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맥스웰 (John C. Maxwell)의 저서 ‘존 맥스웰의 성공이야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늦은 밤, 미국 필라델피아의 작은 호텔에 노부부가 들어와 호텔 직원에게 “예약은 안했지만 혹시 방이 있느냐”고 문의했습니다. 호텔 직원은 우리 호텔에는 방이 없다며 노부부를 위해 다른 호텔에 방이 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근처 어느 호텔에도 방이 없었습니다. 호텔 직원은 노부부에게 “객실은 없지만, 비도 오고 새벽 1시나 되는 늦은 시간이니 차마 가시라고 할 수가 없군요. 누추하지만 제 방에서 주무시면 어떨까요?” 라고 말했습니다. 노부부는 처음에는 사양했지만 직원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 직원의 방에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체크아웃하면서 노신사는 종업원에게 “당신은 미국에서 제일 좋은 호텔 사장이 되야 할 분 같군요”라는 칭찬의 말로 고마움을 표현했습니다. 2년이 지난 후, 호텔직원은 뉴욕행 비행기표와 함께 자신을 방문해 달라는 노신사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노신사는 뉴욕에 도착한 직원을 데리고 중심가로 간 다음 대리석으로 만든 궁전 같은 호텔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 호텔은 당신이 경영하도록 내가 지은 것입니다.” 이 호텔은 바로 현재 국가원수들의 단골호텔로 각광받는 뉴욕의 윌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입니다. 노신사는 바로 사장인 윌리엄 윌도프 아스토(William Waldorf Astor)였습니다. 그리고 그 호텔 직원은 초대 총지배인이 되었던 조지 볼트(George Boldt)였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사람에게 성실하게 대하여 이러한 복이 임했다면 하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사는 코람 데오(Coram Deo) 즉 하나님 면전(面前)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어찌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시겠습니까?
베드로는 본서를 통해 종말에 대해 말합니다. 노아의 홍수로 세상이 물심판을 받았듯이 종말에는 불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그 날에는 악인들에 대한 심판도 있을 것을 경고합니다. 동시에 재림의 지연으로 인하여 불안해하는 성도들에게 재림을 준비하는 합당한 자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죄가 관영하여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 받을 세상에 더 이상 마음을 두지 말고 재림과 함께 이루어지는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의 재림은 성도들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재림이 가까워지는 종말의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깨어 있으라고 경고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7절을 통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세상의 향락과 정욕에 도취되어 잠이 들지 않도록 경성해야 합니다. 기도하여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게을리 하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본문을 보니 주께서 천년을 하루 같이 참아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루를 천년 같이 여기시고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래 참아주신다고 경홀히 여기지 말고 회개하고 믿음에 견고히 서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말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합니까?
첫째로 거룩한 행실을 보여야
남극에서 빙하를 연구하던 과학자들이 이상한 현상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바람이 거세게 불자 바다에 떠있던 빙하들이 떠밀리기 시작했는데, 유심히 보니 거꾸로 바람을 거슬러 오르는 빙하가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조사를 해 보았더니 이유가 있었습니다. 비교적 얼음덩이가 작은 빙하들은 바람이 부는 대로 떠밀려 갑니다. 그렇지만 바다 속에 엄청난 크기를 가지고 있는 빙하들은 바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다 밑의 조류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부분이지만 속에 엄청난 크기를 가지고 있는 얼음덩이들은 위에서 불어대는 바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다 밑의 조류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시류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다릅니다. 믿음 없이 시류를 쫓아가는 이들의 삶은 바람이 부는 대로 떠밀려 갑니다. 그러나 믿음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은 거슬러 올라갑니다. 세상풍조와 상관없이 묵묵히 거룩한 행실을 보이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역사학자 플리니우스가 로마의 트라얀 황제에게,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고하는 편지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음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도둑질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약속을 어기지도 않습니다. 거짓말은 결코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부채 문제에 대해서도 절대로 깨끗합니다.” 플리니우스 당시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거룩한 행실을 나타내며 사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본문 11절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여기의 거룩한 행실은 구별된 생활을 의미합니다.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거룩한 백성의 조상이 되려고 했을 때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죄악의 세상과 함께 어우러지지 아니하고 구별된 생활을 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거룩한 행실은 죄를 회개하고 깨끗해지는 행실을 말합니다. 거룩하지 못한 죄인은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결코 설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모름지기 성도들은 거룩함을 보여야 합니다. 거룩한 성도답게 세속을 멀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과 말과 행동의 기준이 되어 거룩한 행실을 보이는 진실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경건한 태도를 가져야
1990년 주한 미국 대사를 역임한 제임스 레이니(James T. Laney)가 임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서 에모리 대학 교수를 할 때의 일입니다. 출퇴근을 걸어서 하였는데, 어느 날 쓸쓸하게 앉아 있는 노인을 보고 찾아가 말을 건넸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2년 동안 노인과 교제하였습니다. 가끔 그의 집에 가서 잔디도 깎아 주고 차도 마시고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노인이 안 보이기에 집으로 찾아갔더니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장례식장에 갔는데 유족이 봉투를 하나 전해 줍니다. 노인은 워낙 검소하게 살았고 본인의 이야기를 안 해서 몰랐는데 알고 보니 코카콜라 전 회장이었습니다. 봉투를 열어보니 유언장이 있었는데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나의 친구 레이니, 고마웠소. 당신에게 25억 달러와 코카콜라 주식 5%를 유산으로 줍니다. 좋은 데 쓰시오.” 레이니는 유산 전액을 에모리 대학교 발전기금으로 기부했습니다. 엄청난 부가 굴러 들어왔지만 부에 도취되어 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부를 학생과 학교를 위한 발전기금으로 내놓았을 때 그에게 에모리 대학교 총장이라는 명예가 주어졌습니다. 레이니는 평소에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주위 사람을 살피고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경건이 놀라운 일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날마다 경건한 태도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본문 11절입니다. “이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여기의 경건은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이며 하나님을 닮아 가는 태도입니다. 모름지기 성도들은 경건한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청교도들은 경건을 중시해서 복장을 단정하게 입고, 눈을 곧게 떠서 앞을 바라보고, 말을 할 때에도 속된 언사를 쓰지 않고 경어를 사용하고,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에 힘썼습니다. 비록 청교도와 같은 경건 생활은 할 수 없다 해도 세상의 비방을 받아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경건한 태도를 통해 어려운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를 통해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 기쁘게 주를 맞이하여야 합니다. 경건한 태도와 모습을 보고 ‘과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다르다’는 말을 세상으로부터 들어야 할 것입니다. 경건은 겉치레가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간절한 사모가 있어야
초대교회 서머나 교회 감독 폴리갑(Polycarp)의 순교 이야기입니다. 그는 형장에서 마지막으로 개종할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그 때 폴리갑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86년 동안 하나님을 섬겨 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소.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가 있겠소.” 그리고 화형을 당하여 목숨을 잃었습니다. 폴리갑은 사도 요한의 제자입니다. 요한으로부터 재림신앙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머지않아 다시 오실 주님을 뵈올 텐데 내가 어떻게 주를 부인한 채로 그분을 뵈올 것인가?” 이런 생각으로 폴리캅은 순교의 잔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말과 행동과 삶으로 증언하는 내용은 “주께서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증언을 믿고 주가 다시 오시는 날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여야 합니다.
본문 12절입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에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여기의 “하나님의 날”은 주 예수의 재림하시는 날을 의미합니다. 그 날이 주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될 것이지만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에게는 구원이 완성되는 영광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을 기다리는 간절한 사모함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마땅히 있어야 합니다. 재림을 사모하며 소망 중에 기다리는 신앙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모름지기 참된 성도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신다는 주의 재림은 성도들의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1세기의 초대교회는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소수였지만 로마를 복음화 시켰습니다. 그 힘은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기대 즉 종말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침에 눈을 뜨며 “주여 오늘 오십니까?”라고 물었고 밤에 커텐을 닫으며 “이 밤에 오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늘 “마라나타, 주께서 다시 오십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은 마지막에 대한 긴박감이 있었습니다. 핍박이 오고 고난이 생겨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종말의 빛에서 문제를 바라보았기에 희망으로 넘쳐났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진지한 영적부흥과 도덕적인 각성이 일어났던 시기는 종말론적 운동이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종말론은 최후 심판의 관점에서 오늘의 일을 평가합니다. 그러하기에 삶의 목적과 관심이 세상에 집중되어 있다면 그리스도인은 불신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종말의식을 잃어버린다면 세상을 살릴 능력을 잃어버리고야 말 것입니다.
지혜로운 인생은 종말을 준비하는 신앙입니다.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을 깨어 준비하여야 합니다. 주께서 언제 오시더라도 맞이할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 주께서 오신다고 할지라도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며 기쁨으로 맞이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편하고 안락한 생활이 주는 세상적 즐거움 때문에 주의 오심을 준비하는 일을 미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미리 아신 예수께서 “내가 다시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보겠느냐”고 탄식하셨습니다. 주를 섬기는 일에 결코 게으르며 태만하지 마십시오. 주께서 오실 때 부끄러움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이 가까이 올수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부디 거룩한 행실을 보이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경건한 태도를 갖추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 날에 상급 받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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