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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김필곤목사

세상을 밝게 하는 신앙인

세상을 밝게 하는 신앙인
엡5:8-14

2 주 전에 유성에서 마릴라 국제 기독학교를 세우기 위하여 이사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모일 장소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학교 휴게실에서 모이자고 해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길게 회의를 하다 보니 저녁 10시가 넘었습니다. 잠을 자려고 하는데 잘 곳이 없었습니다. 차속에 잘 수도 없고 여관을 가려고하니 대부분 러브 호텔이라고 하니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한 목사님이 찜질 방에서 자고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선입견에는 찜질방에 대한 생각이 부정적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예수 믿고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하겠다고 생각을 하면 사는 사람입니다. 갖은 것은 없지만 빛의 자녀답게, 왕같은 제사장 답게, 왕자답게 품위있게 살아야하겠다가 품위 있게 죽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김필곤 목사 찜질방에 자다 화재로 죽다라고 신문에 나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때까지 찜질방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습니다. 빛의 자녀들이 갈만한 곳이 못된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들어가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둠의 문화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 목사님께서 건전하고 좋다며 찜질방에서 자고 가자고 계속 설득해서 설득당해 난생 처음으로 찜질방에 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좋았습니다. 따뜻한 곳에서 목욕도 하고 방도 있어 여러 목사님이 함께 잠을 자고 왔습니다. 그곳은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빛의 자녀인 우리 성도님들도 어둠의 문화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저와 같은 고민을 생활 가운데 많이 할 것입니다. 집을 사고 팔 때 세금 문제로, 직장 생활, 가정 생활, 자녀 교육 문제로 빛의 자녀로서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해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가 쓰여질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에베소시는 그 당시에 인구 20-25만 정도나 되는 지중해 연안에서 다섯 번째 손가락에 들어갈 만큼 상당히 큰 규모의 도시였답니다. 가장 큰 특징은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에베소에 사는 모든 시민들은 그 아데미 신전의 신전지기가 되는 것에 대해서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소아시아의 많은 순례객들이 들어와 아데미 여신에게 경배도하였고 돈을 맡겨 은행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도 파괴되지 않는 가장 안전한 곳이 신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신전이 그들 생활의 중심이 되다 보니까 이교문화권에 속해 있었는데 온갖 도덕적 타락과 부정이 성행하였다고 합니다. 예배의식으로 매춘을 하고 살인자들, 도적들, 강도들이 피난하는 자유로운 도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그들에게는 착함보다는 악함이, 의로움 보다는 부패함이, 진실함보다는 거짓과 속임수와 가증스런 탐욕이 횡행하는 도시기 된 것입니다. 이곳에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개척하여 3년 가까이 목회를 했습니다. 이제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갈등이 많고 번민이 많았겠습니까? 저처럼 찜질방에 가야할 것인가? 노래방에 가야할 것인가? 술상무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 땅투기를 해서 돈을 벌어야 할 것인가? 탈세를 해야할 것인가? 모양은 다르지만 요즈음 우리가 격는 각가지의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이곳을 떠나 있으면서 편지를 합니다. 그것이 에베소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너희는 빛의 자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8절 보십시오. 전에는 어두움이었습니다. 어둠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의 노예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보십시오. 2장 1-3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공중 권세를 잡은 자를 따랐습니다. 외적으로 세상 풍속을 좇았고 내적으로는 욕심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닙니다. 4절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긍휼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7절을 보세요.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으로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빛의 자녀답게 살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밝게 하는 빛의 자녀입니다. 어두운 이 세상이 우리로 인하여 밝아져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직장이, 우리가 사는 가정이,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우리로 인하여 밝아져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빛의 자녀로 세상을 밝게 할 수 있겠습니까?

결론적인 말씀 14절을 보십시오.
1. 깨어서 일어나야 합니다.(14)
잠자는 자는 깨어나야 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 함께 파묻혀 죽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박차고 일어나야 합니다.
1)잠자는 자리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기도의 잠에서 깨어나고 예배의 잠에서 깨어나고 봉사의 잠에서 전도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소명을 잃어 버리고 배 밑창에서 잠자는 요나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소명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이미 악하다고 알려진 일들을 서슴 없이 행하고 있다면 그 심령은 어두움에 잠자는 심령입니다. 말씀이 경고를 주는데도 회개를 경시하고 악한 습관의 노예가 되어 있다면 이미 심령이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이 잃고 매일 걱정과 근심 속에서 살고 있다면 심령이 잠을 자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이 살아지고 불평과 원망이 마음에 가득 찼다면 심령이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의 대상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어둠에 취해 산다면 이미 영적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사모하지 않고 기도가 지루하고 찬양이 따분하다면 이미 영적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봉사가 귀찮고 사는 것이 짜증나고 전도하는 것이 두려우면 이미 영적 잠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밝히는 빛의 자녀로 살려면 이 영적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좀더 쉬자. 좀더 눕자. 좀더 졸자하면 도적이 들어옵니다. 사단의 세력이 우리를 포로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2)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죽음의 자리는 사탄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패배의 자리이며, 절망의 자리이며 죽음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이미 해방된 사람입니다.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허무와 좌절, 허탈, 죽음의 공포로 산다면 우리는 그 자리를 떨쳐 버리고 일어나야 합니다. 나인성에 일찍이 남편을 잃고 홀로된 여인을 보십시오. 아들 하나 있는데 아들 마져 죽었습니다. 죽음의 행렬이 성밖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 만나 삶의 행렬로 바뀌었습니다. 절망의 행렬입니다. 예수님 만나 소망의 행렬로 바뀌었습니다. 동정을 받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만나 영광을 드러내는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청년은 아직 죽을 때가 아닙니다. 절망할 때가 아닙니다. 비관할 때가 아닙니다. 일어나 사명을 이루어야 할 사람입니다. 빛의 자녀인 여러분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실패의 자리에서, 좌절과 절망의 자리에서 슬픔의 자리에서,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밝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의 빛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서 비춰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사 60:1)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사 60:2)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사 60:3)"

2.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해야 합니다.(11)
빛과 어둠은 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빛이 오면 어둠을 물러가는 것이고 빛이 꺼지면 어둠이 지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어두운 거대한 세력에 참여하지 않고 도리어 책망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숯을 가까이 하면 나도 모른 사이에 숯가루가 몸에 묻게 됩니다.
1)어두움의 일에 동참하지 말아야 합니다.
11절과 7절은 같은 말로 번역되었지만 약간 의미가 다릅니다. 7절은 우리가 악한 일들에 대해 죄인과 함께 행하지 말라는 것이고 11절은 우리들이 그러한 일들에 대하여 관심을 드러내지 말라는 말입니다. 심리적 관심으로 부도덕을 즐기지 말고 마음과 상상으로 그것을 즐겨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에베소 교인들 참 적습니다. 좋은 예배당도 없습니다. 거대한 세속의 물결에 거슬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 선생님은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 어움의 일에 동참하지 말합니다. 동참하지 않는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숨을 잃을 수 있고 직장에 쫓겨날 수 있고 가족으로부터 모든 사회로부터 추방당할 수도 있습니다. 소속된 집단으로부터 왕따 당하는 것입니다. 불의에 동참하지 않는 자리 얼마나 힘들고 어렵습니까?
어두움의 일이란 어둠의 자식들이 하는 것입니다.
어둠의 일은 엡5:3,4에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라고 말씀합니다. 엡4:25-32에는 거짓, 분냄, 도적질,악독, 노함, 훼방, 악의 등이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에베소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이것들에게 대하여 부담없이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둠의 자식이 아니라 빛의 자녀들입니다. 동참하지 말라는 말은 수도원 주의가 아닙니다. 온 종일 세속적인 삶에서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피한단 말입니까? 어떤 사람 음욕을 피하라 하니까 여자의 손을 잡을 수 없으니까 손수건 끝을 잡고 서고 기도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은 고전5:9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고전 5:9-10)"
예수님을 보십시오.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라고 불리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한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를 한 것이 아닙니다. 빛을 드러내 세상을 밝게 한 것입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과 함께 행하지 아니하면서도 그들과 사귐을 갖기는 어렵지만 해야 합니다.(예 술 먹는 친구) 그들의 인격에는 관심을 갖지만 그들의 삶 속에 있는 혐오스런 죄에 대해서는 하등의 관심이 없음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 방법은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소극적인 방법입니다.

2)적극적으로 도리어 책망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단순하게 꾸짖고 정죄하고 비난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흔히 책망하면 불쾌감을 보여 주고 기각하고 꾸짖고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도덕적 교훈 수준이 아닙니다. "그러나 도리어 책망하라"라는 말씀은 증거를 방편으로 납득시켜라는 말입니다. 증거를 제시하여 수긍하고 따라 오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적극적인 방법입니다. 술의 노예가 된 사람에게 있어서 그가 술을 마시므로 건강이 손상되고 사회적인 의미에서 폭주를 통해 그 결과가 악하게 나타나다는 것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엡 5:5)"
예수 그리스도는 세리와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로 우리는 이일을 위해 부름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과 관계를 끊어서는 안됩니다. 자기 의를 자랑하는 바리새인 같이 우리들의 깨끗함과 우월감을 보여 주거나 우리들의 혐오감과 불쾌감을 보여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하여 알게 하여야 합니다.
3)그렇게 함으로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납니다. 나타나는 것마다 빛이 됩니다.

3. 빛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9-10)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으로 자꾸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것은 기본입니다. 복음의 능력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고등학생이 되었는데도 1+1=2라는 것에 끝없이 안주하면 안됩니다. 자꾸 위로받고 칭찬받고 격려받고 복받는 것으로 만족하려 하면 안됩니다. 10년 동안 신앙 생활해도 다람쥐 챗바뀌 도는 신앙 생활로 안주하려고 합니다. 조금만 부담스러운 설교를 들으면 상처받았다고 합니다. 시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 국회의원 111명 국회에 들어가도 세상을 밝게 하지 못합니다. 바다는 2-3% 소금만 있어도 정화하고 부패를 방지하는데 기독교인 25%가 되어도 세상을 밝게하지 못하고 정화하지 못하는 형편이 됩니다. 선교 제 2 대국이 되고 성경을 가장 많이 발행하고 가장 많이 기도하고 가장 많이 예배드리는데도 세상을 밝게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은혜로 구원받은 것은 기본이고 출발점입니다. 여기에서만 머물러서는 아니됩니다.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위대한 특징입니다. 프리즘을 통과하면 7가지 색이 보입니다. 빛의 열매는 세가지입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 의로움, 진심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빛을 받고 사는 우리에게 선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이기적이거나 자기 중심적이 되지 않게 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게 합니다. 악한 것을 막아 주려고 합니다. 언제나 이러한 일을 할 기회를 찾게 합니다. 자비로 가득차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하게 할 것이 무엇인지를 늘 생각하게 합니다. 일을 공정하게 합니다. 속임이 없고, 위선이 없게 합니다. 이것을 짐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특권입니다. 청와대에 대통령이 들어가 사는 것은 대통령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듯 우리가 진실과 의와 선으로 사는 것은 특권입니다. 우리는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동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시간도 구별해 놓았고 땅도, 곡식도, 동물도, 아들도, 나라도, 돈도 구별해 놓고 구별된 삶의 특권을 누리라고 말씀합니다.
얼마전 신문 보았지 않습니까? 의사가 교사와 결혼하는데 예단비 1억, 32평 아파트, 중형 승용차, 명품 코트를 요구하였다가 결국 신혼 여행 갔다가 3000만원인가 4000만원 빚졌다고 하니까 결혼 신고도 하지 않고 이혼 소송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얼마나 세상을 어둡게 하는 이야기입니까? 그러나 소녀 소녀 가장이 동생과 함께 짜장면을 먹는데 생일을 축하해 주면서 돈이 없어 동생만 먹고 있으니까 주인이 그것을 알아보고 죽은 어머니의 친구라고 하며 탕수욕을 갔다 주고 나중에 또 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우리가 신이나고 세상을 밝게 하는 이야기입니까? 나중에 남편이 정말 친구 아이들이냐고 물으니까 아니다고 말하며 아이들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다중에도 또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랬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밝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렇게 선하게 행하는 것 참 세상을 밝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 빛의 자녀들이 하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한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착함과 의로움 진실함과는 다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근본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지그문트 프로이드 인간 행동은 두 가지 동기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성충동과 위대해지려는 욕망이라고 합니다. 동기가 중요합니다. 선을 행하고 공의를 행하고 진실을 행하는 것이 또다른 목적을 위하여 하는 것이라면 그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면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할 수 있습니다. 일을 목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실의 위대한 특징은 그가 주께 정말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긍극적인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사는 사람은 선한 도덕적인 사람 종교적인 사람일 뿐입니다.
이웃에게 악평을 듣기 싫어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선을 행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도덕주의 자, 성인 군자를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장 최종적인 동기는 주를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알려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의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밝게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을 밝게하는 신앙인/김필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