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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3) (눅2:25-34) 2015.12.20(일)희망을 안고 미래를 향해 서라

대림절(3) (2:25-34) 2015.12.20()

 

희망을 안고 미래를 향해 서라

오늘은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림절 넷째 주일입니다. 성탄이 올 때마다 성탄의 의미를생각하게 하는 사건이 떠오릅니다. 몇 년전 칠레 광산에 매몰되었다 살아난 광부들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광부 33명이 지하 700미터 땅속에 매몰되어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69일만에 모두 구조되었는 데 이들을 구조한 방법은 원통형 캡슐이었습니다. 먼저 굴착기로 땅을 파고 수직으로 캠슐을 집어 넣었습니다. 캡슐의 크기는 66센티로 사람 하나가 들어오고 나갈 정도였습니다. 그 캡슐안에는 사람을 구조하는 데 필요한 산소공급기, 통신장비, 조명장치, 안전벨트등이 있었습니다. 결국 캠슐을 통해 광부들이 하나씩 밖으로 나왔는 데 한 명 한명이 캡슐에서 나올 때마다 온 세계가 환호했습니다(사진).

 

저는 이 이야기가 어쩌면 성탄에 오신 예수님 이야기와 닮았는지 깜짝 놀라곤 합니다. , 지금 전 세계가 죄로 인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너무 깊은 곳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살릴 수 없었고 살리는 방법도 몰랐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한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는 방법이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은 땅을 파고 캡슐을 집어 넣듯이 그의 아들을 베들레헴 말구유로 보냈습니다. 그 아들에게는 사람을 살리는 모든 것이 있었습니다. 생명, 진리, 은혜, 영생, 믿음, 그래서 그를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를 구원받고 생명을 얻었을 때 하늘의 천사들은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이때 중요한 것은 땅속에 갇힌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만일 사람들의 구조를 믿지 못하고 낙심한 채 절망에 빠져 있었다면 사람들이 그를 구조하러 갔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칠레광부들을 구조해 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들이 가진 희망이었습니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잊어 버리지 않은 강한 의지, 그 결과 이들은 19살에서 63살까지, 40년이 넘는 나이 차이를 극복해가면서 절망의 죽음희망의 기적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그들은 땅 속에 파묻혀 있는 동안 태어난 딸의 이름을 희망이라고 지었습니다. 이들을 구조하며 작업했던 지휘본부의 이름도 희망 캠프였습니다. 이들이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자 하나님도 그들을 건져 주신 것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음식없이는 40일 밖에 살 수 없고 물이 없이는 8일밖에 살 수 없고 공기없이는 4분밖에 살 수 없지만 희망없이는 단 1초도 살 수 없다“. 살아 있다면 누구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없다면 누구나 죽어 있습니다“. 파피니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인간이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세 가지이다. 먹을 것과 건강과 희망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은 은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여러분도 이 대림절에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희망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을 믿습니까?

 

누구에게나 희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희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시므온이란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 희망이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주전 8세기부터 앗수리아, 바벨론, 페르시야, 그리스, 그러다가 주전 63년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나라도 남의 지배를 받았지만 이스라엘은 수천년에 걸쳐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군사통치와 폭정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헤롯왕은 툭하면 대형 토목공사를 일으켜 벡성들을 강제노역으로 동원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그 힘든 마음을 찬송가 103장이 노래했습니다. “그 포로생활 고달파 메시아 기다립니다”. 이것이 예수님 시대 백성들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시므온에게 또 하나 희망이 없었던 것은 나이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29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예수님을 가슴에 안은 시므온은 이제 내가 메시아를 가슴에 안았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젊은 사람은 하기 힘든 말입니다. 시므온이 나이가 많다는 뜻입니다. 시므온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까? 아마 80은 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살 한 살 나이 먹어가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나이먹은 것이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다 보면 힘도 없고 사는 재미가 없습니다. 연세많으신 분들에게 제가 물었습니다. “가장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건강의 어려움, 경제적인 어려움 말고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밀려난다는 느낌이랍니다. 딱히 누가 밀어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웬지 모르게 밀려나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것은 은퇴후에 더욱 심합니다. 어떤 일을 하다가 일을 그만 두면 정말 내가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 같고 따돌림당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헨리 나우엔은 세 가지로 정리해서 말했습니다. 분리와 고독과 자아상실입니다. 분리는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사람들과 함께 살았고 때로 그 중심에 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먹으면서 서서히 밀려나 그 중심에서 멀어집니다.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고독해집니다. 일이 없고 돈을 못 벌어서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과연 쓸모있는 존재인가? 나는 정말 끝났는가? 자신의 존재 가치와 자존감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자아상실입니다. 미래에 대한 자신이 없어집니다. 미래에 대한 자신이 없어지면 과거에 대한 집착이 점점 강해집니다. 그러면 과거에 집착할수록 죄책감, 불안, 절망, 우울감은 더 커집니다. 그래서 잠못자고 그래서 건강이 나빠집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히브리어에는 늙었다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늙었다는 말로 쓰는 히브리어 자켄익었다. 성숙했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모든 가치관이 나이를 젊으냐 늙으냐로 보는 데 성경만은 익었냐? 덜 익었냐?”로 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적 개념으로 젊은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 아직 미성숙한 것, 덜 익은 것입니다. 늙은 것은 낡고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성숙하고 익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합니다. 19:32, “너는 센 머리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아니라”. 32:7,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왜 어른들에게 물어야 합니까? 옛날, 어느 깊은 어느 산골 마을에 노인을 잡아먹는 나쁜 풍습이 있었답니다. 그로 인해 나이 지긋한 어른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고 마을의 전통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온 주민이 한데 모일 커다란 집을 짓는 데 막상 통나무는 베고 건축을 시작하려 하는 데 나무의 위 아래를 분간할 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무를 잘못 세우면 집이 무너져 큰 사고가 날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한 젊은이가 마을 사람들에게 다시는 노인을 잡아먹지 않겠노라고 맹세하면 자기가 해답을 찾아보겠다고 했습니다. 다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젊은이는 숨겨두었던 할아버지 한 분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노인이 사람들에게 나무의 위아래를 정확히 일러주었고 집은 안전하게 잘 지었습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32:7, “어른들에게 물어보아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리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이가 먹어간다고 탄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간다고 믿으십시오. 나이를 먹어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아 더 온전해지고 지혜로와지고 성숙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믿으세요.

 

신앙의 세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은 것이 오랜 시간이 빚은 노력의 결과입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무려 80번이나 다시 썻다고 합니다. 한번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10년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괴테의 파우스트23살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82세까지 무려 60년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명작은 하루 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을 아십니까? 아브라함은 아들을 얻기 위해 25년을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오랜 기다림을 통해 익고 성숙한 것입니다. 그래서 헨리 나우엔이 나이에 대해 말합니다. “나이가 든다는 건 바퀴가 굴러가는 것과 같다. 좁은 데서 넓은 데로 가고 어두운 데서 더 밝은 데로 가며 약한 데서 강한 데로 가며 받는 데서 주는 데로 간다. 따라서 나이 드는 것을 감추거나 부정할 필요가 없다. 나이가 드는 것은 이를 악물고 감수해야 할 운명이 아니다. 하나님 닮은 성숙의 과정으로 기뻐하며 두 팔 벌려 맞이할 기회다”.

 

오늘의 주인공 시므온을 보십시오. 나이가 80이 넘었지만 성전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희망 때문입니다. 나이가 어릴 때는 자기만 생각합니다. 나이가 젊으면 세상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아지면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날도 시므온은 기도하러 성전에 나왔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2:25-26, “에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게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기도는 희망이고 희망은 곧 기다림입니다. 우리는 기도하기 때문에 희망이 있고 희망이 있기 때문에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희망입니다

그런데 이 시므온이 어디에서 희망을 발견했느냐가 중요합니다. 26절부터 보십시오. 2:26-27,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를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의 이름의 뜻이 중요합니다. 시므온은 듣다, 순종하다. 이해하다의 뜻입니다. 시므온은 나라의 상황도 안 좋고 자기도 나이가 많았지만 희망을 하나님에게서 발견하려고 그 날도 성전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시므온이 들었던 것은 성령의 지시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400년 동안 이스라엘은 아무 선지자도 없었습니다. 400년전에 선지자 말라기가 의의 태양이 오실 것이다. 그가 오시면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여 외양간의 소처럼 뛰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언제 오시는지. 어디로 오시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방식은 성령의 지시를 받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도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매일 성령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성령이란 말이 오늘 말씀에 두 번 나옵니다. 26,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시므온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보리라는 감동을 받았으나 누가 예수님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에 결례받으려고 하루에도 수많은 아이들이 부모의 품에 안겨 성전을 오르내립니다. 그때 아기 예수를 알아보게 한 분이 있었습니다. 성령님입니다. 26, “성령의 지시를 받고”, 27,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나이 많은 안나도 마찬가지입니다. 37, 2:37,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기도외에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기도했더니 성령의 감동을 받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알아 본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은 예수님을 깨닫게 하는 영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식이 세 가지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했습니다. “선지자대신 말하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 다윗, 엘리야, 이사야, 에레미아, 에스겔, 다니엘, 학개, 말라기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통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 사람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성령님을 통해 말씀합니다. 성령을 통해 감동하고 성령을 통해 깨닫게 하고 성령을 통해 계시하시고 성령을 통해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성령은 다른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계시하시는 영입니다.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예수님이 주님이고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분입니다. 예수님과 상관없는 성령은 성경이 말하는 성령이 아닙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은 우리가 끝까지 그리스도를 보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희망을 보게 합니다. 왜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입니까?

 

위로

25, 2:25, “이 사람이 의롭게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인 것은 그가 우리의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세월호 사건으로 죽은 단원고 학생중에 이강현이란 학생이 있습니다. 이 학생의 부모가 제가 아는 안산교회 출석하는 분이라 작년에 위로차 방문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당한 부모에게 무슨 말로 위로할까 처음에는 많이 걱정했습니다. 과연 부모는 힘들어 했습니다. 찬송을 부르고 기도한 후에 설교를 해야 하는 데 무슨 말을 할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죄없이 죽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울기 시작했습니다. 위로할 다른 말이 없어서 예수님도 죄없이 죽었습니다했는 데 그 말을 듣고 슬프게 운 것입니다. 죽은 아들에게 무슨 위로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도 죄없이 죽었습니다“. ”예수님도 이유없이 고난당하셧습니다“. 이것처럼 큰 위로가 어디 있습니까?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이 있습니다.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우리 말로는 세 마디입니다. 영어로는 두 마디입니다. “Jesus wept”. 헬라어로는 한 마디입니다. “에다크뤼센”. 3인칭 단수, 과거, 능동형입니다. “그가 우셨다”. 성경에 한 단어로 된 유일한 귀절입니다. 그런데 이 짧은 귀절이 얼마나 큰 감동을 주는지 모릅니다. 지금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11장에 예수님이 나사로를 사랑했다는 말이 3번이나 나옵니다. 그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 나사로앞에서 예수님이 보이신 모습은 긴 말이 아닙니다. 긴 설교가 아닙니다. 왜 부활을 믿지 않고 울고 있느냐 책망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시니라”. 같이 운 것입니다. 얼마나 슬프게 우셨는지 33절입니다. 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여기서 통분히 여겼다는 말은 헬라어로 엠브리마스타이입니다. 이 말의 본래 뜻은 말이 콧김을 내뿜다입니다. 말이 콧김을 내뿜을 때는 온 몸을 크게 움직인다고 합니다. 이 말은 사람이 울 때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슬픔에 못이겨 온 몸을 쥐어짜 탄식하는 소리로 우는 것을 말합니다. 우는 시늉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한들린 사람처럼 온 몸을 떨면서 우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주께서 몸이 떨릴 정도로 깊은 슬픔에 잠겨 우시사”.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하신 창조의 질서에 따라 나사로의 죽음은 막지 않으면서 그의 죽음은 슬퍼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위로입니다.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질병과 죽음외에는 우리와 똑같이 사셨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울고 삽니다.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우리는 매일 슬픈 일을 당하고 삽니다. 예수님도 슬퍼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주 오해와 핍박과 상처를 안고 삽니다. 예수님도 오해받았고 예수님도 핍박받았고 예수님도 상처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위로입니다.

 

구원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인 이유가 또 있습니다. 2:29-33,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인 이유는 그가 우리의 구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대상은 만민입니다(도표). , 도표를 보십시오. 만민을 크게 둘로 나누면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고, 이스라엘은 압니다. 이들에게 구원은 조금 다릅니다. 이방인에게 구원은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둠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흑암에서 건져내야 합니다. 1:13이 이 구원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재내사 그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건져내는 구원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나오면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골로새서의 표현에의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충만입니다. 1: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안에 거하게 하시고”. 1차 구원은 어둠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고, 2차 구원은 예수님의 ㅂ빛으로 충만케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방인 이스라엘

(초신자) (구원받은 자)

어둠에서 빛으로 영광의 회복

구원 성화

 

예수님

 

표준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인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34-35절입니다. 2:34-35, “이 아이는 이스라엘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해 세움을 입었고”. 조금 어려운 말씀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에게나 거부하는 자에게 모두 표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표준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살고 거절하는 자는 죽고, 예수님이 판단과 운명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입니까? 모든 판단의 표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뱃사람들과 같습니다. 뱃사람들이 배를 탈 때 항상 바라보는 것이 있습니다. 나침반입니다. 나침반은 자기를 띈 작은 쇠조각인데 균형을 잡아줍니다. 이 침이 좌우로 움직이다가 결국 북쪽을 향해 멈춥니다. 뱃사람들은 이 나침반을 목숨과 같이 여깁니다. 그러나 심하게 폭풍이 쳐서 나침반이 필요없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바라보는 것이 있습니다. 별입니다. 북극성입니다. 북극성은 언제나 북쪽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배가 어디에 있든지 북극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샛별이라고 부릅니다. 새벽별이라고도 부릅니다. 22:16,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북극성입니다. 바다를 항해할 때 다른 배를 바라보아야선 안됩니다. 움직이는 배를 바라보면 나도 움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별을 바라보아야 나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모든 문제의 표준이 예수님입니다. 요즘 동성애 문제가 뜨거운 잇슈입니다. 어떻게 볼 것이냐? 설왕설래 말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했고 무엇이라고 말할까를 생각하면 답이 나옵니다. 자녀교육, 인간관계, 새로운 설계와 계획, 갈등을 푸는 법, 장래와 비전, 모든 문제의 표준이 예수님입니다. 그가 흥함과 비방의 표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바라볼 유일한 기준입니다. 그래서 나온 책이 미국의 쉘던이란 사람이 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모든 근거가 예수님에게 있슴을 강조한 책입니다. 취직시험을 앞두고 피곤에 지친 사람이 있습니다. 너무 피곤하여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어떻게 했겠습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간신히 회사에 취직했는 데 까다로운 상관을 만났습니다. 그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어느날 가정에서 사소한 일로 아내와 다투었습니다. 그리고 화가 나서 집을 나갔습니다. ”다시는 집에 들어오나 봐라“. 큰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막상 집을 나갔는 데 갈데가 없습니다. 그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이때 시므온의 심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평생에 걸친 소원을 이루었으니 시므온은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압제당한 민족의 희망, 늙어가는 자신의 마지막 꿈인 아기 예수, 메시아를 가슴에 안았으니 그는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여러분도 예수님을 품에 안고 그 분과 함께 사는 꿈을 꾸시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희망이신 예수님을 가슴에 안는 꿈을 꾸시지 않겠습니까?

 

희망을 안고 미래로 갑시다

마지막에 이렇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그 후 시므온은 어떻게 되었을까?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가슴에 안았다고 해서 나라가 금방 로마로부터 해방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갑자기 젊어질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딱 하나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안고 미래로 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새해를 두 주 앞둔 여러분, 여러분의 미래는 밝고 투명합니까? 여러분의 미래는 성공과 행복으로 가득차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의 미래는 불확실하고 불안할 것입니다. 한번도 살아보지 않았으니 불안한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대신 이렇게 한번 물어 봅시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을 희망으로 안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슴에 콩닥대는 예수님의 심장이 있습니까? 현실은 어렵지만 아기 예수의 환한 미소가 내 가슴에 있다면 미래는 염려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연말에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이 대림절에 예수님을 안고 미래로 나아가게 하소서. 주여, 이 절망의 세상에 희망이신 예수님과 함께 미래를 향해 서게 하옵소서”.

 

1991년 일본의 최대 사과 생산지인 아오모리현에 엄청난 태풍이 몰아쳐 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된 적이 있습니다. 피해가 얼마나 컸던지 수확을 앞둔 사과의 90%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한 해 농사의 90%가 못 쓰게 되었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런데 그중에 한 농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사과의 90%는 떨어졌지만 10%는 그대로 있지 않습니까? 어차피 떨어진 것은 버리고 그래도 안 떨어진 10%의 사과를 팝시다. 이렇게 팝시다. “초속 40미터의 초강력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은 사과, 이 위대한 사과를 팝니다”, 그리고 값을 10배로 매겼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40미터 강품에도 사과가 안 떨어질 수 있나? 그 사과는 도대체 어떤 사과냐? 하며 줄을 섰습니다. 희망의 바겐세일이었습니다. 태풍으로 사과를 이로었지만 이들은 희망을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붙들고 새해로 가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희망, 이 세상에 희망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희망 없는 인간이 있을 뿐입니다. 지옥은 뜨거운 불이 타는 곳이 아니라 희망이 없는 곳입니다. 무엇보다 최고의 희망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가슴에 품으면 미래가 겁나지 않습니다. 그는 위로자요 구원자요 우리 삶의 모든 표준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미래로, 아기 예수와 함께 미래로, 희망을 품고 미래로 향해 섭시다.

 

 

 

 

 

 

 

 

 

 

 

 

 

 

 

 

대림절(3) (2:25-34) 2015.12.20()

 

희망을 안고 미래를 향해 서라

칠레 캡슐(사진)

 

누구에게나 희망이 필요합니다.

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나이먹어 힘든 것 세 가지(헨리 나우엔)

분리

고독

자아상실

 

19:32, “너는 센 머리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아니라”.

32:7,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헨리 나우엔, “나이가 든다는 건 바퀴가 굴러가는 것과 같다. 좁은 데서 넓은 데로 가고 어두운 데서 더 밝은 데로 가며 약한 데서 강한 데로 가며 받는 데서 주는 데로 간다. 따라서 나이 드는 것을 감추거나 부정할 필요가 없다. 나이가 드는 것은 이를 악물고 감수해야 할 운명이 아니다. 하나님 닮은 성숙의 과정으로 기뻐하며 두 팔 벌려 맞이할 기회다”.

 

2:25-26, “에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게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예수님이 희망입니다

2:26-27,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를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37,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2: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왜 에수님이 희망인가?

위로

2:25, “이 사람이 의롭게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구원

2:29-33,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이방인 이스라엘

(초신자) (구원받은 자)

어둠에서 빛으로 영광의 회복

구원 성화

 

예수님

 

표준

2:34-35, “이 아이는 이스라엘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해 세움을 입었고”.

22:16,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쉘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희망을 안고 미래로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