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이윤재목사

여호수아(2) (수1:10-18) 2016.1.17(일) 함께 갑시다

여호수아(2) (1:10-18) 2016.1.17()

함께 갑시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난 주부터 우리는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목표가 정해졌으니 열심히 가면 목적지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가야 잘 가는 것입니까? 10절을 보면 여호수아는 의욕적으로 출발을 하는 백성들에게 사흘뒤에 출발하겠다고 말합니다. 왜 당장 출발하지 않고 사흘뒤입니까?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준비의 실패는 실패의 준비라고 하지 않습니까? 운동을 할 때도 워밍업이 필요합니다. 건물을 지을 때도 위로 올라가기 전에 아래로 깊히 파야 합니다. 높은 건물일수록 기초가 튼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좋은 목수는 대패질하는 시간보다 대팻날을 가는 시간이 더 많다”. 예수님도 3년 공생애를 위해 30년을 준비하시고 3일 죽고 부활하시기 위해 3년을 준비하셨습니다.

 

가나안을 향해 나아갈 때 적어도 두 가지 준비가 필요합니다. 강하고 담대한 믿음과 함께 가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한 해동안 가나안을 향해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나아가겠습니까? 때로 넘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다시 일어나겠습니까? 제가 이스라엘 있을 때 한번은 유다광야에 있는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거기 있는 수도사에게 물었습니다.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됩니까?” 그랬더니 수도사가 뜻밖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넘어지고 일어나고 넘어지고 일어납니다”. 제가 물었던 것은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 무엇을 하며 무엇을 먹고 잠은 어떻게 자느냐 하고 물었는 데 수도사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넘어지고 일어나고, 또 넘어지고 일어납니다”. 그 대답은 제게 영적인 삶은 다만 먹고 자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넘어지고 일어나고 또 넘어져도 또 다시 일어나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한 해동안 가나난을 향해 행진을 할 때 넘어져도 일어나겠습니까? 또 넘어져도 또 일어나겠습니까?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강하고 담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한 가지를 더 준비하셔야 합니다. 함께 가는 마음입니다. 가나안은 혼자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300만이 함께 갔습니다. 작게는 10사람이 한 팀을 이루고 많게는 100, 1,000명이 한 그룹을 이루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도착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인도말고도 백성들이 함께 갔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요단강이 멀리 보이자 여호수아는 12지파중에서 세 지파를 선봉에 세웁니다. 르우벤, , 그리고 므낫세 지파입니다. 이들은 요단간 건너기 전에 이미 땅 분배를 받았습니다. 이들을 선봉에 세운 것은 이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으니 수고도 많이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노블리제 오블리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특권에는 더 많은 의무가 따른다는 뜻입니다. 르우벤, , 므낫세 반 지파는 이미 땅을 분배받았으니 모든 백성들앞에 서서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함께 갈 수 있는가? 함께 가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함께 가야 합니다.

먼저 함께 가기 위해 우리는 가나안 정복의 선봉에 선 르우벤 지파, 갓지파, 므낫세 반 지파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에 도착하기 전이었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요단강인데 어느날 르우벤 비파, 갓 지파, 므낫세 지파가 모세앞에 나아왔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32장입니다. 길게 말했는 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모세님, 우리가 다 목축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금 많은 가축떼를 몰고 가는 데 요단강을 넘어서까지 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지나고 있는 이곳이 목축하기에 참 좋사오니 우리에게 이 땅을 먼저 주세요”. 지금 백성들이 요단강도 건너지 않을 때입니다. 그런데 자기들부터 땅을 달라고 하는 이들의 무리한 요구앞에 모세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한참 생각하다가 조건부로 허락했습니다. “좋다. 너희에게 먼저 땅을 줄테니 이렇게 해라. 요단강을 건널 때 다 같이 건너고 가나안족속과 싸울 때 너희도 함께 싸워라. 그리고 정복이 마치면 그때 이곳에 돌아와 살아라. 그렇게 하겠느냐?” 했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먼저 이들에게 땅을 주었습니다(지도(1)). 이 땅이 이들이 받은 땅입니다. 갈릴리 바다와 요단강, 사해, 이스라엘 경계밖의 땅입니다. 정확하게 지금의 요르단땅입니다.

 

어떻습니까? 결과적으로 땅을 받았지만 이들의 행동이 잘한 것입니까? 아직 요단강도 건너지 않았습니다. 설령 요단강을 건넌다 해도 호전적인 가나안 사람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쉴 틈도 없이 그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들은 가축이 많으니 먼저 땅을 달라? 이스라엘 백성중 목축안하는 백성이 누구입니까? 다 목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기들만 싸우지 않고 먼저 정착하겠다? 말이 됩니까? . 지도를 보십시오(지도(2)).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면 싸워야 할 가나안 족속의 위치들입니다. 위로부터 가나안족속, 히위족속, 여부스 족속, 아말렉속족속들이 자기 땅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들은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 건너 들어오면 목숨걸고 씨우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과 함께 싸워야 할 사람들이 자기들을 못 가겠다. 먼저 땅을 달라“. 이것이 옳은 자세입니까?

 

가나안을 향해 나아갈 때 가장 큰 적은 가나안 족속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안에 있던 이기주의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우리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 우리 지파, 우리 교회, 우리 지역의 집단적 이기주의, 특권의식, 나에게는 권리만 있고 의무는 필요없다는 무책임, 이런 생각이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왜 르우벤, , 므낫세 지파는 이런 생각을 했을까? 몇 가지 잘못된 생각 때문입니다.

 

우선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르우벤지파와 갓지파와 므낫세 반지파은 자기들 눈에 보기 좋은 것을 선택했습니다. 요단강 앞에서 기름진 푸른 벌판을 보자 그만 정신이 돌았습니다. 갑자기 요단강 건너면 자기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 죽을 수도 있고 지금보다 더 나쁜 환경속에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 좋으면 좋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창13장에 나오는 룻과 같은 선택을 했습니다. 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아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아의 동산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 롯의 선택의 기준은 보기에 좋은 땅이었습니다. 물이 있고 풀이 많고 가축이 먹고 살기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망했습니다. 소돔과 소모라가 망할 때 함께 망했습니다. 르우벤, , 므낫세 지파도 어떻게 되었을꺄요? 망했습니다. 역사속에 잊혀진 지파가 되었고 지금도 이스라엘 땅이 아닙니다. 눈에 보기 좋은 것을 택했으나 결과적으로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으로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미래를 보고 선택하지 않고 현재를 보고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에같이 선택했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야곱은 장자권을 택하고 에서는 팟죽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 에서는 망하고 야곱은 승리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어려운 때 무엇을 선택합니까? 어떤 기준으로 선택합니까? 내 눈에 보기에 좋은대로 선택합니까? 하나님 분에 보시에 좋은대로 선택합니까? 좀 손해 봐도 멀리 보고 선택해야 합니다. 내가 알아서 기도하고 결정했는 데 누가 뭐라고 하느냐?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결혼생활과 신앙생활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결혼생활을 남편과 아내가 함께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교인과 교인, 교인과 목회자, 목회자와 교인이 함께 합니다. 혼자 있으면 편하지만 신앙생활은 편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결정하면 빠르지면 잘못 될 수가 있습니다. 함께 가는 교인과 목회자와 상의하십시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만 사람이 된다". 맞습 니다. 신앙생활에는 람보나 007같은 영웅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큰 적은 고립주의입니다. 스탠포드대학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가 말했습니다. “고립주의는 인간 삶에 가장 큰 킬러다. 나로부터 너를 고립시키고 그들로부터 우리를 고립시키는 것보다 더 파괴하는 것은 없다. 우울증, 편집증, 살인, 정신분열증, 성폭행, 자살, 그 밖의 온갖 질병이 고립주의에서 온다”.

 

성경도 말합니다. 4:9-12(현대어),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은 협력하므로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두 사람중 하나가 넘어지면 그를 도와 일으켜 주는 자가 없으므로 그는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추운 방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해진다. 그러나 혼자서 어떻게 따뜻해 질 수 있겠는가? 한 사람으로서는 당해 낼 수 없는 공격도 두 사람이면 능히 막아낼 수 있으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여러분도 평생 신앙생활하면서 고립주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를 원합니까? 혼자 떨어져 편한 신앙생활하기 보다 함께 힘을 합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가겠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때 함께 일하고 함께 고난받고 함께 축복받기를 원합니까? 가나안은 함께 가는 곳입니다.

 

리더를 따라 가야 합니다.

다행히 이들은 여호수아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들에게 그들이 모세와 했던 약속을 상기시켰습니다. 13절입니다. 1:13, “여호아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아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그랬더니 그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16절입니다. 1:16,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그들은 과거에 모세에게 순종했던 것 같이 지금 여호수아에게 순종하겠다고 약속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1:18,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 만일 이들이 땅만 차지하고 요단강을 함께 건너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전력상 가나안에 크게 뒤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들을 설득하고 권면해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도록 한 사람은 여호수아였습니다. 리더의 역할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저는 평소에 리더의 역할을 세 가지로 봅니다. 보여주고 가르치고 맡기는 것입니다(도표). 이것을 도표로 보면 이렇습니다. 리더는 첫째 자기의 삶의 보여주고, 둘째 원리를 가르치고, 셋째 일을 훈련하고 맡겨주는 것입니다.

 

리더의 세 가지 요소

삶을 보여주고 (모범)

원리를 가르치고 (말씀)

일을 맡기고 (위임)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말을 잘하고 실력이 있어도 행동이 따라가지 않은 리더를 사람들은 따라가지 않습니다. 훌륭한 리더쉽은 삶으로 보여주는 리더쉽입니다. 교회 목회자로서 늘 제가 가슴에 품는 사람이 있습니다. 17세기 영국에 살았던 리쳐드 백스터라는 청교도 목회자입니다(사진). 그는 1641년부터 1660년까지 영국 키더민스터에서 목회했는 데 제가 몇 년 전에 갔었습니다. 그때 그 마을에는 약 2천명 정도가 살았는 데 그곳에 가면 교회앞에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리쳐드 백스터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이곳에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가정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이곳을 떠날 때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가정은 거의 없었다.” 모두 다 믿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궁금했습니다.

 

그 비밀을 그가 쓴 <참 목자상>(사진)을 통해 찾았습니다. 이 책에서 백스터는 목회자의 생명은 말씀대로 사는 삶의 실천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회자에게 정확하게 설교하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는 것보다 설교한 대로 정확하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두 시간 동안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연구하느라 한 주를 보내도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주 동안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단 한 시간도 생각하지 않은 목회자는 목회자가 아니다. 설교에서 한 마디라도 잘못된 단어는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자신의 삶속에 나타나는 잘못된 말이나 행동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행동하는 목회자는 큰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이 목회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겠지만 목회자이게 때문에 당연히 구원받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일을 없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지도자로서 목회자의 최고 중요한 덕목은 모범을 보이는 삶입니다. 그래서 제가 부족하지만 실천하려고 애쓰는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철저한 자기 관리입니다. 저는 한 주간 동안 교회 사무실에서 있으려고 노력합니다. 불필요한 외출이나 활동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작년에 맡았던 대외적인 직분도 다 내려 놓았습니다. 노회, 총회에서 어떤 감투를 맡지 않았습니다. 여성 교인이나 여성 목회자들과 개인적으로 심방하지 않습니다. 교인중 여성이 제 방에 들어와 이야기할 때는 문을 열어 놓도록 합니다. 물질은 제가 조심하는 것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11년동안 한푼도 월급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제 월급은 올리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부교역자의 월급은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제 생일이라고 교회에서 크게 잔치한 적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집에서 조촐하게 식사하면 그만입니다. 교회 재정에 관여한 적도 없습니다. 연말에 필요한 예산을 편성할 때 목회적으로 방향을 잡아주는 것을 제외하고 모든 재정관리는 재정국과 장로님들이 합니다. 판공비를 달라고 말한 적도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습니다. 필요하면 제가 내면 됩니다.

 

저는 제 실수를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가 하나님이 아닌 데 실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수보다 더 나쁜 것은 실수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저는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를 많이 하려고 합니다. 제가 잘한 것을 말하기보다 제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이 저에게는 더 편합니다. 무엇보다 기도하려고 애씁니다. 새벽은 할 수 있으면 빠지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기도할 때는 교인중 급한 사람부터 기도하고 시간이 나는 대로 장로님, 목회자, 목자, 교사를 위해 기도하고 그래도 시간이 나면 교구를 위해 기도합니다. 새해부터는 더 구체적으로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 오늘 여러분에게 중보기도 제목을 요청했습니다. 여러분이 목장과 이름을 써주시면 제가 적어도 일주일 이상씩 기도하겠습니다. 꼭 필요한 기도는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하겠습니다. 그래도 다 모범이 안된 것은 여러분이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리더의 두 번째는 원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리더는 삶으로 말할 뿐만 아니라 성경으로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충분한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원리를 말함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성경의 진리와 교훈을 드러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양해를 구할 것은 제가 성경의 원리를 드러낼 때 교인 누구도 두려워 하지 않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저는 그것을 대신 말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좋거나 싫거나 받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설교자의 말의 인간적으로 듣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도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면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상처받는 사람도 있겠지만 상처도 잘 받으면 별이 됩니다.

 

리더는 하나님의 일을 맡기는 사람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중요한 원리는 하나님의 일은 그 일에 맞는 사람을 맡기고 한번 맡기면 믿어준다는 것입니다. 가령 목자는 목자로서 훈련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번 목자를 맡으면 양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가정에 심방간다 할 때 반드시 동행할 사람이 목자입니다. 담임목사보다 우선적인 사람이 목자입니다. 교사는 교사로서 충분히 훈련해야 합니다. 그러나 학생을 맡으면 모든 책임과 권한이 교사에게 있습니다. 훈련할 때는 마땅히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공짜는 없습니다. 공짜로는 좋은 훈련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등록비를 내고 시간을 내서 성실하게 훈련받아야 합니다. 목자, 교사, 피택자, 새가족, 누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일단 훈련받고 일을 맡으면 위임해야 합니다.

 

이 원리는 담임목사인 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삶을 보여주고, 성경적 원리를 가르치고, 일을 맡기는 이 일은 모든 교회 리더들이 함께 해야 합니다. 교회학교 팀장, 교사들에게 삶을 보여주고, 성경적 원리를 가르치고, 가르치는 일을 맡기고 잘하게 합니다. 찬양대 대장, 대원들에게 삶을 보여주고, 성경적 원리를 따르게 하고, 대원들에게 찬양을 맡기고 잘하게 합니다. 사역국장을 맡은 장로님들, 교인들에게 삶을 보여주고, 성경적 원리를 가르치고,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고 잘하게 합니다. 이것이 리더입니다. 교인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하는 한 그들에게 순종하십시오. 리더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교인은 리더를 따르고,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오늘 르우벤, , 므낫세 지파가 여호수아에게 순종한 것을 다시 보십시오. 16, 1:16,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18, 1:18,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 가나안은 순종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공감의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가기 위해 배워야 할 것이 공감의 기술입니다.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이이 점에서 모범을 보이고 있습니다. 리더인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이야기하는 과정은 한번도 강압적이거나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12절입니다. 1:12, “여호수아가 또 르우벤지파와 갓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제나 문제는 상황이 아닙니다. 상황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이 세 지파 사람들이 지극히 개인주의적이며 고립주의적인 태도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있었지만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부드럽게 대화를 시도합니다. 그 대화는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경청입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의 말을 주의깊게 잘 들었습니다. “말도 안된 이야기 하지도 말라고 욱박지르지 않았습니다. 12절에서 여호수아가 이들에게 말했다고 했는 데 이 말은 설득하다. 호소하다. 나직하게 말하다의 뜻입니다. 사람이 사람과 소통하는 방식이 여러가지입니다. 전문가의 연구에 의하면 글로 소통하는 방식 15%, 말로 소통하는 것 33%, 잘 들어줘서 소통하는 벙법이 63%입니다. 성공적인 소통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것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듣는 것입니다. 귀를 기울이는 것과 말을 듣는 것은 다릅니다. 귀로 듣는 것이 hearing이라면 마음으로 듣는 것이 listening입니다. 소리를 듣는 것이 hearing이라면 마음을 듣는 것이 listening입니다.

 

다음 공감입니다. 공감은 어떤 상황이나 사람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 사람이 느끼는 느낌과 같은 느낌을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역지사지,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공감은 동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감은 느낌이 같은 것이고 동감은 생각이 같은 것입니다. 어떻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생각이 갖겠습니까? 생각이 달라도 느낌만 같으면 소통이 됩니다.

 

저는 교회는 예순님의 몸이기 때문에 갈등이나 다툼은 없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갈등과 다툼은 현실적으로 일어납니다. 갈등이 현실적으로 일어난다면 우리는 갈등을 치유하고 해결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다튼 이야기가 나옵니다. 선교하다 도망간 마가 때문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선교하다 도망갈 수 있느냐 하고 바나바는 잘목했지만 한번 더 기회를 줘 보자 했습니다. 싸웠다고 해서 충격을 받아서는 안 된다. 15:39둘이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했는 데 여기서 심히 다투었다는 말은 헬라어로 파로쿠스모스입니다. 이 말은 칼날처럼 날카롭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서로 다퉜으면 칼날처럼 다투었겠습니까? 서로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노려보면서 소리질렀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천사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사건을 보면서 갈등을 해결하는 네 가지 원리를 배웠습니다. 첫째, 갈등이 있을 때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도록 노력하라. 둘째는 대화를 통해 지혜로운 타협점을 찾으라. 셋째, 갈등이 계속될 때 도망치기보다는 부딪혀서 해결하라. 넷째, 해결될 수 없다면 불쾌한 마음 없이 동의하지 않기로 은혜롭게 결정하라.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로 인해 평생 원수같이 지내지는 않았습니다. 서로 미워하거나 폄론하거나 상처를 주고 받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모든 일에 같은 생각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동감할 수 없으나 언제나 공감할 수 있습니다. 공감은 동의가 아닙니다. 생각이 다르지만 불편하지 않게 지내는 법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교인간의 갈등이 생기면 일단 말부터 안하고 봅니다. 말로는 기도한다고 하지만 갈등은 오랫동안 속에 남아 있습니다. 기도만 하지 말고 마음을 열고 대화해야 합니다. 그래도 안되면 다른 생각은 그대로 두고 같은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이것이 공감입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다퉜다면 우리는 오죽하겠습니까? 베드로와 바울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는 오죽하겠습니까? 교회는 100이면 100사람이 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2016, 하나님은 우리를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 여호수아 군대로 불렀습니다. 함께 갑시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속도와 호흡으로 함께 나아갑시다. 함께 손잡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호수아(2) (1:10-18) 2016.1.17()

함께 갑시다

좋은 목수는 대패질하는 시간보다 대팻날을 가는 시간이 더 많다”.

 

넘어지고 일어나고, 또 넘어지고 일어납니다”.

 

함께 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지도(1)).

 

가나안 원주인(지도(2)).

 

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아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아의 동산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

 

4:9-12(현대어),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은 협력하므로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두 사람중 하나가 넘어지면 그를 도와 일으켜 주는 자가 없으므로 그는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추운 방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해진다. 그러나 혼자서 어떻게 따뜻해 질 수 있겠는가? 한 사람으로서는 당해 낼 수 없는 공격도 두 사람이면 능히 막아낼 수 있으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리더를 따라 가야 합니다.

1:13, “여호아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아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1:16,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1:18,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

 

리더의 세 가지 요소

삶을 보여주고 (모범)

원리를 가르치고 (말씀)

일을 맡기고 (위임)

 

리쳐드 백스터(사진).

 

<참 목자상>(사진)

 

1:16,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1:18,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

 

공감의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1:12, “여호수아가 또 르우벤지파와 갓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말하여 이르되“.

 

경청

 

공감

 

공감은 동감이 아니다.

 

갈등 해결의 네 가지 원리

(1) 갈등이 있을 때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도록 노력하라.

(2) 대화를 통해 지혜로운 타협점을 찾으라.

(3) 갈등이 계속될 때 도망치기보다는 부딪혀서 해결하라.

(4) 해결될 수 없다면 불쾌한 마음 없이 동의하지 않기로 은혜롭게 결정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