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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세상의 빛이 십니다./요8:12-20

예수님의 세상의 빛이 십니다./요8:12-20

 

지금 우리나라에 전기가 없는 마을이 있을까요? 있다고 합니다. 주간조선(2003.11.06.)에 보니 경북 주왕산 산동네. 청송군 내원 마을이라는 곳에는 아직도 전기가 없이 9가구 15명이 자연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오후 6시만 되면 칠흑 같은 밤이 되고, 요강이 있고 신문도 우편물도 TV도 없고, 샘물에 감자밥을 해 먹는다고 합니다. 옛날 제가 어렸을 때도 저희 동네에 전기가 없어 호롱불 밑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다 머리도 그슬리고 했습니다. 전기가 있다는 것 참 고마운 일입니다. 저녁에도 자유롭게 책을 볼 수 있고 전기 난로를 통해 겨울철 따뜻하게 지낼 수도 있고 커피도 끓여 먹을 수 있고 각종 혜택을 보며 살 수 있습니다. 만약 전기가 일주일만 우리가 사는 곳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대단한 사건이 벌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전기가 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혜택을 누리고 살고 있습니까? 이 전기를 통해 우리가 이렇게 큰 도움을 받기까지는 윌리엄 길버트나 벤저민 프랭클린, 안토니오 볼타, 에디슨 같은 사람들의 노력 덕분입니다. 에디슨은 일정한 전압에서도 견디는 필라멘트를 실험하기 위해 무려 11만번이나 실패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만든 빛도 엄청나게 유익하지만 자연의 빛 태양의 빛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질량이 지구의 33만배나 되는 태양에서 발산되는 에너지의 22억 분의 1의 빛과 열로 인류는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고 살고 있습니까? 이 태양 빛으로 생명이 살아납니다. 식물이 광합성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 살겠으며 초식동물이 식물이 없으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육식동물이나 잡식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이 있으므로 우리는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빛이 없다면 설악산의 아름다운 가을 단풍을 어떻게 감상할 수 있겠습니까? 빛이 있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빛이 있기 때문에 따뜻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빛이 있기 때문에 계절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이러한 인공의 빛과 자연의 빛 말고도 또 하나의 빛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빛, 생명의 빛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2절에 세상의 빛, 생명의 빛이 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십니다.

1.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1)이 빛을 받으면 어둠이 물러갑니다.
세상의 어두움을 물리치기 위해 오셨습니다. 죽음의 어두움, 죄의 어두움, 근심의 어두움, 시기와 질투의 어두움, 전쟁과 기근의 어두움, 두려움과 불안의 어두움, 질병과 고통의 어두움을 몰아 내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시기만 하면 죽음의 공포에서 두려워하는 자들이 죽음의 공포로부터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죄의 깊은 수렁에서 두려워하는 자들이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기만 하면 죄의 수렁에서 용서받게 됩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기만 하면 걱정과 근심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이 빛을 받으면 어두움의 사상, 어두움의 지식, 어두움의 도덕, 어두움의 문화가 달아 납니다. 이 빛이 임하면 음란한 밤의 문화가 달아납니다. 타락한 어거스틴이 이 빛을 받으니까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방탕하게 살던 부시가 이 빛을 받으니까 새사람이 되어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깡패 대장이었던 김익두가 이 빛을 받으니까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빛은 받으면 나라의 어두움이, 가정의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바이킹족이었던 스웨덴이 변하고 해적들이 신사로 변합니다. 온갖 죄악과 우상으로 타락한 로마가 이 빛을 받으니까 2천년동안 엄청난 축복을 누렸습니다. 불모지의 땅 미국이 이 빛을 받으니까 세계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는 땅으로 변하였습니다. 이 빛을 받으면 헨델과 베토벤, 톨스토이와 도스토에프스키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 빛을 받으면 가정이 밝아 집니다. 영혼이 밝아집니다. 마음이 밝아 집니다. 세상이 밝아집니다.
2) 이 빛을 받으면 밝게 보게 만듭니다. 이성이 살아 납니다. 지성이 새로워 집니다. 양심이 살아납니다. 이성이 제 구실을 하게 됩니다. 정확하고 바르게 세상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세계관이 가치관이 바르게 정립이 됩니다. 지성과 도덕적인 분별력이 정상적으로 됩니다. 참 지식, 참 거룩, 참 행복을 알게 됩니다. 자신을 보고 이웃을 보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이 바울의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3)이 빛을 받으면 아름다워집니다. 가정이 아름답고 교회가 아름답고 자녀가 아름답고 아내가 아름답고 남편이 아름다워집니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4)이 빛을 받으면 생명이 살아납니다. 이 빛은 생명의 빛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빛입니다. 이 빛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사람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우는 선다 싱은 어릴 때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어머니가 시크교 사도였기 때문에 철저하게 시크교식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선교사 앞에서 책을 찢고 선교사 학교에 돌맹이를 던지고 성경을 불태운 사람입니다. 친구들을 모아 놓고 자기 집에서 성경을 불태우며 "만약 기독교의 신이 참 하나님이라면 성경을 불태우는 자신이 당장 벌을 받을 것이라"고 장담하며 장담하던 아이였습니다. 그는 성경을 불태운 후 학교에 가지 못하고 3일 동안 금식하면 기도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 입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죽기로 결심하고 3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였는데 마지막 날 새벽 5시 그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환한 빛이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가만히 눈을 뜨니 갑자기 밝은 빛이 대낮처럼 환하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환한 광채 속에서 어떤 이가 나타났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셨던 아들 예수 스리스도다"
그는 바울처럼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자 그럼 이제 두 눈을 크게 뜨고서 똑똑히 보아라. 십자가에 못박힌 나의 두 손발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말이다."
"내가 이처럼 십자가 형틀 위에서 참혹하게 죽은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가 될 뿐만 아니라 너를 지극히 사랑하여 구원하기 위한 것이란다." 그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똑똑히 보고 들었습니다. 선다 싱은 고꾸라지면서 소리첬습니다. "오 나의 구주 예수님이여 여태까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부정하고 잘 못된 우상만 섬겨 왔던 저의 큰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그리고 이제부터는 저를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만을 위하여 살게 하옵소서" 그는 변하여 맨발의 전도자 인도의 성자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신 분이 계십니까?

2.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지만 그것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빛이신 것을 몰랐습니다.
왜 알지 못했을까요? 영적 무지 때문입니다. 영적인 눈이 감겼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인공의 빛이 있고 태양의 빛이 있지만 다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눈이 보이지 않은 사람은 그 밝음을 볼 수 없고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눈이 감긴 사람은 생명의 빛을 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빛으로 만난 것이나 선다 싱이 예수님을 만나 이야기를 하면 신화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인 것입니다. 이 체험이 없기 때문에 이해가 안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어떤 분은 아내를 사랑하여 영화를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아내는 영화관에 들어가서 구경하는데 자신은 아이를 업고 밖에서 서성대는 남편도 있습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저는 그렇게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부부에게는 그것이 사랑의 개인적인 체험인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베드로처럼 나는 죄인입니다를 고백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과거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그 빛 앞에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사명이 보이지 않던 눈에 사명이 보입니다. 이사야처럼 주여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영적인 눈이 뜨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믿어지고 이해되어 집니다.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 없어도 환하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한 나눔의 대표로 많은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있는 영화 배우 고은아씨처럼 영화는 짧은 감동 신앙은 영원한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영화도 좋지요. 대단한 감동을 줍니다. 하지만 오래 가진 못해요. 영혼이 한 두 시간 쉬어가는 곳이죠. 하지만 신앙은 달라요. 영원한 기쁨을 선사합니다. 비교할 대상이 아니죠." 린나이 코이아 사장은 매주 한 시간씩 전직원 예배를 드린답니다. 돈으로 계산하면 3억원씩 손해 보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예배를 드리는데 일년이면 무려 돈으로 156억원이나 된답니다. IMF 당해 어려울 때 그 해 겨울 추위로 모든 제고품이 다 나가 넉넉히 이겼다고 합니다. 신앙은 이론이나 지식, 보편적 경험 수준이 아닙니다. 개인만의 경험이과 빛이신 예수님과 개별적인 만남입니다. 이 예수님을 만나면 어떤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환하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느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위로받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빛이 없어도 환하게 다가오시는 주예수 나의 당신이여 음성이 없어도 똑똑히 들려주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당신 있음으로 나도 있고 당신의 노래가 머묾으로 나는 부를 수 있어요 주여 꽃처럼 향기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당신이 좋을 수 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라는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대하여 많은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빛으로 모시지는 못했습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요일 5:20)"

1) 이것은 메시야에 관한 구약 성경의 예언의 성취임을 보여 주시는 데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사 42:6)"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사 49:6)"
2)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다는 사실을 말씀하는데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빛은 하나님을 지칭하는 세 가지 표현 중의 하나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세가지로 나오고 있습니다.
(1)요4:24 하나님은 영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
(2)요일1:5 하나님은 빛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일 1:5)"
(3)요일4:8 하나님은 사랑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8)"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장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하나님이 빛이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예수님의 주장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바리새인들은 많은 지식이 있었음에도 교만과 아집 때문에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논쟁만 일삼고 거부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이 참됨을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은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시는 지를 알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완전히 무지함을 지적합니다. 증인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인 것을 말씀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7)"

3. 이제 생명의 빛을 받은 우리는 어두움에 다니지 말아야 하겠습니다(12).
12절에 보십시오. 우리는 이제 생명의 빛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영혼이 살아 있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성철 스님이 평생동안 빛을 찾아 헤매었지만 진정 빛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않고 거지옷을 입고 20년 동안 생식을 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빛을 찾아 몸부림을 친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기가 지은 죄가 수미산보다 더 높고 "이제 나는 가는 길이 저 아비규환 지옥으로 간다"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빛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이제 빛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제 빛의 자녀처럼 살아야 합니다.
생명의 빛을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1)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돈을 따르고 명예와 권력, 쾌락을 따르는 삶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임마누엘 되시는 우리 예수님이 함께 하여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그곳에 희락이 있고 화평이 있고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고난도 받지만 그곳에 두려움이 살아지고 죽음을 이기게 되고 질병을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빛을 만난 시편 기자는“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시27:1)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백성 앞에서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시니다. 전구는 수명이 되면 살아지고 태양 역시 50억 년이 지나면 죽는다고 하지만 빛 이신 예수님은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 말씀합니다."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함께 하신 뿐 아니라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던 것처럼 빛 되신 예수님을 따르면 우리의 앞길을 보장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2)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제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죽음의 어둠, 죄의 어둠, 두려움과 근심, 낙심, 절망의 어둠에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밤 문화만 좋아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롬 13:13)"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4-16)"
이제 우리는 어둠의 문화 땅의 문화, 어두움의 사상, 어두움의 지식, 어두움의 도덕, 어두움의 문화를 몰아 냅니다. 우리는 어둠의 자식들이 아닙니다. 악한 동물들은 다 밤을 좋아 한다고 합니다. 맹수들이 다 밤에 움직임 선한 동물 낮에 활동한다고 합니다.
「아침형 인간으로 변신하라」의 저자 다카이 노부오는 부자가 될려면 늦잠을 즐기지 말라고 합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CEO는 모두 아침형 인간이라고 합니다. 그는 부자들의 전형이 '아침형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침형 인간으로 변신하는 것은 성공적인 비즈니스로 가는 지름길이며 기상 시간부터 오전 업무 활용, 시간 관리, 인간관계까지 전면적인 개편을 해야 인생이 달라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아침은 하루 중 생산성이 가장 높은 때로 아직 몸에 피로가 쌓이지 않았고, 스트레스도 없으며, 머리도 맑아서 일할 의욕이 넘치는 때라고 합니다. 특히 아침에는 우뇌가 활발하게 작용하여 창의력과 상상력이 풍부해지고, 신경을 이완해주는 알파파가 나와 기억력과 집중력을 향상시켜 준다고 합니다. 너무 밤 문화를 즐기지 말아야 합니다. 새벽을 깨우면 사는 인생 얼마나 아릅답습니까?
어떤 소경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등불을 켜고 밖을 나섰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 등불을 보고 자기를 피해 가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어떤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소경이 소리쳤습니다. “여보시오, 눈 좀 똑바로 뜨고 다니시오!” 그러자 나그네도 “당신이야말로 왜 이 어두운 밤에 눈을 감고 다니는 거요?” 소경이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난 소경이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 이렇게 등불까지 준비해서 다닌단 말이오.” 나그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당신의 등불은 꺼졌소.”바리새인처럼 우리의 등불이 커져 있나 점점해야 합니다.
세상이 어둡습니다. 예수님은 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기 위한 빛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도 세상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작은 촛불 하나라도 켜야 합니다. 촛불은 대낮에는 별 가치가 없습니다. 어두울수록 가치가 있습니다. 어둡다고 원망하지 말고 어둠을 저주하기 보다는 촛불 하나라도 켜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를 통해 세상은 밝아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상의 빛이 십니다./요8:12-20/김필곤 목사/2003.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