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호 10:12~15
2차 세계대전 당시 6백만 유대인을 학살했던 독일의 히틀러에 대항하여 싸웠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는 “은혜를 값싸게 보는 우리의 견해는 교회의 가장 큰 원수인 것을 알아야 한다”고 경고하였습니다. 값싼 은혜는 회개 없이 죄의 사유가 가능하다는 설교이며, 교회의 규율을 무시하는 세례요, 죄의 고백 없이 베푸는 성만찬이요, 은밀한 참회 없는 면죄의 확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은혜를 값없이 받는 것으로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치르신 엄청난 희생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결국 구원을 거저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구원을 가볍게 취급하게 됩니다. 급기야 자신이 구원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대수롭지 않게 살게 됩니다. 은혜는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너무도 값비싼 것입니다. 본회퍼는 은혜가 값 비싼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은혜가 값 비싼 이유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대가로 주신 하나님의 희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비싼 것이 우리에게 쌀 리가 없다. 이같이 비싼 은혜가 은혜임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하나님이 아들을 내어 준데 있다. 귀한 은혜는 결국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을 뜻한다.” 우리의 처지에서 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처지에서 보았을 때는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기까지 베푼 희생적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저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은혜를 받은 우리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본문 31절입니다. “그런 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너무 감격하면 말문이 막히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 더 이상 할 말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실로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우리를 불러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의롭게 하시며 영화롭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사도바울의 결론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입니다. 아무 말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었던 이 감격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감격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의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까닭은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모든 것 주시니
국제 예수전도단의 진 다니엘(Jean Darnall) 목사가 과로로 쓰러졌습니다. 그녀는 병원에서 낙심하였습니다. “열심히 주를 위하여 살았는데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쓰러지게 하시나요?” 얼마나 절망감을 느꼈던지 혼자라는 느낌에 외로워졌고 이루지 못한 계획과 일들이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좀 더 강하고, 현명하고, 능률적이지 못했던 자신을 정죄하면서 동시에 엄청난 무력감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실패자라는 느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신다는 느낌으로 더욱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진. 나와 대화하고, 나를 사랑하고, 나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즐거워할 수 없겠니?’ ‘그렇지만 제게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일은 내버려 두어라, 네가 할 수 없으니까. 내가 너와 함께 있듯이 너도 네 안에 있으면 너를 통해서 모든 일은 내가 할 것이다. 너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지만, 나를 경배 할 수는 있지 않니? 그렇게 하면’ 그 순간 진 다니엘은 자신이 할 수 없었던 일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여전히 할 수 있는 한 가지, 병상에 누워있으면서도 할 수 있었던 그것을 하였습니다. 바로 주님을 찬송하고 경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그녀는 주님의 임재하심이 위로부터 흘러넘치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나는 격려를 받고, 용납 받았으며 사랑받았다. 그 분은 내 영을 소성시키시고 내 구원의 기쁨을 새롭게 하셨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이 되시며 나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고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였습니다.
본문 32절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의 “모든 것”은 원어로 ‘판타’인데 ‘영화롭게 되는 일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셨으니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도 당연히 주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풍성함을 베푸십니다.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영광을 거두시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영원하기에 구원도 영원합니다.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바울은 반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더 주저하시겠습니까? 모든 것을 주시는 사랑 때문에 결코 구원에서 멀어질 수 없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둘째로 의롭다 하시니
앨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예수를 경험하는 영성훈련’이라는 저서를 통해 영혼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그는 대학에 다니면서 신앙에 대하여 너무도 지적인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기독교를 더 알기 위하여 캠브리지 대학에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연구하고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 믿는 것을 지식적으로 인지하는데 그쳐있는 자신을 보고, 루이스(C. S. Lewis)의 책을 읽으며 도전을 받았으나 해결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하다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자신에게 빠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보만 축적했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삶속에 살아 계셔서 임재하시며 만나주시며 교제하시는 부분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기독교 영성을 연구하기 위해 성 버나드(Bernard of Cluny), 캔터베리의 안셀름, 마틴 루터, 존 칼빈, 로욜라(Ignatius Loyola)가 지은 경건서적들을 탐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교제하며 신비로운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맥그래스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를 만난 바울처럼 자신이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만나지 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부분이 핵심인 것을 알고 그들이 취한 경건의 방법을 따른 결과 맥그래스 역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롭다 여겨주시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죄를 범한 인생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음을 확인하고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행위로는 결코 의로워질 수 없으며 의롭다 하시는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의롭다 여겨주심은 우리에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본문 33절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의 “의롭다 하신”의 ‘디카이온’은 현재 분사형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현재형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절대로 정죄가 없습니다. 사탄이 허물을 지적하며 비난할지라도 놀랄 것이 없습니다. 사단은 재판할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재판관은 하나님이시고 그의 판결은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마귀가 고발할지라도 하나님은 고발을 기각하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 무죄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에게 지배되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시고 의롭다고 선포하셨으므로 우리를 고소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과거의 죄 역시 고발할 수 없습니다. 이 또한 주님이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의롭다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셋째로 이기게 하시니
초대교회 시절 손종모 목사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나갔습니다. 불신자 아버지로부터 갖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믿지 말라고 멍석에다 말아 매를 때리고 음식을 주지 않고 광에 며칠 동안 가두기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믿음을 버리지 고 교회를 나가자 화가 난 아버지는 아들의 목을 작두 위에 올려놓고 “예수 믿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어린 손종모는 눈물을 흘리며 도리어 아버지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작두를 팽개쳐 버리면서 “이런 독한 녀석, 죽일 필요가 있는가? 이제부터 자식으로 여기지 않으면 되지”하고는 집에서 쫓아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집에서 쫓겨났지만 신앙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신학을 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 핍박하던 부모님도 회개하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37절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기의 ‘넉넉히 이기느니라’의 ‘휘페르니코덴’은 현재 시제로 사용되어 ‘우리가 항상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두게 되는 완전한 승리를 나타냅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지혜에 의한 승리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승리입니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련을 이길 수 있는 이유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러주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시련을 통해 더 견고한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연단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어떤 시련과 박해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로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비틀거리고 쓰러지고 넘어져도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이길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렵고 힘든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셔서 넉넉히 이기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은혜가 충만할 때와 떨어질 때’라는 글입니다. “은혜가 충만하면 예수님이 크게 보이고, 은혜가 떨어지면 내가 크게 보인다. 은혜가 충만하면 천국을 사모하나, 은혜가 떨어지면 세상이 그리워진다. 은혜가 충만하면 말씀이 꿀송이 같으나, 은혜가 떨어지면 말씀이 지겹게 들린다. 은혜가 충만하면 책망을 들어도 감동이 되나, 은혜가 떨어지면 좋은 말에도 시험에 빠진다. 은혜가 충만하면 내가 죽으나, 은혜가 떨어지면 내가 살아난다. 은혜가 충만하면 남을 칭찬하고 높여주지만, 은혜가 떨어지면 자기를 자랑하고 높인다. 은혜가 충만하면 나를 깨뜨리나, 은혜가 떨어지면 남을 깨뜨린다. 은혜가 충만하면 자기 죄가 크게 보이나, 은혜가 떨어지면 남의 허물이 더 크게 보인다. 은혜가 충만하면 사람을 사랑하나, 은혜가 떨어지면 사람이 미워진다. 은혜가 충만하면 영혼이 귀하게 보이나, 은혜가 떨어지면 사람이 하찮게 보인다. 은혜가 충만하면 남을 섬기고 싶어 하나, 은혜가 떨어지면 대접을 받고 싶어 한다. 은혜가 충만하면 고생을 해도 찬송이 나오나, 은혜가 떨어지면 편한 생활에도 원망이 나온다. 은혜가 충만하면 범사에 감사가 넘치나, 은혜가 떨어지면 매사에 불평이 넘친다. 은혜가 충만하면 겸손이 절로 나오나, 은혜가 떨어지면 교만함이 배어 나온다.” 은혜로 충만하십니까? 은혜가 떨어졌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마틴 부버(Martin Buber)의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신다. 그리고 나는 나에 대해 절망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는 나를 절대 포기하시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필요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감사할 수 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며, 의롭다 여겨주시고, 그리고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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