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김광일목사

교회에 주신 은혜-고후 8:1-9

주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작가 정연희(鄭然喜)의 장편소설입니다. 주인공 맹의순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27세에 세상을 떠난 실제 인물입니다. 평양 장대현 교회 맹광호 장로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해방 후 월남하여 한신대학에 다니던 중에 6.25 전쟁이 일어났고, 인민군에게 붙잡혀 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남쪽으로 피난을 가다 인민군 패잔병으로 몰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됩니다. 수용소에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항상 찬송을 부르고, 시편 23편을 외우면서 부상을 당한 중공군 포로들의 간호를 위해 봉사하며 복음 전파에 힘썼습니다. 그들의 발을 씻겨 주었고, 죽어가는 결핵환자를 붙잡고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2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는 가운데 맹의순은 포로수용소의 포로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됩니다. 그 후 억울함이 받아들여져 석방이 결정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그는 수용소에 남아 포로들을 계속 돌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성 프랜시스의 헌신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 프랜시스의 기도를 인용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 어찌 천국을 즐기겠습니까? 주여, 저주 받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시든지, 아니면 저를 지옥으로 보내 고통 받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소서. 그리고 만일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없다면 차라리 지옥에 살며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겠습니다. 나로 하여금 이곳에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그는 성 프랜시스의 기도를 몸소 실천하려 한다면서 친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결코 희생도 아니고 어떤 것도 아닐세. 이곳에 있는 형제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고난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결국 과로로 그는 27세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중공군 포로들은 통곡을 하며 추도의 글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우리처럼 포로의 옷을 입은 그가 미군의사들을 도우며 병동을 찾아오던 초기에 우리는 그를 경멸하고 무시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늘 온화했고, 우리를 돕는 행동은 희생정신으로 언제나 꾸밈없이 한결같았습니다. 1952811, 새벽 3, 그날도 맹선생은 환자들을 다 씻어준 다음, 언제나처럼 시편 23편을 중국말로 더듬더듬 읽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외치더니, 그 자리에 쓰러지셨고, 결국 우리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우리는 심히 통곡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맹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맹선생과 함께 주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통곡합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쳤습니다. 은혜의 잔이 차고 넘쳤습니다.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3차 전도여행길에 오른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머물며 아시아지역을 중심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에베소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 교회가 혼란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가 점차 안정되어간다는 소식을 디도를 통해 듣게 됩니다. 그리고 마게도냐 교회들도 하나님께 은혜 받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마게도냐 교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무엇입니까? 용서 받을 조건을 갖추지 못한 마게도냐 교인들은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관대함을 입은 것입니다. 흔히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 물질적인 복을 베푸시거나, 일이 잘되게 해주시거나, 말씀에 감동을 받는 것들 즉 나를 위한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구제하고 헌금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 구제하고 교회를 위하여 봉사할 마음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구제와 봉사를 할 때 가능하도록 능력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게도냐 교회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은혜입니까? 그리고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첫째로 기쁨으로 행하는가

아프리카 선교사 데이빗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연을 할 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선교사 직분을 맡기셨다는 사실에 대해 기쁨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희생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지고 있는 엄청난 빚을 생각한다면 그것을 어찌 희생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결코 그 빚을 갚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수고한 것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해 볼 때,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결코 희생을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자기 자신을 바치시려고 아버지의 높은 보좌를 떠나신 그분의 위대한 희생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그것을 희생이라 말해서는 안 됩니다.” 리빙스턴은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기쁨으로 하였습니다. 무엇도 그의 기쁨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큰 기쁨,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없을지라도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행복했습니다. 기쁨으로 일하면 사탄이 물러갑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쁨이 넘치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2절입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마게도냐 교인들은 현실을 초월한 기쁨이 항상 내재해 있었습니다. 그 기쁨은 모든 역경을 감당해 나갈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고통을 겪으면서도 넘치는 기쁨을 맛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은 후 닥치는 시련을 당하면서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넘치는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의 기쁨은 외적인 기쁨이 아니라 내적인 기쁨입니다. 속사람이 맛보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영혼이 하나님을 만날 때 기쁨이요 속사람이 말씀을 깨달을 때 맛보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기도 응답을 체험하게 될 때 얻는 기쁨입니다. 내적인 기쁨은 외적 상황과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위기와 환란의 시련 속에서 더 강렬하게 기쁨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비록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쁨이 넘치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자원하여 드리는가

알버트 슈바이처 (Albert Schweitzer)는 친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자신의 생애를 고백했습니다. “자네가 이 편지를 받기 전에 아마 난 죽을 것 같네.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더라도 슬퍼하지 말게나. 나는 세상에서 제일 축복받은 자로 생각하고 싶네. 불쌍한 사람들을 섬기는 사업에 60여 년간 자원하여 헌신할 수 있었고, 90세의 노구를 이끄는 이 순간까지 계속할 수 있음은 과거나 현재나 변함없이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섭리이신 줄을 확신하고 진심을 다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고 싶네.” 슈바이처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애를 끝마치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평화로운 상태에서 자신을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삶이 채워진다면 자원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마게도냐 교인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 가운데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가진 것은 없지만 자원하여 나누려 한 것입니다. 자원하여 드림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본받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은 억지로나 사람 앞에서 부득이한 마음으로 연보하지 않았습니다. 구제 헌금 하는 일에 바울이 권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연보의 뜻은 단순입니다. 단순은 연보의 본질입니다. 복잡한 마음이 없이, 단순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목적으로 드려야 합니다.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는 주께 대한 감사로 드리며, 고난 중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애정에 자원하여 나누는 헌금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원하여 드리는 희생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사랑으로 섬기는가

우리나라 초대 교회 지도자 가운데 최흥종(崔興琮)은 전라도 광주에서 처음으로 예수 믿고 세례 받은 사람입니다. 광주 교회의 최초 장로, 광주 출신 최초의 목사가 된 그는 원래 장터와 뒷골목을 주름잡던 주먹이었습니다. 후에 마음을 잡고 포사이드(Wiley Hamilton Forsythe) 의료 선교사를 만나 조수로 일하게 됩니다. 포사이드가 광주로 올 때 길 안내를 했는데 도중에 구걸하는 거지를 만납니다. 나병에 걸려 잘 걷지 못하는 여자였습니다. 최흥종은 무의식적으로 피했는데, 포사이드는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 그녀를 안아 말에 태우고 자신이 고삐를 잡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멀찌감치 따라가던 최흥종에게 이 모습은 이해할 수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광주에 도착하자 포사이드는 길에서 만난 나병환자를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그런데 먼저 와 있던 환자들이 나병환자하고 함께 지낼 수 없다고 반발하는 바람에 벽돌을 굽던 가마터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에서 포사이드 선교사는 나환자를 직접 안아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최흥종은 바라만 볼 뿐이었습니다. 순간 환자를 옮기던 중에 환자가 들고 있던 지팡이가 떨어졌습니다. 선교사는 지팡이를 집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끝내 나병환자가 가지고 있던 피고름이 묻은 지팡이를 집을 수 없었습니다. 그날 밤부터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왜 그는 하는데 나는 하지 못하는가? 나는 내 동족인데도 피해 도망했는데 어떻게 그는 자식 대하듯이 안을 수가 있었나? 그와 나 사이에 무엇이 다른가?” 마침내 답을 얻었습니다. “그렇다. 사랑의 차이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렇게사는 것이다. 나도 사랑으로 살아야겠다.” 그리고 최흥종은 무등산 골짜기에 집을 짓고 나병환자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이 치료 받도록 재산을 내놓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나병 전문 요양원인 광주한센병원이며 후에 여수 애양원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기근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 성도들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가 임할 때 가능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진실함을 증명하는 길은 형제된 성도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구체적인 행동이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사정을 들으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구제를 작정하였습니다. 사랑한다면 아낌없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아낌없이 드리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생명까지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마게도냐 교인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사랑에 견주어 고린도 교인들의 사랑이 진실한 것임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사랑으로 섬기라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영국의 시골에 살던 두 명의 젊은이가 도시로 옮겨와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시골교회의 따뜻한 분위기와 다른 도시 교회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일 년이나 지났지만 아는 척하는 교인이 없었습니다. 두 청년은 너무하다는 생각에 결단하였는데 내용은 서로 달랐습니다. 한 청년은 다음 주까지 교인들이 아는 체 하지 않으면 이 교회를 나오지 않겠다고 결단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청년은 다음 주에 아무도 아는 체 하지 않으면 먼저 말을 걸겠다고 결단했습니다. 다음 주에도 교회는 두 청년에게 아무도 아는 체 하지 않았습니다. 결단한 대로 한 청년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반대로 다른 청년은 교인들을 찾아가 말을 건넸고 적극적으로 교회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청년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 안에 가르치는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교회의 어린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놀랍게 변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소중하게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너무도 기뻤습니다. 후에 청년은 신학교에 가서 훈련을 받고 목회자로 성장했는데 이 청년이 바로 청교도 시대를 대표하는 리차드 백스터 (Richard Baxter) 목사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교회를 바라보는 구경꾼입니까? 자발적 참여자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받고 적극적으로 교회 안에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소중한 일원으로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의 교회로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은혜를 통해 어떠한 시련이라도 넘치는 기쁨으로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자원하여 드리는 일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섬기는 일을 행함으로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거룩한 일에 동참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