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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사도행전(새벽)

사도행전 9:1 – 19a

사도행전 9:1 – 19a
찬양 334장 ‘위대하신 주를’

8장 초반에서 사울을 전면에 등장시킨 누가는 빌립의 전도 여행을 다루며 잠시 그를 무대 뒤편에 감췄다가 다시 9장에서 사울의 회심을 극적으로 그려냅니다. 스데반과 빌립을 통해 세계선교의 장이 열렸음을 보여주고, 이제 그 주역이 될 두 인물의 회심을 제시하는데 9장에서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는 사울이 회심하고, 10장에서는 고넬료가 이방인으로는 최초로 회심합니다. 제자들이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함께 읽은 소위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은 성경에 등장하는, 그리고 기독교 역사상 그 어떤 회심보다도 극적이고 유명한 사건입니다.

누가는 사울의 회심을 사도행전 9장과 22장 26장에 걸쳐 세 차례나 기록합니다. 9장에서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22장과 26장에서는 바울이 직접 전한 설교의 내용을 따오는 식으로 서술했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지만, 같은 사건을 세 번이나 기술했다는 사실을 볼 때 누가가 사울의 회심이 사도행전에서 굉장히 중요하고, 독자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건으로 여겼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실 은혜를 사모하며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살기 등등한 사울(1-2절)
1절 말씀을 보면 사울은 스데반을 죽인 이후에도 여전히 주의 제자들에 대해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을 찾아가 외지에 퍼진 그들을 잡아 올 수 있도록 권한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다메섹은 현재 시리아의 수도로서 예루살렘에서 약 240km 떨어진 곳입니다. 다메섹은 창세기부터 등장하는 고대 도시로서 유대와 오랜 인연이 있었기에 당시에도 많은 유대인이 여러 회당을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이곳까지 흘러간 자들까지 끌고 오겠다는 일념으로 일주일 정도가 소요되는 먼 길을 떠납니다. 1절에서는 그들을 주의 제자들이라고 표현하고 2절에서는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가 등장하기에 앞서 나타나는 독특한 호칭입니다. 특히 ‘도’란 사도행전 6장 7절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는 말씀에서 도에 해당하는 피스티스, 즉 믿음이 아니라 요한복음 14:6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실 때 길에 해당하는 호도스입니다. 즉 누가는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따르는 자들을 잡아서 폭력으로 제압하려고 찾아갔지만, 오히려 다메섹으로 향하는 길에서 사울이 은혜로 제압되어 참된 길을 찾았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울과 예수님(3-9절)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다메섹에 거의 와가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내려 그를 둘러쌉니다. 사도행전 26장에서는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왔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22장에서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울은 땅에 엎드러지고 맙니다. 그 순간 음성이 들려옵니다.

(4-5)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울아 사울아 라고 부르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름을 두 번 부르는 양상이 마치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부르신 하나님을 연상케 합니다. 하나님의 현현입니다. 사울도 이를 분명히 의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이 압도적인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뜻밖의 말을 듣게 됩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상한 말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박해했다니. 그래서 묻습니다.

주님, 도대체 누구이십니까? 모세의 물음과 동일합니다. 그러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십니다. 성경에는 사울이 예수님을 박해한 기록은 물론 마주쳤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교회와 그 구성원을 박해한 사울에게 나를 박해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울은 이상한 방식으로 자신을 제자들과 동일시하시는 주님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따라서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가르침은 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음성은 시내로 들어가 기다리라고 명하였고 사울은 그대로 따릅니다.

(8-9)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울은 엎드러졌던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눈은 떴지만 보이지 않아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에 들어갑니다. 자신의 힘과 지식을 믿고 기세등등하게 찾았지만 앞가림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가 되어 그곳에 들어섭니다. 거기에서 3일 동안 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였습니다. 보지 못한 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기 의지에 따라 먹지 않고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은 사울이 엄청난 내적 갈등을 겪으며 주님께 부르짖고 있었음을 입증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다른 인물을 준비시키십니다. 바로 아나니아입니다.

사울과 아나니아(10-19a절)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사도행전 22장에서 아나니아는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에게 칭찬을 듣는 자로 소개됩니다. 아나니아는 아마도 사울이 가장 먼저 잡아갈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환상 중에 하나님은 아나니아를 부르시고 명하십니다.

(11-12)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주님은 직가, 즉 곧은 길이라고 부르는 다메섹 시내 중심 거리에 위치한 유다의 집에 가서 사울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기도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기도로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에게는 아나니아가 안수하여 다시 보게 되는 환상을 보여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사울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아 자초지종을 모르는 아나니아는 반문합니다.

(13-14)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아나니아는 완곡하게 반대 의견을 냅니다. 여기에서 그들이 사울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나니아는 신중한 인물로서 단편적인 정보가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들어보니 사울이 주의 성도들에게 큰 해를 끼쳤으며, 여기에서도 대제사장들에게 사람을 잡아갈 권한을 받아왔다고 합니다 라고 자신이 아는 바를 겸손하게 아룁니다. 이해할 수없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경건한 자가 취해야 할 마땅한 자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선포하십니다.

(15-16)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주님은 그에게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사울은 예수님의 이름, 즉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신 복음이 어떠한지를 선포하고 고백하는 사역을 위해 특별히 택한 자임을 밝히십니다. 그는 여러 지역의 이방인들 및 아그립바 2세와 로마 황제 앞에서,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사울이 단지 이방인을 위한 사역만을 행하도록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릇이란 사울이 특별한 기능을 행하는 사람임을 의미하는데, 사실 그릇은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그 기능이 달라집니다. 그릇에게는 자기 주권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사울 역시 자신이 질그릇과 같은 존재에 불과함을 잘 알고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지만 그의 삶은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는 말씀을 입증하는 삶이었습니다. 골로새서 1:24에서 사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의 삶은 말 그대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사명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고난을 채우는 그릇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나니아가 사울을 찾아가 만납니다.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아나니아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여 사지가 될지도 모르는 그곳을 찾아가 사울에게 안수합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사울아. 이 말이 얼마나 사울의 귀에 아름답게 들렸을지 모릅니다.

(행 22:13-16)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왜 주저하느냐는 말을 들을 때 사울은 결심하고 응답합니다. 증인이 되어,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죄를 씻어 성령충만을 받은 것입니다.

(18-19a)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그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누가는 여기에서 의학적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사울의 증상이 신체적인 이상을 수반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그는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새로운 시력을 받았습니다. 사울이 보는 것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흘이나 금식했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먹고 마시지 않고, 우선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는 음식을 준비하여 먹였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함께 하며 사울은 강건해집니다.

오늘 말씀을 보며 이 사건이 사울에게만 특수한 경험이며 일반적인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 사울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그의 마음을 돌이키셨다고 보게 되기도 합니다. 물론 이 회심 사건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난 독특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넓게 보면 회심한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26장 14절에서 사울은 회심 사건 중에 이런 음성이 들렸다고 고백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사울이 마음속에 이러한 가시채를 의식했음을 알 수 있는 근거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그가 보이는 극렬한 태도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광신적 태도는 오히려 그 안에 의심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외적 행위에 더욱 몰두합니다. 그에게 이런 내적 의구심을 불어 넣은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선 스승 가말리엘의 태도였습니다. 사도행전 5장 39절에서 가말리엘은 말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스승의 미적지근한 태도는 그에게 불안감을 주면서 스승과 멀어지게 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요소는 스데반이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이 죽는 것을 당연히 여겼지만, 스데반이 죽으면서 보여준 담대한 태도와 말씀에 근거한 설교에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후에 고백하는 말씀에서 보듯이 자신의 내면 깊이 자리 잡은 죄에 대한 의식이 불안감을 증폭하였습니다. 그가 아무리 외적으로 신앙생활에 몰두해도 그의 내면에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상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내적 갈등을 겪던 그에게 하나님이 드디어 나타나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법은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저 물으십니다.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에게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만 자신이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만 밝히셨습니다. 믿지 않으면 죽일 것이라는 위협이 아니라 다만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내셨을 뿐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울은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로 기도하며 고뇌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찌르시다가, 빛과 소리로 자유롭게 반응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찾아온 아나니아가 자신을 부드럽게 만지며 형제라고 부르게 하셨을 때, 그의 마음은 무너져 내립니다. 주님이 얼마나 온화하고 사랑 많으신 분인지, 교회 공동체가 얼마나 따뜻한지 절감한 그는 전심으로 주님께 돌아선 것입니다.

이러한 회심은 오늘날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님을 모르는 이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가시채를 뒷발질합니다. 괴로움을 알면서도, 마음의 고뇌를 감추며 하나님을 부정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어떠한 계기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통해 빛과 소리가 그에게 임할 때 회심합니다. 혹시 주위에 이러한 회심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나니아처럼 그를 돌봐야 할 것입니다. 영혼의 갈급함 뿐만 아니라, 정신적, 육체적인 필요를 헤아리고 살피며 돌아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위험을 요구한다고 할지라도 그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 사람을 위해 나를 사명의 그릇으로 삼으셨을지 모를 일입니다. 우리가 사울처럼 회심의 경험이 있다면 아나니아처럼 섬기기 원합니다. 주님의 헤세드를 받았다면 그 헤세드를 전하는 자로 살기 원합니다. 명절 기간 접하게 될 우리 주위의 사울이 있다면 내가 예전에 사울이었음을 기억하고 아나니아로 섬기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내가 사울과 마찬가지로 주님을 박해하다가 예수님을 만난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나 역시 주님의 그릇으로 고난을 채우며,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대로 사용되게 하시옵소서. 또 명절 기간에 만나게 될 우리 주위의 사울들이 있는데, 아나니아처럼 저들을 돌보고 세우는 일에 힘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내가 주님을 만나고 회심했던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사울의 회심기와 나의 회심기는 어느 면에서 닮아있습니까?
2.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폭력적으로 강압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이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존중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격했던 결정적인 사건은 무엇입니까?
3.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울을 찾아갔던 아나니아처럼 나를 찾아왔던 믿음의 은사(恩師)를 생각해보고 명절을 맞아 연락을 드려 감사를 표하십시오.
4. 명절에 만나게 될 주위의 사울과 같은 이들에게 어떻게 아나니아처럼 그리스도의 사랑과 돌봄을 베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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