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12-26
찬송: 313장 “내 임금 예수 내 주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니라(12~14)
우리는 어제부터 사도행전 본문에 들어왔습니다. 사도들과 초기 교회 공동체의 믿음이 이론과 형식에 묶인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 함께 이루어가는 믿음의 여정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율법의 둑이 무너지고 새 시대가 열렸으나, 여전히 예수께서 승천하신 하늘만 쳐다보는 제자들에게 흰 옷 입은 두 사람은 이제는 하늘을 보지 말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도 과거와 관습에 묶여있던 제자들의 관심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있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이까?’ 제자들의 질문은 우리 모두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주께서 우리 가정을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이까, 주께서 우리 건강을 온전케 하심이 이 때이니이까, 주께서 우리 사업을 일으키심이 이 때이니이까.
목적의 성취, 확실한 열매, 손에 잡히는 복을 구하는 제자들과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때와 기한을 궁금해하지 말고 오직 사명을 다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8)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이제 제자들이 살아가야 할 현실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현실이란 두 시대 사이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명을 망각하고 세속적 욕망에 투영된 내가 주인인 옛 시대와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오직 우리 하나님만 주인 되시는 생명과 복음, 성령의 운동이 개방되는 새 시대입니다. 새 시대를 준비할 사람들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다락방에서 나와 말씀의 성취를 믿으며 복음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으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계시지 않고,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막막한 상황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이 공백의 시간이 무척 곤고하고 힘들며, 지루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늘을 쳐다보지 말라하면 무엇을 해야 할지, 하늘로 가심 그대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을 하는 것인지, 누구도 명확하게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상적인 가치와 불편한 현실 사이에서 제자들은 오로지 기도에 힘쓸 뿐이었습니다. 가장 나약한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기도한 것인데, 기도가 정답이었습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소생케하시는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함께 모여 기도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가졌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고 놀라운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코로나로 인해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이 요원해졌습니다. 언제 다시금 그 은혜를 맛볼 수 있을지, 언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예배할 수 있을지 누구도 말해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성전이 무너지고 나라가 망하자 예루살렘 방향을 향하여 기도한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우리도 예배당에 모이지는 못할지라도 가정과 직장, 삶의 자리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으사 우리 각자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심각한 전염병보다 더욱 크십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승천하심으로부터 오순절까지의 기간을 하나님의 능한 행위들 중간에 끼어 있는 “의미심장한 멈춤”이라 표현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현존하는 미래의 교회들로 하여금 기다리고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공헌한 기다림은 참믿음의 행위가 아닙니다.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명령에 제자들이 제일 먼저 행동한 것이 기도는 어떤 내용이겠습니까? 단순히 무섭고 두렵다는 내용의 기도에서 멈추지 않고, 승천하시면서 전해주신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그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능력을 구했습니다.
코로나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멈춰버린 듯한 이 시간을 의미 없이 보내지 말아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일상의 멈춤, 함께 모임의 멈춤이 의미있는 멈춤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오로지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이제는 교회에 머물던 예배를 삶의 자리에서도 실현할 수 있도록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혼자 기도할지라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가장 크게 보며 주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주님과 질문하며 대화해야 합니다.
(눅11: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불행히도 첨단화된 시대에 우리는 기다리는 것이 무척 힘이 듭니다. 터치 몇 번으로 세계를 오가고, 타자 몇 번으로 찾아내지 못할 것이 없는 이 시대에 기다림은 몸이 고된 중노동보다 더 힘들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은 언제나 능력 밖의 일들이 수시로 나타납니다. 우리 삶을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순간에 인내하며 기다리고 기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연약한 여성 제자들과도 함께 함으로 당시 세상 어디에도 없는 파격적인 연합이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온전한 사람, 탁월한 사람, 일 잘하는 사람, 마음에 드는 사람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어느 누구와도 함께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주님 닮은 공동체를 이룬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홀로’의 시간을 보내시는 동안, ‘더불어’ 살아가야 할 대상은 누구인지 돌아보고 그들과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누가 주께서 택하신 바 되어(15~26)
다락방에 12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120이라는 숫자는 회당 자치회를 구성하기 위한 최소한의 숫자이며, 풍성한 공동체를 상징하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풍성한 공동체 안에 불행히도 12명의 사도 중에 결원이 생겼습니다. 베드로가 일어나서 결원이 생긴 배경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16-19)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베드로는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헬라어로 된 70인 역을 사용했습니다. ‘아겔다마’라는 아람어까지 해석하고 있습니다. ‘마땅하도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성경의 필연적인 성취에 있으며, 유다가 예수를 배신하는 사건까지도 하나님의 목적이 진행되는 과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취의 관점으로 한 명의 사도를 세울 필요성을 논증합니다. 20절에서 베드로가 인용한 말씀은 시편 69편과 109편에 기록된 말씀이었습니다.
(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가룟 유다는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 대적자의 대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을 반대하는 사단의 세력으로, 하나님이 이루실 새 이스라엘을 방해하기 위해 자신을 죽임으로 기둥 하나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이탈이 믿음의 공동체의 발뒤꿈치는 상하게는 할 수 있어도 머리를 공격할 순 없었습니다. 유다의 배신까지도 이미 구약에서 예견된 하나님의 섭리로 바라보는 베드로의 시각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묵상하게 됩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부활의 증인으로 사역하기 위해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 지도자를 세워야 했습니다. 새롭게 세워질 그는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보좌에 앉을 사람이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차질없이 진행되도록, 새 이스라엘의 기둥이 되기 위해 분명 필요한 열두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자리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사도의 조건을 22절에서 제시합니다.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본문에서는 2가지의 조건, 즉 예수님과 함께 다닌 제자 그룹 중 하나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할 사람으로 규정하지만, 성경 전체로 보면 사도의 조건을 뛰어넘어 다양한 사람들이 사도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사도라고 하며,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바울은 물론 실라와 디모데도 사도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사도’라는 직책이 특정한 누군가의 전유물이 되었다가 사역의 최전선에서 수고하는 모든 이들을 부르는 호칭으로 전환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말 ‘사도’의 헬라어 ‘아포스톨로스’는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그렇게 초대교회 공동체는 두 사람의 후보자를 세웠습니다.
(23)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추첨을 통해 지도자를 세움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 과정으로 하나님이 세우시는 사람이 선출되는 것은 오늘날 교회들에 좋은 모범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과정이 재미삼아 하는 뽑기 형태로 진행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연설을 통해 역사의 주체는 하나님이심을 인정했으며, 성령 하나님이 성취해가시는 것을 이해한 공동체가 함께 동참하여 기도하며 준비했습니다. 맛디아를 세움이 어느 한 사람만의 독단적인 결정이나, 특정한 그룹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도구 되어 지도자를 세우는 거룩한 사역에 동참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공동체의 선택과 하나님의 선택이 온전히 연합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이 사랑으로 연합하여 존재하시듯, 온전한 사랑의 연합을 이루는 초대교회 공동체에 하나님의 은혜는 선물처럼 다가왔습니다. 가룟 유다의 이탈은 무척 고통스러운 결과였습니다. 이런 공동체 이탈이 가룟 유다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이후 지속해서 배교와 이탈, 다툼과 상처가 일어나지만, 이 모든 것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아픔도 은혜로 승화할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사람이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끌어가십니다. 오늘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기도해주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하시는 하루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우리의 기도는 어린아이 칭얼대듯 대화라 하기엔 부끄러웠던 의성어와 같았음을 고백합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기도하였고,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던 믿음의 자리를 지켜내었듯, 우리 현실은 척박하고 손에 잡히는 것은 없을지라도 하나님과 거룩한 동역에 집중하는 삶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마가의 다락방에 제자들처럼 코로나에 뒤덮힌 우리 역시 두렵고 무섭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자리에서 말씀을 붙들 때, 담대함을 허락하여 주옵시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거룩한 동역을 이루어내는 100주년 공동체 한 명 한 명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나의 기도제목은 목적의 성취인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성취인지 구분해봅시다.
2.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이 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제자 된 나는 어떤 형태로 그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지 묵상해봅시다.
3. 현장예배를 기다리는 동안 의미심장한 멈춤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할수 있는지 생각해보고, 그것을 실행해봅시다.
4. 초대교회 공동체가 맛디아를 세우는 과정을 보면서 느끼는 은혜는 무엇인지 정리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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