 좋아 딸이 이식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 살았습니다. 그런데 작년부터 안 좋아져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뇌종양까지 생겼습니다. 한번 몸이 약해지니까 급속히 나빠졌습니다. 우리는 손권사님이 회복될 것을 믿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남편되시는 고창원장로님, 너무 아내를 사랑하여 온 마음으로 간호했습니다. 아내를 살려 보려고 온 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지난 주 토요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약 2주전, 뜻밖에 손권사님의 목소리가 담긴 노래를 받았습니다. 병상에서 간병인이 조금 좋아진 권사님에게 노래를 한번 불러 보라고 했답니다. 그때 권사님이 부른 노래가 즐거운 나의 집입니다. 권사님은 가사를 기억하지 못하고 곡만 불렀습니다. 이 노래입니다(녹음).

 

권사님은 그때 그 많은 노래중 왜 즐거운 나의 집을 불렀을까? 천국이 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 작은 집 내 집 뿐일세”. 권사님은 비록 몸은 약하고 가사는 다 외우지 못했어도 하늘의 집을 사모했던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가 계신 집, 그는 그 집을 사모했던 것입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그는 육신이 약하여 하나님께 갔지만 그의 영혼은 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승리했습니다. 제가 입관예배드리면서 선포했습니다. “우리에는 죽음은 없습니다. 죽음 이전에 우리는 육신으로 살고 죽음 이후에 우리는 영으로 삽니다. 죽음은 육신의 삶과 영혼의 삶을 이어주는 작은 관문일 뿐 우리는 죽음을 살지 않습니다. 죽음은 두 삶을 이어주는 작은 문지방입니다. 손권사님은 과거에는 육신으로 살고 지금은 영으로 삽니다. 생명은 연속됩니다. 죽음은 없습니다. 있다면 짧은 통로가 있을 뿐입니다. 누구도 통로에 살지 않습니다. 통로를 지나면 또 다른 생명입니다. 믿는 자는 망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문지방을 통해서 사멸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이어지고 생명은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죽음은 본래부터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부활하신 것이 우리도 그를 믿으면 그렇게 됩니다. 이 거룩한 성탄절에 성경 최고의 복된 소식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이 죄많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습니다. 너무 너무 사랑한 나머지의 그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우리와 그분과의 관계는 믿음입니다. 누구든지 믿으면 먼저 망하지 않고 다음 영생을 누립니다. 영원히 망하지 않게 된 여러분을 축하합니다. 우리에게 실수는 있지만 망할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잘못한 일이 있을 수 있지만 최후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이 위대한 복음이 선포된 날, 그 날이 성탄절입니다. 이 성탄절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성탄절(3:16-17) 2015.12.25()

성탄, 가장 좋은 소식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들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부모의 사랑은 자식이 잘한다고 커지는 것도 아니요 못한다고 작아지는 것도 아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서양 속담, “사랑없이 줄 수 있지만 주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Christ

 

condemn, convict

(정죄) (믿음)

나 그리스도

 

103:14, “저가 우리의 체질을 하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39:1, “하나님이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필립 얀시, “상처와 흠집은 은혜가 스며드는 틈이다”.

16:16, “누구든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

3:36, “누구든지 아들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고

4:14, “누구든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리라”.

22:17,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오라.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값없이 받으리라“.

 

영생을 얻으리라

 

영생을 얻기 전에 먼저 망하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

 

16:16, ”믿고 세례를 받은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

 

손미영 권사 노래(녹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