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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사도행전(새벽)

사도행전 8장 26-40절

사도행전 8장 26-40절
찬송가 366장 ‘어두운 내 눈 밝히사’

최근 사람들이 ‘빅 픽쳐(Big picture)’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곤 합니다. 이는 영화나 현실에서 다른 사람들은 예상도 할 수 없던 사건을 주인공이 미리 계획을 가지고 이루어갈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 2002년 월드컵 때 많은 사람들이 히딩크 감독이 축구 강대국들과 친선경기를 하면서 큰 점수 차로 질 때 욕을 하다가 결국 월드컵 본선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자 히딩크 감독이 미리 계획한 시나리오였음을 인정하게 되는데 이럴 때 ‘히딩크 감독의 빅 비쳐’였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크고 작은 하나님의 빅 픽쳐가 가득합니다. 타락 이 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빅 픽쳐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진행 중이며 우리도 그 큰 그림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행전에는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예루살렘 박해를 통해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빅 픽쳐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함께 본문을 살펴보시겠습니다.

성령에 이끌려간 빌립집사(26-31절)
(26-31)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오늘 본문은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큰 표적을 행하고 복음을 전하여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된 그 뒤에 이어지는 사건입니다. 아마도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놀라운 회심과 부흥의 사건들을 통해 빌립의 마음은 한껏 고무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사도도 아닌 자신의 사역가운데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은 너무나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자를 보내셔서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구체적으로 명하십니다. 빌립은 아마도 좀 더 사마리아에 머물며 사역의 열매를 거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박해 사건을 통해 오히려 복음의 확장을 이루어 가시는 사건을 경험했기에 하나님의 빅 픽쳐를 믿고 신뢰하며 광야의 길을 향해 출발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빌립에게 한 수레를 만나게 하시고 그 수레로 가까이 가라고 하셨을 때 빌립은 ‘달려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빌립이 성령하나님의 마음과 하나 되어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와 이방인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에 동화된 빌립은 성령 충만한 모습으로 기쁨의 승전보를 전하는 사자같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주인의 마음을 아는 종과 책임과 의무감에 주어진 일만 하는 종은 그 자세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감당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마음으로 이 일을 명하셨는지를 가장 마음 깊이 깨닫는 자가 하나님을 위해 가장 아름다운 헌신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빌립에게 가까이 가라고 하셨지 달려가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빌립은 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뛰는 심장소리에 빌립의 심장도 함께 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2장 7절에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빌립의 달려가는 그 발걸음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걸음이었습니다. 우리도 빌립처럼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복된 발걸음이 되어 하나님의 심장소리를 듣고 함께 뛰는 자들이 되어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빌립이 달려가 만난 사람은 에디오피아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에디오피아는 현재의 에디오피아가 아니라 현재의 ‘수단’이라고 볼 수 있으며 구약에서는 ‘구스’라 불리웠고 함의 자손들로 이루어진 나라였습니다. 그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내시였습니다. 간다게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태양의 아들’로 숭배되는 아들 왕을 대신하여 국사를 돌보는 어머니 ‘여왕’을 통상적으로 부르는 칭호였습니다. 그런 여왕에게 국고를 위임받아 실무를 하는 자리는 상당히 높은 위치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여왕을 가까이 섬기는 관리였던 이 남자가 내시로서 거세당한 자임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혼혈 유대인인 사마리아로 복음을 전하러 가는 것이 상당히 꺼려지는 일이었듯 빌립이 이 남자에게 다가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묶여 있는 유대인 입장에서 볼 때는 저주받은 함의 후손이었고 부정한 이방인이었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거세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빌립은 거리낌 없이 그 수레에 올라가 앉습니다. 만약 다른 유대인이었다면 수레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하나님께 화를 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기껏 사마리아를 떠나서 광야 길로 왔더니 유대인도 아니고 사마리아인도 아니고 이 부정한 이방인 내시 한 명 구원하려 저를 보내셨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이방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에 그 수레에 올라가 앉았습니다. 이는 이사야 56장 3절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오늘 이 장면은 우리에게 교회공동체로 감히 나아오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내시는 하나님을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사에 참여는커녕 유대인이 아니었고 함의 자손이자 내시였기에 이방인의 뜰에 서서 그저 안쪽을 바라보다 돌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마치 온라인예배 때 혹시나 싶어 교회 입구까지 왔지만 들어갈 수 없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교우님의 마음처럼 허전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빌립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도 이 에디오피아 관리와 같은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나 같은 사람은 교회에 받아들여지지 못할 거야’ 라고 생각하며 멀찌감치 바라만 보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우리는 빌립이 될 수 있습니다. 달려가 함께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고 지탄을 받는 자일수도 있고, 기독교의 가치관에서 위배되어 창조의 질서에서 많이 벗어난 삶을 살아가는 자 일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찾아가셨고 하나님께서 빌립을 통해 에디오피아 내시를 찾아가사 우리 주님이 의인과 건강한 자를 찾아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과 병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이 사실을 알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내 마음의 도덕적 기준,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판단하여 복음을 제한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시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음(32-40절)
(32-40)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이 수레에 타고 있던 관리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그 성경번역본은 최초로 헬라어로 번역된 ‘70인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이었던 이 관리도 성경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문자적으로 읽어진다고 그 내용까지 깨달아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관리는 이 땅에 ‘고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해놓은 본문을 읽으며 그 고난이 이사야 자신에 대한 말씀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향한 말씀인지를 알 수 없어 답답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그 본문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의 모든 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관리에게 이사야서를 읽으며 궁금증이 생기게 하셨고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을 하도록 하시기 위해 빌립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 장면은 마치 껍질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를 도와 부리로 그 껍질을 함께 깨주는 어미닭의 모습 곧 줄탁동기(啐啄同機)와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관리는 빌립이 전해준 복음을 믿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그 증거로 근처에 있는 물에서 세례를 받고자 하는 적극성을 보여줍니다. 오늘 이 장면은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승천이후 어떻게 그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시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적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를 만나서 거듭남에 대하여 설명해주시고 수가 성 우물가 여인의 질문에 정성껏 답변해주신 것처럼 오늘 날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찾아 헤매는 한 영혼에게 친절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하사 그 진리 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를 받은 에디오피아 관리는 구원의 기쁨으로 충만하여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빌립은 성령님께서 강권적으로 이끌어 가셔서 해안가 도로에 위치한 아소도의 여러 성에 복음을 전한 뒤 최종적으로 가이사랴에 머물며 정착하게 됩니다. 특히 이 39절에 보시면 ‘다시 보지 못하니라’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빌립과 에디오피아 관리가 다시는 생전 만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이 둘의 만남이 인간의 계획과 시도에 의한 만남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의 역사였음을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이 관리로 하여금 그날 이사야 말씀을 읽으며 그 길을 지나가게 하신 분, 사마리아에서 잘 사역하고 있던 빌립을 이끌어 광야 길로 가게 하신 분 곧 우리 주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이루어 가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주님께로 이끌어 지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가난한 심령을 만드시고 진리에 대한 목마름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빌립들을 통해 나를 조금씩 조금씩 주님께로 이끄시고 복음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입은 자로서 우리도 이제 빌립과 같이 누군가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징검다리’로 살아가야 합니다.
요즘 우리의 일상은 예루살렘에 불현 듯 찾아온 핍박처럼 불쑥 다가온 코로나로 신앙생활과 삶의 패턴이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특히 온라인구역성경공부를 하며 우리는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익숙했던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듯 예전에 함께 만나 식사하고 차도 마시며 가정에서 교회에서 만나 성경공부를 하던 그 때가 그립습니다. 어떻게 앱을 사용해야 하는지 서툴고 어렵고 힘이 들 때도 있고 간신히 시작했는데 화면이 끊기거나 소리가 잘 안 들리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처음 가는 이 길이 마치 빌립이 나아가던 광야의 길과 같습니다. 때론 어렵게 온라인성경공부를 준비했는데 막상 들어오겠다고 한 사람들이 오지 않고 구역원 한 분과 구역모임을 한 구역장님도 계실 것입니다. 마치 그 힘든 광야 길을 달려가 만난 사람이 이방인 관리 한명 뿐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예루살렘의 박해도 거친 광야 길도 하나님의 역사를 막을 수 없었음을 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코로나19로 인해 예배와 구역모임이 온라인으로 변경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역사는 막을 수 없습니다. 비록 지금 우리가 코로나19로 인해 이 시대에 하나님의 빅 픽쳐가 어떻게 이루어질지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며 광야 길로 달려가는 이 시대의 빌립이 된다면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이 곳 우리 삶의 현장에 세워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이 광야에서 만난 단 한사람의 이야기를 소중히 여기사 사도행전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주신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을 그 기업으로 삼고 말씀을 배우고 지키고 고난 속에서도 감사하는 그 사람을 소중히 보시며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빅 픽쳐를 믿고 광야의 길을 달려갔던 빌립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이끄시는 그 곳에서 아름다운 복음의 발자취를 남기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바로 몇 분 뒤에 일어날 일도 알 수 없는 우리의 연약함은 다가오지 않은 미래와 닥친 어려움으로 인해 두려움과 불안함만 가득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박해도 복음전파의 거름으로 사용하시며 광야의 길을 지나며 탄식하던 한 이방인 관리의 질문조차 그냥 넘기지 않으시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빌립을 보내사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을 향한 빅 픽쳐를 그리시며 이루어 가심을 믿기에 오늘도 그 안에서 평안과 안식을 얻습니다. 오늘도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 나라를 세워 가실 때에 빌립처럼 부르시는 그 곳에서 아름다운 복음의 발자취가 되게 하시고 특히 온라인 구역성경공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하며 전하는 모든 구역장님들 한 분, 한 분 기억하여주셔서 광야를 달려가던 빌립의 마음으로 그 말씀을 준비하며 전할 때에 구역원 한 명, 한 명이 에디오피아 관리와 같이 믿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 기쁨안에 삶의 자리로 돌아가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 놀라운 사마리아 회심의 현장에 있던 빌립에게 광야 길로 내려가라 하실 때 충분히 마음이 무거울 수 있음에도 광야 길을 달려갔던 빌립의 순종을 묵상해 봅시다.
2. 하나님을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던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이방인의 뜰에서만 머물며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 마음이 어떠했을지 묵상해 봅시다.
3. 광야 길에서 이방인이자 함의 후손이요 내시인 관리를 만난 빌립의 마음에 충분히 거리낌이 있을 수 있음에도 그 수레에 올라앉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지 묵상해 봅시다.
4. 자신을 찾아온 한 영혼을 잊지 않으시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빌립을 보내사 구원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묵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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