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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사도행전(새벽)

사도행전 1:1-11

사도행전 1:1-11
찬송가 315장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사도행전을 소개합니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과 연작 형태로 기록되었습니다.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출생과 사역 그리고 부활에 대한 증언이라면,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후 복음 전파를 위한 사도들의 행적과 복음이 유대 지방에서부터 이방 지역까지 퍼져나가는 과정을 상세하게 증언합니다. 이 모든 일이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가능했기 때문에,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은 모두 28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면, 1-7장, 8-12장, 13-28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부분은 1:8절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1-7장은 성령님의 임하심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사역에 대해서 증거하고, 8-12장은 유대와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된 사실을 증거하며, 13-28장은 땅끝과 같은 곳이라고 여겼던 로마까지 복음이 증거된 사실을 전해줍니다.
또한 1-7장과 8-12장을 하나로 묶으면 사도행전은 두 부분, 즉 1-12장, 13-28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의 주된 인물은 사도 베드로, 한 명을 더 넣으면 사마리아 지방에 복음을 전했던 집사 빌립을 들 수 있고, 후반부의 주된 인물은 사도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함께 묵상해 가면서,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하며,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 마음에 새겨야 할 세 가지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① 모든 성경이 다 그러하듯이, 사도행전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 개인에게, 바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데오빌로여!”라는 호칭으로 시작됩니다. 데오빌로는 사도행전을 받는 수신자입니다.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누가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전할 때는, ‘데오빌로 각하’라고 했습니다. ‘각하’는 ‘총독’ 정도의 직책에 붙이는 호칭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데오빌로’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즉 데오빌로가 누가가 쓴 누가복음을 읽을 때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지만, 사도행전을 읽을 때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누가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된 것입니다.
데오빌로가 굉장히 높은 관직에 있었던 사람이었음은 틀림없지만, 그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데오빌로가 누구인지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름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데오빌로’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데오스(θεός, theos)’와 ‘사랑하다’는 뜻하는 ‘필레오(Φιλέω)’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데오빌로’의 뜻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라틴어로 표현하면, 음악가 ‘모차르트’의 중간 이름인, ‘아마데우스(amadeus)’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있는 가정, 일터, 학교 등 우리 삶의 현장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시간 하나님의 존전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고 묵상하여 갈 때,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며, 세상을 새롭게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그런 삶을 살기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다.

② 믿음은 관념이나 이론, 형식이 아니라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을 영어로 ‘Acts of the Apostles’입니다. 줄여서 ‘Acts’라고 합니다. ‘act’란 동사의 명사형 ‘action’이라는 단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Acts’라고 한 것은 정지된 행동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누가가 사도들의 행적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상에 앉아 머리로 연구해서 쓴 것이 아닙니다. 사역의 현장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또한 한번의 행동, 한 사람의 행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단수 ‘Act’가 아니라 복수 ‘Acts’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우리 가정, 일터, 학교 등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야 나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이 교회에서나 그리스도인 앞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 앞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은혜를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③ 하나님의 일을 섬기는 데에는 독불장군이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 도우며 함께 이루어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전반부는 사도 베드로, 후반부는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기록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에게 사도 요한과 마가와 같은 사람이 없었고, 사도 바울에게 바나바, 실라, 디모데, 누가 등의 사람이 없었다면, 그들의 사역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특히 사도행전과 서신서를 자세히 미루어 살펴보면, 사도 바울 곁에는 약 80명의 믿음의 사람들이 있어서 동역했다고 합니다. 만약 그들 중에 일부가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사도 바울이 행한 사역의 일부도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사도행전에는 사도들과 여러 믿음의 사람들이 직면해야 할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하나님만을 자신들의 힘으로 삼고, 하나님께 기도드림으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사람들과 같은 믿음의 걸음을 걸으면, 우리의 삶이 사도행전 29장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1-5절)
사도행전은 이런 말로 막이 오르고 있습니다.
(1-2)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이 두 절을 한 단어로 나타내면, ‘누가복음’입니다.
흔히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가르치심’과 ‘전파하심’, ‘병자를 고치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가르치심 앞에 ‘행하심’이 있었다고 증거합니다.
‘언행일치(言行一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과 행동이 하나로 들어맞을 때’ ‘말한 대로 실행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누가에 의하면 예수님은 ‘행언일치(行言一致)’ 하신 분이라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말이 그 사람인 경우는 참 드뭅니다. 말은 과장하기 쉽고, 축소하기도 쉬우며, 또 거짓으로 꾸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삶은 과장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모습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그의 말보다 그의 삶이 훨씬 더 크게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삶의 소리는 말의 소리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라고 아무리 크게 소리 질러도 그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이미 삶의 소리가 우리를 전부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람들이 보내심을 받아서 그들은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이야기를 ‘사도언전(使徒言傳)’이라고 하지 않고, ‘사도행전(使徒行傳)’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을 본받은 것이 아니라 행함을 본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도 ‘○○언전(言傳)’이 아니라 ‘○○행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주님의 손과 발로, 주님의 통로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행하시기만 하신 것이라 아니라 가르치시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 반려동물을 키우는 집이 약 600만 가구나 된다고 합니다. 서너 가구 중 한 가구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입니다. 반려동물이 아무리 총명해도 또 아무리 오랫동안 함께 살아도 그 주인을 이해하는 부분은 지극히 일부분입니다. 그래서 최소한 몇 가지만이라도 알아듣게 하려고 반복적으로 교육합니다.
인간과 반려동물의 차이보다 주님과 인간과의 차이가 더 큽니다. 인간과 반려동물은 모두 피조물이지만, 주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집중해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전파하신 첫 메시지가 “회개하라, 천국(하나님의 나라)이 가까이 왔다.”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다가 3일째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승천하셨는데, 그 40일 동안 행하신 사역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의 핵심을 알아들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갇혀 있을 때,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1)”라고 증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성경은 ‘에덴동산-하나님의 나라’에서 출발하여, ‘새 하늘과 새 땅-하나님의 나라’로 끝납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의 핵심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에 사도들에게 이렇게 부탁하셨습니다.
(4-5)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던 것은 제자들은 마음속으로 “이제는 예루살렘을 떠나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스승이 십자가에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자신들도 붙잡힐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고, 또한 제자들은 대부분 집이 북쪽 갈릴리지방이었기 때문에 스승도 없는 예루살렘에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났다면, 성령강림의 은총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고, 부활의 증인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성령 충만을 입은 후에는 떠나야 했는데, 떠나지 못해서 예루살렘에 박해가 있어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성숙한 믿음에는 자신이 머물러야 할 곳과 떠나야 할 것을 바르게 분별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늘로(6-11절)
하지만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제자들은 이때까지도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있는 것과 같은 나라로, 예수님을 세상의 왕과 같은 분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이 로마 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7-8)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바른 믿음은 알아야 하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을 바르게 분별하고, 알아야 하는 것이 집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아서 ‘나를 증거하라’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의 언어’로 말하려고 하지 말고, ‘삶의 언어’로 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9-11)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천사를 통해서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시는 것을 중심으로 믿는 사람, 그 전에 자신이 주님 앞에 가서 지난 삶에 대해 평가받고, 셈하심이 있다는 것을 온전히 믿는 사람만 이 시대 속에서 사도행전의 삶을, 사도행전 29장의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에 남겨진 제자들은 아주 연약하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연약하게만 보이는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둑을 무너뜨리셨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사도행전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데오빌로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령님은 그들에게 시대를 바꾸는 힘이 되셨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있는 우리 각자가 이 시대의 데오빌로가 되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써 가게 하시는 이 시대의 사도행전과 사도행전 29장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부터 새벽기도회 시간을 통해서 사도행전이라는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믿음의 여행을 떠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믿음의 여행을 통해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 가졌던 그 중심을 우리도 갖게 하셔서 우리의 삶이 이 시대의 사도행전이 되고, 사도행전 29장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연약하게만 보였던 제자들이 사도의 삶을 살아감으로 율법주의 둑이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주역이 되었듯이, 우리가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두 손을 모음으로. 코로나19와 같은 상황도 극복하게 하시고, 어디에나 현존하시며 우리의 힘이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사도행전은 ‘데오빌로(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어진 글입니다. 당신이 데오빌로라고 여겨졌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당신은 어떻게 이 시대의 데오빌로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2.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렸습니다. 당신이 말씀에 순종해서 얻게 된 영적인 유익은 무엇이었습니까?
3. 누가는 예수님을 ‘행언일치(行言一致)’ 하신 분이라고 증거합니다. 당신의 삶에서 말과 행동을 바꾸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4. 사도행전은 1: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예루살렘,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전해진 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의 삶과 가정에 어떻게 퍼져나갔습니까?
5. 자신의 삶을 이 시대의 사도행전과 사도행전 29장으로 가꾸어 가고,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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