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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마태복음16:21-28/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마태복음16:21-28/

 

어제 오후 교회에서 설교 준비하다가 저녁에 되어 집에 갔습니다. 집에 가서 설교 준비 마무리하기 위해 노트북을 꺼내어 켤라고 하는데 전원을 연결하는 선을 교회에 두고 가지고 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는데 선을 놓고 온 것입니다. 서둘러 교회에 왔습니다. 그런데 급히 교회에 온 바람에 교회 예배당 키도 섬김실 키도 다 놓고 온 것입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때때로 이렇게 본질을 잃어버리고 살 때가 있습니다. 주부들은 칼을 들고서도 왜 칼을 들었는지 멍하게 서있을 때도 있고, 계단에 서 있으면서 올라가야 할지 내려가야 할지 몰라 헤맬 때도 있습니다. 왜 교회에 갔는지? 왜 예배를 드리는지? 왜 결혼을 했는지? 왜 아이들을 가르치는지? 본질을 잃어버리고 살 때가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 속에서 보면 교회가 본질을 잃어버릴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가장 심각한 때는 중세시대였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중세에는 수도원이나 성당에 성유물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요즈음에도 가끔 해외 토픽에 나와 성모 마리아가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듯이 중세 시대에는 성인의 유골이나 그의 유품에서 신비한 능력이 나타난다고 생각하여 성유물 유치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수도사 중에는 성유물만 전문적으로 훔치는 도둑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도둑의 문화사]라는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책 마지막 단원에 중세시대의 유골 도둑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성인의 유물이나 유골 등을 성유물이라 해서 신통력이 있어 갖가지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어 숭배하였습니다. 유명한 성유물을 안치하고 있는 수도원은 순례자가 쇄도하고 순례자의 수만큼 헌금이 쌓이게 되었고 존귀한 유골이 있던 곳에 신자들이 모이면서 저절로 영지가 생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영지를 원하거나 수도원을 부흥시키려면 유명한 성자의 유골을 모아 두면 되었습니다. 따라서 영험한 유골을 훔치기 위해 스파이가 된 수도사도 생겼고, 전문적인 성유물 산업이 생겨나 성유물이 거래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름없던 유골도 오히려 도둑맞음으로 더 가치가 있어지게 되고 심지어는 성유물을 위해 살아 있는 성인을 죽이려는 음모까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스콜라 철학의 집성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살아 있을 때부터 그가 성인이 될 것으로 예상을 했다고 합니다. 1274년 그가 포사노바 수도원에서 병사하자 시체를 큰 가마에 끓여서 분해하고 성유물로 분배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믿어야 할지 모르지만 1000년경, 성 롬알도스는 움브리아 산중에서 고행하다가 하마터면 맞아 죽을 뻔했다고도 합니다. 그의 덕행을 사모하는 마을 주민들이 그의 성유물을 다른 마을에 빼앗길 것을 염려해서 살아 있는 동안에 손쉽게 성유물로 만들어 버리자며 덮쳤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기독교 유명 잡지만 보면 오늘날 성유물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종교 히트 상품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 편안하고 안락하며 화려한 건물, 제자 훈련, 영성 훈련, 찬양 사역, 사회 사업, 교육 사역, 영성 목회, 상담 사역, 치유 사역..." 등 다양한 상품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린 상품들이 마치 중세시대 때 화려한 건물 속에 영험한 능력이 있다는 유골들을 진열해 놓고 종교 소비자를 유혹한 것처럼 자신들만이 진품인양 말하며 백화점식 교회들이 끝없는 영지를 꿈꾸며 성유물을 진열해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도시에 수 백억 대의 교회를 건축하고 그 건능(건물의 능력)으로 종교 마케팅을 하는 것을 영험한 능력인양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유물을 통해 영지를 넓히는 중세교회처럼 자신의 교회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양날개 시대, 항공모함 시대 하며 위대한 자기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문어발식 목회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그 어떤 것도 중세의 그릇된 성유물이 되어 영지를 만드는 마케팅의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본질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배드로를 향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핵심적 진리를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믿는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제자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제자란 과연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제자란 과연 무엇을 지향하는 사람인가?"를 명쾌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제자는 어떤 존재입니까? 자기를 부인하는 존재입니다. 제자가 되려면 가장 기본이 자기 부인에 있습니다. 출발이 자기 부인에 있습니다. 자기 성을 쌓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 왕국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을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현대어 번역이나 공동번역에는 "버리고"라고 번역했습니다. 자기를 비운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버린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아지경이 되는 것을 말할까요? 신비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기 학대를 말하는 말씀일까요? 도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음의 도를 닦는 것을 말할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자기 부인은 자신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라고 하는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의 예수님이라고 고백하고 인정하고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결정권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재권이 주님께 있고 소유권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코페루니쿠스적인 방향 전환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어진 생명도, 명예도, 권력도, 재능도, 학식도, 건강도, 자녀도, 가정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출발이 신앙인에게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기본이 된 상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 기초가 되어 있을 때 신앙인은 어떤 경우도 행복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습니다.
맥스웰 몰츠 가 쓴 [맥스웰 몰츠 성공의 법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3000만부 이상 팔린 책입니다. 나폴레온 힐이 성공의 원칙과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를 종합한 것입니다. 그는 성형외과 의사입니다. 마음의 성형 수술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변화와 자아 혁명은 마음의 성형 수술로부터 시작하여야 하는데 그 첫 번째가 자아 이미지부터 바꿔라는 것입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부정적 자아 이미지를 성공할 수 밖에 없는 자아 이미지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아 혁명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도 마찬 가지입니다. 진정 신앙 생활에서 성공하려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명쾌한 답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이것이 왕같은 제사장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존귀한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총을 크게 받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을 메시야로 믿음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실패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성공에 교만하지 않습니다. 이런 존재가 되면 참으로 인생은 멋지고 아름답게 살 수가 있습니다. 초가 삼간도 만족하며 살 수 있습니다. 고대광실도 교만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온갖 탐욕의 노예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남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의 불행을 딛고 행복해 지고 싶은 욕망,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싶은 욕망,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여 역사의 중앙에 서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죄의 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사랑과 희락, 자비, 양성,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로 가득 찬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나를 비우고 남을 채워줄 수 있습니다. 빈 내 마음에 성령의 능력을 충만히 채울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의 제자는 무엇하는 사람입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를 앞세우고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언젠가 김동길 교수의 글을 보니까? 한 여학생에 금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하고 불러 놓고 "십자가는 앞에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뒤에 지고 다니는 것이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학생이 하는 말 "뛰어 가면 가끔 뒤에도 가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자기 과시를 위한 것도 아니고 십자가를 앞세우고 장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지고 가는 것입니다. 고난과 희생, 헌신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종교 사업의 수단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성유물이 아닙니다. 요즈음 보면 십자가로 인하여 탈렌트보다 더 인기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자기 왕국을 건설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못하면 아들에게 대를 이어 충성하라고 하고 어떤 분은 아들이 탈선하여 곁길로 가자 나이가 자신보다 많이 어린 부인을 목사 만들어 대를 잊게 만드려고 한다는 소문도 돌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새신은 신기 좋아하지만 헌신을 하기를 싫어합니다. 자아 성취 신앙으로 바뀌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십자가가 아니고 그들의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각기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루 지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다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일평생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 제자들의 본질입니다. 이 말씀을 눅9:23에서는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고통과 눈물과 한숨만 있는 삶입니까? 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설명하지 않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역설의 진리입니다. 잃으면 찾는 것입니다. 주고자하면 받는 것입니다. 죽으면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갈 때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샘솟는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밝게 하고 세상을 썩지 않게 하고 나를 통해 주변에 평화를 주는 것입니다. 삶의 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내 한 사람 십자가 지면 대단한 능력이 나타납니다.
[10명 중 9명의 구매결정을 좌우하는 한 사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Edward Keller, Jonathan Berry가 지었습니다. 지난 60년에 걸쳐 역사 속에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뽑아 영향력있는 사람들의 행동에 대하여 30년간 연구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물건을 살 때도 광고 매체보다 한 명의 영향력 있는 사람에 의해 9명이 물건을 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의 특징을 조사해 보니 5가지 공통적인 특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첫째가 삶에 대해 적극적 태도를 갖는 것이고 둘째가 폭넓은 인적 네트웍을 유지하고 있어고 셋째, 사람들에게 조언해 주기를 즐겼고 넷째가 문제보다는 문제해결에 관심이 많고 다섯째가 자신있게 시대적인 유행(흐름)을 이끌어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본질적인 것 하나가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진정 영향력있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입니다. 한 어머니가 십자가를 지면 가정에 평화가 찾아오고 가정의 문화가 바꾸어집니다. 교회에서 한 성도가 십자가를 지면 교회가 기쁨이 넘치고 활기있게 예배를 드리릴 수 있고 희망을 보게 됩니다. 직장도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 지고 사는 삶을 잘 못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당하는 고난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삶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남의집 신방에 가서 구두 훔쳐 가지고 구두방 주인한테 구두창으로 얻어맞고 나서 누워 있는 분을 심방하였답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어떻게 합니까? 가서 위로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분이 하는 말이, "목사님! 뭐, 예수님 십자가 졌는데 이까짓 것쯤이야! 뭐, 어떻겠습니까?" 그것이 예수님 때문에 고생한 것입니까? 맞어서 당연한 것이지요. 자신의 탐욕으로 고생하는 것을 십자가 지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좇기 위해 지는 십자가를 말합니다.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이 십자가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히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주님 때문에 고생하는 것 주님 때문에 욕 먹는 것 주님 때문에 우는 것 주님 때문에 화려하게 살지 못하는 것 주님 때문에 먹고 싶은 것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 주님 때문에 고생하는 것 피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 다 누릴려고 욕심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주일날, 주일학교의 한 교사가 어린이들에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해주었답니다. 이야기를 다 해주고 난 뒤 선생님은 어린이들에게 “여러분은 부자가 되고 싶어요, 아니면 거지 나사로가 되고 싶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 중의 한 명이 손을 번쩍 들더니 대답하기를“선생님, 죽기 전에는 부자가 되고 싶고, 죽은 다음에는 거지 나사로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자 뉴턴 멜론은 인간이 신앙을 필요로 하는 4가지 요구를 (1)생존을 위하여 (2)만족을 얻기 위해 (3)안전을 위해 (4)자기 발견에 위해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일부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비록 생존하지 못하고 비록 만족하지 못하고 비록 안전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이 주신 십자가이면 저야 하는 것이 제자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Vincent라는 사람은 "고난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약혼할 때에 받은 선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바울이 십자가 지니까 모세가 십자가 지니까 세상이 바뀌어집니다. D. Bonhoeffer는 미국에서 쉽게 살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조국 독일의 모습을 바라보며 조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39살의 젊은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Damian 편안하게 살 수 있었지만 십자가를 지고 몰로이카 문둥이 섬을 향하였고, 슈바이처는 모든 영광을 포기하고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바울은 고전1:1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미련한 것 같으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라고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가정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고통의 십자가, 헌신의 십자가, 수치의 십자가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자신들에게 지어진 십자가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전례되는 말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도하며 순교했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었습니다. 바들로매는 몸의 가죽을 벗기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나는 예배한다."라고 소리치며 순교했다고 합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창에 찔려 순교했고 맛디아는 예루살렘에서 돌팔매질에 맞고 쓰러진 후 목 베임을 당했고 안드레는 에데사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했고 누가는 헬라에서 감람나무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백세까지 온갖 시련을 겪다가 죽어간 살아 있는 순교자였습니다. 우리는 욕심많은 인간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이룰려고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출세, 병고침, 안심입명, 행복, 평안, 부자, 성공을 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만나 병고침을 받고 예수님 만나 행복하고 예수님 만나 출세하고 예수님 만나 성공하고 예수님 만나 행복해진 사람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오늘날 문명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더욱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 희생할 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주님으로 인하여 복을 받고 평안해지고 건강해지고 가정이 잘되고 사업이 잘되는 것만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본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제자의 본질은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데도 어떻게 하면 편하게 다닐까? 어떤 교회에 나가야 더 많은 서비스를 받을까? 이런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십자가를 질까가 중요합니다.

3. 예수님의 제자란 무엇을 지향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좇아야 합니다. 목표가 분명합니다. 요즈음 제가 우리 성도님들에게 [목적이 이끄는 삶]을 이메일로 보내고 있는데 인생에 있어 참으로 목표가 중요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인생의 목표는 바로 삶에 대한 가치의 표현입니다. 그 목적을 가변적인 것, 상대적인 것에 두는 사람이 있고 본질적인 것, 절대적인 것에 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좇는데 두는 사람들입니다. 명예을 얻고 돈을 벌고 권력을 쥐고, 교회가 부흥하고, 많은 일을 하고 그것이 문제가 압니다. 그것은 단지 파생적으로 은혜로 주어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영원하지도 않고 잠시 누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구원주, 메시야,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좇는데 인생의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어느때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슬플 때도 괴로울 때도 가난할 때도 부할 때도, 병들었을 때도, 건강할 때도 잘될 때도 잘못될 때도 목표는 오직 하나 예수님을 좇으면 그것이 성공이고 그것이 형통이며 그것이 복인 것입니다. 제자는 오직 주님을 좇는 사람들입니다. 주님 가신 길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경우든 주님만을 쫓아야 하겠다고 분명한 목표를 정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를 때 나를 따르라고 불렀습니다. 전신 전력하여 끊임없이 계속해서 좇아야 할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지만 주님께서 십자가를 말할 때 그릴 말라고 하시는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23절 보십시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명하십니다. 예수님을 위해주는 것 같지만 결국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자이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한 것이 아니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만을 좇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7)" 이것은 한 번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좇는 삶입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씀합니다. 하늘 나라의 백성들을 계시록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계 14: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하나님과 어린 양에서 속한자 즉 어린양이 어디고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면 고통만 따르는 길일까요? 아닙니다. 돈을 따르고 명예를 따르고 권력을 따르는 길보다 더 큰 행복과 평강과 기쁨이 주어지는 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 대가는 무엇인지 발로 예수님이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1)목숨을 잃으면 다시 찾는다는 것을 말씀합니다.(25)
주님 따라가는 길 때로는 힘이 듭니다. 세일즈맨 중 90% 이상이 최소한 한 번씩은 "그만 두겠다."는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 말을 하지 않는 세일즈맨은 겨우 10% 정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아마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참 힘들다라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막 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2)행한대로 갚음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합니다.(27)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같은 화려한 성도 어느날 없어집니다. 로마의 영광도 바벨론의 영광도 애굽의 영광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주후 79년에 죄악의 도시 봄페이스가 베수비우스 산이 폭발하는 바람에 용암으로 매몰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물건을 매매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가락지. 팔찌. 목걸이. 금고리등 보석을 끌어안은 채로 용암 벼락을 맞아 화석이 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을 말씀합니다.
(벧후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요 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고후4:17-18 절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3) 예수님의 왕되심을 실제적으로 체험하게됩니다(28).
바로 뒤에 변화산 사건을 통해 체험하게 되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우리는 제자로서
자기를 부인에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성을 쌓지 말아야 합니다. 전적으로 주님께 내 인생을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앞세우고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좇는데 인생의 목표를 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마태복음16:21-28/2003.6.1/김필곤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