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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필곤목사

믿음은 전례의 노예가 아닙니다

믿음은 전례의 노예가 아닙니다.
마가복음2:1-12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교에 오랫동안 심취해 있던 사람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예배에 참석도 해보고 각종 모임에 참석을 해보았지만 풀리지 않는 신앙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용기를 내서 담임목사님을 찾아 상담하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마침 교회 문을 들어서는데 관리집사가 마당을 쓸고 있었습니다. "안녕하시우." "무슨 일로 오신건가요?' "주지 목사님을 만나보려구요."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 교회의 여전도회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부동산 열기가 뜨거울 때 부동산 투자로 유명한 "땅사랑" 집사였다고 합니다. 부동산 투기가 한창 기승을 부릴 즈음, 한몫 잡으려는 땅 집사는 땅사는 일에 푹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여전도회 헌신 예배가 있는 어느 주간 헌신예배도 잊어 버린채 일주일 내내 열심히 아파트와 땅을 보러 발이 닳도록 돌아 다녔다고 합니다. 이윽고 문제의 주일, 여전도회 헌신 예배 시간이 되었는데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땅집사는 급하게 찬송가를 찾아 찬송을 부르는데 "우리 모두 찬송가 109동을 부르겠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중점적으로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 생각이 무의식 중에서도 뛰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한 때 바둑을 좋아했었습니다. 학교에 가면 칠판에 바둑판이 그려지고 아이들의 머리가 바둑판으로 보인 때가 있었습니다. 당구 좋아 하시는 분은 예배드리면서 성도들의 머리를 보면서 당구 연구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붙들어서 말이나 태도에 영향력을 주는 것을 중심사고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사업을 하다가 어느 지방 출신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면 그 때부터 중심사고가 "그 지방 사람들은 사기꾼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런 중심 사고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삶을 지배하여 자식을 결혼시킬 때도 그 지방 사람하고는 결혼을 시키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앙을 가진 후에도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지난 4월 15일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투표하였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난 번 대통령 선거에 찍은 당을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후보가 누구냐에 상관없이 찍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중심사고가 잘 변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숲의 나무처럼 마음 깊은 곳에 쌓여 있다가 불씨만 붙으면 금방 타오른다는 것입니다. 이 중심 사고는 세 가지에 의해 생긴다고 합니다. 자신의 환경(경험)과 유전, 그리고 갑자기 당한 강한 자극 등이라고 합니다. 대부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학습되어져 한 번 만들어지면 쉽게 변화되지 않고 그것이 그 사람의 일생을 붙들어 버린다고 합니다. 그 중심 사고가 우리 생활에서 여러 가지 형태를 띠고 나타납니다. 때로는 선입견, 때로는 고정관념, 때로는 아집, 때로는 관례, 전례, 전통, 주장,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 등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떤 새로운 일을 하려면 마음 깊은 곳에서 "전례대로 해야 한다." "관례대로" "이제까지 해온 전통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합니다. 전례를 벗어나는 것을 큰 일 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사를 않드리면 큰 일나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쉽게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중심 사고는 좋은 것도 있지만 잘못된 중심사고가 있습니다. 이것을 바꾸어야 인생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중심 사고가 쉽게 바뀌어지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중심사고를 고치지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깨려는 생존본능이 작동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극한 위기를 당하면 바뀌어 진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바꾸려면 적극적으로 잘못된 중심사고를 찾아내고, 문제의 중심사고를 제거한 후 기존의 소거된 틀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우울증에 걸린 사람의 중심 사고는 '사는 것이 재미없다', '마음이 우울하고 슬프다', '쉽게 피곤함을 느낀다' 등 이 세 가지가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 잘못된 중심사고는 인간의 몸을 이루는 세포, 조직, 인간의 정신을 작동하게 하고, 제어하고, 활성화시켜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시켜 세포들을 위축시켜 신체에 영향을 줍니다. 이런 사람이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우울한 생각을 찾아내어 우울로 인해 생성된 왜곡된 중심사고를 제거하고 우울로 인해 소거되거나 약해진 중심사고를 활성화시켜 주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특효약은 믿음입니다. 그릇된 중심 사고를 바꿀 수 있는 좋은 약은 신앙입니다. 믿음을 가지게 되면 영적 치료뿐 아니라 마음이 치료가 됩니다. 믿음은 관례, 전통, 전례라는 것으로 포장된 나쁜 중심 사고의 노예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줍니다. 인간을 포로로 만드는 과거의 노예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바울이 믿음을 가지니까 유대교 중심사고에서 유대교 전통에서 해방됩니다. 다윗이 믿음으로 나아가니까 힘의 중심사고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 사고로 바뀌어 상식에도 맞지 않는 물맷돌로 골리앗을 넘어뜨립니다. 그릇된 중심사고를 깨는 것입니다. 한 번도 벗어나지 못한 고정관념의 틀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믿음은 성장하지 못하도록 가두어 놓은 그릇된 중심사고의 그릇을 깨뜨려 버립니다.

1. 믿음은 운명, 숙명의 노예가 된 중심 사고에서 우리를 해방되게 합니다./의식의 한계
오늘 본문에 중풍병자가 나옵니다. 예나 지금이나 중풍으로 쓰러지면 자신 뿐 아니라 가족이 참 힘이 듭니다. 우리 나라 성인들 중에 많은 사망원인 중 하나가 이 중풍입니다. 중풍은 한 번 발생하면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해도 신경마비장애와 언어장애, 정신 장애 등 다양한 후유증이 남게 됩니다. 평소에 혈압이 높거나 당뇨병이 있는 사람, 고지혈증이 있거나 비만한 사람, 늘 흡연을 하는 사람들에게 중풍이 잘 온다고 합니다. 이 중풍은 자신 뿐 아니라 환자 주변 사람에게도 심각한 어려움을 줍니다. 환자들도 다양합니다. 몇 달전 어느 병원에 심방을 가니까 모두 중풍병자들이 입원하여 있었습니다. 5년 된 사람, 10년 된 사람 가족이 온통 환자에게 매달려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중풍 병자는 당시의 의술로는 고칠 가망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걸어다닐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지를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무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언어 장애도 와서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아마 이 중풍병자는 당시의 상황으로 운명으로 숙명으로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 믿지 않는 사람들 식으로 이야기하면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일을 당했는가?" "이것이 내 운명이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 끝이다. 이제 나을 수 없다. 이렇게 살다가 가족들에게 피해만 주다 죽는 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숙명적 중심 사고, 이런 운명적 중심사고를 깨뜨려 버려야 합니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이고 소극적인 이 생각이 자신을 지배하면 중심사고가 되어 버리면 인생은 결코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가정 생활도, 사회 생활도, 직장 생활도, 신앙 생활도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매사 부정적입니다. 매사 비관적이고 매사 소극적이게 됩니다. 모든 것을 운명의 탓으로 돌려 버리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이 운명적 중심 사고에서 해방되게 됩니까? 1절을 보십시오. 절망적인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어느날 예수님의 소문을 듣습니다. 그 소문이 어떤 소문이었겠습니까? 1장 29절을 보십시오. 베드로 장모가 열병에서 나았습니다. 1장 34절을 보십시오. 각색 병든 자가 낳습니다. 정신병자가 났습니다. 40절에 보십시오. 문둥병자가 나았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이 일을 많이 퍼지게 하였습니다. 이 환자가 이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각종 병이 낳을 수 있다는 소문입니다. 육신이 다 마비된 것같은 환자이지만 들을 귀는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문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의 변화, 중심 사고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5)"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것까지 포함된 내용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면 어떤 죄를 지었다해도 용서받을 수 있다. 주님 앞에 나아가면 무슨 문제라도 해결 받을 수 있다." "주님 만나면 행복해 질 수 있다. 주님 만나면 고칠 수 있다. 주님 만나면 기쁨을 얻을 수 있다. 주님 만나면 평안을 얻을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단순한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사람은 단순하게 생각할 때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단순할 때 주님 만날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따질 것없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씀을 들으면 그래 그 말이 맞아 예수님께 나아가면 그런 일이 일어 날 수 있어 이렇게 중심사고를 바꾸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예수님 만나면 해결된다는 중심사고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예수앞에 나오면 모든 죄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구원 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205장 1절)"

2. 믿음은 자신의 한계에 노예가 된 중심사고에서 해방되게 합니다./능력의 한계
이 중풍병자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중심 사과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만 나아가면 예수님만 만나면 나는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 중풍병자가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가고자 할지라도 혼자서는 도저히 갈 수가 없는 능력의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만나 나도 공부 잘 할 수 있고 사업 잘 할 수 있고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갖게 되었는데 공부할 만한 실력이 없고 사업을 잘 할 만한 자본이 없고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만한 성격이 못되는 것입니다. 걸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소문을 들을 수는 있었지만 걸을 수는 없었습니다. 자신 스스로는 예수님께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능력의 한계에 부딪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의 중심사고는 자신의 능력을 비관하면 "나는 할 수 없는 존재다. 나는 무능한 존재야" "나는 어쩔 수 없어" "어머니 아버지 왜 날 나셨나요"라는 중심사고를 가져 버리게 됩니다.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면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지 못한다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나를 도와 일할 사람을 하나님은 준비시켜 놓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그를 들어 예수님께 운반할 수 있는 네 명의 믿음의 사람을 붙여 주었습니다. 자신을 보고 거추장 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신의 약점을 가지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약점을 보완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위로해 주고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5절에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 중풍병자의 믿음만 본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를 도와 그의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실 예수님을 만나게 할 친구들은 있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요나단이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자신을 진정 이해해 주는 바나바같은 사람이 있었고 자신들의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만한 부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 홀로 외로히 신앙 생활하는 것같았지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자 칠 천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시킬 자로 세웠을 때 다섯 번이나 거절 하였습니다. 출4장 10절을 보십시오. 나는 말을 못합니다. 입술이 뻣뻣하고 혀가 둔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출 4:11)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출 4:12)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출 4:13)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 (출 4:14)"
내가 못해도 하나님이 하신다는 중심 사고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어 하시게 합니다.
예수님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눅 10:2)" 내 능력 부족하면 하나님께서 추수할 일꾼과 함께 일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길 원합니다.
인생은 부족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해서 망하는 것 아닙니다. 죄지었다고 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격이 잘 못되었다고 망하는 것 아닙니다. 공부를 좀 못하고, 신체적 결함이 있다고 망하는 것 아닙니다. 주변에 누가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가 중요합니다. 헬렌켈러가 좋은 선생님 만나니까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해해 주고, 용서해주고, 끝까지 참아 주고 기도해주고 인도해주고 품어주는 사람을 만나면 망하지 않습니다. 홀로 있으면 쉽게 무너지지만 신앙인이 함께 있으면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기도할 때도 두 세 명이 함께 기도하라고 하고 전도할 때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었습니다. 내 능력 없다고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망할 힘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같이 일할 사람 보내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3. 믿음은 방법의 제한성에 노예가 된 중심 사고에서 해방되게 합니다./방법의 한계
마음도 바뀌었고 함께 일할 믿음의 동지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장벽은 있었습니다. 이 중풍병자에게 또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 만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의 변화를 가졌습니다. 믿음의 사람을 만나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어 예수님께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응급환자라고 사람들을 해치고 예수님께 나아가고 싶었지만 불가능했습니다. 모두가 응급환자이기 때문입니다. 방법의 한계입니다. 디딤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침돌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도저히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부정적인 중심사고를 절망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사람들 말로 하면 " 이 친구 예수님 만날 팔자가 아닌가 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귀찮은데 잘되었다. 그만 가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 핑계거리를 찾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핑계거리를 찾으면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끝없는 핑계거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사람들 때문에, 목사님 때문에, 교회 때문에, 자식 때문에, 환경 때문에, 돈 때문에, 회사 일 때문에, 사업 때문에, 누구 때문에, 구실과 핑계는 얼마든지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핑계가 많으면 은혜 받기가 어렵고, 신앙이 자라지 않고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믿음은 장애물을 극복하면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장애물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 필요한 것이고 은혜가 크게 느껴지면 질수록 간증 거리는 더욱 많아 지는 것입니다.
중풍병자와 이들을 보십시오.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얼마나 거추장 스럽겠습니까? 계단을 오르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리고 지붕을 뜯어 침상을 내릴 만나 구멍을 내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틴 가옥은 지금처럼 아파트가 아닙니다. 지붕은 덤불이나 갈대에 진흙을 이겨서 평평하게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쉽게 뜯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남의 집입니다. 밑에는 예수님과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설교하는 시간입니다. 상식에도 맞지 않고 예의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평상시가 아닙니다. 평상시에는 상식이나 예의가 통하지만 목숨이 걸린 전시입니다. 위기상황입니다. 열차에 휘말려가는 숙녀가 있다면 손이 아니라 머리라도 잡아 끄집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열차에 빨려 들어가는 숙녀를 보며 숙녀의 손의 예의 상 어떻게 잡느냐고 있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선 순위의 문제입니다. 중요성의 문제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죽어가는 데 예의만 찾고 상식만 찾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상식이 거슬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앞에 서는 것입니다.
장애물이 다가오면 방법의 한계성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꼭 골리앗을 이기는 데 칼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홍해를 건너는데 꼭 배가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데 꼭 성을 부술 대포가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신의 방법에 노예가 되어 그것으로 안된다고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성실성입니다. 끈기입니다. 끈기보다 성실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해주실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예수님을 만나면 된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포도주를 꼭 포도로만 만들지 않았습니다. 물로도 만들었습니다. 믿음은 내 방법을 고집하는 사고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중심 사고의 변화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육신의 질병 뿐 아니라 영적인 질병 죄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질병에서 놓임 받았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막 2:11)" 오늘 이 말씀이 저와 우리 성도님의 심령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이 되길 바랍니다.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막 2:11)" 모든 무거운 짐들로부터 일어나길 바랍니다. 그릇된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안된다. 못한다. 죽겠다. 힘들다. 외롭다. 고통스럽다. 불안하다. 끝났다. 어림없다. 짜증난다." 등의 그릇된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조지아 주립대학의 데이비드 슈워츠 교수는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를 말하면서 "성공하는 사람은 키나 체중, 학력이나 집안 배경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크기에 따라 평가된다."고 말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나는 안되어도 우리 하나님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만나면 나는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면 내 인생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 우리 가정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를 보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 인생도 이런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은 전례의 노예가 아닙니다./김필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