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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사도행전(새벽)

행 8장 14-25절

행 8장 14-25절
찬송가 204장 ‘주의 말씀 듣고서’

골고다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사십 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 세례를 받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주님이 하늘로 올려지신 후에 제자들과 일행은 주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의 소위 “마가의 다락방”에서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그런 그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몸소 체득하는 은혜를 입었고,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제자들을 통한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날이 갈수록 그 수는 많아졌습니다. 이렇듯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성장하게 되지만, 제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리심을 받기 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주님께서는 성령이 임하시면 성령님의 권능으로 예루살렘에서만 복음을 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대 땅에만 복음을 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유대는 물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마리아가 어떤 곳입니까? 이스라엘 북왕국의 수도였습니다. 아시리아 제국이 사마리아를 점령한 후, 사마리아 살던 많은 유대인들을 국외로 추방시켰고, 대신 다른 나라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켜 살게 했습니다. 결국 사마리아에 남아있던 유대인은 이방인과 피가 섞이게 되었습니다. 순수 혈통을 고집하는 유대인들은 혼혈 집단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고, 사마리아 사람들 역시 유대인들을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지만, 사도들은 예루살렘의 사역에만 몰두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리스도인이 많아지게 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초기 교회가 부흥하던 시기에 스데반 집사가 순교 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뿐만 아니라 스데반의 순교를 시작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한 유대교의 대대적인 박해가 가해졌습니다. 이로 인하여 사도들을 제외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난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발길이 닿는 곳에서 복음을 전했고, 복음을 접한 많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빌립을 통한 사마리아의 복음화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땅 끝 복음 사역을 위해 헌신한 사도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난 빌립에 의해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 전도의 교두보 역할을 한 수리아의 안디옥 교회는 물론 유럽 전도의 중심지였던 로마 교회 역시 흩어진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사도를 향하신 주님의 뜻 (14-17)
이처럼 흩어진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사도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오늘 본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사마리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예루살렘을 사수하고 있던 사도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사도들은 소문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보냈습니다. 두 사도가 사마리아에 도착해서 현장을 시찰을 해보니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 이었다고 16절은 전합니다. 두 사도가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 받기를 기도하며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을 받았다”고 17절은 증거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읽으면서 드는 의문점이 있습니다. 함께 새벽기도를 드리고 있는 우리 모두가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게 된 것은 내 의지로 인함인가요? 아닙니다. 바로 나를 향하신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마리아인들이 빌립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게 된 것은 이들에게 이미 성령님이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한 사람도 성령을 받지 않았다고 단정했고, 두 사도가 기도하면서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행2:38절에서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면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고 설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미 그들에게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까지 받았음에도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한 사람에게도 성령님이 내리지 않았다고 단정했을까요?

세례 받은 사마리아 사람 모두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곧바로 과거의 삶으로 회귀했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신앙인이라고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악한 삶을 사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교회의 주인이라고 하면서도, 특정 교역자 또는 특정집단이 교회의 실질적 주인으로 교회를 이끄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의 규모와 재력으로 교계를 좌지우지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신앙인이나, 모든 교역자,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즉 본문에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할 만한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다만 두 사도의 판단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사도는 왜 이같이 단정했을까요?

사마리아에 도착한 두 사도는 이번 안수 사건을 통해 전도의 대상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성령님이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도에게는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성령님이 임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이는 이방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폐쇄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두 사도의 시선을 이방인에게로 즉 땅 끝으로 향하게 하시려는 성령님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성령님은 이방인에게도 성령님이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사도들의 안수 행위를 통해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사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사도들을 향하신 성령님의 섭리하심으로 사마리아에도 성령님이 역사하신 사건을 직접 체험한 두 사도의 이어진 행보를 25절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25)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본문에 의하면 두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마을에서만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물론 사마리아의 복음화 소식을 한시라도 빨리 예루살렘에 전하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돌아갔다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돌아간 이후에도 이방인 복음 사역에는 여전히 소극적이었습니다. 즉 성령님께서 사마리아 사건을 통해 사도들의 소명이 땅끝으로 향하도록 역사하셨지만, 이들은 이번 일을 통해서도 성령 하나님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데반의 순교와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 그리고 박해를 피해 흩어진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사마리아를 비롯한 이방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었고, 두 사도가 이를 확인하고 돌아가는 일련의 과정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할까요?

예루살렘에서 아름답게 공동체를 가꾸어가고 있던 기독 공동체는 유대교의 대박해라는 상황이 맞이했고, 그들은 신앙의 보금자리를 떠나 흩어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결국 그들이 안주했던 보금자리로부터 흩어짐을 통해서 실현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스데반의 순교와 유대교의 대박해와 흩어짐과 두 사도의 행적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성령 하나님의 섭리하심입니다. 이러한 시선으로 코로나19 사태를 바라보면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코로나 19로 인해 이단 집단인 신천지의 정체가 세상에 낱낱이 밝혀졌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기독교의 치부가 속속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질타하셨던, 생명보다는 율법을 내세웠던 바리새인의 모습이 오늘을 사는 우리 속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주님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 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함과 추태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함께 예배당에 모여 대면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온라인으로 각자 삶의 자리에게 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교회 또는 공동체 위주의 신앙에 안주해왔던 내 자신을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를 모토 삼고 있는 우리 스스로에게 '삶의 자리에서 예배자의 삶을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예배의 현장을 교회로만 국한했던 우리의 좁은 시야를 땅 끝인 우리 삶의 자리로 확대하게 되었습니다. 주일 설교의 주제로 해석하면 코로나 19는 우리의 시야를 땅 끝, 즉 삶의 현장으로 확장시켜주시려는 주님의 헤세드입니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도 성령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예루살렘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못한 어리석은 사도들이 될 것인가? 아니면 코로나 19를 통해 역사하신 주님의 나를 향한 섭리하심을 바로 깨닫고 주님만을 분깃 삼고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인자하심의 역사가 펼쳐질 것을 소망하는 주님의 증인으로 살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시몬 (18-24)
마술사였던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사람들이 성령 받는 것을 보고, 자신도 이 권능을 갖게 해달라고 돈을 지불하려 했다(18)는 사실에서 사도들의 안수 후에 어떤 외적인 현상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마술사 시몬이 탐낸 성령이 임한 외적인 현상이 무엇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외적인 현상을 추구한 시몬을 향한 베드로의 질타를 기록했습니다. 성령님의 외적인 은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은사를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시몬을 꾸짖은 이유는 성령의 은사를 추구하는 그의 마음이 바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빌립이 전한 복음을 통해 시몬은 회심했지만, 그는 여전히 세상을 분깃 삼고 있었습니다. 세상을 분깃 삼았기에 그는 외적인 현상을 추구했습니다. 외적인 현상을 추구하는 신앙은 건전하지 않습니다. 외적인 현상을 추구하는 신앙의 결말을 베드로는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이 성령님이 임한 외적인 현상이 무엇인지를 밝히지 않는 이유도 성령님의 은혜로 주님을 믿게 된 우리가 시몬과 같은 어리석은 전철을 밟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코로나19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유가 마지막 때 알곡과 가라지를 속아내기 위한 주님의 섭리하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임무는 주님께서 많은 알곡을 추수하실 수 있도록 복음을 통해 주님의 자비하심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향하신 인자하심을 믿고 신뢰하면서 추수 때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코로나 19라는 험한 조류로 인해 우리의 삶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눈 앞에서 넘실대는 조류를 바라보면 두렵기만 합니다. 초대 교회가 직면했던 박해와 흩음이 주님의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섭리하심이라는 사실 앞에서 코로나 19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게 도와주시옵소서. 코로나 19를 통해 인간의 실체를 바로 바라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코로나 19를 통해 우리의 믿음과 믿음 생활을 재점검해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사마리아에 임하신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보고도 주님의 뜻을 여전히 깨닫지 못한 두 사도의 어리석음과 회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을 분깃 삼고 있는 시몬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실상이 아닌지를 자문해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주님을 분깃 삼아 주님께서 맡겨주신 삶의 자리에 주님의 인자하심을 드러내는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에 보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이 전한 복음을 믿고 세례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두 사도는 왜 한 사람에게도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고 단정했나요?
3. 사마리아를 방문한 사도들을 향하신 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주님의 뜻을 깨달았나요?
4. 성령님이 임재하신 가시적인 현상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5. 시몬의 행동을 통해 깨닫게 되는 바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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