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25~32
슈테른베르그(Sternberg)는 독일의 화가였습니다. 당시에는 성화를 그리지 않으면 명성 있는 화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도 대가가 되고 싶어 성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반쯤 그렸지만 더 이상 영감도 없고 감동도 없었습니다. 그는 길거리로 나갔다가 멋진 여자를 만나 누드 그림을 그려 돈을 벌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여인에게 접근했습니다. “당신의 모습을 그리고 싶으니 모델이 되어 주면 사례하겠습니다.” 여인은 가난한 집시였기에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화실로 데려가 여인의 나체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집시 여인이 화실 한 편에 있는 그림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죽은 사람의 그림이 있었습니다. “선생님, 저 사람은 얼마나 무서운 죄를 지었기에 나무에 달려 죽었습니까?” 슈테른베르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예수라는 사나이인데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신 것이라오.” 그러자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던 집시 여인이 되물었습니다. “우리의 죄라구요? 그 분이 정말 선생님의 죄도, 나의 죄도 대신해서 죽으셨단 말입니까?” 그 순간 슈테른베르그의 가슴은 무너져 내리듯 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누드를 그리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대신에 그는 교회에 나가 엎드렸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정말 저를 위해 죽으셨나요? 제 죄도 주님께서 지시고 돌아가셨나요? 정말인가요? 주님, 알려 주세요.” 진정으로 회개하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다시 그린 그림이 바로 에케이 호모(Ecci Home) 즉 ‘이 사람을 보라’라는 성화입니다. 슈테른베르크는 예수께서 고난 받으시는 그림 아래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 하였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는 글귀를 적어 넣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없이 그림을 그리면 성경에 일어났던 사건들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이 감동하시면 내게 주시는 사건으로 닥아 오게 되며 성경의 메시지들이 내게 주시는 메시지로 전해집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피 흘리심이 바로 나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본문 30절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의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메 뤼페이테’인데 ‘고통과 슬픔을 유발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기에 죄 때문에 고통과 슬픔을 느끼십니다. 불의한 일에 대해 근심하는 감정을 갖습니다. 특히 본 구절은 새 사람을 입은 성도가 성령과 어떤 관계에 놓여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성령이 누구입니까?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을 통해 교회를 태동시키신 분입니까? 사도들을 통해 선교사역을 일으킨 분입니까? 능력과 은사를 주셔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입니까? 물론 이러한 성령에 대한 이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알아야 할 것은 성령께서 개인의 생애에 주도자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은사를 주실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 내주하셔서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친히 인도하시는 영이십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에는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증거가 여실히 나타나야 합니다.
성령은 삶의 방관자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구경꾼도 아닙니다. 거처할 곳이 없어서 오신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당신이 원하는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새 사람을 입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크고 작은 일을 자신이 주관하고 결정합니다. 자신의 욕구대로 따릅니다. 따라서 할 일을 빼앗기신 성령께서 슬퍼하며 근심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근심하지 않게 하려면 성령의 생각에 맞추어야 합니다. 성령께 집중하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근심하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첫째로 거짓을 버려야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이 미국 국민회(Korea National Assembly) 중앙총회장 직책으로 지방을 순회하던 중이었습니다. 기차를 타려고 정거장에 나왔을 때 한 간부가 말합니다. “이번 여행에 경비가 모자라 다른 목사의 신분증을 빌려왔습니다. 이것으로 목사 행세를 하시면 철도운임을 할인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자 도산 안창호 선생이 한참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이것을 사용하다가 들키면 신용이 떨어지고 또 목사의 신용도 떨어질 것이니 그럴 수 없는 일이오. 경비가 모자라면 다시 돌아가 돈을 더 장만해 가지고 길을 떠나도록 합시다.” 도산 안창호는 거짓을 행함으로 자신과 목사의 신용이 떨어지는 것 보다 한국인의 신용도가 떨어지는 것을 떠올린 것입니다. 의혹이 난무하면서 어느 쪽 말이 옳은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밝혀질 일들인데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꿈에 거짓말을 하였거든 깨어나서라도 반성하라”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참된 것을 말하며 거짓을 버려야 합니다.
본문 25절입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여기의 ‘거짓’은 ‘프슈도스’인데 ‘진실 되지 못한 행위’를 일컫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말하라’에 해당하는 ‘랄레이테’가 현재명령형으로 쓰인 까닭은 진실만을 말하는 행위가 지속되고 습관화 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을 버리는 것은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을 근심하지 않게 하려면 마귀가 틈탈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은 마귀의 특징이요, 마귀의 것입니다. 여전히 거짓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새롭게 창조된 자는 거짓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귀의 속성은 거짓된 것, 더러운 것, 악한 것, 간사한 것, 이간하는 것, 분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근심하지 않게 하려면 모든 거짓을 버려야 합니다. 거짓의 유혹을 멀리하여야 합니다. 이웃과 더불어 참된 말을 하지 않았다면 회개하여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은혜를 끼쳐야
불우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홀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먹을 것이 없어 아사 직전에 이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죽음을 느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때 구호단체 유니세프의 도움을 통해 소녀는 굶주림을 해결하고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소녀는 장성하여 세계적 영화배우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오드리 헵번 (Audrey Hepburn)입니다. 유명한 배우가 되었을 때도 유니세프 홍보대사가 되어 전 세계를 다니며 구호를 도왔습니다. 말년에 암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했습니다. 그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매력적인 입술을 가지려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가지려면, 사람들 속에서 좋은 것을 발견하라. 날씬한 몸매를 원하면, 배고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라. 아름다운 머릿결을 가지려면, 하루에 한번 그 머릿결을 어루만져라. 균형 잡힌 걸음걸이를 유지하려면, 당신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며 걸으라. 당신에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때, 당신 역시 팔 끝에 손을 갖고 있음을 기억하라. 나이를 먹어가며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당신이 두 개의 손을 갖고 있는 이유이다. 한 손은 당신 자신을 돕기 위해, 그리고 나머지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오직 덕을 세우며 살아야 합니다.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에게 은혜를 끼치라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본문 29절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바울은 먼저 더러운 말을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명합니다. 여기의 ‘더러운 말’에 해당하는 ‘로고스 사프로스’는 쓸모없는 말이며,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도록 하는 뜻의 단어입니다. 이러한 말들은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하게 만듭니다.
성령의 인도함 받는 자들은 덕을 세우는데 필요한 말을 해야 합니다. 여기의 ‘세운다’는 ‘오이코도멘’인데 단순한 건축의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요, 교회 공동체가 견실하게 성장해 가는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데 필요한 말을 하여 항상 은혜를 끼치며 살아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성령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셋째로 용서를 하여야
2015년 6월 17일,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찰스턴에 있는 이매뉴얼 아프리칸 감리교회(Emanuel Af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수요일 밤 성경공부가 열린 교회에 21살 백인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한 시간 정도 자리에 앉아 있던 청년이 갑자기 일어나 권총을 난사하기 시작했고, 9명의 흑인 교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교인들은 순식간에 남편을, 아내를, 딸을 그리고 목사님을 잃었습니다. 사건 이틀 후 범인 딜런 루퍼는 구치소에 감금된 채 화상재판을 받았습니다. 유족들이 가해자에게 이야기할 시간을 주는 주의 관행에 따라 법정에 나온 유족들이 가해자에게 발언하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유족들은 놀랍게도 가해자에게 용서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내게서 가장 귀한 것을 빼앗아 갔다. 하지만 당신을 용서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증오로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는 당신의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 경건한 크리스천으로서 증오범죄의 연쇄를 끊기 위해서는 죄를 용서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으므로 우리는 당신을 용서한다.” 얼마나 놀라운 용서의 고백입니까?
본문 32절입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여기의 ‘용서하기를’, ‘용서하심’으로 번역된 ‘에카리사토’와 ‘카리조메노이’는 모두 ‘카리조마이’ 즉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에서 유래한 동사로서 ‘은혜를 베풀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의 은혜를 먼저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새사람을 입은 성도는 비록 자기에게 상처를 입힌 원수 같은 사람일지라도 미워하거나 악심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하고 친절하게 대하며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합니까? 본성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통하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용서의 빚을 지고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따라서 용서의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진 빚을 갚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근심하지 않게 하려면 서로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는 행동을 지속적으로 반복해야 합니다.
릭 워렌(Rick Warren) 목사의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를 향해 파도를 보내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향해 끊임없이 성령의 파도를 보내주십니다. 성령의 파도를 몸으로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성령의 파도를 타고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교회를 몇 년 다녔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직분을 갖고 있느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성경을 많이 알고, 기도를 많이 했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근심하지 않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디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고 성령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든 거짓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끼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 용서하는 행동을 통하여 성령과 더불어 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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