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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신년주일(딤후2:1-6) 2016.1.3(일) 은혜안에서 강하라

신년주일(딤후2:1-6) 2016.1.3()

은혜안에서 강하라

새 해가 밝았습니다. 우리 서로 인사나누겠습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행복하세요”. “축복받으세요”. 지난 12, 제가 새 해를 앞두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새해 교인들에게 제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한 해동안 우리 교인들이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 말씀은 무엇입니까?” 했더니 제게 감동된 말씀이 왔습니다. “강하라”. 그래서 제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도 이상하다. 왜 하필 강하라인가? 부드러운 것도 많은데그래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다른 것 없습니까? 조금 더 부드러운 것을 주세요””. 했더니 하나님이 또 말씀하셨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그리고 오늘 말씀 딤후2:1-6절 말씀을 읽었더니 거기 말씀이 나옵니다. 딤후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은혜속에서 강하고“.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쓴 마지막 성경입니다. 바울은 주후 64년경, 로마의 차디찬 지하 감옥에서 순교의 날을 기다리며 이 편지를 썻습니다. 그가 편지를 보낸 사람은 디모데였습니다. 디모데는 말하자면 바울이 복음안에서 낳은 영적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부를 때마다 내 아들아하고 불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바울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무엇입니까?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은혜속에서 강하고”. “강하라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목회자였습니다. 에배소 교회를 목회하던 목회자였습니다. 목회자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참 많았을 것입니다. “교회를 부흥시켜라. 부지런해라. 성실해라. 전도해라. 기도해라. 설교 잘해라”. 그러나 바울은 그 많은 말중에서 강하라고 말합니다. 다같이 강하라”. 왜 강하라고 말했을까요?

 

강하라

새해는 과연 우리가 강해야 살아야만 할 상황입니다. 새해를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올 한 해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한 해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총선을 앞두고 정치는 시끄러워지고 생활은 더 어려워져 직장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간신히 직장을 얻은 사람도 직장을 지키기 위해 목숨걸고 일해야 합니다. 어떤 통계를 보니까 우리 나라 모든 직장인의 35%가 야근을 한답니다. 하루 2-3시간이 28.5%로 가장 많고 3-4시간이 27.4%, 심지어 4-5시간도 13.7%나 됩니다. 왜 야근하냐고 묻는다면 답은 뻔합니다. 낮에만 일해가지고 먹고 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경제란은 우리 사회의 고령화로 인해 더욱 촉진될 것입니다. 2018년이 되면 우리 나라 65세 이상의 고령자수가 14%가 됩니다. 그래서 고령사회로 진입합니다. 그렇게 되면 생산성을 떨어지고 노인빈곤층이 생깁니다. 노인의 약 반절정도가 빈곤층입니다. 먹고 살기 어려우니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마음도 행복하지 않으니 질병도 증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 암발병률이 1995년 이래 4배나 증가했답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딱 한 가지입니다. 강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강해져야 할 또 하나 이유는 믿음때문입니다. 참으로 이 시대는 적당한 믿음을 가지고 살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무신론자의 비율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 나라가 종교인 50%, 비 종교인 50% 였는 데 이제는 비종교인의 비율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동성애가 교회안에도 들어와 동성애 커플이 생기고 있습니다. 저출산으로 전국 교회의 60% 이상이 교회학교가 사라졌습니다. 농어촌교회는 거의 100% 교회학교가 없고 도시도 작은 교회는 교회학교가 없습니다. 교회 잘 나오던 신자가 어느날 갑자기 가나안 신자이 됩니다. “가나안을 거꾸로 하면 안나가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 신자중 약 200만 정도는 다른 종교로 개종했고 100만정도는 가나안 신자입니다. 가나안 신자는 교회에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잘 보이지 않은 신자입니다. 그 가나안 신자중 1/4이 직분을 받은 사람들이며 그들중1/4은 지금도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안 나옵니다. 이들을 교회밖으로 끌어내는 요인은 자유주의, 쾌락주의, 향락문화, 편하게 살자, 무신론, 바쁜 경제활동, 교회에 대한 불만, 이런 것들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강하라”. “강하고 담대하라“.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새해에는 조금 더 강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스라엘에 있으면서 광야를 여행하는 데 유난히도 눈에 띄는 식물이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가시나무였습니다. 얼마나 가시나무가 많은지 종류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형형색색의 이름 없는 가시나무가 광야에 수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가시나무는 여름에 말라 비틀어진 채 가시만 삐쭉 솟은 보기에는 험상궂은 나무입니다. 보기만 해도 무섭습니다. 그 많은 가시나무들을 보면서 물었습니다. “왜 광야에는 가시나무가 많은가?” 그러다가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아하, 척박한 땅이니까 가시나무구나. 가시나무로 밖에 살 수 없어서 가시나무구나. 광야같은 세상에 살려면 가시나무같이 살아야 한다”. 그때 크게 은혜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광야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가시나무처럼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가시나무처럼 물도 없어도 이겨내고 가시나무처럼 아무도 돌보지 않아도 스스로 살아가야 합니다. 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법궤도, 성막도 가시나무로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조각목이 가시나무입니다. 광야에서 강하게 자란 가시나무가 결국 성전의 대들보가 되고 성막, 떡상, 번제단의 재료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새 해에 그렇게 살아야 하지 얺겠습니까? 강해져야 합니다.

 

은혜안에서 강하라

그런데 바울이 강하라고 말할 때 그냥 강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은혜안에서 강하라고 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딤후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은혜속에서 강하고“. 왜 바울은 그냥 강하라고 하지 않고 은혜안에서 강하라고 했을까요? 바울이 은혜안에 강하라고 말하면서 말한 모델이 셋입니다. 3-4절에 군인, 5절에 선수, 6절에 농부입니다. 이 세 모델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위에 주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군인에게는 상관이 있고 선수에게는 코치가 있고 농부에게는 지주가 있습니다. 3절 볼까요? 딤후2: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여러분, 군인이 누구입니까? 군인은 무엇보다 명령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위에는 상관이 있고 밑에는 부하가 있습니다. 군인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상명하복의 질서안에 있습니다. 위로부터는 끊임없이 명령을 받고 그 명령을 계속 수행해야 합니다. 군인에게는 아니요가 없고 만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끔 오해하는 것중의 하나는 복종은 수치스러운 일이며 자존심상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종이 자유가 아니듯이 굴종은 복종이 아닙니다. 굴종은 마지 못해 무릎꿇는 것이고 복종은 동의해서 무릎꿇는 것입니다. 굴종은 힘이 없어 순종하는 것이고 복종은 스스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일제의 칼날앞에 어쩔 수 없이 신사참배한 것은 굴종이고 주기철 목사님이 4번이나 감옥에 갇혀 순교한 것은 복종입니다. 굴종이냐 복종이냐의 차이는 내가 내 의지로 동의하느냐 동의하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굴종이냐 복종이냐의 차이는 힘이 없어 하느냐 자발적으로 하느냐의 차이입니다. 복종의 출발은 은혜입니다. 내 위에 있는 상관을 믿고 그가 나를 위해 좋은 결정을 내린다고 믿기 때문에 복종할 수 있습니다.

 

오래전에 강동만이란 장사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사냥을 좋아해서 시간만 나면 사냥하는 데 한번은 눈에 펑펑 쏟아지는 날, 사냥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한참 가다보니 하얀 눈길에 동물 자국이 보이는 데 오랜 사냥 경험으로 그것은 호랑이 발자국임을 직감했습니다. 그 순간 같이 가던 두 마리 사냥개가 소리를 지르며 쏜살같이 앞으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호랑이가 앞에 있는 데 사냥개가 달려갔으니 사냥개들은 호랑이에게 큰 일을 당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정신을 차린 강동만씨가 총을 장전하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고개를 넘어 보니언덕위에 나무 한 그루가 있는 데 밑에서는 사냥개가 열심히 짖고 호랑이는 무서워서 나무위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보통은 호랑이가 으르렁거리고 사냥개가 나무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거꾸로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한 심리학자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사냥개 뒤에는 주인이 있다. 주인은 총을 가졌다. 세상에 어떤 짐승도 주인이 가진 총앞에는 힘이 없다. 내 뒤에 주인이 있으니 나는 염려가 없다. 그러니 할테면 해보자“. 그래서 사냥개가 호랑이를 나무위로 몰았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언제 강해집니까? “은혜안에서 강하고”. 은혜는 무엇입니까?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뒤에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3절입니다. 딤후2: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 그리스도 예수님이 내 뒤에 있습니다. 무엇을 염려합니까? 나 혼자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뒤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분입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권세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 뒤에는 super power가 계십니다. 그러니 할테면 해보자. 붙을테면 붙어보자“.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를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삼손이 있습니다. 삼손은 용사였습니다. 그의 힘의 비밀은 그의 머리카락에 있었습니다. 머리가 자라면 힘이 생기고 머리가 없으면 힘이 사라졌습니다. 그 비밀을 어느날 드릴라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엄청난 파멸이 닥쳐왔습니다. 머리가 잘리자 삼손은 눈이 뽑혔고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삼손이 그때 했어야 하는 것은 머리를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머리카락을 의지했지만 머리카락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그런가 하면 다윗은 물매돌로 골리앗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의지했던 것은 물매돌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엘라 골짜기에 가면 물매돌이 지천으로 깔렸습니다. 다윗 이후에 똑같은 물매돌로 힘센 군대를 이겼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다윗이 의지했던 것은 물매돌이 아니라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싸움의 원리는 간단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싸우면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싸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35:1,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크게 세 가지 싸움이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나를 위하여 싸우는 싸움이 있습니다. 이 싸움은 힘든 싸움입니다. 대부분 지고 혹시 이겨도 결국 지는 싸움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싸우는 싸움입니다. 다윗과 여호수아가 그렇게 싸웠습니다. 결국은 이기지만 내가 싸우기 때문에 힘이 많이 듭니다. 제일 좋은 싸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 대신 싸우시는 싸움입니다. 모세가 홍해바다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그렇게 싸우셨습니다. 14:14, “여호아께서 너희를 위해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 여기서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라틴어로 바가테입니다. 이 말은 휴가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싸울테니 너희는 휴가가라는 것입니다. 바가테에서 영어 vacation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내 대신 싸우면 우리는 휴가 가 있어도 언제나 이깁니다. 여리고 전투에서도 이스라엘백성이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대신 싸우셨습니다. 앗시리아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하고 하나님이 대신 싸우셨습니다. 그 전쟁에 패한 후 앗수르 제국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저는 정말 새 해에 교우 여러분을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 교인들에게 더 큰 은혜를 주옵소서. 비상시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은혜입니다. 주여, 더 큰 은혜를 주시사 우리로 더 큰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소설가 이철환씨가 쓴 <연탄길>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소설에 감동적인 이야기가 하나 나옵니다. 이철환씨는 어린 시절, 매우 가난한 집에 태어났답니다. 조그만 단칸방에 다섯 식구가 살았답니다. 아버지는 가족의 가난에 대한 죄책감으로 몹시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어린 자식들이 공부방이 없다고 불평할 때, 다 떨어진 신발 때문에 창피하다고 울먹일 때, 아버지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소주 한 병을 사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곰팡이 핀 벽을 향해 말없이 술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여름 한 밤중에 폭우가 쏟아져 지붕 여기 저기가 새서 방에 빗방울이 떨어졌습니다. 어머니는세숫대야와 양둥이를 가지고 들어와 빗물이 떨어지는 여기저기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안 보였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비가 쏟아지고 방안에 비가 새는 데 아버지는 어디 갔는지 어린 자식들은 아버지를 원망했습니다. 그래서 엄마와 함께 형제들이 아버지를 찾으러 나갔는 데 도저히 아버지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저기 있다해서 보니까 아버지가 지붕에 앉아 있었습니다(그림). 천둥 치고 번개치고 비가 쏟아지는 데 아버지는 아픈 팔로 빗물이 새는 지붕을 막으며 온 몸으로 우산을 받치고 있었습니다. 작가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비가 그치고 새벽이 올 때까지 천둥 치는 지붕 위에 앉아, 식구들의 가난을 힘겹게 받쳐 들고 있었다”. 그가 받친 것은 지붕이 아니라 식구들의 가난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뒤 그가 하나님을 믿고 지금은 높은 뜻 정의교회 집사인데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답니다. “그렇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집 지붕에서 우산을 들고 계신다. 그는 우리의 가난을, 우리의 아픔을, 우리의 상처를 아신다. 그는 지금도 우리위에서 우산을 붙잡고 계신다”. 여러분은 강하라라는 말의 히브리어 하자크굳게 붙잡아 매다, 꽉 붙잡다는 뜻인 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연약할 때 하자크”,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 주시는 분이요, 우리가 아플 때 하자크”, 우리의 몸을 븥잡아 주시는 분임을 믿습니까?

 

하나님도 우리를 하자크”, 붙잡아주시니 우리도 하나님을 하자크”, 붙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안에서 강하다는 뜻입니다. 4:8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하나님도 우리를 가까이 합니다. 은혜안에 강하십시오. 모든 강함의 소스는 은혜입니다.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에 가까이 가라. 그러면 세상의 모든 큰 것이 작게 보일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강해서 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님이 강하시니 우리가 강한 것입니다. 새해에는 더 큰 은혜를 간구합시다. 더 큰 은혜는 더 큰 믿음을 낳고 더 큰 믿음은 더 큰 승리를 낳습니다.

 

은혜는 훈련으로 갑니다.

그러면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강해진다면 우리는 더 할 일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2천년 교회역사는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행동간에는 두 가지 다른 생각이 있어 왔습니다. (도표) 먼저 정적주의입니다. 정적주의는 나는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신다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은 신자의 구원과정에서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할을 강조합니다. 그런 책 제목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어요“. 이 제목이 곧 정적주의의 특징을 보여 줍니다. 신자가 할 일은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하시는 일에 순종하는 것 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참 좋은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와 다른 주장이 경건주의입니다. 경건주의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노력과 책임을 강조합니다(도표). , 도표를 보시죠. 이 두 생각이 나름대로 다 옳은 데 자주 충돌합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어요하면 인간은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되고 못된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런데 나도 할 일이 있어요하면 인간의 자발적인 행동을 강조한 것은 좋은 데 인간의 행동이 기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군형이 필요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은혜에서 출발합니다. 다음 그러나 은혜와 훈련은 둘이 아니다. 함께 간다. 그래서 나는 훈련으로 은혜를 체험하겠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정적주의(quitism): 하나님이 다 하신다(은혜)

은혜는 훈련으로, 훈련은 은혜로

경건주의 (pietism): 나도 할 일이 있다(훈련)

 

이것을 성경으로 보면 명확합니다. 2: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했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빌2:12에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루라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에도 받는 구원이 있고 이루는 구원이 있습니다. 은혜도 둘입니다. 거저 받는 은혜도 있고 훈련으로 받는 은혜도 있습니다. 이것을 종합해서 리쳐드 포스터가 말했습니다. “은혜는 훈련으로, 훈련은 은혜로”.

 

, 그러면 은혜안에서 강하라했으니 먼저 은혜가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 강해질 수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약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약한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약한 내가 강한 하나님께 붙어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항상 약한 상태로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상한 갈대가 되어야 합니까? 상한 갈대로 어떻게 큰 집을 짓겠어요? 하나님은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불이 항상 꺼져 있어야 합니까? 꺼져가는 등불로 어떻게 세상을 비추겠습니까? 우리는 약하지만 약한 상태로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예로 든 세 가지 중에서 나머지 둘이 무엇입니까? 선수와 농부입니다. 5절 보시오. 딤후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라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좋은 선수가 그냥 됩니까? 김연아를 보세요. 김연아는 다섯 살 때 스케이트화를 처음 신었다고 합니다. 본격적으로 피겨를 시작한 것은 1996년 여섯 살때였다고 합니다. 언니와 같이 등록했는 데 언니는 포기하고 연아만 남았습니다. 그때부터 20년간 아침 10시에서 새벽 2시까지 쉬지 않고 연습을 계속했습니다. 코치가 인터뷰 한 것을 보면 보통 선수들은 자신감이 생기면 연습을 그만 하는 데 김연아는 악버리같이 연습했답니다. 트리플 악셀에서 실패하면 열 번을 더 반복했답니다. 김연아의 재능은 타고난 것이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다 하셨지만, 하나님이 김연아의 훈련을 통하여 하셨습니다. 그냥 받은 은혜가 아니라 훈련을 통해 받은 은혜입니다. 김연아 선수의 발 좀 보세요(사진1). 그냥 된 발입니까? 그의 자전 엣세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나는 성공한 스포츠 스타가 아니라 끊임없이 성장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꿈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훌륭한 선수, 노력하는 인간 김연아로 기억되고 싶다.". 결국 김연아는 꿈을 이루었습니다. 훈련으로 받은 은혜 때문입니다.

 

운동이 이렇다면 농사는 어떻습니까? 6절입니다. 딤후2:6,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즘 농촌에 들어가서 농사짓겠다는 귀농자들이 많습니다. 15년 전에 비해 그 수가 40배 가량 늘었습니다. 문제는 아무 준비없이 들어가 실패한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t.v에 나오는 아름다운 전원풍경을 보거나 남들이 수입이 좋다고 하니까 막연히 들어가는 데 성공률은 실제 10%밖에 되지 않습니다. 무려 90%가 실패합니다. 왜 그렇게 실패할까요? 훈련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정착 자금도 필요하고 자신의 적성도 잘 알아야 하고 농사의 기술도 배워야 하는 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귀촌한 뒤에도 끊임없이 배우고 훈련해야 하는 데 노력을 안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새해 승리하기 위해 어떤 훈련이 필요할까요? 무엇보다 기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쓴 서신중에서 기도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오는 성경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에배소서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 디모데가 이 교회를 목회했습니다. 로마서는 전체 433구절들 가운데 56개 구절이 기도에 관한 구절입니다. 1/8입니다. 에베소서는 155구절중 31절입니다. 1/4입니다. 로마서는 8마디중 한 마디가 기도라면 에배소서는 네 마디중 하나가 기도입니다. 왜 바울은 에배소서에서 집중적으로 기도를 많이 강조했을까요? 에배소에서는 기도해야 살기 때문입니다.

 

1세기, 에베소는 인구 25만의 도시로 로마제국 내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에는 아테미라는 여신을 숭배하는 종교가 있었는 데 이 도시는 아데미의 영향으로 마술과 귀신들의 역사가 아주 강했습니다. 바울도 거기서 복음전하다가 붙잡혀 곤욕을 치르다 쫓겨났습니다. 3년동안의 사역을 뒤로 하고 예루살렘으로 오면서 행23:29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모아 놓고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교회안에 들어와 어그러진 말을 하며 교회를 어지럽히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엡6:10절 이하에서 말한 것이 전신갑주입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때 바울이 했던 말이 이것입니다. 6:10, “끝으로 너희가 주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 지고”. 다같이 강건해 지고”. 왜 강건해져야 합니까? 에배소이기 때문에 더 강건해져야 합니다. 아데미 귀신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데서는 그냥 기도하라했습니다. 그런데 에배소서에서는 강건해 지라. 대적하라. 믿음에 서라라고 말합니다. 에배소가 그렇게 강팍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새해 우리가 사는 상황은 매우 강팍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고 경제적으로 어렵고, 신앙적으로 힘든 시대가 될 것입니다. 마치 에배소처럼 될 것입니다.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우리를 바꾸면 됩니다. “강하라. 은혜안에서 강하라. 너 자신을 말씀으로 훈련하라. 기도와 간구로 항상 깨어 있으라. 마귀를 대적하라. 믿음으로 굳게 서라. 내가 너와 함께 영원히 함께 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한 해동안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신년주일(딤후2:1-6) 2016.1.3()

은혜안에서 강하라

딤후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은혜속에서 강하고“.

 

강하라

 

은혜안에서 강하라

딤후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은혜속에서 강하고“.

딤후2: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딤후2: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35:1,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세 가지 싸움

(1) 내가 나를 위하여 싸우는 싸움

(2)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싸우는 싸움

(3) 하나님이 나 대신 싸우시는 싸움

 

14:14, “여호아께서 너희를 위해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

 

아버지가 지붕에 앉아 있는 그린(그림).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 “하나님에 가까이 가라. 그러면 세상의 모든 큰 것이 작게 보일 것이다”.

 

은혜는 훈련으로 갑니다.

 

 

정적주의(quitism): 하나님이 다 하신다(은혜)

은혜는 훈련으로, 훈련은 은혜로

경건주의 (pietism): 나도 할 일이 있다(훈련)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2:12,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루라

딤후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라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김연아 선수의 발(사진).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나는 성공한 스포츠 스타가 아니라 끊임없이 성장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꿈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훌륭한 선수, 노력하는 인간 김연아로 기억되고 싶다."(김연아).

 

딤후2:6,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6:10, “끝으로 너희가 주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 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