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나와 내 집은-수 24:14~18
유고슬라비아의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서 가난한 사람들의 어려움을 동화속의 사건 정도로 이해하던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학교를 졸업하고 도시의 가장 부유층이 다니는 사립학교의 교사로서 재직했기에 가난한 사람들의 형편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또 잃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명소리가 나서 쫓아 가보았더니 위독한 환자가 있었습니다. 급하게 환자를 들쳐 업고 병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돈이 없는 사람은 받아 줄 수 없다며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이번에는 신분이 낮은 사람은 치료할 수 없다고 거절당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병원으로 옮기는 사이에 그 환자는 여성의 품에서 죽었습니다. 죽어가는 환자를 붙들고 이제부터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 곁에 있겠노라고 여성은 결단했습니다. 마더 테레사(Madre Teresa)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우리가 결단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결단하면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본문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겜으로 소집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회고하면서 백성들과 함께 신앙 서약식을 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므로’로 시작하고 있는데,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발람에게서 건져주셨고, 여리고의 일곱 족속을 넘겨주셨으며, 또 아모리 두 왕을 쫓아내어 주신 사실,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을 주시고,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 열매를 먹게 하신 사실 모두가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절박한 심정으로 이스라엘에게 결단을 촉구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14절의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라’의 ‘경외’가 복수로 기록되어 있는데 반해 16절의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의 ‘대답’은 단수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을 섬기라고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말했지만 그 응답은 개인이 하여야 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여호수아가 결단을 촉구할 때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개인적 의지로 결단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부모는 가정에서 자녀들의 신앙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순간순간마다 바르게 결단하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 받는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처럼 ‘오직 나와 내 집은 하나님을 믿겠노라’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강력한 결단을 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는 자기의 집과 더불어 무엇을 결단하였습니까?
첫째로 여호와를 경외하리니
1620년에 청교도 102명이 메이플라워호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북미 대륙 플리머스(Plymouth) 해안에 도착하였습니다. 청교도야말로 미국의 기초를 닦은 조상들입니다. 그들이 제일먼저 도착한 플리머스 앨러톤 스트릿(Allerton Street)에는 기념탑(National Monument to the Forefathers)이 세워져 있습니다. 높은 탑 위에 네 사람이 서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자유(Freedom)의 상징이요, 한 사람은 법(Law)의 상징이요, 한 사람은 도덕(Morality)의 상징이요, 또 한 사람은 교육(Education)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네 사람 위에 다른 대가 하나 있는데, 그 위에 여자가 한 손에 성경을 펴 들고 한 손은 높이 들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자유 민주국가를 이룩하기 위해서 자유, 도덕, 법, 교육이 필요하지만 그 위에 성경을 기초로 하는 하나님 경외하는 신앙(Faith)도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 종교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미국은 청교도 정신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세워졌기에 그 후손들이 강성하고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여기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전적인 의미로 경외는 ‘두려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두려움은 신앙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아는 것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결코 건널 수 없는 본질적 차이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기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영적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믿음의 중심에 영적 두려움인 경외가 있어야 합니다. 공포로서의 두려움이 아니라 존경으로서의 두려움입니다. 천박한 사람일수록 윗사람에게 경망스럽게 행동하고, 품위 있는 사람일수록 윗사람에게 조심스럽게 행동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깊을수록 경외심은 높아집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과의 차이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는 당연한 감정이며 복된 길입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하나님을 경외함에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여호와를 택하리니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저자 안요한 목사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37년동안 무신론자로 살았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자랐는데도 무신론자, 즉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항상 원망과 불평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중도에 시력을 잃고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절망에 빠진 그는 자살을 몇 번씩 시도 했다가 실패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자살도 못할 정도로 심히 약해졌습니다. 어느 날, 지쳐 쓰러져 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바로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요한아! 요한아!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요한은 하나님을 떠났어도 하나님은 요한을 안 떠났다는 사실입니다. 그 음성이 들리는 순간, 그는 37년 동안 하나님을 부인하며 살았던 것을 철저히 회개하였습니다. 그 후 육신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영적인 눈이 뜨여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신학교를 가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앞을 못 보는 소경이 되고 나서 수지맞았습니다. 눈으로 보았던 37년보다 앞을 못 보는 지금 이시간이 더 행복합니다.” 천하를 가져도 하나님 없는 인생은 만족과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을 다 잃어버린다 해도 하나님을 택하였다면 감사가 있기에 행복한 것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섬기든지 이방의 신을 섬기든지 양자택일하라고 백성들에게 결단을 촉구하였습니다. 동시에 여호수아의 고백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을 선택하되 혼자가 아니라 가족이 함께 하나님을 택하겠다는 강한 결단입니다. 신앙은 개인 단위지만 신앙생활은 가족단위로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선택은 현실적인 삶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영적인 것은 삶 속에서 훨씬 더 중요합니다. 선택의 결과가 성공이냐 실패냐가 아닌 생명이냐 사망이냐를 가름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혼탁해져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수아는 ‘오늘날 섬길 자를 택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 구원은 개인으로 받지만 축복은 가족으로 받아야 합니다. 밥만 같이 먹고 사는 식구가 아닌 함께 하나님을 믿고 천국가야 할 사람이 바로 가족입니다. 누구라도 구원받지 못한 자가 있는 가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나와 내 집은 하나님을 선택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서로 도와야만 할 것입니다.
셋째로 여호와를 섬기리니
성경 고고학을 가르치는 찰스 셔어(Charles Shaw)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대부분의 자기 생애를 팔레스타인에서 고적답사와 연구를 하는 데 바쳤습니다. 선교사로서 고고학자로서 일하다가 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였는데. 그의 인격 앞에 압도당하지 않은 학생들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셔어 교수가 교통사고를 당하였습니다. 병원 방문을 하고 오신 학장은 소생할 가능성이 도저히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다시 소식이 들려오기를 소생할 가능성은 있는데 정신이 정상적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무의식 상태에 무언가 자꾸만 중얼거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학장이 직접 보고 오시더니 놀랄 만한 보고를 하였습니다. 셔어 박사는 절대로 정신 이상이 되지 않을 것이며. 건강도 회복되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 독백처럼 중얼거리는 것을 자세히 들어보니 시편 1편을 히브리어로 암송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무의식 속에서도 자신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그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호흡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랑, 그래서 분리될 수 없고, 파괴될 수 없는 마음으로 삶을 온전히드리며 오직 하나님만 섬겼던 분이셨습니다.
본문 1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니라.” 하나님을 섬기면서 다른 무엇을 섬긴다면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풀지 말고 말씀으로 온전히 신뢰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겸허한 자세로 섬겨야 합니다.
여호수아처럼 오직 나와 내 집은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선포할 수 있습니까? 자신의 신앙을 유지하는 데만 급급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나와 내 아내는, 나와 내 남편은, 나와 내 자녀는, 나와 내 집은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복된 가족이 되려면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신앙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만 섬길 수 있도록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신앙 결단 촉구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하였습니다.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과단성을 보여준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를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느꼈던 체험적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성도들에게 많은 권세와 재물을 약속하며 기회가 되는 대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집요하게 계속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여호수아의 촉구를 기억하고 계속적인 결단을 하여야 합니다.
수도사들은 마음이 세상을 향하게 하지 않으려고 눈을 세상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수도원 입구에는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이 있는데 이 문을 지키는 것도 젊은 수도사가 아니라 늙은 수도사가 문지기 역할을 합니다. 혹시나 시장이나 볼일이 있으면 젊은 수도사를 내보내지 않습니다. 늙은 수도사가 수도원 밖의 일을 보러 갑니다. 수도사들은 마음에 잡념이 들어오지 않게 하려고 오랜 경험을 가진 늙은 수도사가 바깥을 향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종일 말씀을 읊조리며 살고 잡념이 들어오지 않게 ‘엘리에손 끼리에’ 즉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를 반복합니다.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결단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우리 앞에 ‘하나님과 세상’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와 내 집은 지금 어떻게 결단하여야 합니까? 여호수아의 심정으로 바른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결단하여야 합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경외하여야 합니다. 여호와를 택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는 집이 되어 하나님의 축복 받는 가정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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