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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요한복음10:7-10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요한복음10:7-10

 

중국 선교의 아버지 허드슨 테일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어릴 때 신앙이 좋은 부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지금 말하면 약국을 하셨는데 어릴 때부터 아들을 끌어안고 기도해 주시며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아들이 쓰임 받기를 원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아들이 중국 선교에 관심을 가지길 원했습니다. 아버지처럼 약을 파는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전함으로 죽어 가는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자신이 병으로 죽어 가는 사람에게 약을 파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부모님의 바램처럼 11살 때까지는 신앙 생활을 잘하였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신앙에서 멀어졌습니다. 교회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급기야는 학교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보모님은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탈선한 아들을 보며 6년 동안 하나님께 매어 달려 기도했습니다. 15살에 허드슨 테일러는 은행 견습사원으로 취직하여 오직 돈을 많이 벌어 좋은 집과 훌륭한 말을 사서 즐길 것인가라는 생각에만 골몰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시력이 나빠져 은행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우울하게 보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학교도 잃고, 직장도 잃고, 건강도 잃어버리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부모님은 허드슨을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누나 아멜리아는 허드슨을 위해 매일 세 차례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 드렸습니다. 그 무렵 어느날 허드슨이 아버지 서재에 들어가 책을 보는데 그 책 속에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나왔습니다. 어릴 때부터 들은 말씀이지만 그 날 따라 그 말씀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를 다 청산하고 구원을 온전히 이루었다는 사실이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사실 앞에 감격하였습니다. 무릎꿇고 기도하며 찬양하였습니다. 가슴에 쌓인 의심의 먹구름이 사라지고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밝은 빛이 아침 햇살처럼 쏟아졌습니다. 그 때가 1849녀 6월 그의 나이 17살 때였다고 합니다. 후에 그의 누이가 거듭나기 전과 후의 차이를 물어 보자 허드슨 테일러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같은 하늘과 땅이지만 예전의 하늘과 땅과는 다른 것입니다. 사명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중국 땅이 그의 마음 속 사명의 땅으로 보였습니다. 놀기 좋아하고 게을렀던 그가 새벽 5시에 일어나 중국어를 공부하고 의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인생관이 달라지고 삶의 목적이 달라져 버렸습니다. 한 인생이 어떻게 이렇게 순식간에 변할 수 있을까요? 이런 현상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신비입니다. 똑같은 말씀을 들었지만 성령님께서 그의 마음을 변화시켜 말씀이 살아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일을 오늘 본문 9절에서 어떻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까?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7절 하반절에 보면 양의 문이라는 말입니다. 이 문은 생명의 문입니다.

1. 이 문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생명을 얻는 문입니다.(9,10)
이 문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문입니다.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서 양을 치는 목자들은 저녁이 되면 동네의 공동 우리에 양을 가두어 놓습니다. 아침이 되면 그 양의 이름을 불러 초장으로 나아갑니다. 이 울타리는 양에게 안식을 주고 저녁에 사나운 짐승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입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같은 민족이 됨으로 혈통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이고 신약으로 말하면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양이 안전하게 생명을 보호받을 수 있는 이 우리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양의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은 당시 쉽게 볼 수 있는 상황을 통해 자신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양의 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양의 문을 통과하면 홍수로 다 죽어야 할 때 노아와 그의 가족이 하나밖에 없는 방주의 문으로 들어가서 죽지 않고 살았듯이 생명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대상이 누구입니까?
1)누구든지 양의 문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생명을 얻게 됩니다. 유대인만 얻는 것이 아닙니다. 혈통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여자나 남자나 상관이 없습니다. 살인자도, 사기꾼도 예수님 안에 오면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가 됩니다. 인생이 바뀌어 집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사람들은 과거의 종으로 살기를 좋아 하지만 예수님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과거 어떤 죄가 있고 어떤 잘못이 있다고 하여도 주님 앞에 나오면 모든 죄를 용서 받고 새생명 얻어 새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는 어릴 때 불량한 소년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나라의 세금을 걷는 사람이었는데 10 세 때에 아버지가 거둬 온 돈을 구두속에 감추어 두고 남의 눈을 피해서 방탕한 곳에 썼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것을 틈타 아버지가 모아 둔 돈을 훔쳐 집을 나가 방탕한 생활에 써버렸습니다. 결국 아무것도 없어 베르헨비텔에서 여관비가 모자라 도망을 하다가 잡혀서 유치장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16세였습니다. 이 불량소년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으로 건너가 브리스톨에 큰 고아원을 세웠습니다. 고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인간을 이렇게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과연 어떤 것으로 인간에게 새생명을 주어 삶의 질을 바꿀 수 있도록 해 주겠습니까?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면 도둑도 살아 납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입니다.
"인생살이 고달파 낙심 말아라 영원한 구원이 그 속에 있네, 예수 내 친구 오직 내 사랑 온 천지가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사형수가 되었던 도스토예프스키가 예수님을 만나자 위대한 신앙의 작가로 변화되었습니다. 사형수들을 싣고 가는 열차가 간이역에 멈췄을 때 그는 어느 부인으로부터 작은 책 한 권을 받았습니다.그것은 신약성경이었습니다. 사형을 기다리면서 그는 감옥에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작은 성경책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그는“누가 내게 ‘그리스도는 진리가 아니다’라고 증명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다.나는 진리보다도 차라리 예수와 함께 있고 싶다”는 신앙고백을 했습니다.그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1995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지존파' 중 한사람이었던 김현양 군 그렇게 강퍅한 살인자도 예수님을 만나자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글을 남겼습니다. "지난날 사회를 어지럽히던 살인자 김현양이 예수님의 종이 되었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이 세상 서로를 존중하며 아껴주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면 저같은 죄인은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잊지 말고 전해주세요. "
세계적인 대문호인 빅토르 위고도 주색에 빠져 방탕하게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아버지가 방탕했는지 아버지의 타락한 삶을 보다 못해 딸이 유서를 남기고 강물에 뛰어들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십시오"라는 딸의 유서를 보고 그는 울부짓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타락한 삶이 딸을 죽였다고 자책하며 양의 문이신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고 말년에는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됐었다고 합니다. 1841년을 기점으로 그의 인생은 BC와 AD로 나뉘어지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로 추앙받았던 솔제니친이 암에 걸렸습니다. 그를 수술한 의사는 콘필드였습니다. 그는 그에게 예수님을 전합니다. 그는 병석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질병도 낳고 영혼도 구원받은 것입니다. 솔레니친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사상과 문학이 바뀌었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이러한 삶의 변화, 구원이 가능합니까?
2)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노아의 방주의 문이 하나 밖에 없듯 양의 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천국 가는 길은 여러 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한 길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시며 그리스도께서 들어갈 능력을 주십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 4:12)"

2. 이 문은 들어가며 나오며 삶을 풍성하게 하는 문입니다.
나가며 들어가며는 단회적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루의 생활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 사람의 삶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꼴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4:14), 생명의 떡(요6:35)과 같이 구원의 축복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생명을 얻되 풍성이 얻는다고 했습니다. 주님 안에서 생명의 구원 뿐 아니라 신령한 은사 풍성히 누리며 만족한 삶을 살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양의 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를 받게 됩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양의 문을 나와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아 풍성한 꼴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저 양의 문만 통과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가 나오라고 하면 그저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앞서 인도하시는 목자를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나 생명을 얻되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게 됩니다.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습니다. 목마르고 주리며 헐벗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몸에는 병이 있었습니다. 사랑했든 형제들로부터 배신을 당했습니다. 설교를 못한다고 비난도 들었습니다. 이중 인격자라는 소리도 들어야 만했습니다. 그가 개척한 고린도 교인 같은 경우 얼마나 부도덕합니까? 파당을 만들어 서로 싸웁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감사합니다. 참 대단합니다. 우리는 조금만 자존심 상하면 원수가 됩니다. 한 번 마음 틀어지면 얼굴 보기도 싫어합니다. 저도 조금 정도의 차이지 마찬가지입니다. 애매하게 비난 받을 때 참 참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화장실 휴지 가져다 놓으면 거지들이 와서 가져갑니다. 어제 놓아 두었는데 오늘 새벽 예배 끝나고 가보니 없습니다. 밤새 가져간 것입니다. 처음에는 안 갔다 놓아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오죽하면 남의 화장실에 와서 화장지 가져가겠느냐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불쌍이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없어지는대로 가져다 놓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은혜로 생각하면마음이 풍요로워지고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얼마나 풍성하게 살고 있습니까? 편지를 쓸 때마다 감사가 넘칩니다. 감옥에 있으면서도 찬송을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2)"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빌 4:18)"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누리는 풍성한 삶, 멋진 삶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예수 안에서 이런 풍성한 삶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마케팅 용어 중에 손실 혐오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휘발유 요금을 1리터 당 1,000원이라고 할 때 "휘발유 1리터 당 1,000원! 현금 사용시 50원 할인!"이라는 문구와 "휘발유 1리터 당 950원! 카드 사용시 50원 할증!"이라는 문구 중 어떤 것을 제시할 때 현금으로 많이 사겠습니까? 첫 번째 문구는 가격이 1,000원인데 현금을 내면 50원의 이득이 생긴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두 번째 문구는 가격이 950원인데 카드를 사용하면 50원의 손실이 생긴다는 의미로 이해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 경우 얻는 것의 가치보다 잃는 것의 마이너스 가치가 크게 느껴지는 '손실혐오 현상'이 적용되어, 같은 50원이지만 카드를 사용함으로써 입게 되는 50원의 손실이 훨씬 더 크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문구를 제시하였을 때, 사람들은 현금으로 결제하는 비율이 훨씬 높아진다고 합니다. 손실 보는 것을 사람들은 혐오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집착하여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 생활하는데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온통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에 즐거움이 없습니다. 목회자에게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다 설교 시간에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과 같은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원수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것은 풍요로운 삶이 아닙니다. 1870-1930년대는 생산시대라고 합니다. 1930-1950년까지를 판매시대라고 합니다. 1950년 대 이후를 마케팅 시대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마케팅에 익숙해 있습니다.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보니 조금만 자존심이 상하고 조금만 손해를 보면 못견디는 기질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독생자를 우리와 같이 부족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해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까지 달리게 하신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 아내를 인신매매한 사람입니다. 모세 살인한 사람입니다. 야곱 사기꾼입니다. 다윗 유부녀를 간음한 자입니다. 베드로 배신자입니다. 바울 살인 방조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그 죄에 집중하며 그들을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기 싫은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며 한 시대 사용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고 사용하였습니다. 모세의 민족에 대한 열정을 봅니다. 야곱의 복에 대한 소원을 봅니다.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봅니다. 베드로의 열정과 바울의 열정을 보고 사용하십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가정에서 아내의 단점과 남편의 단점만 자녀의 단점만 보면 우리는 풍성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왜 예수님이 오셨습니까? 모자라고 부족하기 때문에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자, 자존심 팍팍 긁는 사람들, 눈이 보아 줄 수 없을 정도로 미운 자, 사기꾼 같아 상대하기 싫은 자, 같이 있으면 구역질 나올 정도로 혐오스러운 자들을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오늘 10절을 읽어보십시오. 이러한 사람들 불러 구원시킬 뿐 아니라 풍성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양의 문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보호해 주시고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 (누가복음15:4)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려고 합니다. 8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절도요 강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참 만족을 누려야 합니다. 자꾸 교회를 통해, 성도를 통해, 남편과 아내를 통해, 돈과 명예와 권력을 통해 참 만족을 누리려고 하면 실망할 따름입니다. 우리 예수님 안에 참 만족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힘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 되시고 근심에 쌓일 때 위로가 되시고 외로울 때 우리의 친구가 되십니다. 슬퍼할 때 기쁨이 되시고, 의지할 때 보호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간구할 때 풍성한 곡식과 열매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이 되셔서 우리가 세상을 떠나갈 때 곧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양의 문이 되십니다.(찬송93장)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돈이 많은 부자인데 아주 구두쇠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부인이 헌금한다고 돈을 주지 않는 사람입니다. 돈은 많은데 사는 것은 거지처럼 살아갑니다. 나이가 들면 바꾸어질까 기대를 했는데 나이들어도 여전하였습니다. 구두쇠로 살다가 어느날 죽었습니다. 장례를 치르는데 그만 관을 가지고 나오다가 벽에 부디쳤답니다. 그러자 관속에 들어 있던 할아버지가 "나 죽지 않았다"고 소리를 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5년을 더 살았답니다. 죽었다 살아나서 변할 줄 알았답니다. 풍요로운 삶으로 살 줄 알았는데 여전히 구두쇠로 살더라는 것입니다. 다시 5년 후 죽었답니다. 관을 들고 나오는데 할머니가 초초히 관을 든 사람들에게 가서 조용하게 "벽 조심해"라고 소곤거리더라는 것입니다. 죽었다 살아나면 변해야 합니다. 생명을 얻으면 풍요롭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를 믿음으로 다시 사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을 얻되 그리스도 안에서 풍요로운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 9-10절을 한 번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풍성한 삶의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요한복음10:7-10/김필곤 목사/2003.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